따로 또 같이 있는 세계 ['너의 눈을 들여다보면' #2]
따로 또 같이 있는 세계 ['너의 눈을 들여다보면' #2]
  • 이상용
  • 승인 2023.07.02 13:00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교차하고 교감하는 현재의 순간들"

미야케 쇼의 <너의 눈을 들여다보면>(2022)에는 요즘 보기에 드문 것들이 있다. 하나는 '16밀리' 필름으로 촬영되었다는 점이다. 한국에서는 현상조차 할 수 없는 16밀리 필름은 드문 선택이다. 도쿄의 철거지역을 보여주는 아날로그적인 감성에 부합되기도 한다. 하지만 후반작업을 통해 얼마든지 아날로그한 감성을 만들어 낼 수는 있다. 물론, 미야케 쇼 감독이 원했던 것은 후반작업의 디지털 기술이 아니라 그 자체로 자연스러운 느낌이겠지만 16밀리라는 선택의 흥미로움과 약간의 번거로움을 제외하고 여기에 너무 많은 의미를 둘 필요는 없다. 단지, 아날로그의 자연스러움을 추구한 동시대 영화에서 찾아보기 힘든 선택임을 기록해 두고자 한다.

오히려 흥미로운 것은 대부분의 장면을 카메라를 고정(fix)한 채 촬영했다는 점이다. <너의 눈을 들여다보면>에는 동시대 영화에서 흔히 접할 수 있는 트래킹 쇼트나 무빙 쇼트가 없다. 카메라의 움직임이 전혀 없다고는 할 수 없는데, 가령 영화 초반 주인공 '케이코'(키시이 유키노)가 쇼핑몰이 있는 거리를 지날 때 익스트림 롱쇼트로 잡은 카메라는 멀찍이 보이는 그녀를 왼쪽에서 오른쪽으로 따라간다. 패닝(panning) 쇼트다. 집에서 남동생과 함께 있을 때에도 아주 작게 움직이는 패닝 쇼트가 있다. 하지만 움직임이 보이는 패닝이라고 해도, 카메라를 고정한 채 돌릴 뿐이다.

무엇보다 영화에 직접적으로 두 번 등장하는 케이코의 복싱 경기 장면에서도 카메라는 고정되어 있다. 링 위의 주인공을 역동적으로 보여주고 싶은 유혹에 시달릴만도 하지만, 일상을 살아가는 케이코와 다르지 않게 고정된 카메라로 바라본다. 그것은 이 영화의 기본적인 시선과 스타일을 구현한다. 그녀의 삶은 일상이나 링 위에서나 다르지 않다. 카메라는 그녀를 지켜보는 동시에 그녀의 삶과 경기에서 뿜어져 나오는 무엇인가를 기다린다. 

여기에 하나를 더 덧붙이자면 영화 음악이 전혀 사용되지 않았다는 점이다. 사운드는 모두 현실 혹은 현장의 소리다. 영화 음악을 사용해 인물에게 대입하거나 인물의 감정이나 반응을 끌어내지 않는다. 인공적인 것을 배제하고, 최대한 자연스러움을 표현해 내는 선택이다.

 

ⓒ 디오시네마

<너의 눈을 들여다보면>은 실존 인물인 '오가사와라 케이코'의 자서전을 바탕으로 각색되었다. 애초부터 강력한 자연적 실체가 주어져 있다. 그런데 미야케 쇼 감독은 여러 인터뷰를 통해 이 영화를 전기물의 재연 드라마처럼 만들고 싶지 않았다고 강조한다. '재연'이라는 말에는 현실의 인물을 모델 삼아 이 인물의 전기적이면서도 극적인 요소를 끌어내려는 태도가 포함되어 있다. 미야케 쇼가 선택한 방식은 신화적인 복서의 탄생이 아니라 어디서든 볼 수 있을 법한 인간의 기록이다. '최대한 자연스럽게!' 이를 영화의 모토라 할 수 있다면, 이 영화의 촬영 방식과 섬세한 사운드의 디자인은 자연스러움을 구현하기 위한 선택일 따름이다. 

영화는 귀가 들리지 않는 '케이코'를 바라본다. 그녀는 프로에 입문하는 권투 선수다. 직장과 집을 오가는 그녀의 일상에는 또다시 링 위에 오르기 위해 수행해야 하는 훈련과 육체의 반복이 있다. 그녀의 움직임을, 그녀의 말없음 속에서 지켜보는 것은 이상한 스펙터클을 만들어 낸다. 침묵 속에 갇힌 듯한 그녀의 움직임은 꽤나 구체적인 언어에 다가가는 것처럼 느껴지기 시작하고, 케이코가 속한 체육관 회장의 말과 행동처럼 그녀로부터 무엇인가 분출되기를, 싸울 의지를 갖추도록 바라보며 기다리게 만든다.

