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가 보는 것은 진실일까 ['러브 라이프' #2]
우리가 보는 것은 진실일까 ['러브 라이프' #2]
  • 박정수
  • 승인 2023.07.24 11: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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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든 것에는 '양면성'이 있다"

'친절한 얼굴'로 다가온 그는 나를 무장 해제시켰다. 하지만 내가 마주한 그 친절한 얼굴은 '가면'이었거나(<하모니움>), 아니면 '측면'에(<옆얼굴>) 그쳤다. 내가 볼 수 없었던 가면 너머의 '민낯', 오른편 '너머'의 왼편이 있었고, 거기엔 악의로 가득했다. 그것이 일본 영화감독 '후카다 코지', 나름의 철학이다. 상대방이 내게 보여주는 얼굴이 전부가 아닐 것이라고, 전시되지 않은 얼굴이 따로 있기 마련이고, 그 얼굴은 내가 예상치 못한 파장을 몰고 올 수 있다고, 그래서 친절함은 '착각'이기에 속단해선 안 된다고.

물론 반대도 있다. 그 얼굴, '자연재해'(<바다를 달린다>)는 쉽사리 이해되지 않았으며, 심지어 참혹한 피해를 불러왔다. 하지만 부정적인 첫인상을 천천히 이해하고 보니 풍족한 선물이 뒤따랐다. 즉 한 존재는 절대적으로 선하지도, 그렇다고 사악하지도 않다. 모든 것에는 '양면성'이 있다고 생각하는 코지는 자신의 철학을 주로 '스릴러'로 풀어왔는데, 신작 <러브 라이프>에서는 '드라마'에 녹여낸다.

 

ⓒ M&M 인터내셔널

이번 신작에서도 '내가 보고 싶은 얼굴'과 이를 배반하는 '입체적이고 복잡한 민낯', 곧 두 얼굴이 교차한다. 영화의 도입부, 파티 준비가 한창이다. 아직까진 타에코가 계획한 것이 탄탄대로 실현되고 있다. 코지는 이 현장을 카메라를 고정시켜 회화 내지는 사진처럼 포착한다. 그녀가 예상한 틀에서 조금도 움직이지 않고 있다는 듯이. 그런데 서서히 카메라가 움직인다. 가까이서 타에코와 케이타를 포착하던 카메라가 베란다로 멀어지면서, 파티를 도와주기로 한 외부의 동료들을 촬영한다. 파티의 의도가 '결혼을 반대하는 시아버지의 마음을 돌리기 위함'으로 결혼식의 증인인 동료들은 파티의 목적에 따라 초대되었다. 그런데 동료들의 몸과 얼굴에 타에코의 계획이 매끄럽게 스며들지 않는다. 더욱이 결혼식에 참석하지 않았고, 또 부부에게 감정이 좋지 않은, 지로의 옛 연인 야마자키가 나타난다. 타에코의 계획대로 선별한 순수한 얼굴에, 부부를 축복하고 싶지 않은 훼방이 침투함으로써 불순해진다. 이에 그녀가 생각한 틀에서 벗어난다는 듯 카메라는 이동한다.

물론, 타에코의 계획이 탄탄대로 흘러가거나, 혹 조금 엇나가더라도 큰 틀에서 별 지장이 없다면 카메라 워킹은 안정적이다. 그런데 타에코가 일하는 무료 급식소에 도착하자 카메라는 '핸드 헬드'로 흔들린다. 무료급식소에서 타에코와 금주를 약속했던 토요다가 약속을 어기고 술을 마셔 소란을 일으킨다. 기대를 전면 벗어난 얼굴과 상황, 그것이 핸드 헬드의 감각과 유사한 '지진'과 같다. 이후 영화에서 실제로 지진이 발생하는데, 케이타와의 추억을 보존한 집을 뒤흔들며 타에코의 의중을 와르르 무너뜨린다.

