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ALK ABOUT ] '걷기, 헤매기' #1: 영상과 결합할 때
[TALK ABOUT ] '걷기, 헤매기' #1: 영상과 결합할 때
  • 박정수
  • 승인 2023.07.12 11:00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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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 국립아시아문화전당 콘텍스트 전시 《걷기, 헤매기》
프란시스 알리스 <실천의 모순> 시리즈
마리나 아브라모비치&울라이 <연인, 만리장성 걷기>

2015년 '베니스 비엔날레'에선 대한민국의 예술가, 임흥순이 <위로공단>으로 은사자상을 수상하며 국내 '미술계'에 쾌거를 이뤘다. 그리고 2015년 '베니스 영화제'에서는 <위로공단>처럼 현실을 고발하는 영화 <스포트라이트>가 비경쟁 부문에 소개되었다. 이 두 작품은 움직이는 이미지, 곧 '영화'라는 점이 동일하여 2015~16년에 거쳐서 '영화관'에서 개봉되었고, 심지어 소재도 유사한 측면이 있었다. 하지만 이런 공통점에도 불구하고 <위로공단>은 '미디어아트'로 분류되어 비엔날레에 전시됐지만, <스포트라이트>는 영화로 규정되어 영화제에서 프리미어 되었다. 그렇다면 '움직이는 이미지' 외의 어떤 차이점이 미디어아트와 영화를 구분하는 것일까?

물론, 이는 쉬운 일은 아니다. 영화로 분류되어 영화제에 소개되는 작품들 또한 가장 큰 틀에서는 다큐멘터리(논픽션)와 픽션으로 나뉘고, 여기서 또 여러 장르로 무수하게 세분화된다. 우리가 큰 틀로 묶는 미디어아트 또한 실정은 크게 다르지 않다. 당장 7월 9일 막을 내린 '제14회 광주비엔날레 - 물처럼 부드럽고 여리게'에서도 미디어아트라고 묶인 작품들은 매우 다양했다. 음악과 시각을 결합한 '뮤직비디오'에서부터, 추상적이고 실험적인 '익스페리멘탈', CCTV를 이용하여 자연을 객관적으로 관조한 '아카이빙', 인어로 분장한 예술가가 아마존강을 횡단하는 '퍼포먼스' 등 영상 외의 공통점을 찾아볼 수 없을 정도였다. 이번 글을 통해 추상적인 규정을 보다 세분화하여 각기 다른 장르의 특성을 밝혀내고, 그들이 영화, 그것도 '어떤 영화'들과 차이를 이루는지 이야기해 볼 생각이다.

 

<실천의 모순 5: 우리는 사는 대로 꿈꾸곤 한다 & 우리는 꿈꾸는 대로 살곤 한다>
(Paradox of Praxis 5: Sometimes we dream as we live & sometimes we live as we dream)
2013, 우다드 후아레스, 멕시코, 단채널 영상, 컬러, 사운드, 가변설치, 7분 49초, 작가 및 페터 킬히만 갤러리 제공.

첫 번째 발걸음을 '퍼포먼스'에서 떼보고자 한다. 4월 27일부터 9월 3일까지 '국립아시아문화전당'(Asia Culture Center)에서 개최되는 전시 《걷기, 헤매기》에는 국제 미술계에서 큰 주목을 받는 '마리아 아브라모비치'(Marina Abramović)와 '프란시스 알리스'(Francis Alÿs)의 퍼포먼스를 영상으로 기록한 미디어아트가 소개되고 있다. 이 두 작품의 영상은 영화로 비유하지면 현실을 있는 그대로, 최대한 객관적으로 기록하려는 '다큐멘터리'와 흡사하다. 프란시스 알리스는 현실의 '멕시코시티', 마리아 아브라모비치는 실제 '만리장성'의 풍광을 기록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전형적인 다큐멘터리와 비교하자면 차이점 또한 확연하다. 다큐멘터리가 닿을 수 있는 객관적인 기록의 정점에 도달한 감독을 꼽자면, 서양에는 '프레더릭 와이즈먼'이 있고, 동양에는 '왕빙'이 있다. 이들의 다큐멘터리에서 '카메라를 든 예술가'는 철저하게 은닉된다. 이들은 자신이 개입함으로써 객관적인 현실이 주관적으로 훼손되는 것을 원치 않는다. 두 감독은 자신을 숨기다 못해 투명하게 은신하며, 영화감독을 의식하지 않고 자연스레 행동하는 현실을 은밀하게 기록한다.

