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믿거나 말거나, 진짜야' 욕망의 시간에서 모두의 시간으로
'믿거나 말거나, 진짜야' 욕망의 시간에서 모두의 시간으로
  • 박정수
  • 승인 2023.06.28 13: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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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한한 '시간'을 향한 인간의 이기심"
ⓒ M&M

천장에서 내리는 비, 살인광 타이어, 거대 파리… 음악계에서는 '미스터 와조', 영화계에서는 '캉탱 뒤피외'라 불리는 한 아티스트의 영화에 등장하는 기상천외한 캐릭터들이다. 거의 1년마다 신작을 내놓는 뒤피외는 항상 저예산으로 영화를 제작하며, 작품의 규모 및 비용보다 중요한 것이 풍요로운 상상력, 기상천외한 아이디어임을 증명하는 시네아스트다. 뒤피외의 허무맹랑한 설정들은 개인의 편협한 통념에서는 존재하지 않지만, 분명 거대한 세계에 존재하는 '낯설고 모호한 타자'를 환기한다. 그의 영화 속 인물들은 작은 개인의 앎이 미약하다는 것을 폭로하는데, 이기심과 아집에 눈이 먼 이들은 그릇된 욕망을 분출해낸다. 신작 <믿거나 말거나, 진짜야>는 무한한 '시간'을 향한 인간의 이기심을 보여준다.

그간 뒤피외는 자신이 창조한 기상천외한 캐릭터를 명확하고 뚜렷한 디지털로 생생하게 포착했다. 필름과 달리 디지털의 질감은 현실과 분간이 되지 않을 정도로 선명하다. 뒤피외는 자신의 초현실적인 캐릭터가 현실이라는 듯 디지털에 담아냈다. 뒤피외의 세계관에서 이러한 기묘한 캐릭터는 개개인이 주관적으로 만든 공상의 산물이 아니라, 객관적으로 존재하는 생명체들이기에 누구나 그 실존을 동의할 수 있게끔 선명하고도 확실하게 포착되어져야 했다. 그러나 <믿거나 말거나, 진짜야>는 선명하지 않다. 화면이 아주 희고 탁하다. 그 이유는 객관적인 시간의 흐름을 '주관성'이 거스르기 때문이다.

영화 속 알랭과 제라르는 각각 프랑스와 일본에 머물며 '시차'를 겪는다. 이들이 서로 다른 시간에 머물게 된 이유는 제라르가 하반신에 부착한 '전자 남근'을 수리하는 욕망에서 비롯했다. 그는 만인에게 통용되는 객관적인 시간이 아닌, 자신만의 주관적인 시간 속에서 타인과의 시차를 발생시킨다. 뒤피외는 '욕망에 의한 시차'에 더해서 12시간 이후로 곧장 워프하고 3일을 젊어지게 해주는 지하실의 '구멍'을 그려낸다. 구멍을 통과하는 마리는 오전 5시에서 오후 5시로 단번에 워프하는 반면, 알랭은 마리가 자리를 비운 12시간을 오롯이 체감한다. 그래서 12시간을 단번에 건너뛴 사람의 시간과 현실에서 1초씩 차근차근 먹어가는 사람의 시간이 다르다. 알랭은 12시간을 뛰어넘은 마리를 '오래전에' 봤지만, 12시간을 단번에 점프한 마리는 알랭을 '방금' 봤다. 오늘을 사는 알랭, 내일을 사는 마리는 연락조차 되지 않는다. 서로가 혼탁하고 흐려서 잘 안 보인다.

 

