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장난 타자기를 두드리는 청춘들 ['너의 눈을 들여다보면' #1]
고장난 타자기를 두드리는 청춘들 ['너의 눈을 들여다보면' #1]
  • 김경수
  • 승인 2023.06.27 13: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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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야케 쇼'가 그려낸 잘려 나간 청춘의 모습"
ⓒ 디오시네마

<너의 눈을 들여다보면>(2022)의 오프닝을 볼 때, 케이코(키시이 유키노)가 샌드백을 마구 난타하는 소리가 왜인지 '타자기 소리'와 비슷하다는 엉뚱한 감흥에 사로잡혔다. <너의 눈을 들여다보면>은 다소 정적으로 시작한다. 그간 권투선수의 이야기를 담은 스포츠 영화와는 정반대다. 어떤 배경음악도 없고, 선수 사이의 소통도 없다. 영화는 샌드백에 펀치 여러 방이 날아드는 소리로 시작한다. 땀에 흠뻑 젖은 채 훈련에 매진하고 있는 청각장애인 '케이코의 펀치'다. 그녀뿐만이 아니다. 체육관에 있는 모두가 저마다의 방식으로 훈련하고 있는 광경이 몽타주로 드러난다. 쇠가 부딪히는 소리, 숨이 헐떡이는 소리 등을 통해서 파편화된 장면이 하나로 이어진다. 모두가 한마디도 하지 않아서 지나칠 정도로 건조하다는 인상까지 든다.

왜 그 모든 소리, 특히 케이코의 소리가 타자기 소리로 들리는 것은 그 건조함 때문이었다. 체육관이라기보다는 각자 저마다의 일에만 몰두하고 있는 사무실의 풍경과 비슷하다는 인상이 들어서다.

보통 영화 도입부에서 타자기는 자기반영적이다. 아날로그 타자기는 실시간으로 글자를 입력하는 매체다. 글을 통째로 폐기하는 것은 가능해도 중간중간에 지우는 것은 불가능하다. 무언가가 입력되고 있다는 것이 사운드로 드러나므로, 타자기의 소리는 그 리듬으로 서사가 진행되고 있다는 장치이기도 하다. 타자기는 서사의 리듬을 조율하기도 한다. 타자기가 이야기꾼의 상징인 것도 이 때문이다. 이야기는 막히지 않고 술술 이어져야만 보고 듣는 관중을 매혹할 수 있다. 작가나 감독이 이야기꾼으로의 자신을 드러내는 장치로 타자기가 쓰이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이야기하는 나의 자아를 계속 입력하고 싶은 것이다.

<너의 눈을 들여다보면>의 도입부 속 케이코의 펀치 소리가 타자기 소리와 비슷하다면, 입력되는 텍스트는 무엇인가. 사실 케이코뿐만 아니라 체육관에 누구도 텍스트를 입력하지 않는다. 아니, 그 텍스트를 제아무리 새기려 해도 그 텍스트가 부재해 있다. 타자기로 제아무리 두드려도 제 삶을 텍스트로 남기기가 힘든 것이다. 성공과 실패, 꿈 이 모든 것은 영웅으로 거듭나는 이의 것이기 때문이다. '타자기스러운 사운드'를 삽입함으로 미야케 쇼의 영화는 단순히 청춘 영화로 그치지 않는다. 이야기가 삶으로 이어져 아무런 흔적도 남지 않는 사토리 '세대'의 이야기까지 나아간다. 이는 그가 전작에서부터 그려내려는 테마다. 청춘은 풍경과 정서, 타인과 만나는 순간 하나만으로 충분하다는 것이다.

 

ⓒ 디오시네마

<너의 눈을 들여다보면>의 원제는 직역할 때, <케이코 눈을 똑바로 떠> 정도일 것이다. 제목처럼 영화는 케이코가 두 눈을 똑바로 뜨기까지의 과정을 그린다. 미야케 쇼는 2011년에 쓰인 선천적 청각장애인 복서 오가사와라 케이코의 자서전을 느슨하게 각색했다. 여기에 코로나19 이후를 배경으로 설정해 케이코의 이야기를 그려낸다. 플롯은 제법 단출하다. 케이코는 프로 복서로 데뷔한 후 경기를 치르고 있다. 낮에는 호텔 종업원으로, 밤에는 권투선수로의 삶을 살아가는 것이 버겁기만 하다. 케이코는 권투를 그만두어야 하는지 계속 고민한 끝에 혼자서 관장에게 그만둔다는 편지를 쓴다. 편지를 못 보낸 채로 끙끙 앓던 시기에 관장이 체육관을 닫는다고 이야기한다. 관장은 건강이 악화되어서 하반신을 움직이지 못하는 지경에 이르러 있다. 케이코는 그 어디에도 머무르지 못하고 마지막 경기를 준비한다.

