영화인가? 발렌시아가식 마텔 홍보인가? ['바비' #2]
영화인가? 발렌시아가식 마텔 홍보인가? ['바비' #2]
  • 김경수
  • 승인 2023.07.27 13: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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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비를 왜 '지금' 그려내야 하는가"

그레타 거윅의 신작 <바비>(2023)의 개성을 잘 드러내는 장면은 켄(라이언 고슬링)을 포함한 여러 켄이 올라탈 말이 없는데도 말을 탄 듯이 나오는 장면이다. 전설적인 코미디 영화 <몬티 파이튼의 성배>(1977)의 오프닝을 그대로 따라 한 것이다. <몬티 파이튼의 성배>를 제작한 몬티 파이튼 팀은 예산 부족으로 말을 못 구해서 말발굽 소리를 내는 코코넛을 두드리며, 말을 탄 척하는 마임 연기를 했다. <몬티 파이튼의 성배>를 제작한 몬티 파이튼 팀은 멤버 전원이 백인 남성이며, 고학력이기까지 하다. 높은 목소리를 지닌 에릭 아이들이 신경질적인 톤으로 여성을 연기해 여성의 공백을 메운다. 부조리 코미디의 전설적인 존재인데도 거기에 깃든 냉소와 남성성은 지우기가 힘들다.

<바비>는 <몬티 파이튼의 성배>와 몬티 파이튼의 코미디의 유머 코드를 그대로 전복한다. 마고 로비가 "나는 이제 더 이상 예쁘지 않아"라고 소리치는 순간 급작스레 내레이터가 개입해 "이런 대사를 시키려면 마고 로비를 캐스팅하지 말라"는 식의 코멘트를 더해서 제4의 벽을 무너뜨린다든지 바비랜드와 캘리포니아를 오가는 중간에 삽입된 애니메이션은 몬티 파이튼의 인장이다. <바비>는 남성적 코미디의 정서를 여성의 것으로 전복하는 야심만만한 태도가 담긴 작품이다. 그러나 과연 <바비>가 그러한 야심을 성공적으로 그려내는 영화인지는 의문이다. 특히, 이 영화의 유머가 왜 감독의 야심만큼의 감흥이 없을까.

 

ⓒ 워너브러더스 코리아

<바비>의 플롯은 단순하다. 페미니즘과 가부장제의 대립을 시각화하고, 페미니즘이 왜 우리 세계에 필요한지를 우화적으로 드러낸다. 도식적이라는 인상을 지우기가 힘들긴 해도, 그 당위 하나는 만족하게끔 한다. 영화는 스탠리 큐브릭의 <2001 스페이스 오디세이>(1967)을 당차게 패러디하며 시작한다. 어린아이를 돌보는 인형이 유행한 인형 시장에서 바비 인형의 등장이 어떠한 의의를 지니는지를 설명한다. 어린아이가 인형을 돌보게 하는 것은 훌륭한 가부장제 이데올로기를 이식하는 권력 장치로 기능했고, 이를 바비가 부수었다는 것이다. 이는 마텔과 바비 인형의 약력이면서도, 바비 인형의 페미니즘적인 맥락을 압축한다. 성인 여성을 본떠서 만든 바비 인형으로 인해서 어린아이가 주체적인 여성으로 살 수 있게끔 꿈을 안긴다는 것이다. 실상은 코르셋과 외모지상주의를 대표하는 것인데도 말이다. 이윽고 가상의 세계관인 바비랜드가 소개된다. 바비랜드는 대통령, 노벨문학상 수상자, 의사 등 각자 분야에서 정점에 오른 바비만이 사는 유토피아다. 매일 밤 여자 파티가 열리고, 남성인 켄은 그저 배경에만 머문다. 이는 게르드 브란튼베르그의 페미니즘 소설 『이갈리아의 딸들』에서 '이갈리아'를 생각나게끔 한다. 남성과 여성의 성역할을 반전한 이른바 미러링(mirroring)을 실천적으로 쓴 작품이다.

<바비>가 바비랜드를 그려내는 방식은 이보다 한층 더 복잡하다. 마크 론슨의 흥겨운 음악을 따라서 소개되는 바비랜드에서의 일상은 유토피아이면서도 어딘가 기계적이다. 이를 대표하는 이미지는 하이힐을 벗어도 그대로 무지외반증의 꼴이 유지되는 바비의 발이다. 이처럼 영화는 코르셋 등 여성을 옥죄는 장치를 선명하게 시각화한다.

