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7th BIFAN] '인피니티 풀' 우리는 어디로 가야하는가
[27th BIFAN] '인피니티 풀' 우리는 어디로 가야하는가
  • 김경수
  • 승인 2023.07.10 11: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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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임과 윤리가 부재한 SNS 시대의 파국을 비추는 거울"

단언컨대 '브랜든 크로넨버그'의 <인피니티 풀>(2023)은 걸작이다. 엔딩 크레딧이 올라가기까지 1분 1초 단위로 압도당했다. 씬마다 숨통이 콱 조이는 기분이었다. 브랜든 크로넨버그를 이야기할 때 종종 언급되는 그의 아버지 '데이빗 크로넨버그'의 그림자가 느껴지지 않을 정도다. 동시대의 미디어 환경이 자아내는 공포를 시각화한다는 점에서 아버지의 문제의식을 이어가면서도 그의 개성을 한껏 뽐내서다. 오죽하면 그의 아버지가 그의 시대에 아날로그 특수효과로 준 충격을 가늠하게 될 정도다. 차세대 호러 퀸으로 불리는 미아 고스의 호연, 환각과 현실을 오가는 파격적인 연출과 세련된 촬영은 감독의 과잉된 야심을 뒷받침한다. 또한 과격하기 그지없는 작품 속 세계관도 눈여겨볼 만하다. 가까이 볼 때는 우리가 발붙이고 있는 세계와 동떨어져 보이지만, 멀찍이서 볼 때는 우리와 더없이 닮아있다. 그의 작품에서 드러나는 과격함은 단지 관객을 옥죄고, 가학적으로 몰아세우는 데에 그치지 않고, 정확히 우리 시대를 정확히 반사하는 거울이 된다.

 

<인피니티 풀>의 플롯은 다소 고전적이다. 마치 카프카와 1960년대의 필립 K.딕, 카뮈의 《이방인》이 한 데에 어우러진 듯한 인상을 준다. 이 영화는 무명작가 '제임스'(알렉산더 스카스가드)와 그의 애인 '엠'(클레오파트라 콜먼)이 가상의 휴양지 라 톨카의 리조트에서 휴가를 보낸다는 설정에서 시작한다. 라 톨카는 보통 휴양지가 아니다. 여행객이 머무르는 리조트를 둘러싼 철조망을 벗어나는 순간에 야만적인 장소로 돌변한다. 경찰과 정치인은 부패해 있으며, 원주민은 여전히 폭력이 자행되는 원시적인 풍습에 따른다. 이는 함무라비 법전이 생각나게끔 하는 라 톨카의 법률 체계에도 그대로 반영된다. 제임스는 대형 출판사를 운영하는 거물 집안의 딸인 엠과 부부생활에 무기력을 느끼고 있다.

제임스는 리조트에서 팬을 자처한 가비(미아 고스)를 만나고, 가비 부부와 홧김에 일탈을 저지르고 만다. 가비 부부가 빌린 차의 브레이크가 고장나서 원주민을 한 명 뺑소니로 죽인 것이다. 서사는 이때부터 정반대로 뒤집힌다. 죄의식에 대한 딜레마를 겨냥한 영화라는 예상을 정면으로 거스른다. 바로 라 톨카가 외국인에게 주는 특례로 인해서다. 라 톨카에서는 살인 사건이 발생할 때마다 피해자의 유족이 가해자를 살해하는 처벌을 실행한다. 이는 의례나 퍼포먼스에 가깝다. 외국인의 경우 돈을 지불한 다음 제 기억을 그대로 지닌 복제인간을 만들고, 복제인간이 그 처벌을 대신 치르게끔 하는 것이다. 또 그 처벌을 두 눈으로 보아야 한다. 라 톨카의 법에 따라서 제임스는 자신의 복제인간을 만들고, 그 복제인간의 처형을 두 눈으로 목도한다.