미야케 쇼는 원작에는 비어 있는 디테일을 더한다. 그중 하나가 극 중 '배경'이다. <너의 새는 노래할 수 있어>에서 어스름이 가득한 하코다테의 여름 풍경을 담으려 했다면, <너의 눈을 들여다보면>에서는 철거가 한창인 도쿄의 아라카와를 담으려 한다. 이는 오즈 야스지로의<동경 이야기>(1953)의 배경이기도 한 곳이다. 또 하나가 시대적 배경이다.

<너의 눈을 들여다보면>에는 뉴제너레이션이라 부르는 일본 독립 영화의 흐름을 관통하는 정서가 감지된다. 바로 '반-매체성'이 그러하다. 뉴제너레이션의 한가운데에 있는 하마구치 류스케의<우연과 상상>(2021)은 반-매체성이 노골적으로 드러난다. 3부 중 2부는 매체를 경유한 만남을 주제로 한다. 2부는 잘못 보낸 이메일로 타인이 파멸에 이르게 하며, 3부에서는 우연을 되살리고자 SNS를 폐기하기까지 한다. 또 <드라이브 마이 카>(2021)와 <아사코>(2018)에도 SNS의 흔적이 사라져 있다.

거슬러 올라가면 반-매체라는 테마는 이와이 슌지나 구로사와 기요시 등 인터넷 매체가 탄생했을 시기에 전성기를 누린 여러 감독의 영화에 배어 있다. 구로사와 기요시는 <회로>(2001)를 통해서 인터넷 매체가 필연적으로 공포에 이르게 된다고 본다. 이와이 슌지의 근작 <라스트 레터>(2019)는 편지로 소통하는 고전적인 커뮤니케이션과 거기서 비롯하는 우연을 복원하고자 오프닝부터 스마트폰을 욕조에 빠뜨린다. 미야케 쇼도 이 흐름에서 예외는 아니다. 그의 전작 <너의 새는 노래할 수 있어> 또한 스마트폰이 전면에 드러나지 않는다.

<너의 눈을 들여다보면>는 '16mm 필름'의 사용에서부터 알 수 있듯이, 줌(zoom)과 비대면 만남이 일상화된 풍경에서도 미야케 쇼는 매체를 경유하지 않는 만남을 어떻게든 그려내려고 애쓴다. 코로나19 이후라는 배경은 넌지시 암시만 될 뿐이지, 영화의 사건에 별다른 영향을 끼치지 않는다. 편의점에서 마스크를 쓴 사람이라든지 마스크를 쓴 경찰은 영화 안의 사람이라기보다는 영화 외에서 급작스레 개입하는 듯하다. 이는 <드라이브 마이 카>(2020)의 한국으로 가는 엔딩이 급작스레 픽션에서 현실로 하강하는 구도와도 이어져 있다. 미야케 쇼와 하마구치 류스케의 영화 속 매체 없는 세계는 마치 꿈과도 같은 톤으로 그려진다.

 

ⓒ 디오시네마

SNS와 카카오톡 등은 개인과 개인 사이의 거리를 더없이 가깝게 한다. 아예 멀어진 사이라도 SNS는 알고리즘으로 친구 추가에 뜨도록 이끈다. 한편. 개인과 개인 사이의 대화가 실시간으로 이루어지기에 대화와 대화 사이의 행간이 사라진다. SNS는 인생의 비밀과 신비로움, 우연을 사라지게 한다. 인스타그램은 멀리서 볼 때는 사진첩에 불과하지만, 가까이 볼 때는 개츠비의 삶과 비슷하다. 다시 말해 삶의 가장 화려한 것만 잘라낸 사진과 사진을 이어서 그의 삶을 재가공하는 작업에 가깝다.

미야케 쇼의 청춘은 SNS에서의 파편으로만 있는 청춘이 아니다. 그저 그대로 있는 청춘에 가깝다. SNS를 일부러라도 영화에서 배제하면서까지 미야케 쇼가 그려내는 것은 무엇일까. 잘려 나간 청춘의 모습이다.