ⓒ M&M

뒤피외는 <믿거나 말거나, 진짜야>을 통해 무수한 주관성에 의해 각기 달라지는 시간을 탐구한다. 영화 도입부에선 알랭과 마리가 이사하여 처음으로 '자신들만의 집'을 갖는다. 영화는 이들을 '시간을 주관적으로 채워나가는 인류'에 빗댄다. 시간이 흘러가듯, 알랭과 마리도 과거에 얽매이지 않고 '다른 곳'(다른 시간)으로 이동한다. 처음 맞닥뜨린 집은 '텅 비어' 있다. 모두에게 객관적으로 제공된 '빈 시간'을 각자가 주관적으로 채우고 꾸며간다. 자신들만의 시간이라는 듯 '커튼'으로 외부를 차단한다. 그런 시간은 아예 텅 비어서 다가오진 않는다. 이사 간 집에는 벽에 '빨간 페인트'가 미리 칠해져 있고, 정원엔 '폐차'가 덩그러니 방치돼 있으며, 지하실에는 '시간 워프 장치'가 있다. 이것들은 떠난 누군가가 미리 채워놓은 '역사'이다. 그래서 시간은 타인의 주관적인 과거를 품고서 현재로 다가오는 '중고차'에 가깝다. 이로써 어느 정도 미리 채워져 있는 타인의 주관성과 타협해야 한다. 이때, 손때 묻은 주관성과 어떻게 타협할지, 각자의 태도도 모두 제각각이라서 서로는 하나의 시간에 전혀 다른 주관성을 채워간다. 알랭은 폐차를 처분하려 했지만 제라르는 꽤 쓸 만하니 고쳐서 쓰라고 충고한다. 알랭은 워프 장치가 꺼림칙한 모양이지만, 마리는 회춘하고자 적극 사용한다. 이에 서로는 하나의 시간 속에서 전혀 다른 시간을 보고 있다.

그래서인지 <믿거나 말거나, 진짜야>는 '컷'이 잦다. 마리와 알랭이 똑같은 마음으로, 동일한 시간에 병원에 찾아갔을 때는 하나의 테이크에 놓였다. 또 알랭과 마리가 약속한 시간에 함께 만나 공인중개사와 집을 둘러볼 때도 둘은 하나의 숏에 담겼다. 이때 그들은 모두의 시간에 참여한다. 그러나 마리가 알랭의 곁에서 떠나 12시간 워프를 하면서 양자의 숏이 나뉜다. 이후 돌아온 마리가 영생이라는 허무맹랑한 공상에 빠져 정신을 못 차리자, 그녀의 뺨을 때리는 알랭과 그녀가 놓이는 숏이 각기 나뉜다. 마리와 알랭의 집들이 시퀀스도 마찬가지다. 마리가 샤워를 했다고 믿는 손님의 인식과 달리, 마리는 자신의 워프 사실을 인지한다. 또 세 사람은 4시에 속하는 반면, 마리는 4시를 거치지 않고 새벽 5시에서 오후 5시로 단번에 뛰어넘었다. 그래서 세 사람/마리가 위치한 숏이 각기 분리된다. 즉 똑같은 시간을 각자가 주관적으로 사용하고, 이로써 서로가 전혀 다른 시간 속에 놓임에 각자가 위치한 숏이 분절된다.

이렇게 하나의 시간을 다양하게 구성하는 인간의 주관적인 시야, 그런데 이와 달리 '기계'는 객관적이다. 뒤피외는 인간과 기계를 병치하며 인간의 주관성을 반성한다. 영화의 도입부, 알랭은 게임을 하느라 바쁘다. 그런데 전화가 울린다. 전화기에서 흘러나오는 마리의 목소리는 약속을 잊지 말라며, 서두르라고 보챈다. 게임할 때 알랭의 시야는 자신의 주관성을 따라 모니터에 갇혀있었다면, 전화벨이 울려서 주관에서 벗어나 마리와 함께하는 객관적인 외부 세계에 참여한다. 마리의 목소리를 객관적으로 전달하는 전화가 알랭이 주관성을 극복하게 해준다. 알랭이 제 주관에 머물러 있었을 땐, 가만히 앉아서 '부동'했다. 이후 외부 세계에 참여하기 위해서 뿌리박힌 주관성을 일으켜 세우고 무거운 몸을 들썩인다. 카메라도 마찬가지다. 카메라는 객관적이고 냉정한 달리 숏, 다양한 것을 한데 모아 포착하는 롱숏으로 알랭을 둘러싼 환경을 널따랗게 살펴본다. 가만히 앉아서 자기가 보고 싶은 모니터만 뚫어져라 쳐다보는 알랭과 딴판이다. 이후 마리와 알랭이 이사 갈 집을 둘러본다. 이때도 달리 숏이다. 뒤피외는 객관적인 외부 세계에의 참여를 능동적으로 움직이는 달리 숏으로 가시화한다. 이는 저녁 식사에서 '가만히 앉아' 제 얘기만 쏟아내고 타인에게 이동하지 않는 네 명의 사람들과 상반되는, 대상과 시공간에 참여하려는 의지를 보여준다.