이는 브랜든 크로넨버그의 필모에서 반복되는 모티프 중 하나인 '의식의 전'이다. 내 의식을 타인에게 전이할 때, '나는 누구인가'라는 질문에 따른 사고 실험이다. 그의 전작인 <항생제>(2012)는 셀레브리티인 하나 가이스트(사라 가던)의 바이러스를 공유하는 시드(케일럽 랜드리 존스)의 캐릭터에서부터 문제의식이 시작된다. 바이러스를 공유함으로 그 셀레브리티와의 죽음을 공유하는 시드의 병적인 사랑은 이 영화의 중추이기도 하다. 또 전작인 <포제서>(2020)에서 타인의 육체를 도용하는 킬러의 설정은 이를 노골적으로 드러낸다. 타겟과 가까운 사람을 납치하고 그 육체에 의식을 전이해서 킬러로 활동하는 것이다. 문제는 사흘 이상 그 육체에 전이된 의식이 남아 있을 때, 그 육체가 본래 지닌 의식에 동화된다는 것이다. '내 자아 정체성을 만드는 것은 나인가, 나의 육체인가'는 심리철학의 오랜 문제의식이기도 하다. 다만 이 자아 정체성의 본질을 질문하는 데에 그친다면 이 영화는 대학 영미철학 과목의 영상 보조 교재에 그칠 것이다.

<인피니티 풀>도 마찬가지다. 언뜻 보기에는 자아 정체성과 의식, 육체라는 주제를 그대로 이어가되 윤리학의 딜레마를 더한 듯한 인상을 준다. 감독은 이 영화를 단순히 사고 실험으로 닫아두지는 않는다. 또한 자아정체성과 의식, 육체 등 주제에 천착하는 일차적인 시선을 넘어선다. 자아정체성과 의식, 육체 등의 문제를 불러일으키는 것이 무엇인가라는 이차적인 시선에 이른다. 이를 통해서 동시대의 미디어에 대한 알레고리를 그려낸다는 점에서 이 영화는 문제작이다.

 

작품으로 되돌아가자. 제임스가 복제인간의 처형을 본 뒤에 느낀 감정은 무엇일까. 엠이 느끼는 공포는 소름과 불쾌에 더 가까운 데에 비해서, 제임스가 느끼는 감정은 마크 피셔의 개념을 빌리면 으스스함에 가까울 것이다. 존재와 비존재의 경계가 흐려지는 순간 발생하는 공포다. 으스스한 것은 대상이 있어야 하는 곳에 아무것도 없을 때, 혹은 대상이 없어야 하는 곳에 무언가가 있을 때 발생한다. 이는 우리가 마땅히 그래야 한다고 생각하는 인과를 부순다. 대신 그 너머에 무언가가 있다는 감각을 불러일으킨다.

제임스는 내가 마땅히 죽어야 할 상황에 내가 살아있다는 것에 어색함을 느낀다. 무엇보다도 으스스한 것은 엠이 귀환한 다음에 제임스가 마주한 가비 일당이다. 가비 일당도 제임스와 마찬가지로 복제인간의 죽음을 보았지만, 거기에 아무런 윤리적인 죄의식을 느끼지 않는다. 되려 가비 일당은 범죄를 저지르고 복제인간이 대신 죽는 것을 보는 데에 익숙하고, 거기에 중독되어 있기까지 하다. 윤리적 으스스함은 여기서 한층 더욱 깊어진다. 브랜든 크로넨버그가 겨냥하는 것은 제임스의 무의식에 깃든 으스스함을 그의 1인칭 시점으로 시각화하는 것이다. 자본주의에서 비-인간성이 어떻게 용납되는가를 비유하는 장치로 해석할 여지가 있으면서도, <인피니티 풀>은 거기에 머무르지 않는다.

브랜든 크로넨버그의 아버지 데이빗 크로넨버그의 카메라는 그리 동적이지 않다. 카메라를 고정한 다음에 뒤로 살짝 물러서서 이미지에 주목한다. 데이빗 크로넨버그는 그의 초기작에서 아날로그 미디어 신체의 교접을 시각적인 이미지로 그려낸다. 이때 교접은 마약을 먹은 듯한 환각적인 순간에 이루어진다. 더 급진적으로 <비디오드롬>(1983)에서 비디오를 몸에다가 삽입해 육체를 미디어와 동일시하기까지 한다. 미디어와 신체 간의 경계가 사라지고, 신체를 미디어로 혼동하기까지 한다. 인간의 신체를 기계로 보이게금 한다. 이는 인간 사이의 관계로까지 이어진다. <비디오드롬>의 차기작 <데드링거>(1988)에서 마커스 형제(제레미 아이언스)는 사고의 메커니즘을 교접하기에 이른다.

