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정수의 영화로 세계 속으로] 영국: "우리는 단지 국적만 같을 뿐!"
[박정수의 영화로 세계 속으로] 영국: "우리는 단지 국적만 같을 뿐!"
  • 박정수
  • 승인 2023.07.07 13: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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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확연히 다른 오늘날의 영국영화(들)"
영화 <애프터썬> ⓒ 그린나래미디어

올해 상반기에는 유달리 많은 '영국영화'를 만날 수 있었다. 그런데 이 영화들은 '순수한' 영국영화는 아니었다. 다시 말해 '잉글랜드'가 아니라, '스코틀랜드'(<애프터썬>), '아일랜드'(<이니셰린의 밴시>, <말없는 소녀>), '콘월'(<에니스 맨>) 등 영국 내 구성국(영국 내 지역)의 색채가 반영된 영화였기 때문이다. 이 영화들은 잉글랜드 시네아스트들의 정서와 확연히 달랐다. 특히나 민족적 정체성이 굵고 짙은 아일랜드와 콘월 영화일수록 더더욱 잉글랜드와 구별됐다.

작년까지 개봉한 영국영화 또한 마찬가지다. 조안나 호그의 <더 수베니어 2>(2021), 안드레아 아놀드의 <카우>(2021), 클라이오 바나드의 <알리 앤드 에이바>(2021) 등은 오늘날 영국의 주목받는 영국의 여성 시네아스트라는 점에서 여성 영화인들의 약진이 두드러진다는 공통점을 가지지만(여기에 '린 램지'까지 더할 수 있다), '부르주아'인 호그와 '프롤레타리아'인 아놀드, 바나드, 램지의 영화는 단지 속한 '지역'과 감독의 '성별', 사용하는 '언어'만 같을 뿐, '소재'나 '미학'은 너무나도 다르다.

다시 말해, 민족, 사용하는 언어, 속한 계급은 영국영화의 소재나 미학에 아주 큰 영향을 미친다. 해당 조건들이 오직 국적만 같을 뿐, 무한하게 '변이'를 일으키는 다양한 영국영화의 근원이다.

 

ⓒ 영화 <쥐잡이꾼>

영국에서 '계급'은 한 개인이 누릴 수 있는 교육 수준과 가능한 직업을 결정한다. 즉, 선택할 수 없는 계급이 한 개인의 일생을 그 어떤 나라보다 공고하게 규정하는 국가가 영국이다. 영국의 계급은 영화에도 반영되어, 20세기 영국영화에는 부르주아와 프롤레타리아의 계급적 차이가 뚜렷하게 나타난다.

부르주아 영화를 선도한 '데이비드 린', 미국의 영화감독이지만 활동 무대는 영국이었던 '제임스 아이보리' 등의 영화는 현실에서 부족함이 없다 못해 충만하게 흘러넘치는 '과잉'으로 가득하고, 그 넘침이 아름다움을 주도한다. 데이비드 린은 부르주아가 동원할 수 있는 거대 자본을 극한으로 활용하여 거룩함과 숭고함을 추구했다. 이렇게 웅장하고 아름다운 그들 영화에서는 현실의 사소한 걱정거리는 끼어들 틈이 없다. 당장 오늘의 생계를 걱정해야 하는 프롤레타리아와 달리, 기본적인 욕구를 태어나서부터 걱정해 본 적 없는 부르주아의 결여란 오직 일상 너머에만 있다. 그래서 이들 영화의 주된 장르는 평범하고 세속적인 삶에 만족하지 않는 영웅담이나 아주 순수한 멜로다. 이들이 아름다움을 추구한 이유 역시 마찬가지다. 본인들이 누리는 안정적인 현실에 결코 만족하지 못하는 부르주아는 넘어서야 할 천상의 아름다움을 연출로써 고민했다.