그 가운데 동시대성이 자연스럽게 투영된다. 자서전이 발간된 것은 2011년의 일이다. 하지만 영화의 배경에는 코로나19 팬데믹 시기가 자연스럽게 등장한다. 사람들은 마스크를 쓰고 살아간다. '이 케이코'는 자서전에 등장하는 실존적인 인물도, 극적인 재연이나 동시대성만을 지닌 인물도 아니다. 그 모든 것을 아우르는 케이코다. 미야케 쇼 감독은 어느 시대에나 있을 법한(보편적 동시대성), 하지만 쉽게 만나기 어려운 청각장애를 지닌 케이코(전기적 사실성)를 병합하면서 자신만의 인물을 만들어 내고자 한다. 반복되는 일상과 훈련 그리고 주어진 경기 장면을 오가면서 어떤 기다림과 어떤 순간들을 포착해 낸다.

그것은 케이코 혼자만으로 이루어진 세계가 아니라 여러 인물들과의 관계 속에서 점차적으로 드러내는 세계의 모습이다. 이전보다 소통이 더 어려워진 팬데믹 시대에 개인과 가족의 일원으로 살아가면서, 개인과 링 위에 오를 준비를 하는 선수를 겹쳐 놓으며, 케이코가 적어내려가는 매일같이 적어가는 훈련 일지(동시에 개인적 소회를 담은 일기처럼 읽히기도 한다)처럼 지금을 살아가는 인간의 모습이다.

 

따로 혹은 같이

케이코를 중심으로 가장 도드라진 점 중의 하나는 홀로 있는 장면들과 다른 사람들과 있는 장면으로 구별되거나 연결된다는 점이다. 영화의 시작은 이 점을 명확히 보여주는데 체육관에 들어오는 케이코가 탈의실로 들어오면 안에 있던 남자가 밖으로 나간다. 케이코는 체육관의 유일한 여성이다. 귀가 들리지 않고, 그녀가 홀로 훈련하는 장면이 주목되지만, 상대적으로 덜 언급되는 사실 중의 하나는 남성 중심의 복싱 세계에서 체육관에 속한 유일한 여성이라는 점이다. 어째서 귀가 들리지 않는 케이코가 복싱을 선택했는지는 알 수가 없다. 다만, 케이코의 선택을 극대화하거나 감정을 자극하지 않은 채 묵묵히 자신의 일과 훈련을 살아가는 케이코를 보여줄 따름이다. 이러한 정서는 대부분 그녀가 홀로 로드웍을 하거나 직장과 일상을 살아가는 장면에서 반복된다.  

그럼에도, 이 세계에서 그녀는 온전히 홀로 있을 수는 없다. 옷을 갈아입기 위해서는 다른 사람들의 배려가 필요하고, 일터에서도 그녀에게 물어볼 때 정확한 대답을 얻기 위해 기다려야 한다. 심지어 훈련을 위해서는 매번 코치들의 지도와 함께 호흡을 맞춰야 하는 순간들이 있다. 이를 통해 그녀의 홀로 있음(따로)은 그 자체로만 드러나는 것이 아니라 타인과 소통해야 하거나 충돌하는 '같이'의 장면들을 통해 적극적으로 구현된다. 호텔 청소를 하면서 시계 분실물이 있는지를 묻는 동료의 물음에 케이코는 마스크를 내려보라고 손동작을 한다. 상대의 입술을 읽어야만 알아들을 수 있는 그녀의 자연스러운 모습이 등장한다. 마스크와 관련된 장면은 마트에서 물건을 사고 계산을 하는 직원과 소통을 할 때에도 일어난다. 마스크를 쓴 채 포인트 카트를 만들겠냐는 직원의 질문에 케이코는 적절하게 답하지 못한다.

'같이' 살아가야 한다는 것은 귀가 들리지 않는 케이코에게는 큰 어려움이다. 링 위에서도 마찬가지다. 언론과 인터뷰를 하는 체육관의 회장은 케이코의 선천적인 장애가 위험할 수 있다고 말한다. 심판의 말도 들리지 않고, 코치의 목소리도 들리지 않는 탓에 소통의 어려움이 있다. 케이코는 복싱장으로 가는 계단을 내려가기 직전 한 남자와 부딪히기도 한다. 남자의 물건이 땅에 떨어진다. 케이코는 그 사실을 알아차리지 못하거나 의식하려고 하지 않는다. 남자가 케이코를 향해 소리치지만, 케이코는 그 말을 듣지 못한다.

