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 이즈 어프레이드' 아리 에스터식 역사의 종말
'보 이즈 어프레이드' 아리 에스터식 역사의 종말
  • 배명현
  • 승인 2023.07.18 12: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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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이아적 자본주의에 관하여"

<보 이즈 어프레이드>의 세계는 그야말로 끔찍한 혼종이다. 주인공 '보'가 내던져진 세계가 끊임없이 폭력을 생성하고 발생시키기에 혼종이란 어휘가 적확한지 의문이 들 수 있겠지만, 잠시 영화를 떠올려 보자. 보의 빌라 앞 거리에 우리의 눈을 사로잡는 사람들이 보인다. 그들은 외형도 행동도 비일상적이다. 보를 향해 전속력으로 달려온다거나 곧 무슨 짓을 저지를 것만 같이 위협적이다. 칼로 사람을 찌르는 노숙자를 신고하더라도 경찰은 그를 체포할 의지를 보이지 않는다. 굳이 푸코를 호명할 필요도 없이 이들은 노골적으로 광인을 표현한다. 하지만 이 거리를 정말 으스스하게 만드는 핵심 요소는 '일상적 평범'에 있다. 약탈과 살인이 일어나는 거리에서 핫도그가 팔리고 식료품 가게가 운영되고 건물의 보수가 이루어진다. 사회 시스템이 유지되고 경제 활동이 이루어지는 곳이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보의 세계를 미친 세계라 부를 수 없다. 이곳은 디스토피아 보단 오히려 우리가 사는 일상에 가깝다. 다만 평범의 한가운데 폭력이 도드라지게 드러날 뿐. 이곳은 일상 비일상이 뒤죽박죽 섞여 있는 세계다.

 

ⓒ 싸이더스

이 세계에서 보는 엄마인 모나를 만나러 간다. 아니, 모나를 만나러 가야만 한다. 3시간 러닝타임 전체가 엄마를 만나러 가는 과정이라고 말해야 <보 이즈 어프레이드>에 대한 정확한 요약일 것이다. 그는 엄마를 만나기 위해 끊임없이 걷고 달린다. 보는 엄마를 실망시킬까봐 무섭고 엄마의 불호령이 무섭다. 중년을 넘긴 나이임에도 엄마라는 존재는 보를 완벽하게 장악하고 지배하고 있다. 보에겐 엄마를 거절하거나 거역할 만한 수단도 용기도 없다. 그는 무기력하고 피폐하고 왜소하다. 비행기 표를 구할 수 없어 갈 수 없다는 말에 거짓말이라며 윽박지르는 엄마를 보는 설득할 능력이 없다. 그의 능력은 오로지 생존만을 위해 발휘된다. 꼭 물과 함께 약을 섭취 하라는 의사의 말을 지키기 위해서 그는 건물 밖으로 달리고 또 달린다. 이렇듯 보가 두려움을 이겨내고 행동하기 위해선 당장의 생존이 걸려있어야만 한다. 보는 사회 속에서 타자와 상호 작용하는 삶이 아닌 생명의 유지를 위해 움직인다. 이러한 보의 행동에서 겹쳐 보이는 상은 어린이다. 하지만 보를 아이라 말할 수 없는 분명한 근거가 있다. 그는 울며 보채지 않는다. 아이는 울면 부모님이 챙겨준다. 하지만 보는 울지도 보채지도 않는다. 제목처럼 그저 보는 무서워하기만 한다.

어른인 보를 평생토록 두렵게 만든 근원적인 금기는 사정이다. 엄마는 보에게 아버지와 할아버지가 어떻게 죽었는지를 '교육'시켰다. 두 사람은 사정한 순간에 죽었고 그들의 유전적 질병이 보에게도 유전되었다고 말했다. 이는 단지 섹스의 차원에 머무를 문제가 아니다. 사정을 하면 죽는다는 것은 자위도 몽정도 불가능하다는 것을 의미한다. 자위행위를 막는 건 사회적 통념상 많은 부모가 현재까지 행하고 있긴 하지만, 몽정과 같은 생리적 차원의 현상은 임의로 막을 방법이 없다. 보는 의식적 차원뿐만이 아니라 생리적 차원에서조차 억압받고 통제받는 것이다. 하지만 보의 세계에서는 그것이 가능하며 엄마는 그것을 가능하게 한다. 그러나 그녀가 끝까지 막아낸 건 아니다. 사고처럼 발생한 첫사랑과의 섹스는 막지 못했다. 이를 통해 밝혀지는 사실은 보는 사정을 하더라도 살 수 있었다는 것. 첫 사정을 마친 보는 오르가즘이 아니라 살아 있음에 쾌감을 느낀다. 이 모습은 마치 자신의 목숨을 담보로 엄마가 틀렸음에 건 배팅에 승리한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불행하게도 보는 여전히 엄마가 두렵다. 엄마가 절대적 존재가 아니라는 사실이 증명되었지만, 여전히 엄마가 두렵다.

