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독립영화 편지 박정범#3] '파고' 바다의 가장자리에서
[한국독립영화 편지 박정범#3] '파고' 바다의 가장자리에서
  • 김민세
  • 승인 2023.09.01 11: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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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정범의 반복되고 변주되는 부뉴엘적 세계"

'박정범'의 영화를 보고 있으면 그가 보여주는 프레임 속의 풍경이 리얼(real)에 가장 맞닿아 있음에도 불구하고, 지금 우리가 밟고 있는 땅과 동일한 곳이라는 당연한 사실에 의심이 들 정도로 그 이미지가 지목하는 지점이 리얼을 넘어선 '초현실'처럼 느껴질 때가 있다. <무산일기>(2010)의 승철이 교회를 가기 위해 뛰어 올라가는 가파른 '길'과 개와 함께 뛰어놀거나 누군가에게 린치를 당하는 흙먼지 날리는 '공터와 절벽'. <산다>(2014)의 정철이 도끼질을 하고 나무를 온몸으로 나르는 황량한 '숲', 돌로 된 벽이 다 무너져내리는 '집'과 문을 등에 진 채 묵묵히 걸어가는 정철을 둘러싼 적막한 '밤'. 박정범의 영화에서 삶의 고통과 현실의 부조리함을 외면화하는 풍경의 이미지, 즉 박정범의 영화적 무대는 결정적인 순간에 인물의 운명과 선택이 만드는 비극과 숭고함으로 리얼을 넘어선 초현실이 된다. 정한석 영화평론가는 그의 최근작인 <이 세상에 없는>(2019)을 두고 해당 영화를 기점으로 박정범의 영화에서 이전에는 볼 수 없던 초현실적인 무언가가 드러나기 시작했다고 지적했지만, 사실 그것은 그의 첫 작품부터 꾸준히 이어져 오던 것이다.

 

ⓒ 영화 <산다> 

중요한 건 박정범의 리얼리즘이 실현되는 곳이 우연성과 불확실로 기능하는 열린 세계가 아닌, 그의 영화 전반을 걸쳐 반복되고 변주되는 경직된 영화적 무대, 즉 '닫힌 세계'라는 점이다. 그의 영화에서 초현실은 열려 있던 것처럼 보였던 세계가 쉬이 가늠할 수 없는 의미와 정념으로 가득 찬 닫힌 이미지가 될 때 그것을 둘러싸는 후광 같은 것이다. 이런 점에서 그의 영화적 기원은 익히 언급된 다르덴 형제와 켄 로치를 넘어 '루이스 부뉴엘'이라고 뒤늦게 또는 앞서서 조심스럽게 말해보고 싶어진다. 부뉴엘의 초현실과 반복이 부르주아들의 허례허식을 발가벗기고 그들을 연옥에 가두려는 굴레였다면, 박정범의 초현실과 반복은 자본주의와 욕망의 실체를 조망하는 방식이자 더 이상 내려갈 수 없는 구렁텅이 같은 삶이 스스로를 드러내는 태도이고 동시에 그 틈에서 점멸하는 작은 빛이다. (영화의 시작과 함께 다짜고짜 등장하는 자극적인 이미지의 파편들, 그리고 초현실적인 연결들. 꽃과 파리, 거미줄에 걸린 곤충과 거미, 소의 시체, 날아가는 새 무리. 이러한 거친 질감의 흑백 이미지들은 지극히 상징적이다. 감히 말해보자면 부뉴엘적인 이미지이다.)

<파고>는 어쩌면 그 지점에서 시작하는 영화다. 섬이라는 물리적 제한이 있는 지극히 설정적인 공간, 바다, 파도, 숲, 돌과 모래로 덮힌 언덕, 그 사이를 뛰어다니며 쫓고 쫓기는 인물들. 자본으로부터 비롯된 이기심과 이해관계로 가득 찬 인간 군상은 그들이 겨누고 있는 총구가 결국 자기 자신에게 돌아올 것을 모른 채 박정범의 무대 위를 하염없이 헤맨다. 그렇기에 전작 <무산일기>와 <산다>에 이어 박정범이 직접 출연했음에도 불구하고(물론 <파고>에서는 비교적 분량이 줄어든 조연을 맡았다), <파고>는 누군가의 몸이라는 구체적 존재로 리얼리티를 재현하는 영화라기보다는 사회실험의 공간 안에서 펼쳐지는 하나의 우화처럼 느껴진다.

