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엘리멘탈' 감정의 덩어리
'엘리멘탈' 감정의 덩어리
  • 이현동
  • 승인 2023.06.20 13: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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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의 표정을 한 원소를 바라보며"

영화의 제목인 '엘리멘탈'(Elemental)은 원소 혹은 정령이란 의미가 있다. 원소라고 했을 때 우리는 변용 가능성이 완전히 차단된 본질적인 형태라고 정의할 수 있고, 반면에 정령이라 했을 때는 사유하고 행위하며 심지어는 감정이 있는 생명체로 정의할 수 있을 것이다. 4대 원소라 불리는 불, 물, 공기, 흙이란 원소의 본래 개념과 기호의 규율을 거부하면서까지 묘사된 영화의 설정은 본질적이라기보단 실존적인 문제로 보인다. 그들은 감정이 있고, 공동체를 통해 연대를 확립하고 무언가를 결정하고 변화하는 존재이기 때문이다.

<엘리멘탈>뿐만 아니라 픽사가 다루는 세계관에서 자주 등장하는 '차별'이란 주제는 서로 다른 외형과 성질의 간극에서부터 출발한다. 외형으로부터 자유도를 부여받은 애니메이션은 인간과 영상 사이에서 추동하는 '의미'를 밀착시키는 장치로 기능한다. 단조롭거나 투박해 보이는 그래픽이 아닌, 캐릭터의 근본적인 성질을 기발하게 변용시키거나 조합해 낸 픽사의 애니메이션은 어쩌면 재현을 앞서기까지 한다. 픽사의 애니메이션은 분명 외형은 사람이 아니지만, 결국 사람의 것을 취함으로 비현실적인 이야기는 곧 우리의 이야기가 된다.

 

ⓒ 월트 디즈니 컴퍼니 코리아

<엘리멘탈>의 이야기는 피터손 감독의 삶으로부터 출발한다. 감독은 콜리더와의 인터뷰에서 한국에서 가족을 위해 꿈과 희망을 품고 이민을 온 부모님 밑에서 성장한 당시를 회상하며 어린 시절의 환경이 작품의 영감을 주었음을 밝혔다. 영화 속 네 종류 원소가 더불어 살아가는 도시 환경은 이민자로 살아간 감독의 배경을 잘 보여준다. 감독은 엘리멘탈이 어울려 사는 도시를 상정하고 상상력을 발휘해 원소라는 단일한 속성에 성별을 부여하고, 아이를 출산하고 번영을 이룰 수 있는 각기 다른 공동체임을 설정한다. 어떤 상황에서도 영화에서 두 종류의 계열이 섞이는 법이 없지만, 감정을 나누는 제스처가 묘사되는 장면은 엠버와 웨이드 밖에는 없다. 영화는 원론적으론 불가능한 관계가 극복해야 할 전통과 사회 통념을 전제로 둘의 관계를 조명한다.

주인공 엠버 가족은 고향을 떠나 엘리멘트 시티로 이주했다. 그러나 주변으로부터 환영받지 못한다. 달갑지 못한 이 감정은 아버지 '버니 루멘'에게 고스란히 전가된다. 버니는 파이어 하우스라는 상점을 열고 불 원소 지역의 터줏대감으로 이주에 성공한다. 이것을 보고 성장한 '앰버'는 아버지의 유산인 파이어 하우스 물려받는 것이 자신의 유일한 꿈으로 여기고 아버지와 함께 일을 한다. 엠버는 수도관의 누수로 인해 우연히 잠입하게 된 '웨이드'를 만난다. 그리고 두 원소는 서로 다른 모습에 매력을 느끼고 사랑에 빠지게 된다.

엠버와 웨이드의 성향과 삶의 패턴은 흥미롭게도 물과 불이라는 이미지를 통해 구별된다. 물 속성인 웨이드는 상대방의 의견을 유연하게 수용할 줄 알고, 새로운 것에 민감하게 반응하고 매번 눈물을 흘리는 장면이 등장할 정도로 감정적이다. 화목한 가정에서 자란 건실하고 자상한 청년 웨이드와 분노를 억제하지 못하고 손님들에게 화를 분출하는 앰버는 자신의 결정보다 공동체의 결정이 중요한 보수적인 원소다. 이러한 성향은 상호작용하며 에너지를 공유한다. 앰버가 전통을 거부하는 동기를 제공하는 것도 웨이드다. 영화에서 부모의 전통을 물려받아야 한다는 암묵적인 룰은 세대 간의 갈등을 촉발하고 편견으로부터 해방되지 못하는 구조적 위압에 내몰린 커플을 보여준다.

 

ⓒ 월트 디즈니 컴퍼니 코리아

형태를 가공하는 애니메이션의 요소에 대하여

<엘리멘탈>의 서사는 평평하다. 특히 주인공인 불 원소 앰버와 물 원소 웨이드가 마치 인종과 신분을 초월하여 사랑을 완성한다는 이야기의 평면성과 더불어 주변부의 요소를 가볍게 다루므로 영화가 쉽게 휘발된다. 물, 불 그리고 웨이드의 상관인 게일 쿠물러스를 제외한다면, 공기와 흙 원소는 영화에서 어떠한 역할도 수행하지 않고, 그저 배경의 파편으로만 머무른다. 이러한 주변부의 부실함은 부모와 자녀의 갈등을 풀어나가는 과정과 둘의 로맨스 또한 온전히 발동하기 위한 시간을 방해한다. 그러므로 관객이 그들의 감정을 수용하고 감응하기엔 꽤 어렵게 체감되는 것도 사실이다. 이처럼 <엘리멘탈>이 그저 그런 영화로 소급될 수 있는 포인트가 있지만, 이것을 단순히 기능적이거나 서사의 개연성과 맥락을 비평하는 것은 큰 의미가 없다. 감독의 의도와는 무관하게도 애니메이션이 내포하고 있는 어떤 담론이 <엘리멘탈>에게서 어떻게 작동하는 지를 보는 것이 더 흥미로운 소재가 될 것이다.