전화기와 카메라가 참여하는 시간은 '현재'다. 현재엔 어떤 사건이 일어날지 모른다. 기계는 현재의 우발성을 고스란히 반영한다. 또 현재는 앞으로 끊임없이 전진하면서 많은 것들을 짓밟고 사라지게 만든다. 기계는 폭주기관차와 같은 시간의 폭압을 고스란히 받아들인다. 장총, 전자 남근, 자동차 모두 다 현재가 즈려밟고 전진하며 고장이 나고 망가진다. 시간의 흐름 속에서 소멸하는 것처럼, 12시간이 흘렀으면 그만큼 늙어야 하고, 지하실 아래로 뚫린 구멍을 내려가면 더 밑으로 떨어지는 것이 당연하다. 그런데 인간의 욕망은 이 당연함을 거슬러서 12시간이 지났는데도 3일 젊어지고, 지하실을 내려가서 '2층'으로 올라가고 싶어 한다. 그래서 인물들은 현재를 거스르는 '플래시백'으로 '좋았던 시간'만을 선별하여 길어온다. 마리는 당장 12시간을 건너뛰어 회춘하고 싶은지, 현재에 공인중개사가 워프 장치를 소개해준 과거를 자꾸만 회고한다. 외에도 알랭은 제라르의 '진상짓' 증거, 제라르는 기계가 멀쩡하던 시절, 마리는 새파랗게 젊었던 20대를 연거푸 플래시백한다. 현재에 과거를 바라보는 인물들이 소환하는 것은 자신의 욕망이다. 이에 영화 후반부, 자기가 바라는 '욕망의 시간'에만 참여하려는 각 인물들의 시간을 빠르게 축약한 편집이 인상적이다. 객관적인 모든 시간 중 주관적인 시간을 선별하고 이외의 시간을 제쳐놓고 괄시함에, 내가 누리는 시간은 그만큼 압축되고 짧아진다.

 

ⓒ M&M

어째서 사람들은 '객관적인 모두의 시간'을 거부하는가. 뒤피외는 인류가 이기적이기 때문이라고 답한다.

상대의 눈에 혼탁한 각자의 주관적인 시간을 조금이나마 가늠해보기 위해선 '대화'가 필요하다. 그러나 영화 속 이기적인 사람들은 대화를 한사코 거부하기에 시차는 조금도 좁혀지지 않는다. 뒤피외는 본 작품에서 대화를 '장광설'로 처리한다. 대화의 핵심이 '믿기지 않는 이야기'인 시간 워프 장치나 전자 남근인 만큼, 상대가 받아들일 수 있게끔 준비 단계를 오래 거친다. 그러나 청중들은 장광설을 참지 못해 말을 싹둑 잘라먹고 제 주장을 설파하기 일쑤다. 이외에도 대화는 '귀 따가운 잔소리'나 '접시가 깨지는 소음'이기에, 이를 듣기 싫은 인간의 '귀'는 영화 내내 닫혀 있다. 영화 속 공용어인 '불어'로 대화하더라도 불통이 만연하고, 제라르가 욕망을 위해 일본으로 향했을 땐 당연히 '일어'를 조금도 이해할 생각이 없음에 의사는 충돌한다. 또 욕망을 위해서 말을 아끼기도 한다. 마리는 나만을 위한 욕망인 시간 워프 장치를 타인에게 숨긴다. 즉 욕망에 의해서 대화는 불발하고, 너와 나 모두 다 동의할 만한 객관적인 시간을 합의하지 못하며, 각자는 시차가 아득히 큰 욕망의 시간에 갇힌다.