바비랜드의 기계적 일상을 깨트린 것은 '전형적인 바비'(마고 로비)가 급작스레 "죽음을 생각해 본 적 있어?"라고 질문하는 순간이다. 이 실존적인 물음 하나가 전형적인 바비의 발을 땅에 닿게끔 하면서도 허벅지에 셀룰라이트가 생기게 한다. 이를 고치려 '이상한 바비'(케이트 맥키넌)에게 간다. 그는 전형적인 바비가 가지고 놀던 아이가 "죽음을 생각하는 바비" 등을 생각하기 시작한 시점부터 바비랜드와 캘리포니아 사이의 시공간 균열이 생긴 것으로 본다. 전형적인 바비는 균열을 메우러 캘리포니아로 떠난다. 문제는 그냥 켄(라이언 고슬링)이 바비 몰래 그녀의 차에 타면서부터 생긴다. 바비는 캘리포니아에서의 성차별을 몸소 경험하고, 자신을 가지고 놀던 사샤(아리아나 그린블랫)로부터 바비가 되려 여성의 미적 기준을 획일화했다며 파시스트라고 비난당한다. 켄은 전형적인 바비와 동행하면서 가부장제의 개념을 알고, 그 개념에 매혹되기 시작한다. 이윽고 켄은 바비 랜드로 되돌아가서 가부장제를 설파하고 바비랜드를 엉망진창으로 만든다.

 

ⓒ 워너브러더스 코리아

<바비>는 마텔사의 프로모션으로 제작된 영화다. <바비>가 제작된다는 소식을 접했을 때 과연 이 영화가 홍보 이상의 역할을 할 수 있을까 걱정되었다. 최근에 제작된 <슈퍼마리오 브라더스>(2023)도 닌텐도의 프로모션이기는 해도 원작이 슈퍼마리오가 피치 공주를 구한다는 고전적인 서사를 지니긴 했다.

<바비>는 서사가 없이 출발한 영화로, 그 빈틈은 각본가이자 연출가 그레타 거윅이 그려내야만 했다. 그레타 거윅은 데뷔작 <레이디 버드>(2018)에서 캘리포니아에 사는 10대 여성 크리스틴 맥피어슨(시얼샤 로넌)의 아픔을 감싸 안는 풋풋한 시선으로 주목받았다. 맥피어슨이 그토록 선망하던 뉴욕의 대학교로 가기까지, 맥피어슨의 가족사와 연애사를 통해서 그녀의 복잡한 결을 그려내는 스토리텔링은 그를 차세대 여성감독으로 주목받게끔 했다. 마찬가지로 <작은 아씨들>(2019)도 원작에서의 여성 캐릭터가 더 주체적으로 살아 움직이게끔 했고, 연대기 순으로 적힌 원작과 달리 과거와 현재를 오가는 독창적인 각색으로 눈길을 끌었다. 그레타 거윅은 감독으로 데뷔하기도 전에 노아 바움백의 <프란시스 하>(2012) 등 각본을 쓰기도 했다.

<바비>의 서사는 '논쟁적 대상인 바비를 왜 지금 그려내야 하는지'에 대한 과제를 먼저 해결해야만 했다. 프로모션이라는 제약으로 인해서다. 만일 이 작품을 보고 난 다음 바비 인형이 소비되더라도 그에 마땅한 윤리적 당위가 있어야 하기 때문이다. 또 한편으로 바비와 켄 인형이 남녀불문 소비되려면, 그 외의 관객도 감싸 안아야 한다. 특히 프로모션은 남성도 대상으로 삼아야 하는 것이어서다. 말로 드러난 남성성에 패티시즘에 가까운 집착을 하던 켄이 제 잘못을 인정하고, 켄은 그냥 켄으로 살아가고 켄스플레인을 하지 않도록 하는 것도 이 프로모션의 영향으로 보인다. <바비>는 바비의 프로모션을 수행하면서도 그레타 거윅의 영화이어야 했다. 이는 오직 노스탤지어에 기반하는 팬서비스에 몰두한 <슈퍼마리오 브라더스>와 다르다. <바비>는 팬서비스를 현재진행형으로 해야 한다. 바비 인형의 이상적인 모델인 마고 로비를 택하면서도 바비를 소비하는 데에 비판적이어야 한다는 딜레마가 생긴 것이다.

