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th SIEFF] '핵 유랑민들' 자본의 유랑민들
[20th SIEFF] '핵 유랑민들' 자본의 유랑민들
  • 이현동
  • 승인 2023.06.13 12:00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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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이지 않는 에너지, 보이는 노동자들의 세계"
ⓒ 서울환경영화제

<핵 유랑민들>은 비정규직 원전 청소 노동자들의 삶을 다룬다. 먼저 이 영화는 뮌헨 영화과 출신인 킬리안 아르만도 프리드리히와 스트롬프 자르가가 함께 촬영했다. 등장인물들의 삶을 공유하기 위해서 감독들 또한 유목민처럼 캠핑카를 빌려 3개월이라는 긴 시간을 운행하는 대장정을 거쳤다. 이 아이디어는 전적으로 프리드리히로부터 출발했다. 왜냐하면 프리드리히는 유럽에서 가장 큰 원자력 발전소로 알려진 카테놈 발전소 근처에서 자랐기 때문이다. 노동자들은 캠핑카를 끌고 야영장과 원전 앞을 유랑하며 7평 남짓한 공간 안에서 생활하며 짧은 시간 가족들과 통화하고, 외로움을 달래기 위해 술을 마시며 티비를 시청한다.

영화에는 등장하지 않지만, 감독은 노동자들과 술을 마시고, 그들의 이야기를 들어주면서 밀접하게 그들의 삶 가운데 깊이 개입했다고 한다. 그러나 영화에선 감독의 인터뷰나 내레이션 등이 전혀 없다. 그만큼 다른 것이 아닌 그대로의 삶을 다루고 싶어 했다. 여기서 다큐멘터리가 기본적으로 체험을 기반으로 한 예술이라면, <핵 유랑민>은 그 형태를 잘 유지하면서도 특정한 사건에 주목하지 않고, 일상을 나열한다. 일상에서 관측되는 균질한 이미지의 중첩은 영화의 주제를 직관적으로 형상화하지 않는다. 그런데도 카메라의 앵글이 잡는 프레임만으로도 감독의 관심을 포착할 수 있다. 영화는 기발한 편집들보다 카메라 한 대로 영화가 시사하는 주제를 유려하게 담아낸다.

 

ⓒ 서울환경영화제

밤을 유랑하는 사람들

영화에서 주로 등장하는 시간은 '밤'이다. 이는 노동자들이 보통 밤에 일하고 낮에는 잠을 자기 때문이기도 하다. 밤은 기본적으로 공포의 감정을 전달한다. 밤의 속성인 '어두움'이 모든 공간을 무용하게 만드는 탓이다. 물론, 영화에서 거의 유일하게 보이는 빛이 있다. 그것은 발전소임을 드러내는 빛으로, 발전소를 통해 인위적으로 재생성되는 빛이다. '빛'이 발광할지언정, 노동자들의 생명을 손상하고 밤의 소모품이 되어버리는 도구로 전락시킨다. 이는 밤이 빛의 모습으로 재가동되는 것처럼 보이지만, 영화는 상당 부분을 묵시적으로 묘사함으로 이러한 밤의 유랑이 비극임을 암시한다. 아울러 캠핑카가 이동하는 경로에서 등장하는 사막은 황량하고 처량하게 보이기도 한다.

그렇다면 밤을 지배하고 있는 대상은 무엇인가. 그들이 밤에 일하는 이유는 다른 것이 아니라 '돈' 때문이다. 그들의 희망은 돈을 모아 땅을 살 때까지 일을 계속해 나가는 것이다. 영화에서도 나오지만, 전문직이 아닌 일반 노동자의 경우는 1,200유로 정도가 한 달 월급이다. 낡은 파이프를 해체하는 2주의 작업 기간 동안 피폭량 3개월 치가 된 어느 한 노동자는 그럼에도 요양병원에서 노인 기저귀를 갈아주는 것보다 낫다고 말한다. 또 월 5천 유로를 벌어야 한다는 건 그들에게 조그마한 봉급으로는 가족을 부양하기 어려운 사회 현실을 반영하는 것이기도 하다. 위험을 감수하면서까지 세 배 이상이 되는 봉급을 받기 위해 그들은 밤을 유랑한다. 노동자들의 위험은 돈으로 환원되고, 밤이란 공간이 그들의 활동 무대가 된다. 이 일을 "지옥 같다"고 말하는 노동자의 음성은 빛이 소멸한 밤의 세상에서 유랑하는 이들의 속내를 드러낸다.