 

ⓒ 싸이더스

모나는 언론을 동원해 죽은 척을 할 수도 있고 항공사의 티켓을 조종할 수 있고 (최후엔) 영화 속 모든 인물을 증인으로 동원할 수도 있을 만큼 위압적이다. 또한 그녀의 회사인 MW가 보의 세계의 모든 것을 쥐고 흔드는 기업처럼 등장할 때(영화 내내 MW로고가 온갖 제품에 프린트되어 있다), 우리는 영화 속 모든 인물을 쥐고 흔드는 그녀의 경제적 권력을 실감하게 된다. 보가 그녀를 거역할 수 없는 방법조차 없어 보인다. 일인칭 시점으로 진행되는 영화의 특성상 보의 시각이 곧 관객의 경험이란 점을 떠올렸을 때, 우리 또한 그녀를 거역할 수 없는 존재로 바라보게 된다. 하지만 정말로 그러한가. 그녀는 자연법칙을 거스를 순 없다. 전지전능하지 않다는 말이다. 그저 보가 엄마를 그러한 시선으로 바라보고 있을 뿐이다. 아이러니는 여기서 발생한다. 그녀는 절대적이지 않지만 '현실적'으론 절대적이라는 이상한 성립이 가능한 모순. 그리고 이 순간, 그녀의 정체가 자본주의라는 사실이 밝혀진다.

MW는 보의 세계를 뒤덮고 있다. 그리고 모든 등장인물을 동원해 결말이란 단 하나의 점으로 귀결시키게 하는 힘을 가지고 있으며 보를 보았던 모든 인물들을 증인으로 세워 마지막 처형을 정당하게 만드는 권력을 가진다. 영화는 보의 세계라는 거대한 세트(<트루먼쇼>를 꼬아 만든 서사라는 것을 노골적으로 보여준다)를 통째로 장악하고 있다. 영화 속에 등장하는 모든 인물은 물론, 영화의 엔딩을 증인석에서 지켜보았던 우리도 이 세계 안에 포함되어 있다. 이 말인즉슨 우리 또한 자본주의에 영향 아래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물론 새삼스러운 이야기다. 우리가 언제 자본주의에서 벗어난 적이 있던가. 하지만 아리 에스터가 이번 영화를 통해 포착한 자본주의는 가장 최신의 자본주의가 가지는 어떤 형태이다. 나는 이 자본주의를 '가이아적 자본주의'라 부르려 한다.

 

ⓒ 영화 <칠드런 오브 맨>(2006)

자본주의적 디스토피아를 잘 다룬 영화에는 알폰소 쿠아론의 <칠드런 오브 맨>(2006)이 있다. 이 세계에선 다음 세대가 태어나지 않으며, 그렇기에 인류의 전멸이 눈앞에 다가왔음에도 영화 속 인물들은 돈을 벌고 일한다. 정말 이상한 건 돈이 많은 이는 인류의 유산과 예술품을 사 모은다는 점이다. 영화는 "자본주의의 종말을 상상하는 것보다 세계의 종말을 상상하는 것이 더 쉽다"는 프레드릭 제임슨과 슬라예보 지젝의 말을 증명하기 위해 존재하는 것처럼 보일 정도이다. 자본주의가 유일하게 존립가능한 정치 경제 체계일 뿐만 아니라 이제는 그에 대한 일관된 대안을 상상하는 것조차 불가능하다는 널리 퍼져있는 감각은 위와 같은 이미지로 등장한다.