<바비>는 지금 바비를 소비하는 것이야말로 '힙하다'는 전략을 택한다. 개봉 직전 SNS를 도배한 워너의 공격적인 마케팅을 생각할수록 더욱 그러하다. 워너는 <바비>를 홍보할 때 SNS 챌린지를 도입했다. <바비>의 홍보 포스터는 하나나 둘 정도의 캐릭터만 부각되는 보통의 포스터와 다르다. 마치 인스타그램의 피드를 생각나게끔 만드는 형식으로, 영화에 출연하는 24명의 캐릭터를 똑같은 포맷에 담는다. 캐릭터 사진을 핑클 가위로 오려낸 듯한 원에다가 담고, 위에다가 영화의 타이틀을 단다. 또 캐릭터 옆에 작은 글씨로 캐릭터에 대한 설명을 달아둔 것은 덤이다. 이를 본 여러 셀럽이 포맷에 따라서 사진을 찍기 시작했다. 곧 "나는 바비"라는 문구는 챌린지로 유행하기 시작했다.

<바비>의 마케팅은 인터넷 밈을 동원한 발렌시아가의 바이럴 마케팅과 유사하다. 발렌시아가 패딩을 걸친 교황 등등 예기치 못한 조합으로 힙한 이미지를 만드는 발렌시아기의 전략은 힙한 브랜드를 소비하는 행위를 전시해 정체성을 확립하려는 힙스터의 욕망과 맞물려 폭발적인 시너지를 냈다. 개개인은 챌린지로 제 정체성을 드러내는 동시에 상품의 홍보 수단으로 전락하고 만다.

<바비>는 정확히 힙스터의 욕망에 복무하고 있는 작품이다. 작품을 소비하는 방식도, 작품 자체가 바비를 소비하는 방식도 SNS 힙스터와 더없이 닮아있다. 즉 무언가를 창조적으로 전유해 저 자신만의 개성을 드러내는 것이 아니다. 이미 누군가 마련한 틀에 자신을 이입함으로 개성을 드러내는 것이다. 이는 <바비>의 스타일과 이어진다.

 

ⓒ 워너브러더스 코리아

<바비>에서의 오마주와 패러디는 작품 내적인 논리와 이어지지 않는다. 오마주와 패러디는 원작에 부여된 여러 역사적 맥락을 뒤집고 저만의 방식으로 재해석하는 것이다. 오마주와 패러디는 원작의 뉘앙스, 문학으로 이야기하면 문체를 모방하는 작업이기도 하다. 오마주와 패러디가 서사의 레이어를 한층 두텁게 하는 이유는 이전의 것을 승계하되 그 이전의 것에 대한 감독의 해석이 감독의 주제의식과도 이어지는 경우가 대다수이어서다. 오마주와 패러디의 해체는 최근 영화에 두드러지는 경향 중 하나다. 다니엘스의 <에브리씽 에브리웨어 올 앳 원스>(2022) 속 에블린의 멀티버스에서 드러난다. 에블린의 멀티버스는 에블린이 웨이먼드와 결혼할 즈음의 여러 영화의 스타일을 가져다 쓰는 데에서 나온다. <화양연화>(2000)부터 시작해 온갖 레퍼런스는 에블린이 살 수 없던 영화적 삶을 드러내는 데에 쓰이지, 원작의 오마주와 패러디로 쓰이지 않는다. 이는 인터넷 밈이 쓰이는 양상과도 이어져 있다. 원작을 탈맥락화한 후에 재맥락화를 하는 데에서 인터넷 밈의 미학이 탄생하는 것이지 원작의 탈맥락화 자체는 인터넷 밈이 되지 않는다. <바비>는 그 문제점을 드러낸다.