박정범은 <무산일기>에서 그의 몸이라는 리얼이 드러낼 수 있다고 생각한 리얼리티의 영역을 <산다>와 <파고>에 이르러 영화적 무대라는 픽션(열린 동시에 닫힌 세계)으로 점차 옮겨놓는 것 같다.

 

박정범의 자본주의 모독

박정범의 전작 <무산일기>와 <산다>에서 세계를 작동시키는 가장 큰 원동력은 다름 아닌 '노동'이다. 그리고 노동은 필연코 '폭력'을 낳는다. 그의 영화에서 노동은 폭력으로 이어지거나(승철은 거리 한복판에서 전단지를 붙이다가 경쟁 패거리에게 붙잡혀 린치를 당한다), 폭력이 노동으로 이어지거나(승철의 고용주가 그를 때리면서 차 밖으로 쫓아내고, 거리에 내몰린 승철은 전단지를 붙이는 작업을 시작한다), 노동은 곧 폭력이 된다(하루를 꼬박 지샐 정도로 수없는 테이크를 촬영했다는 <산다>의 된장 공장 싸움 씬에서는 서로 물고 뜯는 싸움이 마치 노동 그 자체인 것처럼 보인다).

노동에서 폭력으로, 폭력에서 노동으로, 그리고 폭력이 곧 노동으로. 하지만 이 문장은 이상하다. 두 단어가 조사와 위치를 바꿔가며 의미론적으로 유희할 때, 그 사이를 이어야 하는, 이런 의미의 생산을 가능하게 할 무언가가 문장에서 빠져있다. 그 자리를 '자본'이라는 단어가 채운다. '자본' 또는 '생산수단'에 따라 발생하는 상징적인 (어쩌면 실제적인) 자본가와 노동자의 계급구도 속에서야 위의 문장이 성립할 수 있다. <무산일기>와 <산다>에 걸쳐 '누군가가 들고 도망친 돈'이라는 계기적 사건이 반복적으로 등장하듯, 그의 영화에서 돈은 곧 갈등이며 세계의 폭력 그 자체다.

 

ⓒ tvN

<파고>의 닫히고 경직된 영화적 세계에서 폭력과 갈등의 중심이 되는 '돈'은 더 뚜렷하고 명징한 형상으로 다가온다. 외지로 파견된 경찰관 '연수'(이승연)와 그 안의 수상쩍은 주민들, 그리고 마을의 숨겨진 범죄의 피해자로 의심되는 '예은'(이연)은 섬이라는 폐쇄적이고 설정적인 공간 안에서 관찰자, 가해자, 피해자의 도식적인 구도 아래 놓인다. 반면 '돈'이라는 이해관계에서 이들의 이기심과 욕망은 더욱 복잡한 양상을 띤다. 마을 사업의 성공적인 추진을 위해 예은의 성매매 사실을 은폐하고 그녀를 섬 밖으로 내보내고자 하는 이장, 돈을 모으기 위해 마을 주민들에게 몸을 파는 예은, 피해자 예은을 보호해주는 것처럼 보이지만 생계를 위해 예은의 성매매 사실을 방관했던 상훈. 그리고 관찰자의 위치에 있던 연수가 양육비를 위해 딸 '상이'(최은서)를 외지의 폐가에서 함께 지내게 하고 방치한 것이라는 사실이 밝혀지며 영화는 또 다른 선악의 굴레에 우리를 몰아넣는다.