데이빗 크로넨버그의 세계관은 당시 마샬 맥루언과 월터 옹, 에릭 해블록 등의 캐나다 학파의 미디어 이론에 대한 심기가 뒤틀린 패러디로 보이기까지 한다. 마샬 맥루언의 미디어 이론의 두 축인 “미디어는 메시지”, “미디어는 인간 신체의 연장이다”는 데이빗 크로넨버그의 세계에 깊숙이 녹아 있다. 카톡과 문자의 무게감이 다르듯이 메시지를 전달하는 수단으로 미디어를 선택하는 행위가 메시지라고 보는 맥루언의 명제는 <비디오드롬>과 <네이키드 런치>(1991)에서 뒤틀려서 드러난다. 비디오와 타자기는 괴물로 드러나며, 이때 미디어는 인간이 통제할 수 있는 범주를 넘어서 있다. 메시지를 전달하되 메시지의 자극성을 과장해서다. 미디어는 인간 신체의 연장이라는 주장도 마찬가지다. 오히려 <비디오드롬>에서는 인간은 SM 영상이 퍼지는 미디어에 복속당하기까지 한다. 인간 신체는 미디어의 연장에 불과해진다.

데이빗 크로넨버그의 세계에서 미디어와 인간이 교접하고 합일하는 과정이 드러난다면, 브랜든 크로넨버그의 세계에서 미디어는 인간의 자아를 분할한다. 브랜든 크로넨버그의 인장이라 할 수 있는 연출은 동적인 카메라와 바로 환각 경험과 디지털 미디어를 하나로 연결하는 연출이다. 동적인 카메라는 대상을 정확히 드러내기보다는 대상을 비껴 나간다. 감시카메라의 시선을 모방하기도 하고, 여기저기에 카메라가 있다는 감시사회의 감각을 체화한다. 물론 꿈과 현실이 모호하다는 점에서 아버지와 비슷하게 보일 수 있다. 브랜든은 인간의 이미지가 디지털로 왜곡되고 분열되는 과정을 가감 없이 드러낸다. 영화를 1막과 2막으로 분할하는 사건이 제임스가 복제인간을 만드는 순간이라는 점은 중요하다. 복제인간을 제작하는 과정에서 제임스는 환각을 체험한다. 이때 암전되는 인서트가 등장한다. 이로 인해서 제임스가 눈을 뜬 순간, 제임스는 제임스의 복제인간일 수 있는 가능성을 지니게 된다. 외양은 같되 의식은 달라서다.

여기서 브랜든 크로넨버그의 세계관을 관통하는 문제의식이 시각화된다. 디지털 이미지로 변환된 나가 나를 대체하게 된다는 것이다. SNS 속 자아가 실제 자아를 대체하고 압도하면서부터 인간은 혼동을 느끼기에 이르며 브랜든은 이를 잘 포착한다. <포제서>가 딥페이크, 사칭 계정, VR 영화 등의 기술적인 문제를 드러내는 영화에 가깝다면, <인피니티 풀>은 그로 인해서 생긴 문화를 그려내는 영화에 가깝다. <인피니티 풀>은 아버지와는 달리 미디어에의 몰입이 중독에 그치지 않는다고 본다. 되려 그 시선을 낡은 시선으로 보이게 한다. SNS 몰입은 자아와 미디어의 교접이 아니라, 미디어가 자아를 파편화하는 과정이라는 듯이. 나와 나의 의식이 분리되어서 다른 육체에 의식이 되고, 그에 따라서 내 행동에 따르는 책임감이 부재한다. 이는 SNS 시대의 병증이다.

 

<인피니티 풀>의 세계관은 종말론적이다. 영화 속 라 톨카의 리조트는 네모로 둘러싸여 있다. 이는 인스타그램의 네모 창이 연상된다. 인플루언서가 리조트나 호텔 등에서 매일 머무르는 듯한 착시를 불러일으키고, 그들의 휴양이 일상과도 분리되어 있다는 점에서도 그러하다. <인피니티 풀>의 제임스가 문자 매체라는 올드 미디어의 유저라는 것은 의미심장하다. 제임스는 그 리조트를 유난히 낯설게 느끼고, 적응하기 힘들어한다. 리조트는 폭력적인 라 톨카 원주민의 시위 혹은 문화마저도 관광 상품으로 전락하는 곳이기도 하다.