파티에서도 상징적인 지진이 발생한다. 타에코, 지로, 케이타가 함께 사는 신혼집 건너편에 시부모님이 거주한다. 비교적 가까운 거리지만, 자신의 시점에서 상대는 '익스트림 롱숏'으로 쬐끄맣게 포착되기 때문에 먼 거리인 것도 사실이다. 그 익스트림 롱숏에는 자신의 계획이나 의도, 기대 등을 그려볼 만한 '여백'이 많고, 잘 보이지 않을 정도로 작아진 인간은 추상적이어서 상상력을 자극한다. 심지어 목청을 높여 고함을 쳐야지만 겨우 대화도 가능하기에 오해를 사기 쉽다. 시어머니는 익스트림 롱숏으로 마주한 타에코가 시아버지와 관계를 개선하길 바라는 눈치로, 집에 없는 남편이 신혼집에 갔기를 상상한다. 그러나 멀리서 막연히 그려보기만 한 시공간을 가까이서 직접 맞닥뜨린다. 익스트림 롱숏으로 포착된 상대의 얼굴을 내 마음대로 그려볼 때 유지되던 평온한 질서는, 미디엄숏이나 클로즈업으로 가까이서 실체를 확인하니 거짓이라는 게 탄로 나며, 이때 기존 질서에 균열을 내는 지진이 발생한다. 세 사람의 기대와 달리, 파티가 시작되니 성화를 내는 시아버지처럼 말이다. 반대도 마찬가지다. 신지와 타에코는 지로의 눈에 항상 익스트림 롱숏으로 포착된다. 그들의 진의를 모르는 지로는 오해하지만, 타에코의 말처럼 가까이서 보니 그들은 "아무것도 안 했다."

인간은 선과 악이 혼재된 실제와 달리, 항상 제게 좋은 것만 계획하거나, 믿고 싶은 것만 본다. 시어머니가 죽음을 감당하기 어려워서 신앙을 갖는다는 것처럼, 케이타 사후 타에코가 아들의 환각을 보는 것처럼, 자기가 보고 싶거나 감당할 수 있는 이미지만을 믿는다. 그러나 긍정적으로만 계산하면 참혹한 결과를 대비하지 못한다. 지로와 타에코는 케이타를 기쁘게 하려고 '비행기 장난감'을 선물했지만, 정작 이를 갖고 놀던 케이타가 욕실에서 미끄러져 사망한다. 케이타는 타에코가 물을 받아놓은 욕조로 넘어져서 바로 익사했는데, 그녀는 물이 찬 욕조가 이런 결과를 낳을지 감히 짐작조차 못했다. 외에도 타에코는 베란다에 앉아 용변을 보는 비둘기를 쫓아내기 위해서 CD를 매달아두었다. 그러나 정작 대롱대롱 설치된 CD는 비둘기를 '내쫓기'는커녕 박신지와 함께 있는 타에코를 밝히며 지로를 의도치 않게 '불러들인다.' 신지 또한 마찬가지로 타에코를 일본에 내버려두고, 한국으로 돌아갈 차비를 벌고자 "아버지가 위독하시다"라고 거짓말을 꾸몄다. 그러나 이는 정작 그녀가 그의 한국행에 동행하는 결과를 낳았다.

 

ⓒ M&M 인터내셔널

영화 속 등장인물들은 불완전하고 편향되어 상황을 객관적으로 인지하지 못하는데, 코지는 이를 다양한 '언어'를 상징으로 삼아 보여준다. 영화에선 일어와 수어가 교차 사용되고, 영화 말미 한국어를 조금 구사한다. 이 중 수어, 일어, 한국어가 다 가능한 쪽은 타에코와 신지, 지로는 일어만 구사한다. 그래서 타에코, 케이타, 신지가 수어로 소통하는 내용을 지로는 모른다. 수어에 관한 그의 의심과 착각이 걷잡을 수 없이 커져만 간다. 분명 지로는 자신의 욕망이나 망상을 거두고, 타에코와 신지에게 가까워지려 했다. 그 과정에서 영화는 생생한 민낯을 서로 접하는 '줌인'을 사용한다. 객관적인 실재에 접근한다는 듯이. 그러나 아무리 다가가도 그의 시각으론 수어를 해석할 수 없고, 대신 질투심을 자극하는 주관적인 풍경만 매개될 뿐이다. 객관에 다가가던 줌인은 이내 멈춰서 주관으로 뒤바뀐다. 이는 영화에서 간헐적으로 등장하는, 베란다에 놓인 카메라가 유리창 너머의 실내를 포착하는 촬영과 같다. 유리창에 비치는 불빛, 풍경 등이 실내에 겹쳐져서 보이는 롱숏, 그것이 흡사 주관과 객관이 겹쳐진 인물들의 시야와 같다. 실내를 객관적으로 조망해야 하지만, 내 동공에 묻어있는 주관이 자꾸만 함께 보인다.