미야케 쇼는 처절하고도 우울한 톤으로 머물 곳이 없는 청년의 이야기를 다룬다. 스포츠 영화가 주인공이 되는 인물을 가까이에서 다루는 데에 비해서 <너의 눈을 들여다보면>은 인물에서 최대한 거리를 둔다. 감동이나 벅찬 순간은 없다시피 하고, 케이코가 웃는 순간도 후반부에 이르러서다. 그마저 친구와 케이크를 먹는 순간이다. 이 소소한 순간에 집중함으로 미야케 쇼는 SNS에서의 과장된 경험을 배제한다. 미야케 쇼는 언어의 부재로 인해서 소통이 가능하다는 흐름에 참여하되, 우리가 복원해야 하는 소통이 SNS에서 발달한 소통이 아니다. 오히려 무성 영화의 언어로 그려지는 신비로운 언어라고도 할 수 있다. 케이코가 '수어'로 말하고, 중간중간에 무성영화처럼 '자막'이 삽입되는 순간은 몸짓 언어를 대안적 언어로 이야기한 헝가리 영화평론가 '벨라 발라즈'의 주장과도 이어진다. 미야케 쇼는 얼굴을 맞대어야 가능한 경험을 통해야만 일상은 신비해지고 아름다워진다고 보는 것이 아닐까.

 

ⓒ 디오시네마

<너의 눈을 들여다보면>의 이중성은 케이코가 맞는 것은 두려워하되 때리고자 복싱에 임한다는 데에서 온다. 청춘은 고통받되 그것을 증언하려는 데에서 비롯한다. 이는 감각적인 행위이기도 하다. 때리는 행위를 타자기를 두드리는 것으로 설명해보자. 샌드백을 때리는 소리는 청각에 기반하므로 케이코에게는 들리지 않는다. 되려 그것을 때리고 거기서 오는 진동, 그리고 상대방을 때리고 있다는 상황이 주는 시각적인 전달이 케이코에게는 대안적인 언어다. 매체는 특정 감각을 강조함으로 그 메시지를 전달하는 장치다. 라디오는 청각을, 영화와 사진은 시각 매체라고도 불린다. 텍스트는 매체에 따라서 특정 감각에 따라서 재편성된다. 이 매체에 둘러싸인 삶에서 기본값으로 가정된 이는 오감을 모두 지닌 이다. 케이코가 편안히 대화할 수 있는 이는 수어를 이해하고 이 신비로운 경험에 몸을 맡기는 이다. 하마구치 류스케를 포함해서 뉴제너레이션 감독이 재구성하고자 하는 세계는 매체 없이 모든 이가 동등한 목소리를 지니는 정치적 유토피아가 아닐까. 미야케 쇼의 이 영화는 SNS와 매체, 코로나19와 마스크 등 모든 것을 넘으려는 풍경의 감각을 그려낸다.

케이코는 마지막에 이르러 권투 시합에 나간다. 권투 시합에서 반칙을 저지르는 상대방의 행위에 곧장 말로 항변하기 불가능하다는 것을 안다. 그럼에도 그녀는 악을 써서 상대에게 저항한다. 패배한 뒤 케이코는 반칙을 저지른 상대를 강둑에서 마주한다. 상대는 미안하다는 말을 건넨 뒤에 공사장으로 곧장 되돌아간다. 그녀는 곧장 훈련에 다시 임하러 간다. 이겨도 공사판을 전전하고, 호텔에서 일하는 것은 똑같다. 케이코의 복잡미묘한 표정을 어찌 보아야 할까. 그건 적대일까, 연대일까. <너의 눈을 들여다보면>은 멀찍이 우리에게 청춘의 풍경을 느끼라는 듯 지평선을 비춘다.

[글 김경수 영화평론가, rohmereric123@ccoart.com]

 

ⓒ 디오시네마

너의 눈을 들여다보면
Small, Slow but Steady
감독
미야케 쇼
Sho Miyake

 

출연
키시이 유키노
Kishii Yukino
미우라 토모카즈Miura Tomokazu
미우라 마사키Miura Masaki
마츠라 시니치로Shinichiro Matsuura
사토 히미Himi Sato
와타나베 마키코Watanabe Makiko

 

배급|수입 디오시네마
상영시간 99분
등급 전체관람가
개봉 2023.06.14

김경수
김경수
 어릴 적에는 영화와는 거리가 먼 싸구려 이미지를 접하고 살았다. 인터넷 밈부터 스타크래프트 유즈맵 등 이제는 흔적도 없이 사라진 모든 것을 기억하되 동시에 부끄러워하는 중이다. 코아르에 연재 중인 『싸구려 이미지의 시대』는 그 기록이다. 해로운 이미지를 탐하는 습성이 아직도 남아 있는지 영화와 인터넷 밈을 중심으로 매체를 횡단하는 비평을 쓰는 중이다. 어울리지 않게 소설도 사랑한 나머지 문학과 영화의 상호성을 탐구하기도 한다. 인터넷에서의 이미지가 하나하나의 생명이라는 생각에 따라 생태학과 인류세 관련된 공부도 하는 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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