<칠드런 오브 맨>이 끝까지 대안이나 그에 관련한 아이디어를 보여주지 않음은 영화의 당연한 수순이다. 우리가 사는 시대가 그것을 상상해 낼 수가 없게 만들기 때문이다. 대신 쿠아론 감독은 다른 하나를 붙잡는다. 자본주의의 대안이나 종말의 가능성 대신 인류의 종말을 유예시킨다. 그리고 그곳에는 우리와 다른 무엇이 있어야만 한다는 희망을 이미지로 기원한다. 기적적으로 탄생한 아기와 나룻배 그리고 안개 짙은 바다. 그 주위로 Tomorrow호가 지나간다. 그들은 분명 구조되었을 것이란 희망을 전달한다. 땅이 아닌 바다에서. 모든 생명의 근간인 바다에서 다시 인간은 구조되고 출렁이는 물의 표면 위에 새로운 발을 딛는 것이다. 이 '액체적 착륙'은 자본주의가 발생한 곳인 땅에서 다시 시작하지 않겠다는 어떤 믿음을 전달한다. 물론 이 낙관적 믿음을 우리의 문제를 다음 세대로 전가해버리는 무책임과 퇴행으로 비판할 수 있다. 하지만 그럼에도 정상참작을 하자면 쿠아론은 대안을 상상해내진 못했지만 가능성의 형태를 이미지로 구체화해냈다는 데 있다.

하지만 아리 에스터는 현재 상황과 현실 상황을 코믹하게 바라보고 있는 것 같다. 그는 이번 영화가 악몽 코미디라고 대답했다. 영화가 한 인물의 내면에서 일어나는 불안을 재현한 것에 그쳤다면 그저 잔인한 인간이라 생각하겠지만, 그는 의도적으로 영화를 현실의 우화로 그려냈다. 보(우리)는 엄마(오늘의 자본주의)의 손에서 벗어날 수 없음은 물론, 사랑하는 동시에 두려워하고 그 어떤 거부조차 할 수 없다. 중간중간 삐딱 선을 탈 수는 있겠다만 그것은 아이가 엄마에게 부리는 투정과 같은 것이다. 엄마에게 살아남기 위해서 우리가 취해야 할 자세는 완벽하게 수긍해서 MW를 물려받는 것(경제적 성공을 이루는 것) 혹은 적당히 순응하며 죽을 때까지 목숨을 유지하는 것(자본주의의 어쩔 수 없는 부역자)로 남는 것이다. 우리는 엄마를 두려워하지만 동시에 사랑한다. 이 사랑은 우리를 평생 유아에서 자라지 않게 한다. 평생 아이인 우리는 삶을 살기 위해 정해진 루트가 있는 것처럼(공부를 잘해서 좋은 대학에 가라, 좋은 기업에 취직해라, 등) 자발적 선택이 아닌 엄마의 정해진 선택을 우리의 선택이라 착각하며 살 수밖에 없다.

영화의 중간 보의 가상적 삶이 애니메이션 효과로 등장한 이유를 여기서 찾을 수 있을 것 같다. 우리 삶의 선택지를 고르지 못한다면, 그래서 정해진 루트를 타야 한다면 그것은 게임 속 케릭터와 다를 바 없다는 은유로서 역할을 하기 위함이라고. 탄생 이전부터 삶의 미래는 정해져 있고 그저 목적을 충실히 이행할 뿐인 삶, 레벨을 올리고 능력치와 스킬을 '몰빵'으로 찍는 행위, 혹여나 실수로 성공적 캐릭터가 되지 못했다면 폐기 처분한 다음 대체 캐릭터를 등장시키는 현실을 2D로 드러내기 위해서라고. 이때 정말 문제적인 부분은 세계로부터 탈출하기 위해 올라탄 자그마한 배의 엔진을 켰을 때 보의 세계는 다시 한번 애니메이션처럼 보인다는 점이다(아리 에스터는 이 순간을 마치 동화 속 한순간처럼 담아 놨다). 탈출의 의지는 쇠사슬로 무력화되고 무력은 곧바로 처형으로 이어진다. 그는 영화의 시작부터 엔딩까지 단 한 번도 세계의 바깥에 닿을 수 없었고 그런 운명으로 탄생했다. 보의 운명은 처형을 바라보는 증인과 연결되고 우리도 증인에 포함된다. 이 연결은 쇠사슬처럼 단단하고 거부할 수 없다. 그저 그렇게 태어난 것이다.

보가 올라탄 배를 보며 <칠드런 오브 맨>의 엔딩을 떠올리지 않기란 불가능하다. 세계에 대한 쿠아론의 응답 이후 17년이 지난 지금, 우리가 영화에서 목격한 것은 인류의 생존 가능성마저 불가능하다는 예술가의 대답이다.