하지만 알리스와 아브라모비치의 영상은 다르다. 두 예술가가 기록하는 피사체는 '자신의 행위'다. 현실을 무대로 삼아서 예술가가 퍼포먼스하기 때문에, 부수적으로 현실이 촬영되어서 다큐멘터리처럼 보이는 것뿐이지, 그들의 관심은 객관적인 현실 그 자체에 있지 아니하다. 특히, 알리스는 주관적인 예술가의 개입으로 변모해가는 현실을 기록한다. 그런 점에서 퍼포먼스 미디어아트와 다큐멘터리는 기록이라는 점에서 같되, 어떤 것을 기록하느냐에 차이가 있다. 다큐멘터리는 감독이 촬영하고 싶은 '객관적인 현실'을 기록하는 반면, 퍼포먼스와 결합한 미디어아트에서 영상은 순간 나타났다가 사라지는, 심지어 우발적이기까지 한 예술가의 '주관적인 행위'를 영속적으로 담기 위한 수단에 그친다.

이들의 작업과 유사한 작품을 영화에서 꼽자면 '아녜스 바르다'의 <이삭줍는 사람들과 나>(2000), <바르다가 사랑한 얼굴들>(2017)을 들 수 있다. 전형적인 영화감독 루트를 밟지 않고, 오히려 미술을 전공했다가 영화계로 궤도를 이탈한 바르다 또한 객관적인 현실 자체보단, 그 현실과 관계를 맺는 자신의 주관적인 행위를 다큐멘터리로써 기록하였다. 즉 퍼포먼스 미디어아트는 전형적인 다큐멘터리와 분명 차이를 보이지만, 퍼포먼스 미디어아트와 유사한 사례가 극소수이긴 해도 영화 내에 분명 존재하기 때문에, 둘의 경계가 매우 흐릿한 것 또한 사실이다. 더욱이 바르다의 작품들은 영화제에서 소개되기도 하지만, 동시에 비엔날레나 미술관에서도 소개되기 때문이다. 이들은 같지만 다르고, 다르면서 또 같다.

 

ⓒ 영화 <녹색광선>
ⓒ 영화 <버닝>

알리스와 아브라모비치의 작업 방식(자신이 표현하고자 하는 것에 주목)을 두고 누군가는 "다큐멘터리보다는 픽션과 유사하지 않냐"라고 생각할지 모른다. 퍼포먼스 미디어아트와 픽션은 예술가의 '아이디어'가 작품을 공통적으로 지배한다. 하지만 픽션과도 확연히 다르다. 픽션은 '액션'과 '컷'을 외치며 현실과 가상을 분리하고, 이렇게 현실과 분리된 가상에서 자신이 추구하는 고유한 세계관을 구축한다. 그러나 현실 참여적인 이 두 퍼포먼스 예술가는 실제와 가상을 구분하지 않는다. 픽션은 보존하거나 지향해야 할 아이디어를 가상으로서 제시한다면, 퍼포먼스 예술가는 그 아이디어를 현실에서 일단 실행하고 본다.

시네아스트들은 가상 속 이상향을 만들어내기 위해서 때론 치열하게 인내하며 기다린다. 에릭 로메르의 <녹색광선>(1986) 속 태양이 지평선 너머로 넘어가기 직전에 발생하는 황홀한 찰나, 이창동이 <버닝>(2018)에서 붙잡으려 한 순간의 황혼처럼 시네아스트들은 가상을 위한 질료를 기다리고 또 기다린다. 영화감독은 자신의 계획을 실현해줄 '피사체'에 의존한다.

그러나 퍼포먼스 예술가들은 피사체가 자기 자신이다. 그 자신은 외부 피사체들과 달리 기다릴 필요가 없다. 그래서 시네아스트가 정교하고 계획적이라면, 퍼포먼스 예술가들은 미리 준비된 자신의 즉흥성을 따른다.

