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ritique] 두 개의 '서스페리아' 혹은 공포의 시선과 답변
[Critique] 두 개의 '서스페리아' 혹은 공포의 시선과 답변
  • 배명현
  • 승인 2023.06.19 13: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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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이크와 리메이크 사이에서"

루카 구아다니노의 <서스페리아>(2018)는 1977년 서독일에서 벌어진 시위의 한복판에서 시작한다. 카메라는 시위 참가자를 비추지 않는다. 대신 바더와 마인호프를 석방하란 외침을 전달한다. 반면, 원작인 다리오 아르젠토의 <서스페리아>(1977)는 주인공 수지가 어떻게 독일에 도착했는지를 서술하는 내레이션으로 시작한다. 두 영화는 외부인(미국의 유학생)이 내부(독일의 무용단)로 들어오게 되면서 벌어지는 사건을 다룬다는 점과 내부인과 그들의 단체가 오컬트 세계와 연루되어 있단 점을 공유하는 부분에서 리메이크-원작 관계를 이루지만, 영화 내부에서 쌓아 올린 상징과 서로 다른 지향점의 층위를 통해 리메이크-원작의 관계를 부정하기도 한다. 두 영화는 리메이크인 동시에 리메이크가 아니라는 형용모순을 성립시키는 기묘한 관계인 동시에 공포라는 장르가 현실에서 포착한 시점의 차이를 읽어낼 수 있게 하는 흥미로운 텍스트이다.

 

ⓒ 영화 <서스페리아>(977)

이러한 차이를 알기 위해선 두 영화를 나란히 놓고 살펴볼 필요가 있다. 먼저 지알로 호러의 대표작으로 유명한 아르젠토의 <서스페리아>(1977)는 말초적 감각에 집중한다. 강렬하고 비현실적인 조명과 미장센, 인테리어, 사물, 과장된 음악과 효과음 그리고 과잉된 감정, 다리오 아르젠토 감독은 이것들은 공포를 신산하고 신선한 볼거리로 조리해 관객에게 배달한다. 흔히 서사라 부르는 이야기는 개연성이 엉망인 걸 넘어 '데우스 엑스 마키나'를 떠올리게 하지만, 전개의 비약은 <서스페리아>라는 요리의 메인 재료라기가 아닌 향신료 정도의 역할에 머문다. 다리오 아르젠토 감독이 평생 서사가 약하다는 평가를 받았지만, 그럼에도 살아남을 수 있었던 이유는 애초에 그와 그의 영화 팬이 보(여주)고 싶었던 것은 개연성 있는 공포와 죽음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아르젠토의 <서스페리아>의 빈약한 서사에서도 주목해야만 하는 부분은 있다. 공포의 대상이 되는 주인공이 외부자라는 설정이다. 장르의 구조가 되는 내용을 요약하면 이렇다. 외부자인 '나'는 타자(들)의 세계에 들어가게 되는데, 나는 이들과 함께 살면서 기묘한 일들을 경험하게 된다. 이후 일련의 사건을 경유하며 밝혀지는 진실은 타자(들)가 내가 알던 이(들)가 아닌 전혀 다른 그(들)이었다는 점이다. 이는 이전의 영화들이 '외부자'를 바라보며 공유했던 시각과는 전혀 다른 위치에서 바라보고 있음을 드러낸다. 가령 김기영의 <하녀>(1960)를 예로 들 수 있다. 주인공이 속한 가족에 외부자인 가정부가 들어오게 되면서 내부자들 사이에 점점 균열이 생기더니 결국 파국을 맞이한다. 이는 도시화를 겪는 과정에서 발생한 공포 서사이며, 그 안에 내부자의 위치를 선점한 이들의 근원적 두려움을 다룬다. 이들은 신분과 출신이 불명확한 정체 모를 타자가 두려운 것이다. 하지만 도시화가 정착된 이후부턴 전과 다른 공포를 다룬다. 또 다른 예로 <악마의 씨>(1968)가 있다. 내가 잘 안다고 생각했던, 사랑하는 남편이 사실은 악마의 추종자라는 이야기. 이 시기의 타자는 정체를 몰라 두려운 대상이 아닌 나의 예상을 벗어나기에 두려운 존재다. 요컨대 우리가 일상적으로 만나는 타자가 실상은 미지의 대상이란 말이다. <악마의 씨> 이후에 만들어진 <서스페리아>(1977)가 타자의 진짜 정체를 마주하는 방식으로 쓰인 건 결코 우연이 아니다.