<바비>에서 인용되는 여러 레퍼런스는 이상하리만치 무의미하다. 오프닝에서의 <2001 스페이스 오디세이>부터가 그러하다. 이윽고 마텔 회사 내부가 자크 타티의 <플레이타임>(1967)을 따라서 그려진 데에는 아무런 이유가 없다. 이상한 바비가 전형적인 바비에게 두 선택지를 건네는 <매트릭스>(2000)를 따라서 하는 것도 사실상 코미디에 가깝다. 마찬가지로 <오즈의 마법사>(1939)의 노란 길을 핑크색 길로 그려낸 장면도 마찬가지다. 켄(라이언 고슬링)과 또 다른 켄(시무 리우) 사이의 갈등을 드러낼 때 차용된 여러 레퍼런스도 그러하다. <웨스트 사이드 스토리>(1961)와 <그리스>(1978)의 남성성이 우스꽝스럽게 그려지되 남성성이 생긴 기제는 배제되어 있다. 켄이 입은 복장은 <록키>의 것이며, 켄이 가부장제를 통해서 바비 랜드를 점령한 뒤 가장 먼저 하는 비치볼은 <탑건>(1986)의 것이다. <대부>(1972)로 맨스플레인하는 남성 시네필의 모습까지 그러하다. 이 모든 것이 그저 남성성의 이미지만 빌려서 하는 1차원적 슬랩스틱에 머무른다. 물론, 켄의 단순하고 겉멋만 들어 있는 남성성을 그려내려는 장치로는 효과적이다. 또 라이언 고슬링이 연기하는 켄은 할리우드에서 클리셰로 쓰이는 백인 금발 백치 여성 캐릭터의 미러링이다. 우리가 흔히 보던 영화에서 유해한 남성성(toxic masculin)의 흔적을 발견하는 것만으로 가치가 있어서다. <바비>는 그간의 할리우드 영화에 깃든 남성성을 아카이빙하는 영화로 볼 수 있는 셈이다.

도입부에서 논의한 <몬티 파이튼의 성배> 의 차용도 마찬가지다. 그 개그가 남성적이라는 것을 폭로할 뿐이지, 개성 있는 재해석으로 이어지지는 않는다. (놀라우리만치 2022년에 칸 영화제 황금종려상을 수상한 <슬픔의 삼각형>(2022)의 2부도 <몬티 파이튼의 삶의 의미>(1983)의 한 에피소드를 가져다가 쓴 것이다. 다만 여기서도 이 에피소드는 피상적으로 머물 뿐이다.) 그레타 거윅은 남성적 영화를 뒤집고 비틀지 않는다. 그저 할리우드 남성성의 표본을 전시하는 아카이브의 차원에만 둔다. 각본을 쓴 그레타 거윅과 노아 바움백에게 바랐던 것은 그 아카이브를 해석하는 속 시원한 블랙유머다. 다만 거기에 다다를 정도로 이 영화가 날카롭고 독한 영화는 아니라 아쉬운 점이 있다. 이는 영화의 홍보와도 이어지는 지점의 문제다. 이 영화는 고전 영화를 숏폼의 형식으로 가져다 쓰는 발렌시아가식 홍보에 그친다.

이는 영화 서사와 태도로까지 이어지기에 이른다. 특히 <바비>는 셀럽과 할리우드, 그 너머의 일상 사이의 관계를 다루는 데에 있어서 직설적이다. 바비 랜드의 뒤편에 산타 모니카 산의 할리우드 사인을 패러디한 바비 랜드가 적혀 있고, 마텔의 뒤편에 할리우드 사인이 있는 것 사이의 유사성으로 감독은 마텔과 할리우드를 곧장 이으려고 한다. 바비 랜드의 일상은 그야말로 일상에 제거된 타인에게 보이는 루틴만이 존재하는 인스타그램 피드를 보는 듯하다. 근육질 몸매로 해변에 어슬렁거리면서 포즈를 취하고, 제 역할이 해변에 그친다는 켄의 언행도 인스타그램 인플루언서를 보는 듯하다. 모든 바비가 하이힐을 항상 신고, 먹어야만 하는 우유마저 빈 잔으로 마셔야만 하는 코르셋으로 가득한 바비 랜드의 세계는 마치 모든 것이 광고의 호흡으로 촬영된다. 할리우드 스타와 인플루언서는 걸어 다니는 광고판이기도 해서다. (한편으로 남성과 여성 모두에게 성기가 제거되어 있다는 설정도 그들이 가상의 섹슈얼리티에 기반해 있다는 장치로 해석된다.) 바비 랜드 속 모든 바비는 그의 활동이 여성 인권 신장을 위한 것으로 생각한다. 바비의 생각은 마저리 퍼거슨이 정의한 페미니스트의 오류 개념과도 이어져 있다. 이 개념은 시장주의 페미니즘을 비판하려는 목적에서 고안된 개념으로 대중매체 속 주체적 여성이 등장할수록 현실 속 여성의 문화적인 가시성이 늘고, 제도적인 여권 신장도 이루어진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소설이나 영화 속의 여성 캐릭터를 단순히 그 자체로 보는 것이 아니라 여성 인권을 드러내는 척도를 관객수 등 지표로만 대하는 셈이다. 이는 할리우드에서 강한 여성 캐릭터의 유행을 자아냈고, 디즈니의 인기를 이끌어냈다.