이러한 도식 바깥에 있는 대안적인 구도는 '예은'과 '상이' 사이의 연대다. 그들에게 섬은 떠날 것을 강요받는 곳이고, 떠나고 싶은 곳이다. 그러나 (자의든 타의든) 둘은 섬을 떠날 수 없다. 예은은 어릴 적 부모의 죽음으로 인한 트라우마 때문에 바다를 건널 수 없고, 상이는 엄마 연수에게 붙잡혀 있다. 그런 면에서 같은 욕망을 지닌 두 인물은 섬이라는 시스템을 전복하는 연대의 집단이다. (사실 면밀히 따져서 예은과 상이는 같은 욕망을 지닌다고 말하기 어렵다. 예은이 섬을 떠나도록 하는 것은 마을 주민들이다. 반면 상훈은 예은에게 마을 주민들을 피해 섬 안에 숨어있도록 한다. 예은의 도망은 섬으로부터의 도망이 아니라 사람들로부터의 도망이다. 그래서 예은과 상이의 연대는 '섬 밖으로 나가기 위해서는 수영하는 법을 가르쳐 주어야 한다'는 상이의 가르침과 예은의 깨달음을 전제로 한다)

박정범이 예은과 상이이라는 소수집단으로 이뤄내고자 하는 바를 더 들여다보자. 천주교 신자인 (또는 그렇게 행세하는) 예은은 마을 주민들에게 몸을 판다. 박정범은 예은이 처음으로 등장하는 성당의 장면과 예은이 마을 주민들과 관계 맺는 밤의 장면의 연결을 통해 성(性)과 속(俗)의 관계를 의도적으로 잇는다. 그리고 예은은 한밤중의 성당에서 상이를 만나고 그 관계 안에서 대안적인 구원을 꿈꾼다. 이런 설정은 다소 신성모독의 면모를 띤다. 하지만 박정범이 부정하려 하는 것은 '신'이 아니다. 이 영화에서 신성모독이라는 말은 메타포다. 그렇다면 무엇을 모독하는가? 무엇을 전복하는가? 자본주의. 박정범은 세 편의 영화에서 세 차례에 걸쳐 이 말을 반복한다. (예은과 상이는 추위를 견디기 위해 예은이 몸을 팔아 번 돈을 땔감으로 써 불을 지핀다. 지폐 낱장이 하나씩 불에 탄다. 그야말로 전복적이다. 자본주의를 겨냥한 이미지. 이는 분명 부뉴엘적이다)

 

ⓒ 영화 <파고>

<파고>의 세계는 경직되어 있다. 대사는 다소 부자연스럽고 설정적인 상황과 서사는 메시지의 전달을 우선하느라 과잉되어 있다는 인상이 드는 것이 사실이다. 이런 점을 염두하고 적지 않은 사람들은 박정범의 영화를 욕심이 앞선 과한 설정극 그 이상 이하도 아니라고 여길지도 모른다. 하지만 지금의 한국독립영화에서 박정범처럼 자신이 영화를 찍어야 하는 이유를 항상 자각하고 타협 없이 밀어붙이는 작가는 보기 드물다. 영화의 마지막 장면, 바다의 가장자리에서 서로의 몸을 부여잡고 있는 두 여자의 흐느낌은 마치 지금의 한국영화 한쪽을 홀로 버티고 서 있는 박정범의 기도처럼 들린다. 박정범처럼 영화를 찍는다는 행위가 곧 고통임을 몸소 증명해내는 사람이 있을까. 이 연재에서 앞서 다룬 작가들과의 비교에서도 박정범의 계보는 유일무이할 정도이니 말이다.

[글 김민세 영화전문기자, minsemunji@ccoart.com]

김민세
김민세
 고등학생 시절, 장건재, 박정범 등의 한국영화를 보며 영화를 시작했다. 한양대학교 연극영화학과 영화부에 재학하며 한 편의 단편 영화를 연출했고, 종종 학생영화에 참여하곤 한다.
 평론은 경기씨네 영화관 공모전 영화평론 부문에 수상하며 시작했다. 현재, 한국 독립영화 작가들에 대한 작업을 이어가고 있으며, 그와 관련한 단행본을 준비 중이다. 비평가의 자아와 창작자의 자아 사이를 부단하게 진동하며 영화를 보려 노력한다. 그럴 때마다 누벨바그를 이끌던 작가들의 이름을 하염없이 떠올리곤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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