 

ⓒ 디오시네마

가장 흥미로운 설정 중의 하나는 남동생과 함께 사는 집에서 등장한다. 귀가한 케이코는 피자를 먹고 치우지도 않은 채 기타를 연주하는 동생에게 집세를 내놓으라며 잔소리를 퍼붓는다. 동생은 자신이 먹은 음식을 치우지 않았다는 사실을, 이로 인해 귀가한 케이코의 짜증이 올라왔다는 사실을 인지하지 못한다. 귀가 들리지 않는 케이코는 거의 말을 하지 않고(말을 완전히 할 수 없는 것은 아니다.), 이에 따라 타인에게 자신의 마음이나 생각을 전하는 데 익숙하지 않다. 

하지만 수화로 대화를 나누는 두 사람의 모습은 공격적이기만 한 것은 아니다. 어떻게든 말을 이어가고자 하는 의지가 있다. 경기 후 남동생은 복싱이 무섭지 않냐는 질문을 하기도 하고, 무섭다는 말에 케이코가 사람처럼 보인다고 말하기도 한다. 케이코는 동생의 반응에 “무례하네.”라고 말하지만 이 장면은 보통의 남매 사이에 존재하는 장난스러운 대화처럼 보인다. 

무엇보다 남동생과의 장면이 흥미로운 것은 그가 음악을 한다는 사실이다. 그것은 들리지 않는 케이코에게는 무용한 것일 수 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음악은 존재할 뿐만 아니라 이 세계에 공존한다. 남동생의 여자 친구로 보이는 흑인 여성의 존재처럼 서로가 달라도 공존할 뿐만 아니라 각자 케이코의 경기를 보고, 응원을 보낸다. 한밤중에 세 사람이 모여 복싱을 연습하고 춤을 추는 장면이 등장하기도 한다. 공존한다는 사실이 따로 또 같이 살아야 하는 이 세계의 가장 중요한 공기이자 영화가 반복하면서 강조하는 지점이다. 미야케 쇼의 다른 영화에서도 청춘들은 서로가 다르지만, 다름으로 인해 충돌이 일어나지만, 다름을 어느 정도 인정하거나 돌파해 가는 과정이 주요한 핵심을 이룬다. <너의 눈을 들여다보면>에서도 침묵 이상으로 중요한 것은 수화를 통한 대화이다. 

그것은 '나고야 텔레비전 60주년 기념'으로 제작된 이 프로젝트에 기본적인 태도로 보인다. 조만간 개봉할 후카다 코지의 <러브 라이프>(2022)에서도 인물들이 수화로 대화를 나누는 장면이 등장한다.(이 작품 또한 같은 프로젝트라는 크레딧이 보인다.) <너의 눈을 들여다보면>과 비교해 보았을 때 '여성'과 '수화'라는 것이 중요한 키워드로 보이는데, 남동생과 수화로 대화할 때 자막 화면을 사용하거나 케이코가 자신과 비슷해 보이는 친구들과 수화로 대화할 때 아무런 자막을 사용하지 않는 등(그래서 수화를 모르면 이 장면의 내용을 정확히 알 수는 없다. 하지만 어떤 분위기는 충분히 전달된다.) 수화 혹은 침묵 속에서 보여질 수 있는 여러 표현 양식을 사용한다. 

그럼에도 홀로 있는 케이코는 많은 순간 침묵한다. 침묵 속에서 케이코를 읽으려면 영화의 제목처럼 눈을 들여다볼 때 가능한 일이다. 임마누엘 레비나스라면, 눈보다는 '타인의 얼굴'을 강조하겠지만 클로즈업(얼굴만 있는 것은 아니다. 케이코의 다리와 신체들이 강조되기도 한다)과 시선의 중요성은 말없는 케이코의 핵심이다. 케이코가 상대의 눈과 입술을 보아야 어느 정도 의사소통을 할 수 있듯이, 영화는 관객으로 하여금 케이코의 눈을 보라고 말하는 셈이다. 체육관 회장 또한 이 점을 강조한다. 케이코가 복싱 선수로서의 재능은 없다고 말하면서도 눈이 좋다고 칭찬한다. 눈이 좋은 케이코는 시간이 걸리지만 상황에 적응해 내고, 귀가 들리지 않는 단점은 어느 정도 커버가 된다는 식으로 말한다. 