더욱이 하나의 객관이라도 서로가 그것을 바라보는 '각도'가 다르다. 코지는 전작 <옆얼굴>에서 각도에 따라 해석이 달라지는 얼굴들을 고찰한 것처럼, <러브 라이프>에서도 똑같은 시공간에 참여하고 있어도 개개인이 어느 각도, 어떤 측면을 바라보느냐에 따라 알게 되는 것이 달라짐을 환기한다. 이후 타에코와 시아버지가 화해하며, 노래방 기계로 즐거운 삶을 누린다. 그들은 삶 중에서도 탄생, 곧 '생일'만 뚫어져라 집중한다. 그런데 카메라는 식구들의 시야와 달리, 노래방 기계가 위치한 안방-거실 사이를 포착하다가 이후 욕실을 촬영한다. 명랑한 시청각만을 마주하는 식구들이 보지 못한 각도에서 케이타가 사망한다. 삶만 바라봤다. 그러나 생일만 바라보는 각도에서 볼 수 없는 '사각지대'에 죽음이 있었다.

감상자는 타에코와 신지가 어떻게 재회했는지 알 수 있는, 또 수어 내용이 번역되는 전지적인 시점에서 객관적으로 둘의 관계를 관찰한다. 그런데 감상자와 달리 지로는 이들이 어쩌다 복지국에서 재회했는지, 시발점을 모른다. 대뜸 둘이서 수어로 대화하는 장면만 그의 동공에 맺힌다. 대체 왜 저 둘은 만나서 대화하고 있는가, 케이타 때문인가, 아니면 둘의 관계가 개선될 여지가 있기 때문일까? 지로의 각도에서 보지 못한 타에코와 신지의 사각지대엔 의심과 착각이 가득 불어난다. 케이타의 장례식에 사용된 '영정 영상'은 세 사람이 처음으로 '가족'이 된 날이라 말할 수 있다. 영상의 '좁다란 화면비', 곧 지로의 각도에서는 다가와서 가족이 될 타에코가 보인다. 그런데 타에코의 시야에 상응하는 '널따란 화면비'에선 공원 벤치에 앉아있는 신지가 눈에 띈다. 그녀는 신지를 외면하고 지로에게 갔다. 그래서 둘은 신지를 다르게 해석한다. 지로는 신지가 모자를 내팽개친 것만 알고 있기에 영상 속에서 비로소 행복해졌다고 느낀 반면, 타에코는 자신이 신지를 버렸다고 원통해하기에 죄책감이 영 찝찝하다.

이렇게 각자가 제한된 구도에 갇혀서 앎이 협소해지는데, 이 원인 중 하나는 '고착화된 통념'에서 비롯한다. 후반부의 한국인 여성 운전자가, 신지와 타에코를 막연하게 부부 및 연인 관계로 단정하여, 둘의 다툼을 '사랑싸움'으로 오해한 것처럼 말이다. 케이타가 사망하기 전까지 식구들은 아이에게 묶여 있었다. 아이에 의해서 볼 수 있는 각도, 보여야 하는 모습이 제한됐다. 케이타가 지로를 '아빠'로 보이게 만듦에, 감상자도 그가 '친부'가 아닐 것이라고 의심조차 하지 않았다. 그런데 케이타가 사망하자, 아들이자 손자에 의한 각도 제한이 완화된다. 호적상으로는 케이타가 지로에게 입양되지 않았다는 사실이 드러나고, 시부모는 살던 집을 팔고 이사한다. 영화는 타에코나 지로만 포착하던 각도를 넓혀서, 타에코는 신지를 만나러 가고, 지로는 야마자키와 재회한 장면을 보여준다. 신지와 타에코는 화장실에서 일반적인 구도와 다른 '거울' 시점으로 대화한다. 거기서 타에코는 지금껏 밀어내던 케이타의 죽음을 직면해본다. 미야자키는 지로가 눈을 마주하고 대화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지적한다. 즉 특정 관계에서 해방되어 여러 각도를 허용하자 비로소 객관적인 대상의 진실, 한 얼굴이 가질 수 있는 다양한 가능성이 보인다.

 

ⓒ M&M 인터내셔널

우리는 진실에 다가서고자 억지로라도 협소한 구도를 넓혀서 봐야 한다. 케이타의 장례식에서 아이들과 신지는 뻔한 관습을 따르지 않는다. 장례식의 어른들은 마땅히 상복을 갖추고 예를 표한다. 그러나 아이들은 죽음도, 장례식도 잘 모른다. 부모가 상복은 입혀줬지만, 아이들이 표현하는 감정은 장례식에 어울리지 않는다. 이후 아이들처럼 감정에 솔직한 존재, 또 상복마저 입지 않은 신지가 등장한다. 그는 아이를 잃은 비통함에 분개하여 타에코의 따귀를 때리고, 제 뺨도 연신 강타한다. 기대에 없는 조문객의 모습이지만, 거기서 '자식의 죽음을 마주한 부모의 원통한 진실'이 드러난다. 내내 굳은 표정으로 조문객들을 맞이하던 타에코는 신지와 만난 이후 처절한 눈물을 터트린다.