<엘리멘탈>에서 가장 주목해 볼 만한 것은 원소의 인간화와 이로 인해 발생하는 소격효과다. 인간화란 표현은 은유를 토대로 한 것이지만, 영화에서 원소는 진실로 인간과 다를 바가 없다. 그들은 식사를 하고, 잠을 자고, 공동체를 형성하고 사랑을 나눈다. 더군다나 이 세계에는 인간이란 개념이 없다.(이와 비슷한 작품은 <카> 시리즈 정도) 범신론을 가시적인 현존으로 묘사했을 때, 이미지의 형태란 인간이 시각적으로 사유할 수 있는 모든 사유의 궤적을 넘어선 미지의 영역이라 볼 수 있다. 모든 애니메이션이 그렇듯 현실 재현이 아닌 가공된 재현으로 은유를 사용한 장르라는 점을 상기해 본다면, 우린 계속해서 부활하는 무언가를 목도하는 셈이다. 가령 픽사의 경우, 장난감이 말을 하고 생각을 한다거나(<토이 스토리>), 감정을 캐릭터로 가시적으로 구현하거나(<인사이드 아웃>), 죽은 주인공이 저승에 가서 영혼이 된다거나(<소울>) 하는 사물과 비가시적 형태를 가공하여 구현하는 것이 된다.

 

ⓒ 월트 디즈니 컴퍼니 코리아

철학자 '발터 벤야민'은 이를 파악한 사람 중 한 명이었다. 그의 저서 『기술복제시대의 예술작품 사진의 작은 역사 외』에서 「미키 마우스에 대해」 장에는 미키마우스를 보며 처음으로 사람들이 자신의 팔, 아니 자신의 몸뚱이를 도둑맞을 수 있다는 점이 드러난다고 밝힌다. 또 인간을 중심으로 구상된 피조물의 위계질서를 폭파한다는 것과 미키마우스가 두려움을 배우기 위해 떠난다는 모티프가 있다는 문장은, 우리는 여전히 재생산되고 있는 모든 애니메이션이 신체의 탈각성, (인간)권력의 붕괴, 의미의 보존성에 대해 논구하고 있음을 주시하게 된다. 그렇기에 <엘리멘탈>과 같이 본래 식별이 불가한 원소, 정령 같은 것에 가시적 형태를 부여하는 행위는 제법 모험적이라 부를 법하다. 더욱이 인간이 없는 세상에서 이들이 인간을 대신한다는 것처럼 보인다는 것도 특이하다. 여기서 흥미로운 점은 영화와 달리, 우리는 원소의 손과 발과 같은 신체를 주의 깊게 보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저 덩어리에 표시된 인간의 얼굴과 같은 표정에 주목할 뿐이다.

이는 신체를 바라보는 시각에 대한 선입견과 편견 등을 배제하는 요소로 작용하고 온전한 의미에 접근할 수 있도록 유도한다. 애니메이션이란 더 이상 카메라의 재현 법칙에 구속되거나 서열을 매길 수 없는 독특한 이미지로 탄생하게 되는 것이다. 애니메이션의 주된 특징은 신체의 탈각 속에서도 궁극적으로 도달하고 삽입하려는 감정의 순수성을 보존한다는 특징이 있다. 즉, 애니메이션은 '본다'라는 차원에서 끝나지 않고 외화면으로 연장되는 의미화 작용으로부터 그 형태를 복권할 수 있도록 더욱 기능한다. 물론 <엘리멘탈>은 캐릭터나 서사를 다루는 방식이 입체적이진 않지만, 특정 장면에서 이끌어내는 형태의 간결성, 혹은 덩어리라 할 수 있는 이 이미지가 영화 전체를 보았을 때 평면적임에도 불구하고 몇몇 장면은 감정을 고양하는데 효과적인 장면으로 연출된다. 이미지의 형태만으로도 얼마나 뇌리에 각인되기 쉬운지를 이번 <엘리멘탈>을 통해 또 한 번 생각해본다.

[글 이현동 영화평론가, Horizonte@ccoart.com]

 

ⓒ 월트 디즈니 컴퍼니 코리아

엘리멘탈
Elemental
감독
피터 손
Peter Sohn

 

출연(목소리)
레아 루이스
Leah Lewis
마무두 애시Mamoudou Athie
웬디 맥렌던-커비Wendi McLendon-Covey
메이슨 베르트하이머Mason Wertheimer

 

제작 디즈니 픽사
수입|배급 월트 디즈니 컴퍼니 코리아
제작연도 2023
상영시간 109분
등급 전체관람가
개봉 2023.06.14

이현동
이현동
 영화는 무엇인가가 아닌 무엇이 아닌가를 질문하는 사람. 그 가운데서 영화의 종말의 조건을 찾는다. 이미지의 반역 가능성을 탐구하는 동시에 영화 안에서 매몰된 담론의 유적들을 발굴하는 작업을 한다. 매일 스크린 앞에 앉아 희망과 절망 사이를 배회하는 나그네 같은 삶을 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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