미야케 쇼 감독은 귀가 들리지 않는 세계에서도 시간은 걸리지만, 결국 눈을 통해 대화할 수 있음을 강조하는 셈이다. 이는 다양한 수화와 자막의 방식이나 케이코를 보여주는 방식에서도 적용된다. '눈' 혹은 '케이코의 눈'을 보면 우리는 그녀를 알 수가 있다. 그리고, 상대 혹은 케이코의 눈을 제대로 들여다보기 위해서 필요한 것은 '말'이 아니라 침묵이다. 침묵은 눈을 깊숙이 들여다보게 이끈다.

 

ⓒ 디오시네마

세 번째 경기

케이코의 일상과 훈련 속에서 영화 전체를 구성하는 것은 '세 번의 경기'다. 영화 초반부에 그녀가 승리한 경기가 언급되기는 하지만 화면으로 등장하지는 않는다. 본격적으로 화면 위에 등장하는 경기는 2:0으로 판정승을 거두는 두 번째 경기다. 그리고 마지막에 펼쳐지는 세 번째 경기가 등장하기까지 <너의 눈을 들여다보면>은 케이코의 모습과 감정이 흔들리고 있음을 보여준다.

흔들리는 모습은 크게 두 가지로 나타나는데 하나는 케이코의 경기를 지켜보는 엄마의 권유다. 함께 길을 가던 철도 건널목 앞에서 프로가 되었으니 "이제 충분하지 않아?"라고 말한다. 더 이상 권투를 하지 않는 것이 어떻겠냐는 권유다. 엄마는 케이코의 맞은 얼굴을 제대로 보지 못한다. 엄마의 말이 전부는 아니겠지만 케이코가 잠시 휴식 시간을 갖겠다는 편지를 쓴다. 하지만 복싱장을 찾을 때마다 매번 전하고 싶어하는 이 편지를 끝내 전달하지 못한다. 그녀가 프로 복서가 되고 싶어하는 구체적인 연유가 등장하지 않는 것과 마찬가지로 어째서 휴지기를 가지려고 하는지는 알 수는 없지만 프로에 입문한 판정승(두 번째 경기) 이후 변화된 모습이 등장한다. 케이코가 훈련하는 모습은 점점 더 흐릿해진다. 

그런데 이러한 케이코 앞에 체육관의 문을 닫는다는 소식이 전해진다. 문자를 통해 이 소식을 접한 케이코는 이를 그만두거나 중단할 기회로 여겨야 할지, 아니면 준비된 세 번째 경기를 하는 것이 나아갈 수 있는지를 고민하는 것처럼 보인다. 두 번째 경기 직후 일터에 온 케이코에게 동료는 일과 복싱을 병행하는 케이코를 대단하다고 하면서 "시합 후에는 좀 쉬어도 될 텐데."라고 말한다. 그러자 케이코는 "한 번 쉬면 쭉 게을러질 것 같아서요."라고 답한다.

이 대답은 중요하다. 케이코가 무언가를 계속하고 있는 것은, 무언가를 쉬게 된다면 스스로 나태해질까봐 근심하기 때문이다. 청춘의 일상을 채우고 있는 것은, 복싱 자체만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무엇인가를 꾸준히 한다는 것에 있다. 체육관 회장의 아내가 보게 되는 케이코의 훈련 일지는 이를 증명한다. 그녀의 훈련과 일상과 함께 흘러나오는 내레이션 장면은 이 영화의 핵심이라고 할 수 있는데 매일 같이 뛰고, 훈련을 하고, 일상을 살아간다. 왜 그렇게 열심히 하냐고 묻는다면 케이코는 분명히 "쉬면 게을러질 것 같아서요."라고 답할 것이다.

 

ⓒ 디오시네마

두 번째 경기 직후 무서움 때문에 상대에게 달려들고 제대로 거리를 유지하지 못하는 케이코가, 어머니의 권유도 있는 마당에 권투를 계속해서 할지 말아야 할지를 고민하는 상황에서 체육관의 문을 닫는다는 것은 강력한 도전이 된다. 케이코를 받아주는 체육관이 흔하지 않을뿐더러 이 때문에 자신의 의지와는 상관없이 권투를 멈춰야 할지도 모르기 때문이다. 