욕망의 시간에서 타인은 흐려서 잘 안 보이고, 오직 잘 보이는 것은 자신뿐이다. 제라르는 지독한 여성 편력을 과시한다. 잔에서 시작하여 일본인 스튜어디스, 백인 중년 여성, 흑인 여성 등 지금 연인에 만족 못하고 불륜을 반복한다. 사실 제라르는 그녀들에겐 관심조차 없다. 잔이 몇 살인지, 어떤 취향을 갖고 있는지 조금도 모른다. 백인 중년 여성과 교제할 땐, 침실에서 자신의 전자 남근만 조종한다. 그는 오직 자신의 '리비도'만 안다. 잔 또한 마찬가지로, 제라르가 무엇을 하러 일본에 갔는지 관심을 두지 않고 연인을 갈아치운다. 알랭 옆집의 한 이웃은 고양이가 '속 뒤집는 선수'라 표현한다. 고양이가 마음대로 돌아다녀서 해당 별칭을 붙였다. 그러나 고양이는 밖에 놔두면 자유롭게 돌아다니는 것이 본성이다. 그런데 인간은 고양이가 가만히 있어주길 바라는 기대와 욕망에만 관심이 있다. 마찬가지로 마리도 워프하고 돌아오는 출구 앞에 꼭 '거울'을 놔둔다. 그들은 외부 세계가 아니라 '자신을 위한 대상', '자신의 얼굴'만 보고 싶다.

귀찮고 껄끄러운 모두의 시간을 잘라내고, 욕망의 시간만을 취합하면 쾌락은 그야말로 농축된다. 하지만 뒤피외는 농축된 쾌락의 시간에는 대가가 있다고, 그것이 '화재'와 '부패'를 불러와 시간을 모조리 집어삼킬 것이라고 경고한다. 영화 속 욕망의 시간을 압축한 시퀀스가 쾌락과 무관한 시간을 모조리 잘라먹는 것처럼, 욕망을 불러준 대가로 개인이 누릴 수 있는 모든 시간을 빼앗는다. 상대를 배려하지 않는 각기 다른 욕망의 시간들은 서로 충돌하고 마찰을 일으켜, 이윽고 화마로 번진다. 그 불꽃이 제라르가 누릴 수 있는 모든 시간을 앗아간다. 그렇게 낭비된 시간은 인간에게 유한하다. 마리가 아무리 젊어진다 한들, 무수한 시간을 자신의 욕망을 위해서 낭비했기에 그녀의 시간은 썩고 곪아서 얼마 남지 않았다.

뒤피외는 욕망의 시간을 거두고, 대신 모두의 시간에 참여하는 알랭을 긍정한다. 제라르가 까다로운 계약을 내팽개치고 일본으로 내뺄 때, 알랭은 고객의 귀 따가운 요구를 묵묵히 참아가며 계약을 완수한다. 인턴을 괴롭히기 일쑤인 제라르와 달리, 인턴이나 마리를 동정하는 알랭은 공공의 이익을 위한 객관적인 시간에 참여한다. 결말에서 알랭은 자연에서 반려견과 함께 유유자적 낚시를 즐긴다. 그는 마리나 제라르처럼 욕망의 시간을 불러오기 위해서 조급하게 행동하지 않고, 모두의 시간 속에서 물고기가 다가올 자신만의 시간을 묵묵히 기다린다. 필연적으로 타인의 주관성을 묻힌 채 다가오는 시간이란 제게 전부 만족스러울 순 없다. 타인의 주관성을 지우고 또 지워서 욕망의 시간을 이룩하려다가, 인간의 유한한 시간은 불타고 썩어서 동난다. 결국, <믿거나 말거나, 진짜야>가 보여주는 현실은 시간과 타협해야 하는 필요성이다. 모두의 시간을 긍정하며.

[글 박정수 영화평론가, green1022@ccoart.com]

 

ⓒ M&M

믿거나 말거나, 진짜야
Incredible But True
감독
캉탱 뒤피외
Quentin Dupieux

 

출연
알랭 샤바
Alain Chabat
레아 드루케Lea Drucker
브누아 마지멜Benoit Magimel
아나이스 드무스티에Anais Demoustier
마리 크리스틴 오리Marie-Christine Orry

 

수입|배급 M&M
제작연도 2022
상영시간 73분
등급 15세 관람가
개봉 2023.06.21

박정수
박정수
예술은 현실과 차별화된 고유하고도 독립적인 차원입니다. 그중에서도 영화는 타 예술 매체와 구분되는 고유한 시각적 특징을 지니고 있습니다. 이러한 예술만의, 오직 영화만의 경험을 독자 여러분께 소개해 드리고자 합니다. 동시에 영화는 현실에서 비롯되고, 인간에게 이바지합니다. 그렇기에 현실-예술, 인간-영화를 이어내는 교두보와 같은 글을 제공하고자 노력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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