그래서인지 아르젠토의 <서스페리아>는 주인공이 타자(들)의 정체를 뒤쫓는 움직임으로 작동하는데, 이 추적의 과정은 수사물을 떠올리게 한다. 주인공 수지는 아카데미 입성과 동시에 희생자와 스치며 사건 해결을 '요청'받고, 주변 인물을 '심문'하고 현장에서 보고 들음으로써 '조사와 및 검사'를 진행하며, 이후 박사와 만나 '논리적 추론'의 과정을 거친 후 타자의 정체를 '지목'하고, 관객은 과정을 영화라는 '기록'으로 관람한다. 영화의 과정은 셜록 홈즈가 사건을 해결하는 '의뢰인의 요청-심문-현장 조사 및 검사-논리적 추론-범인 지목-왓슨의 기록' 과정과 정확하게 일치하는데, 의과 대학 교수 캐서린 몽고메리는 『셜록 홈즈』가 환자의 요청-문진-신체 진찰 및 검사-논리적 추론-질병 진단-의무 기록으로 이어지는 의사의 추론과 유사하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말했다(실제로 아서 코난 도일은 셜록 홈즈를 구상하며 자신의 스승이자 외과 의사인 조지프 벨을 참조했다). 여기에 더해 훌륭한 추리란 연역이나 귀추 같은 과학적 방식과 경험이나 직관, 상상력 같은 서사적 방식을 충분히 활용하여 하나의 사건에 논리적이고 서사적인 정합성을 부여하는 과정을 일컫는다 할 때, <서스페리아>의 공포는 추리라는 서사의 실로 과학과 연결되어 있음이 분명해진다.

이때, 아르젠토의 <서스페리아>는 오컬트 공포영화라기보단 과학적인 방식으로 이륙한 정합적 서사가 어떻게 인간의 미신을 죽이는지를 밝히는 영화가 된다.

 

ⓒ 영화 <서스페리아>(2018)

루카 구아디니노의 <서스페리아>는 원작인 아르젠토의 <서스페리아>를 완벽하게 다시 쓰고 싶어 했다는 욕망을 러닝타임의 시작부터 감추지 않고 드러낸다. 아카데미의 실내와 인물에게서 채도를 극단적으로 빼고 지알로 호러의 장르적 특징인 비현실적 조명과 색상의 사용을 최소화한다. 스크린 안에서 생기를 잃은 인물들은 춤을 추다 당장이라도 탈진해서 쓰러질 듯 위태로워 보이며 원작의 과잉되어 있던 모든 부분을 제거해 영화의 분위기를 한껏 진지하게 만든다. 구아다니노 감독은 공간을 구성하는 공기부터 원작과 전혀 다르다는 태도를 분명하게 한다. 여기에 더해 구아다니노의 영화는 인물들의 체력을 한계까지 밀어붙이는 동작의 극단적인 반복과 거친 숨소리로 관객에게 인물들의 고통을 전달하는 걸 넘어, 고통에 적극적으로 동참해보길 권유하고 있다.

반복해서 말하지만 구아다니노의 <서스페리아>는 원작을 처음부터 다시 쓴 영화이다. 그렇기에 원작이 도달하고자 했던 목표인 '타인의 진짜 정체' 따윈 중요하지 않다. 영화는 초반부터 무용 교수들의 정체가 마녀임을 관객에게 보여주는 것으로 원작의 방향과 리메이크작이 전혀 다른 방향을 바라보고 있음을 드러낸다. 하지만 정체를 드러내는 시퀀스를 통해 원작과 설정을 공유하고 있음을 암시하는 역할을 하기도 하는데, 무용 아카데미가 어떻게 대를 이어 유지되었는가를 보여주는 것이 그것이다. 교집합의 원소로는 오컬트가 있다. 주인공 수지가 연기를 시작하자 지하에 있던 올가의 몸이 꺾이고 부서진다. 수지의 연기와 올가의 몸이 교차편집으로 등장하고 수지가 몸을 비틀고 휘저으면 올가의 몸은 그 움직임에 따라 비틀리고 꺾이며 고꾸라진다. 두 인물 중 움직임의 의지를 선점하고 있는 인물은 수지이기 때문에 언뜻 수지가 올가를 멋대로 죽이고 있는 것처럼 보이기도 하지만, 정작 수지는 자신의 행위에 올가가 고통받는다는 걸 알지 못한다. 오컬트적으로 해석해 보았을 때, 아카데미가 귀신 들린 집이란 설정(정보)으로 읽어낼 수 있지만, 윤리의 차원으로 바라보았을 땐 이렇게 읽어낼 수 있다.