 

ⓒ 싸이더스

물론 예술(가)이 세계를 긍정해야 할 의무를 가지고 있지도 않으며, 대안을 제시하는 것을 목적으로 존재하는 것도 아니다. 하지만 아리 에스터가 영화에서 스프 대신 연극을 선택한 보가 본 것이 불만족스러운 현실에 대한 자위로써의 대안일 때, 예술의 근원적인 힘과 가능성(그것은 분명 엄존한다고 믿는다)마저 소멸시키려 한다는 혐의는 가히 위협적인 태도다. 특히나 영화의 시작을 자궁 속 양수에서 시작하고 끝을 호수(자궁 속 양수의 대형화 버전이라고 가정했을 때 쇠사슬은 자력으로 끊어낼 수 없는 탯줄이 된다)에서의 처형으로 마무리 지을 때, 관객은 제4의 벽 너머에 존재하는 누군가가 아니라 보를 적극적으로 가해한 혐의를 가지게 되기 때문이다. 동시에 관객은 MW식 자본주의에 적극적으로 복무한 직원이 된다. 감독은 이러한 결말을 최고의 결말이라 말하고 있다

아리 에스터가 포착한 오늘의 자본주의를 가이아적 자본주의라고 명명한 까닭이 여기 있다. 이전까지의 자본주의는 아버지의 형태로 나타났다. 그리고 우린 아버지에 대한 두려움을 이겨내고 죽여버리거나(프로이트식 해결) 아버지가 부재한 곳에서 다시 시작(쿠아론식 미봉책)할 수 있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이젠 그것이 불가능하다. 어머니의 형태로 등장한 자본주의를 우리가 사랑하기 때문이다. 새롭게 등장한 거대한 모성은 우리를 양육해주며 보다 더 자본주의에 충실해질 수 있는 방향으로 성장하게 한다. 가이아적 자본주의는 역사적으로도 기원적이며 우리의 탄생부터 죽음까지 함께한다. 때문에 부모에게 버려졌다 한들 벗어날 수 없다. 감독이 연극단의 이름을 괜히 '숲속의 고아들'이라고 지은 게 아니다. 문득, 이런 생각이 떠오른다. <유전>의 결말은 엄마가 죽은 뒤 벌어진 사건이 사실은 엄마의 계략임이 밝혀지는 내용이다. 시간이 흘러 <유전>의 다락방을 죽은 줄 알았던 모나가 연다. 그 안에는 오래전에 봉인된 아버지가 있었고 우리는 모나가 짜놓은 보의 운명이 있었다. 엄마는 죽어도 죽은 게 아니었고 엄마는 우리도 모르게 세계를 지배하고 있었다.

자본주의가 우리의 끝이라는 감독의 선언은 프랜시스 후쿠야마의 『역사의 종말』을 떠올리게 한다. 자본주의가 인류사의 최종 완성태에 도달했다는 후투야마의 주장 말이다. 하지만 인류사는 계속해서 변해왔고 변하고 있다. 역사의 종언은 인류가 생존하는 한 불가능하다(쿠아론은 이 사실을 믿었던 것 같아 보인다). 돌이켜 보면 늘 최악의 반복이었던 것 같지만 말이다. 그렇다면 우리는 최악에서 무엇을 할 수 있을까. 『최악의 방향으로』에 쓰인 사무엘 베케트의 응답을 들어보자. "다시 한번 시도하기, 다시 한번 망쳐버리기. 다시 한번 더 망쳐버리기." 희망적으로 들리긴 하지만 결코 만만하게 볼 시도는 아니다. 베케트적 희망이란 영원히 오지 않을 것만 같은 고도가 언젠가는 오리라는 믿음에서 시작하기 때문이다.

[글 배명현 영화평론가, rhfemdnjf@ccoart.com]

 

ⓒ 싸이더스

보 이즈 어프레이드
Beau Is Afraid
감독
아리 에스터
Ari Aster

 

출연
호아킨 피닉스
Joaquin Phoenix
패티 루폰Patti LuPone
네이단 레인Nathan Lane
에이미 라이언Amy Ryan
카일리 로저스Kylie Rogers
스티븐 헨더슨Stephen Henderson
데니스 메노체트Denis Menochet

 

수입|배급 싸이더스
제작연도 2023
상영시간 179분
등급 청소년 관람불가
개봉 23.07.05

배명현
배명현
 영화를 보며 밥을 먹었고 영화를 보다 잠에 들었다. 영화로 심정의 크기를 키웠고 살을 불렸다. 그렇기에 내 몸의 일부에는 영화가 속해있다. 이것은 체감되는 영화를 좋아하는 이유이기도 하다. 영화를 보다 문득 '아.' 하고 내뱉게 되는 영화. 나는 그런 영화를 사랑해왔고 앞으로도 그런 영화를 온몸으로 사랑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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