 

ⓒ 워너브러더스 코리아

초반만 하더라도 <바비>는 시장주의 페미니즘의 오류를 지적하는 블랙코미디로 탁월했다. 아이러니하게도 이 영화가 시장주의 페미니즘을 이행하면서도 부수는 지점이 이 영화의 쾌감이었다. 마고 로비가 연기한 전형적인 바비야말로 시장주의 페미니즘의 오류를 그대로 답습한 중산층 여성이어서다. 영화도 이를 전면으로 드러낸다. 영화 초반에 바비 랜드의 바비를 소개할 때 임신한 바비를 폐기된 상품이라 배제한다. 마찬가지로 바비 랜드에서는 다양한 인종의 바비가 있지만 그들 중 중산층과 그 위를 웃도는 여성만이 부각된다. 즉 능력이 그들의 페미니스트로의 정체성을 드러낸다는 점에서 능력주의에 갇혀 있는 셈이다.

또한 바비 랜드는 같은 생각을 하는 이들끼리만 모이는, 흔히 필터버블이라고 할 수 있는 데에 갇히기 쉬운 환경이다. 그만큼이나 <바비>가 현실을 마주할 때의 디테일은 탁월했다. 캣콜링을 하는 남성부터 시작해 제3세계 페미니즘을 공부하는 사샤 등이 그러하다. 또 남성적인 권위의 기반이 전문성이라는 것을 드러낸 캘리포니아의 풍경도 그러하다. 전형적인 바비는 계급으로 구성된 일상적인 삶을 배운다. 또 전형적인 바비와 만난 사샤가 아니라 사샤의 어머니인 그레이스가 여전히 바비를 통해서 페미니즘을 꿈꾸는 모순도 눈여겨 볼만하다. 여기까지만 해도 이 작품이 흥미로웠다. 할리우드와 시장주의 페미니즘과 일상에서의 실천 문제를 본격적으로 다루려고 하겠거니 기대했다.

<바비>는 마텔의 바비가 할리우드 스타나 인플루언서로 그려내던 와중 급작스레 가부장제 전반에 대한 비판으로 나아간다. 작은 담론을 다루려던 이야기가 거대 담론으로 전환된 시점부터 서사가 삐걱대기 시작한다. 직유법으로 전개되던 영화는 급작스레 직설법으로, 혹은 미러링으로 전개되기 시작한다. 영화가 중후반에 다다를 즈음에 그레이스(아메리카 페레라)의 절규는 여성의 코르셋의 모순을 압축하고 직접 발화하기에 이른다. 여기서부터 영화는 영화 문법에 기대기보다는 모든 미장센이 대사를 설명하는 수단으로 전락한다. 결말까지 이 영화는 주제를 말로 토하는 데에 급급하다. 끝내 켄에게 켄의 인생을 살라고 이야기하더니 결말에 이르러서 이를 실존적인 문제로 치부한다. 새하얀 배경 아래서 바비의 발명가 루스 핸들러(리아 펄먼)과의 대화는 당혹스럽기까지 하다. <에반게리온> TVA 25-26화 속 이카리 신지가 실존적 위기를 경험할 때 모두가 "오메데토"라고 축하해주는 듯이 이 영화도 비비를 향한 오메데토로 끝나버린다.

 

ⓒ 워너브러더스 코리아

<바비>는 정보가 우선시된 콘텐츠의 감각을 반영한 작품이 된 셈이다. 대사가 영화의 전부이기에 빨리 감기로 볼 수 있을 정도고, 켄너프, 켄스플레인 등등 유행어로 밈으로 가공되는 것을 목적으로 하는 장면도 더러 보인다. 또 미장센은 헐겁고 촬영은 쉴 틈 없이 계속 움직이고 인서트 숏도 배제되어 있다. 마크 론슨이 작곡한 OST에 N행시처럼 나오는데, 정작 제시어와는 다른 말을 삽입한다든지 하는 장난은 예능에도 종종 보일 정도로 유명한 장난이다. 이는 영화라기보다 "10년 뒤 –"이라는 시리즈로 일상 속의 스테레오타입을 답습하면서 동시에 과장하는 <킥서비스> 등 스케치 코미디 콘텐츠에 가깝다. 라이언 고슬링과 마고 로비의 연기도 캐릭터의 표정을 살려서 한 연기라기보다 인터넷에 돌아다니는 남성과 여성의 스테레오타입을 그대로 소화해서 하는 연기에 가깝다. 가부장제와 페미니즘도 일상에서 흔히 접할 수 있기에 트위터에서 소화할 수 있는 정도로만 그려진다. 이 영화는 사실 그 어떤 새로운 이야기도 한 적 없다.