특히, 영화는 '공동 프로젝트'다. 1인 제작 시스템을 추구하는 이탈리아의 '난니 모레티', 최근 규모를 극도로 축소한 '홍상수' 정도의 사례를 제외하면, '작가주의'를 추구하는 시네아스트라 한들 극소수의 인원으로 작업하기란 사실상 불가능에 가깝다. 한 시네아스트의 아이디어를 실현하기 위해선 많은 인원이 동원되고, 그 과정에서 자연스럽게 아이디어는 사적인 것이 아닌 공공의 것으로 육중해진다. 이에 크레딧에는 한 작품이 책임져야 하는 수십, 수백 명의 이름이 몇 분간 게시된다. 하지만 아브라모비치와 알리스의 영상 속 크레딧에는 열 손가락을 다 채우지 못할 정도로 적은 인원만 적혀있다. 그들은 단지 퍼포먼스를 영상으로 기록할 뿐이다. 중요한 것은 퍼포먼스의 행위자이지, 다수가 참여해야 할 세계를 만드는 일이 아니기에, 퍼포먼스 미디어아트는 그만큼 개인적이고 사적이다.

 

<연인, 만리장성 걷기>(The Lovers, The Great Wall Walk)
1988/2010, 2채널 영상, 컬러, 무음, 15분 45초, 1988년 퍼포먼스 기록, 90일, 중국 만리장성, 마리나 아브라모비치 아카이브 및 LIMA 제공

끝으로 주목할 특징은 '스크린의 개수'다. 코로나 팬데믹 이후 영화계에선 전통적인 '영화관 관람' 방식을 빠르게 탈피해가고 있다. 개인이 손에 쥐고 있는 스마트폰이나 태블릿 등이 스크린을 대체해가는 실정이다. 이로써 스크린의 '크기'는 각기 다른 감상자가 무엇으로, 어디서 감상했느냐에 따라 제각각이다. 하지만 변화하지 않는 것이 있다면 바로 스크린의 개수다. 영화는 오늘날까지 스크린을 '하나'만 사용한다는 법칙을 우직하게 지켜나가고 있다. 최근 개봉한 웨스 앤더슨의 <애스터로이드 시티>(2023)의 사례처럼 하나의 스크린을 '분할'할지언정, 스크린을 두, 세 개로 늘리진 않는다.

미디어아트는 다르다. 아브라모비치는 <연인, 만리장성 걷기>에서 스크린, 곧 채널을 두 개 사용한다. 영화는 오직 한 스크린에의 집중을 요구한다. 이를 위해 '암막'까지 쳐서 외부로의 집중 분산을 엄격하게 차단할 정도다. 이에 반해 다중 스크린을 사용하는 <연인, 만리장성 걷기>에서 감상자는 하나의 스크린에 얽매지 않는다. 좌측의 스크린을 보다가, 자연스레 우측 스크린으로 고개를 옮기다 보면, 기존 스크린에서 송출되고 있는 이미지를 놓치기 부지기수다. 

다수가 하나의 화면만 공통되게 쳐다봄으로써 만인이 비교적 객관적인 경험을 공유하는 영화와 달리, 다중 스크린의 미디어아트를 감상하는 관람자들의 경험은 다양해진다. 누군가가 본 장면을 다른 누구는 못 봤을 수도 있고, 각자가 어느 순간 고개를 갸웃거렸느냐에 따라서 이미지를 이어내는 방식도 제각각이다. 감상자들 또한 감상으로써 다양한 퍼포먼스를 산출한다는 점이 단일 스크린과 다중 스크린의 차이다.

[글 박정수 영화평론가, green1022@ccoart.com]

박정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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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술은 현실과 차별화된 고유하고도 독립적인 차원입니다. 그중에서도 영화는 타 예술 매체와 구분되는 고유한 시각적 특징을 지니고 있습니다. 이러한 예술만의, 오직 영화만의 경험을 독자 여러분께 소개해 드리고자 합니다. 동시에 영화는 현실에서 비롯되고, 인간에게 이바지합니다. 그렇기에 현실-예술, 인간-영화를 이어내는 교두보와 같은 글을 제공하고자 노력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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