이에 대한 역설적인 장면이 하나 있다. 체육관 회장의 인맥으로 케이코는 여성 코치가 있는 다른 체육관을 소개받는다. 그녀는 케이코에게 함께 하자고 제안한다. 그런데 케이코가 이를 거부하면서 "집에서 멀어서요."라고 말한다. 이 말이 안되는 핑계는 단순히 핑계의 문제가 아니라 복싱에 대한, 자신이 속했던 체육관이란 세계에 대한 변화를 어떻게 받아들여야할지 갈등하고 망설이고 있음을 보여준다. 이 영화는 케이코를 기다리면서 바라보고 있을 뿐만 아니라 동시에 그녀의 망설임과 결단을 보여주고자 하는  셈이다. 

체육관의 관장은 케이코의 망설임과 대비가 된다. 노년의 그는 병이 들었고, 더 이상 체육관을 운영할 힘과 능력이 없다. '전환이나 변화의 시기'라는 점에서 회장은 케이코와 대비를 이룬다. 그는 진정으로 쉴 때가 온 인물이고, 그는 케이코를 바라보며 같이 훈련하거나 다독거린다. 회장은 케이코와 가장 많이 같이 있는 인물로 등장한다. 케이코가 로드웍을 하는 곳에 나타나 함께 몸을 움직여보기도 하고, 거울 앞에서 섀도우 복싱의 동작을 알려주기도 한다. 무엇보다 고민하는 케이코를 향해 다가온 회장은 단호하게 말한다.

"케이코. 복싱은 싸울 마음이 없으면 할 수가 없어. 싸울 마음이 사라지면 상대에게도 실례야. 위험하니까. 무슨 말인지 알겠어, 케이코?"

회장은 케이코의 대답이 들리지 않는다면서 크게 말해달라고 청한다. "네"라는 말이 희미하게 들려온다. 싸울마음이 없어진 케이코를 향해 격려이자 현재에 대해 인식하도록 던지는 회장의 존재감은 영화의 두 기둥이라고 할 만큼 중요하다. 회장이 쓰러져 병원에 입원하였을 때 그의 곁을 지키는 인물 중의 하나도 케이코다. 두 사람이 함께 있는 영화의 순간들은 서로 교차하고 교감하면서 현재를 만들어 낸다. 그 가운데 진정으로 휴지기를 가져야 하는 회장이 있고, 복싱을 계속해야 할지 말지를 두고 방황하며 휴지기를 가질까 말까를 고민하는 케이코가 있다.

기자와의 인터뷰에서 회장은 거의 말을 하지 않는 케이코에게 프로 선수가 되고 싶냐고 물었을 때 처음으로 정확하게 "네"라고 말하는 것을 들었다고 말한다. 회장의 인터뷰는 두 번째 경기 이후에 등장한다. 회장은 아주 또렷하게 그녀가 프로가 되고 싶어 했다고 말한다. 그리고 또다시 다가오는 경기 앞에서 회장이 케이코에게 싸울 마음이 없으면 시합을 미루자고 하는 것도, 그녀의 답을 듣기 위해서인지 모른다. 앞으로도 계속 싸우고 싶은지 아닌지를 말이다.

어쩌면 이 영화의 기다림은 또 한 번 케이코의 "네"라는 말을 듣기 위함인지도 모른다. 그리하여 세 번째 경기가 펼쳤을 때 처음으로 상대를 향해 고함을 지르는 케이코가 등장한다. 비록 이 경기에서 패배하였지만, 케이코는 처음으로 자신을 드러내면서, 자신이 낼 수 있는 소리의 최대치를 지른다. 병실 복도에서 이어폰을 착용한 채 경기를 보던 회장은 패배를 알면서도 "좋아!(요시)"라고 말한다. 얼핏 보기에는 이상한 장면이지만 케이코가 드디어 고함을 지르며 싸울 의지를 내보였기에, 회장은 그에 호응하는 것이다. 

 

ⓒ 디오시네마

프로가 되었으니 멈추라는 엄마, 싸울 각오 없이는 링에 오르지 말아야 한다는 회장 그리고 그녀를 지켜보는 사람들의 응원 속에서 패배한 케이코는 승패에 졌을 따름이다. 소리를 지르며 돌진하는 케이코는 마침내 싸우려는 케이코가 되었고, 회장은 그 모습에 '좋아', 라고 환호한다. 그것이야말로 복서가 복서답게 되는 유일한 길이기 때문이다. 