이때 본질적인 질문이 생긴다. <바비>는 영화인가? 이 작품을 둘러싼 논쟁을 볼 때 생긴 이질감도 여기서 온다. <기생충>(2019), <조커>(2020) 등 문제작이 인물을 재현하는 태도와 미장센, 카메라의 움직임 등으로 관객과 평론가 사이의 논쟁을 불러일으킨 것과 상반된 양상으로 남녀의 반응이 갈라진다는 것이다. 이 작품에 대한 호불호가 곧장 페미니즘을 둘러싼 그이의 정치적 입장을 드러내는 선언으로 치부된다. 콘텐츠의 내용 자체가 문제시된 것이다. 이 호불호를 여기서 드러내지는 않을 생각이다. 이 영화가 문제적인 이유는 한층 더 깊은 차원에 있다. <바비>가 영화이기를 포기한 영화라는 것이다. 이로써 더 많은 관객에게 다가갈 수 있는 작품이 되었다. (인형과 피규어의 갈등으로 드러나는) 바비를 둘러싼 역사, SNS에서 이야기하는 페미니즘, 가부장제에 대한 더 많은 것을 설명하고, 나아가 마텔 회사의 홍보도 할 수 있을 정도로 다양한 목적을 충족하려면 영화가 아니라 콘텐츠로 제작되는 것이 최적인 듯하다. 이러한 형식이 장점일지 단점일지 아직 판단이 서지는 않는다. 아직 이 작품이 영화와 숏폼 콘텐츠 사이의 어디라는 것만 이야기할 수밖에 없다. 아니, 차라리 당장은 마텔사의 발렌시아가식 홍보 영상으로 이야기할 수밖에 없을 듯하다.

P.S

서브플롯을 배제하다 보니까 사샤와 그레이스의 서사가 깊게 드러나지 않고, 이들이 서사에서 바비의 조력자 이상으로 기능하지 않은 것에 아쉬움이 있다. 또한 사샤가 Z세대라는 세대 감수성을 제대로 못 드러낸 것도 그러하다. 성소수자로 암시되는 앨런에 대한 설명을 미처 더하지 못했는데, 이 캐릭터가 주체적으로 드러나기보다 바비를 돕는 캐릭터로 쓰인 것도 아쉬운 지점이다. 끝으로, 작품이 켄을 감싸 안으려는 어정쩡한 선택보다는 여러모로 훨씬 급진적이고 복합적인 맥락을 지닌 쪽으로 나아갔어야 한다는 생각이 든다.

[글 김경수 영화평론가, rohmereric123@ccoart.com]

 

ⓒ 워너브러더스 코리아

바비
Barbie
감독
그레타 거윅
Greta Gerwig

 

출연
마고 로비
Margot Robbie
라이언 고슬링Ryan Gosling
아메리카 페레라America Ferrera
케이트 맥키넌Kate McKinnon
잇사 레이Issa Rae
두아 리파Dua Lipa
시무 리우Simu Liu
아리아나 그린블랫Ariana Greenblatt

 

배급|수입 워너브러더스 코리아
제작연도 2023
상영시간 114분
등급 12세 관람가
개봉 2023.07.19

김경수
김경수
 어릴 적에는 영화와는 거리가 먼 싸구려 이미지를 접하고 살았다. 인터넷 밈부터 스타크래프트 유즈맵 등 이제는 흔적도 없이 사라진 모든 것을 기억하되 동시에 부끄러워하는 중이다. 코아르에 연재 중인 『싸구려 이미지의 시대』는 그 기록이다. 해로운 이미지를 탐하는 습성이 아직도 남아 있는지 영화와 인터넷 밈을 중심으로 매체를 횡단하는 비평을 쓰는 중이다. 어울리지 않게 소설도 사랑한 나머지 문학과 영화의 상호성을 탐구하기도 한다. 인터넷에서의 이미지가 하나하나의 생명이라는 생각에 따라 생태학과 인류세 관련된 공부도 하는 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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