"나의 의지와 무관한 행동이 타인을 가해했다면, 그것은 나에게 어떤 죄가 될 것인가" 이것은 영화가 던진 첫 번째 질문이자 러닝타임의 끝까지 처절하게 부여잡고 놓지 않은 윤리적 고민이기도 하다.

구아다니노가 그린 <서스페리아>의 윤리적 고민은 오컬트를 경유해 드러나는데, 가령 아카데미의 교수인 블랑을 조사하기 위해 파견된 두 형사가 아카데미에 들어오자마자 최면에 걸려 얼어붙은 채 성기를 내놓고 있는 장면이 그 예이다. 원작에서 수사는 과학적 방법론을 드러내는 상징이자 살아서 아카데미를 나갈 수 있게 하는 유일한 수단이었지만, 리메이크에선 아카데미의 여성 교수들이 남성의 성기를 툭툭 건드리며 소리 내 웃는 씬으로 비유된다. 비약을 감수하고 말하자면 아르젠토의 <서스페리아>의 수사가 인류가 살아남기 위해서 신앙을 대신해 믿어야 할 대리물인 과학을 의미했다면, 구아다니노의 <서스페리아>의 수사는 조롱의 대상으로 전락한다. 과학-외부 세계-남성은 아카데미라는 구체적인 세계에 침투하지 못하며 무기력하고 우스운 존재다. 구아다니노는 이를 증명하듯, 영화 속 유일한 남성이자 의사인 요제프 클렘페러 박사가 페트리시아의 진술을 진실이 아닌 망상으로 판단하고 의무 기록일지를 작성하는 씬을 보여준다. 의학은 연역이나 귀추같이 과학적 사실에 기반하고 서사적인 정합성을 요구하지만, 진실은 언제나 사실을 초과한다고 영화는 보여준다.

그래서일까. '나의 의지와 무관한 행동이 타인을 가해했다면, 그것은 나에게 어떤 죄가 될 것인가'란 질문은 클라이맥스가 되었을 때 남성의 입을 통해 다시 발화된다. "나는 죄가 없어요. 나는 기억해요. 베를린에 죄인이 있냐고요? 사방에 있어요. 하지만 난 아니에요." 요제프는 빨개 벗겨진 채로 엎드려서 자신이 무죄임을 절박하게 애원한다. 그러다 곧 풀이 죽고는 울기 시작한다. 유감스럽게 이 순간을 <타인의 삶>(2006)에서 하필 동독 요원이었던 주인공의 대사가 서독인인 박사를 정확히 겨냥한다. "결백한 사람은 화를 내지만 그렇지 않은 사람은 풀이 죽고 조용해지지. 질질 짜기도 하고." 영화는 러닝타임 중간중간 푸티지를 거칠게 삽입하여 박사의 과거를 유추하길 적극적으로 권하는데, 우리는 이를 통해 그가 과거에 나치당 소속이었으며 유대인 아내를 잃었다는 사실을 어렴풋하게 짐작할 수 있다. 그의 거짓을 통해 베를린에 결백한 사람은 없다는 진실이 드러난다. 1977년 베를린은 아직 청산하지 못한 죄인이 가득하고 심지어 그(들)는 아무런 죄가 없는 것처럼 사는 장소라고. 여기서 2018년에 리메이크된 <서스페리아>는 그 존재만으로 이렇게 말하는 듯하다. 1970년대 베를린의 현실이 오늘날까지 현재진행형으로 있다고.