라 톨카는 한편 그 리조트 바깥의 SNS로도 보인다. 이에는 이, 눈에는 눈이 통용되는 엄벌주의가 대중의 정서를 형성한다. 질서와 안정을 유지하는 것이 모든 행동의 척도가 되어서다. 전시-파시즘에 가까울 정도로 그 바깥의 세계는 획일화되어 있다. 가비 일당은 불법적인 일탈을 저지르는 SNS 인플루언서로 보인다. 엄벌주의에 기반한 라 톨카의 법은 그들이 활개치는 사각지대를 만든다. 제아무리 엄벌주의에 따라서 피해자가 가해자를 처벌하는 환상이 이루어진다고 한들, 인플루언서는 언제든 돈을 지불하고 제 분신을 죽여서 회귀하기 때문이다. 인플루언서는 온라인 안에서 논란의 대상이 될지라도 계정을 잠시 삭제하고 자숙한 뒤에 복귀하면 그만인 셈이다.

제임스는 그들에게서 벗어나려 거듭 애쓰지만 실패한다. 그 실패의 과정은 마치 타임루프 장르와도 닮아있다. 다소 과잉이라는 느낌이 있기는 해도 이는 우리가 SNS를 못 벗어나는 이유와도 같기에 납득이 된다. 특히 가비가 성적 판타지를 통해서 제임스를 통제하는 것도 SNS 여성 인플루언서의 모습을 충분히 연상할 수 있다.

<인피니티 풀>은 이같은 악행이 영영 되풀이될 것이며 치유될 수 없다는 데에까지 나아간다. 결국 일시적인 처방에 불과한 라 톨카의 법은 이 영화의 모든 갈등을 불러일으킬뿐더러, 그 무엇도 해결하지 않는다. 이는 학교폭력으로 인한 여러 폭로가 오가 돼 폭로전이 상대방의 계정만을 매장하는 형식적인 차원에 머무르는 한국의 상황과도 닮아있다. 해외 사례로는 '캔슬 컬처'가 있다. SNS 인플루언서에게 책임감 없이 자행되는 모든 악행은 휴가에 불과하고, 이는 절대 해결되지 않는다. 제임스가 으스스함을 느끼는 이유는 그가 작가이기 때문이다. 문자 매체는 글쓴이의 문체나 필치 등이 남아 있기에 유저와 직결되어서다. 제임스가 놀이감으로 쓰다가 버려지는 것도, 영화가 결말 즈음에 이르러서도 제임스가 그 무엇도 쓰지 못할뿐더러 오히려 글쓰기를 포기하는 것도, 글쓰기라는 올드 미디어의 종말과도 이어져 있다.

<인피니티 풀>의 엔딩에서 제임스는 본국으로 못 돌아간 채 라 톨카의 해변에 머물러 있다. 제임스의 체념은 윤리가 사라진 세계를 마주하는 감독의 표정과도 닮아있다. 또 서구의 전통적인 지식인 남성의 실패와 이어진다. 이 영화는 지독하리만치 염세주의로 일관한다. 이 영화는 결국 SNS로 인한 윤리적 파국을 더는 이해할 수 없으리라는 솔직한 고백이기도 하다. 감독은 열린 결말로 우리가 어디로 가야하는지를 유추하게만 할 뿐이지 그 이상 말하지 않는다. 그것이 그가 할 수 있는 최대한의 저항이어서다.

[글 김경수 영화평론가, rohmereric123@ccoart.com]

 

인피니티 풀
Infinity Pool
감독
브랜든 크로넨버그
Brandon CRONENBERG

 

출연
알렉산더 스카스가드
Alexander Skarsgard
미아 고스Mia Goth
클레오파트라 콜먼Cleopatra Coleman
토마스 크레취만Thomas Kretschmann
존 랄스톤John Ralston
캐롤라인 볼튼Caroline Boulton

 

제작연도 2023
상영시간 117분
공개 2023 부천국제판타스틱영화제

김경수
김경수
 어릴 적에는 영화와는 거리가 먼 싸구려 이미지를 접하고 살았다. 인터넷 밈부터 스타크래프트 유즈맵 등 이제는 흔적도 없이 사라진 모든 것을 기억하되 동시에 부끄러워하는 중이다. 코아르에 연재 중인 『싸구려 이미지의 시대』는 그 기록이다. 해로운 이미지를 탐하는 습성이 아직도 남아 있는지 영화와 인터넷 밈을 중심으로 매체를 횡단하는 비평을 쓰는 중이다. 어울리지 않게 소설도 사랑한 나머지 문학과 영화의 상호성을 탐구하기도 한다. 인터넷에서의 이미지가 하나하나의 생명이라는 생각에 따라 생태학과 인류세 관련된 공부도 하는 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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