반면에 프롤레타리아에게 부르주아 영화가 가진 모든 것은 사치다. 아이보리가 연애담을 펼치는 공간이 각양각색의 꽃이 휘황찬란하게 만개한 대초원이었다면, 이와 달리 린 램지의 <쥐잡이꾼>(1999) 속 프롤레타리아들은 '쥐'와 '바퀴벌레', '쓰레기'가 득실거리는 산단에 위치한다. 아이보리의 초원 옆에선 맑고 투명한 샘물이 졸졸 흘러간다면, 켄 로치의 영화에선 끈적이고 질척이는 폐수가 뻑뻑하게 겨우 파이프를 통과한다. 린과 아이보리의 영화에서 청년들은 대학교에 다니며 진보하는 인류로서 도약한다면, 로치의 <케스>(1969) 속 프롤레타리아 아이들에겐 기초 교육조차 허용되지 않는다.

이렇게 너절한 잿빛 프롤레타리아 영화는 '키친 싱크 리얼리즘'(kitchen sink realism)으로 규정되며 켄 로치와 마이크 리가 20세기 중후반부터 선도하였다. 이후 21세기에는 린 램지와 안드레아 아놀드 등이 바통을 물려받았다. 로치의 영화는 부르주아 시네아스트들이 대변하는 아름다운 영국의 이면을 신랄하게 까발린다. 마이크 리의 영화는 '세속적인 코엔 형제'라 말할 법한, 항상 계획이 불확정적으로 틀어지는 프롤레타리아의 불안정한 일상을 잔잔하게 조명한다. 이들은 아름다움을 적극적으로 추구하지 않는다. 현실 너머의 아름다움과 웅대함으로 나아가는 부르주아와 달리, 프롤레타리아는 현실 너머를 공상하기엔 당장의 생계가 발목을 잡는다. 영국의 리얼리즘에 '키친 싱크', 곧 부엌의 싱크대라는 단어가 수식하는 것처럼, 이들의 고민거리는 "당장 오늘 저녁은 뭘 먹어야 하지?"이기에, 사치스러운 아름다움은 생각할 겨를조차 허용되지 않는다.

 

영화 <알리 앤드 에이바> ⓒ Altitude Film Sales

이후 21세기엔 린 램지, 안드레아 아놀드, 클라이오 바나드 등이 유수의 국제 영화제에서 두각을 보이며 프롤레타리아 영화와 '여성 영화'를 선도한다. 20세기 프롤레타리아 영화와 부르주아 영화가 귀족 청년과 가난한 소년이 대비를 이뤘다면, 21세기 여성들이 주도한 프롤레타리아 영화는 '미화된 남성'과 '피해자 여성'이 대비를 이룬다. 프롤레타리아 여성 영화인들은 부르주아 남성 감독들이 은폐하거나 미화한 '가장의 실체'를 까발린다. 이는 <애프터썬>으로 국내 관객들에게 강한 여운을 남긴 샬롯 웰즈 또한 마찬가지로, 그녀의 단편에서 계급성은 부각되지 않지만 대신에 여성이 겪는 공포와 수모가 도드라졌다. 즉 20세기의 밑바닥 영국을 비추던 프롤레타리아 영화인들의 유산은 21세기에 '여성의 삶'으로 계승되고 있다.

그렇다면 부르주아 영화인들의 유산은 어떻게 이어지는가. 린, 아이보리처럼 '매끈하고 아름다운' 영화를 연출하는 감독으로는 '조안나 호그'가 있다. 호그는 초기 시절에는 관계를 탐구하는 실험 영화를 연출했지만, 최근 영화에선 순수한 아름다움을 추구한다. 한편 아름답게 포장하는 대상은 20세기 부르주아 영화의 소재인 위대한 영웅, 달콤한 연애와 달리 '사적 기억'이다. 호그는 오늘날엔 상실한 '연인', '학창시절', '가족 관계'를 <더 수베니어 시리즈>에서 섬세하게 보존한다. 오직 기억을 재현하는 목적에만 충실한 영화이기에 서사는 도드라지지 않는다. 이렇게 유실된 기억을 되돌리는 특징은 호그에서 그치지 않는다. 앞서 언급한 웰즈 또한 아버지와의 추억을 <애프터썬>에서 소환했다. 이는 아놀드의 <카우>, 바나드의 <알리 앤드 에이바>에서 '현재 영국이 직면한 문제'인 동물권, 이민자 및 여성 문제를 다루는 것과 정반대의 방향이다.