코로나19 시대에 타인과 부딪힘을 외면하거나 피해가는 것이 아니라 부딪힘을 제대로 충돌하는 케이코가 되었다. 그리하여 영화의 맨 마지막에는 작은 기적과도 같은 장면이 등장한다. 평소처럼 로드웍을 하는 장소에 있던 케이코는 여성 노동자가 자신에게 다가오는 것을 목격한다. 그는 세 번째 경기에서 싸웠던 선수였다. 심지어 자신의 발을 밟는 반칙을 한 탓에 다소 억울했던 상황을 연출했던 선수였다. 

"저번 시합 때 감사했습니다."

케이코가 고개를 끄덕인다. 상대 선수는 "그럼 이만"이라며 자리를 피한다. 풍경을 바라보며 망설이던 케이코의 눈동자가 굳건해진다. 다시 언덕에 올라 달릴 준비를 한다. 영화는 그렇게 끝난다. 케이코는 어제와 마찬가지로 사실은 하루하루를 채워갈 것이다. 그녀의 삶에서 하루는 어떻게 성실하게 기록되도록 사느냐의 문제일 것이다.

 

영화 <너의 새는 노래할 수 있어>(2018) ⓒ 디오시네마

이러한 반복의 문제는 미야케 쇼의 영화 전체를 아우르는 태도일 수도 있다. 2015년에 선보인 <너의 새는 노래할 수 있어>에는 다소 불성실하게 소일하며 살아가는 세 청춘의 모습이 그려진다. 하지만 그들의 세계 속에 흔들림이 없는 것은 아니다. 그리고 이 진동을 마주하면서 결단해야 하는 순간이 영화의 마지막에 등장한다. 한때 일본에서 유행처럼 번진 '사토리 세대'의 모습을 포착하면서도, 미야케 쇼는 그들의 모습을 부정적으로만 그리는 것이 아니라(그렇다고 클럽을 오가며 하루하루를 살아가는 그들의 모습을 무한 긍정으로 그리는 것만도 아니다) 여전히 살아가고 있음을 깊숙하게 보여준다. 그리고 흔들리는 순간은 항상 고민과 고통을 동반한다.

청춘 영화로써 <너의 눈을 들여다보면>은 이러한 계보를 잇는 작품이라고 할 수 있다. 자신이 싸웠던 선수와 링만이 아니라 현실에서도 마주할 때가 있고, 이 순간 링과는 달리 서로 예의 바르게 감사를 나누며 살고 있음을 확인하는 때가 있다. 그것이 삶의 풍경이다. <너의 눈을 들여다보면>은 목소리를 높이거나 극적인 형식으로 권투 선수 혹은 청춘을 예찬하는 것이 아니라 산다는 것은 어느 시대나 존재하는 문제이며, 여전히 많은 불안과 방황 속에서도 살아가고 있음을 나지막이 강조한다. 엄청나게 강렬하지는 않을지 몰라도, 엄청나게 오래도록 여운의 공기를 남기는 영화임이 분명하다.

비록 시합에는 졌지만, 관객들은 케이코가 다시 링 위에 오르리라는 것을 충분히 믿게 된다. 이 믿음이 구현되고 전달되었다면 이 영화의 소임은 충분히 다한 것이다. 살아가기 위해 링 위에 오르는 케이코가 아니고 살고 있기에 링 위에 오르는 케이코를 본다. 어딘가 시지프스의 신화를 닮은 삶의 부조리함과 인간에 대한 굳건한 의지가 이 영화를 가득 채우고 있다. 

[글 이상용 영화평론가, poema@ccoart.com]

 

※ 추신

ⓒ 더숲 아트시네마

이 글은 6월 24일 더숲 아트시네마에서 진행된 '이상용의 씨네모어' 강연을 토대로 삼았습니다.

 

ⓒ 디오시네마

너의 눈을 들여다보면
Small, Slow but Steady
감독
미야케 쇼
Sho Miyake

 

출연

키시이 유키노Kishii Yukino
미우라 토모카즈Miura Tomokazu
미우라 마사키Miura Masaki
마츠라 시니치로Shinichiro Matsuura
사토 히미Himi Sato
와타나베 마키코Watanabe Makiko

 

배급|수입 디오시네마
상영시간 99분
등급 전체관람가
개봉 2023.06.14

이상용
이상용
 1997년 『씨네21』 2회 신인평론상을 수상하며 영화 비평을 시작했다. 부산국제영화제와 전주국제영화제 프로그래머를 역임했다. 지은 책으로 『봉준호의 영화 언어』, 『영화가 허락한 모든 것』, 공저로 『씨네쌍떼』 『30금 쌍담』 등이 있다.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