타에코는 자신의 부채를 신지의 진실에 덕지덕지 덧붙여서, 그를 마치 구원해야 할 누더기처럼 전락시켰다. 그렇게 타에코 마음대로 오판하여 한국에 동행했더니, 정작 신지 아들의 결혼식이 열리고 있고, 신지에게 타에코는 필요 없어져 그녀는 동떨어진다. 기대하지 않은 결혼식에 간 타에코는 현장에서 들려오는 흥겨운 트로트에 즉흥적으로 몸을 맞춘다. 이후 비가 내려 하객들은 계획된 결혼식을 위해 대피하는 반면, 타에코는 야외에 남아 비를 우두커니 맞는다. 이럴 수도, 저럴 수도 있는 변덕스러운 얼굴을 가진 현실을 그저 긍정하는 것이다.

물론 가까이서 객관적인 현실을 긍정하는 사랑은 결코 쉽지 않다. 타에코는 지로에게로 돌아온다. 부부 사이는 멀리 벌어져있고 분위기는 냉랭하다. 어찌할 바를 모르겠지만, 함께 산책이라도 해본다. 그 현장을 코지는 익스트림 롱숏에 담는다. 길을 걷는 부부의 벌어졌던 간격이 점차 좁혀지는데, 그것이 익스트림 롱숏의 함정인지, 아니면 실제로 거리를 좁힌 것인지 단언할 수 없다. 여하간 간격은 좁혀진 것처럼 보여서, 감상자의 눈엔 무탈한 남녀 사이처럼 보일 정도다. 즉 이들의 진실을 오롯이 반영하지 못하고 끝나는 영화처럼, 착각이 인간의 한계일지 모른다. 그러나 진실과 거리를 좁히고 이로써 복합적인 현실 그 자체를 긍정하려는 시도가 연이어져야 할 것이다.

끝으로 박신지가 일본인들이 '보고 싶어 하는', 부정적인 한국인의 전형이 아닌지 의심이 든다. '사기꾼'이거나 아니면 '생활자금을 받는 구원의 대상'이거나, 이로써 영화가 말하고자 하는 바에 모순이 발생한다. 더욱이 왜 그가 청각 장애를 지녔고, 수어를 하는지 설득이 되지 않는다. 물론 영화에 장애인이 특정한 목적성을 가져야지만 등장할 수 있는 건 아니다. 그들도 비장애인 못지않게 일반적으로 출연할 수 있어야 하지만, 다만 최근 일본영화(<드라이브 마이 카>, <너의 눈을 들여다보면> 등)에서 청각 장애인의 등장이 자주 보이기 때문에 <러브 라이프>만의 고유한 목적 없이는 그저 타 예술가의 설정을 안일하게 따라간다는 오해를 살 수 있다. 굳이 청각 장애인이어야만 하는 이유가 없다면 <그 남자는 타이타닉을 보고 싶지 않았다>(2022)처럼 다른 장애 유형을 가시화하고 이해하는 일도 충분히 가능하지 않았을까. 즉 삶과 세계의 입체성과 복잡함을 잘 구현해놓고도, 스테레오타입과 유행의 단순성에 매몰되어 버린 점이 아쉽게 느껴진다.

[글 박정수 영화평론가, green1022@ccoart.com]

 

ⓒ M&M 인터내셔널

러브 라이프 
LOVE LIFE
감독
후카다 코지
Fukada Koji

 

출연
키무라 후미노
Kimura Fumino
나가야마 켄토Nagayama Kento
수나다 아톰Atom Sunada
야마자키 히로나Yamazaki Hirona
시마다 텟타Tetta Shimada
미토 나츠메Natsume Mito
칸노 미스즈Kanno Misuzu
타구치 토모로오Taguchi Tomorowo

 

수입|배급 M&M 인터내셔널
제작연도 2022
상영시간 123분
등급 12세 관람가
개봉 2023.07.19

박정수
박정수
예술은 현실과 차별화된 고유하고도 독립적인 차원입니다. 그중에서도 영화는 타 예술 매체와 구분되는 고유한 시각적 특징을 지니고 있습니다. 이러한 예술만의, 오직 영화만의 경험을 독자 여러분께 소개해 드리고자 합니다. 동시에 영화는 현실에서 비롯되고, 인간에게 이바지합니다. 그렇기에 현실-예술, 인간-영화를 이어내는 교두보와 같은 글을 제공하고자 노력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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