즉 계급이 영화가 다루는 '시간'을 좌우하는데, 그 시간은 영화의 형식까지 결정한다. 호그의 <더 수베니어> 시리즈, 웰즈의 <애프터썬> 모두를 관통하는 연출의 특징은 바로 '사진성'이다. 호그는 그 시절이 담긴 회화나 사진, 푸티지에서 본 프로젝트를 출발하였고, 웰즈는 스냅사진과 푸티지로만 존재하는 아버지의 추억을 긴 영상으로 확장한다. 이렇게 확장하는 과정에서 그녀들은 '카메라 워킹'을 부각하지 않는다. 카메라는 가만히 멈춰서 '액자 틀'처럼 프레임을 형성하고, 피사체를 '사진'처럼 가둔다. 카메라가 요동치면 칠수록, 피사체는 불완전해지고, 또 감상자는 피사체가 아니라 현란한 카메라의 기교에 주목한다. 반면 카메라가 워킹을 거두면 거둘수록, 흡사 회화나 사진을 감상하듯 '액자틀' 안의 '피사체' 내지는 '모델'에게만 주목한다. 호그나 웰즈가 주목했으면 하는 것, 보존하고 싶은 것이 바로 피사체다. 그 피사체는 그들에게 너무나 소중한 기억이다.

 

ⓒ 영화 <에니스 맨>(2022)

영국은 계급에 더해서 잉글랜드가 복속한 적지 않은 민족, 국가 때문에 다양하게 얽히고설켜 있다. 동시대에 주목받는 영국 시네아스트임과 동시에, 평범한 잉글랜드 영화감독으로 묶을 수 없는 이들로 아일랜드 출신의 '마틴 맥도나', '콤 베어리드'와 콘월 출신인 '마크 젠킨'이 있다.

아일랜드와 콘월 서로는 사용하는 언어, 믿는 종교 모두 다 제각각이지만 공통점이 있다면, 영국에서 독립을 향한 식지 않은 욕망, 고유한 문화와 언어를 보존하려는 노력, 더 나아가 영국의 지배에 처했다는 점이다. 가령 베어리드와 젠킨의 영화에는 잉글랜드를 상징하는 '외지인'의 개입이 항상 주된 화두다. 젠킨의 <미끼>(2019)와 베어리드의 단편들 및 <말없는 소녀> 모두 다 외지인은 '영어'를 사용한다. 영어를 쓰는 외지인은 젠킨의 작품에서는 '부르주아', 베어리드의 작품에서는 힘 있는 '가장'이다. 형태가 어떠하든 외지인들은 베어리드와 젠킨, 양자 모두의 작품에서 '세대 갈등'을 초래한다. 베어리드의 작품 속 기성세대는 잉글랜드에 맞서 투쟁한다. 하지만 잉글랜드는 아일랜드의 독립 열기를 방치하지 않고 기성세대를 어떻게든 탄압한다. 이로써 청년세대는 잉글랜드에게 무시당하고 짓밟힌 기성세대를 보고 자란다. 기성세대가 당한 수모를 청년세대는 당하고 싶지 않다. 그래서 기성세대는 독립을 추구하는 반면, 청년세대는 잉글랜드와 타협하며, 세대 간 갈등이 발생한다.

젠킨의 작품에서 부르주아 영국인은 '자본'으로 콘월의 생계를 쥐고 흔든다. 그래서 콘월인에겐 '내적 갈등'이 발생한다. <에니스 맨>(2022)에서 잉글랜드의 보급품에 만족하며 체념한 현재의 자신은, 한때 콘월인으로서 정체성이 명확했던 과거의 자신을 '유령' 취급하며 타자화한다. <미끼>에선 잉글랜드의 외지인이 콘월의 기성세대가 쌓아온 '사유재산'을 절도하고 무전취식한다. 외지인들은 자신들의 범행을 '빈곤한 청년세대'에게 전가하며 세대 갈등을 유발한다. 정작 재물을 훔쳐 간 잉글랜드인은 두 세대 간의 분쟁에서 음흉하게 쏙 빠져나간다. 즉 기성세대가 아일랜드나 콘월의 고유한 문화를 보존하려고 몸부림친다면, 잉글랜드의 책략은 기성세대의 독립 열기가 청년 세대로 이어지지 못하도록 훼방을 놓는다.