 

ⓒ 영화 <서스페리아>(2018)

물론, 베를린에 결백한 사람이 없다는 문장은 말 그대로 여성-오컬트-아카데미도 죄인에 속한다는 의미이다(보수주의자들(나치)이 여성을 애 낳는 기계로 보았을 때도 저항했지만). 아카데미에 들어선 순간 의도치 않게 지은 죄와 같은, 마르코스와 블랑 교수가 전쟁 중에도 아카데미를 지키려 행했을 스크린 표면으로 드러나지 않은 은폐된 행동(들)과 같은 죄들. 다만 영화는 아카데미의 세대와 내부와 외부의 잘못을 구획함으로써 둘의 온도가 다르다 말한다. 학생들은 비자발적으로 춤에 동원되어 희생되고, 이 희생(춤)을 통해 탄식의 모후(세 마더 중 한명)를 소환하려는 마르코스는 끔찍한 최후를 맞이한다. 죽기 전 "이건 예술이 아니야!"라는 마르코스의 대사는 나치에게 예술로 부역했던 그녀의 아이러니 혹은 스탠스를 드러낸다. 반대로 수지는 그 자리에서 이렇게 말한다. "나는 유일한 어머니다" 이는 "어머니는 그 누구의 자리도 대신할 수 있으나 그녀의 자리는 그 누구도 대신할 수 없다."는 영화 초반부에 등장하는 푸티지에 등장하는 문구를 복기시킨다. 그녀는 아카데미 내부를 벌하고, 부역자를 벌하고, 미스 테너를 살리고, 캐롤라인이 점프할 수 있도록 하며 유죄이지만 적극적 부역자가 아닌 요제프의 기억을 아픈 기억을 지워준다. 이 순간 그녀는 말한다. "우린 죄책감이 필요해, 닥터, 수치심도 하지만 당신과는 상관없어" 그녀는 파괴자인 동시에 포용하는 유일한 존재이다.

그렇다면 영화가 제시한 '마더', 그 궁극의 존재를 어디서 찾아야 할까. 애석하게도 그건 불가능해 보인다. 원작과 달리 구아다니노의 <서스페리아>는 과학을 조롱하고 오컬트를 지지한다. 오컬트란 세계의 외부에 있는 존재가 현실로 침투해 들어오는 미지의 존재(세계)에 대한 신뢰이다. 그러나 현실에 마더와 조응하는 대상이 있을 리 만무하다. 현실의 문제를 오컬트로밖에 해결할 수 없다면, 이건 인간의 실존적 무기력이며 절망을 의미한다. 그렇기에 러닝타임이 끝나는 순간 영화의 공포는 불가능으로 모습을 바꾸어 소환된다.

루카 구아다니노의 <서스페리아>(2018)가 그린 공포는 스크린 바깥으로 연장선을 그리고선 다시 발화한다. 영화가 숨소리와 익스트림 클로즈업을 이용해 관객의 피부에 신체적 고통을 가했던 근거를 여기서 발견할 수 있다. 영화는 공포를 신체로 감당하고 시각 청각 촉각으로 기억하길, 실제로 감각 하기를 요구한다. 시위하는 목소리의 주체는 제대로 쳐다보지 못하고 청산하지 못한 죄인들이 사방에 있는 이곳 현실에. 다만 감각의 결과가 무기력과 절망의 공포일 뿐이지만 말이다. 모든 공포영화의 공포는 현실을 포착한다. 하지만 그중 특별한 작품만이 공포를 갱신시킨다. <서스페리아>(2018)는 영화와 현실이라는 이중 스크린을 공포로 잠가버린 특별한 공포영화다.

[글 배명현 영화평론가, rhfemdnjf@ccoart.com]

배명현
배명현
 영화를 보며 밥을 먹었고 영화를 보다 잠에 들었다. 영화로 심정의 크기를 키웠고 살을 불렸다. 그렇기에 내 몸의 일부에는 영화가 속해있다. 이것은 체감되는 영화를 좋아하는 이유이기도 하다. 영화를 보다 문득 '아.' 하고 내뱉게 되는 영화. 나는 그런 영화를 사랑해왔고 앞으로도 그런 영화를 온몸으로 사랑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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