잉글랜드의 또 다른 계략은 '잉글랜드 남성'을 아일랜드, 콘월, 스코틀랜드의 '가장'으로 파견하고, 해당 민족의 여성들이 '잉글랜드 혼혈'을 낳게 한다. 이는 베어리드의 <말없는 소녀>와 잉글랜드계 감독 '테렌스 데이비스'가 스코틀랜드 여성의 삶을 다룬 <선셋 송>(2015)에서 도드라진다. 두 작품 모두 다 20세기 여성의 임신은 남성에 의해 강제된다. 원치 않은 임신은 단번에 그치지 않고 여성이 죽기 전까지 끝없이 반복된다. 이후 태어난 아이들은 토착 언어를 사용할 수 없다. 잉글랜드 가장에 의해서 자녀와 아내 모두 다 영어만 허용된다. 무수한 잉글랜드 혼혈이 태어나는 아일랜드, 스코틀랜드는 잉글랜드의 수탈에 의해서 이미 '빈곤'한 상태였다. 많은 아이들을 거두기에 안 그래도 부족한 자본마저, 잉글랜드 가장이 사리사욕을 위해서 독점한다. 이에 아이들은 기본적인 의식주, 교육을 누리지 못한다. 주체적으로 독립할 수 있는 여건이 제한됨에 식구들은 더더욱 가장에게 의존하며, 그가 요구하는 대로 본인을 희생하여 잉글랜드의 배를 불려준다.

 

영화 <이니셰린의 밴시>(2022) ⓒ 월트 디즈니 컴퍼니 코리아

이처럼 아일랜드와 콘월 등의 영화는 잉글랜드의 식민화를 맹렬하게 비판하는데, 이와 동시에 자신들이 속한 사회의 부조리 또한 신랄하게 폭로한다. 특히, 이는 아일랜드 영화에서 일관되게 발견되는 특징이다. <말없는 소녀>, 마틴 맥도나의 <이니셰린의 밴시>, 아일랜드계 감독 존 크롤리의 <브루클린>에서 나타나며, 그들이 비판하는 아일랜드의 명암은 하나의 원리만을 강제하는 '일신교' 가톨릭이 불러온 '전체주의'다. 세 작품 모두 다 아일랜드 사회는 갑갑하다. 사생활 침해, 주제넘은 간섭, 전체를 위한 의견 획일화가 평범한 수준으로 퍼져 있다. 아일랜드는 '잉글랜드의 지배'와 '아일랜드 내 전체주의의 지배', 총 두 개의 지배에 처한다. 이에 <브루클린>에선 자유를 위해 자국을 등지는 한편, <말없는 소녀>와 <이니셰린의 밴시>에선 진정한 독립의 조건으로 아일랜드에 자유가 필요함을 역설한다.

오늘날의 영국영화는 국적만 같을 뿐, 세상을 바라보는 시야와 색채가 확연하게 다르다. 올해, 그리고 내년 여러 영국영화 중에서도 프롤레타리아 영화, 여성 영화를 만날 예정이다. 76회 칸 영화제에 소개된 켄 로치의 은퇴작 <올드 오크>(2023)와 떠오르는 신예, 몰리 매닝 워커의 장편 데뷔작 <섹스하는 법>(2023)이 국내 관객과 만나기를 기다리고 있다. 또 마이크 리, 린 램지, 안드레아 아놀드가 우후죽순 신작 계획을 내놓으며 우리는 동시대 영국 노동자, 여성의 초상을 마주하게 될 것이다.

[글 박정수 영화평론가, green1022@ccoart.com]

박정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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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술은 현실과 차별화된 고유하고도 독립적인 차원입니다. 그중에서도 영화는 타 예술 매체와 구분되는 고유한 시각적 특징을 지니고 있습니다. 이러한 예술만의, 오직 영화만의 경험을 독자 여러분께 소개해 드리고자 합니다. 동시에 영화는 현실에서 비롯되고, 인간에게 이바지합니다. 그렇기에 현실-예술, 인간-영화를 이어내는 교두보와 같은 글을 제공하고자 노력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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