영화 내내 이미지로 산포되어 있는 건 원전 안이 아니라 원전 밖에서 이를 관찰하는 '카메라'다. 무엇이 <핵 유랑민들>의 핵심이냐고 한다면, 노동의 현장이 아닌 그 밖에 노동자가 즐기는 풍경일 것이다. 원전을 청소하는 일을 보여줄 수 없는 것은 당연히 보안상의 이유도 있겠지만, 그것이 얼마나 위험한 일인지를 지시하고 있기 때문이기도 하다. 유랑민들의 삶은 보이지 않지만, 끊임없이 피폭에 노출되는 위험한 삶임을 그들의 음성을 통해 알 수 있다.

 

ⓒ 서울환경영화제
ⓒ 서울환경영화제

유랑민들의 시선

다큐멘터리에서 카메라가 담아내는 윤리성이란 '프레임이 주로 어디에 머물고 있는가'이다. 인물일 수도 있고, 배경일 수도 있다. 표정과 제스처를 통해 유추가 가능한 인물과는 달리 풍경은 해석을 필요로 하는 경우가 많다.

이전에 썼던 <스트라이킹 랜드>(2022)가 아방가르드 영화라고 할 수 있을 정도로 서로 연계되는 장면이 없었다면, <핵 유랑민들>은 픽션이라 할 정도로 시간의 흐름에 따라 몽타주가 잘 정돈되어 있다. 영화에서 카메라는 인물들이 근접해서 찍기도 하지만, 아주 멀리 보기도 한다. 특히, 캠핑카라는 공간의 제약과 원전의 거대한 크기는 영화가 드러내려는 모종의 영역임이 틀림없다. 캠핑카에서는 촬영을 넓게 하는 것이 불가능하다. 곧 이것은 영화뿐만 아니라 인물의 시선이 구조의 차원에서 제한되고 있음을 보여준다. 이 구조는 프랑스라는 나라를 지목하고 있는 하나의 방식이기도 하다. 영화에선 두 번의 대선에 대한 이야기가 나오는데, 마크롱의 지지율과 당선 소식이 바로 그렇다. 그렇다면 이 장면의 삽입은 과연 긍정적인 신호일까. 부정적인 신호일까. 유랑민은 그 소식에 어떤 제스처도 취하지 않는다. 아마 누가 선출되든 이 유랑은 계속될 것이고, 원전을 향한 카메라의 시선 또한 멈추지 않을 것임을 알기 때문이다.

이러한 간접 화법은 영화의 풍경을 지시하는데도 동원된다. 원전은 프레임을 잡아먹을 듯이 큰 위치를 차지한다. 여기서 우린 영화가 포착하고 있는 원전을 바라보는 고정적인 앵글을 볼 수 있다. 익스트림 롱 숏과 로우 앵글이 바로 그러한데, 이를 통해 원전의 위용을 가시적으로 드러낸다. 반복적으로 구술되는 이 이미지의 정체는 이러한 위용 앞에서 한없이 무력하게 보이는 유랑민들의 시선을 비교하여 보여준다. 이런 이미지가 진술하고 있는 내용은 원전과 노동자 사이의 격차에 대한 내용을 면밀하게 검토할 수 있도록 해준다. 한 노동자는 캠핑카에서 생활한 지 5년이 되었다고 말하기도 하고, 다른 한 노동자는 원전 근방에 캠핑장을 수소문하는 것도 힘들어 전전긍긍하기도 한다. 이들 모두 연인과 가족에게서 떨어져있다. 게다가 돈을 모아서 땅을 사겠다는 어떤 노동자의 말은 실행될 수 있을지 알 수 없다. 유랑의 이유와 목적이 자본의 영역 안에 포함되어 있다는 것을 유심히 관찰하면 이 영화의 공간 이미지는 이 주제에 충실히 대응한다.

여기서 가장 무서운 이미지는 원전에 들어가는 노동자들이다. 가령 <뤼미에르 공장을 나서는 노동자들>(1895)은 2분여 동안 사운드와 함께 인물의 생생함과 더불어 공간을 풍부하고 다채롭게 프레이밍 하지만, <핵 유랑민들>에는 손가락으로 셀 수 있을 정도로 적은 수의 노동자들이 원전을 향해 터벅터벅 나아간다. 심지어 그들은 각 지역에 있는 원전을 향해 먼 거리를 운행해야만 한다. 그들의 표정에는 아무런 감정도 없다. 유랑민들의 시선은 자본을 향해 그렇게 기계적으로 움직인다. 한편의 로드무비라 칭할 수 있는 이 영화는 희망보다 앞으로도 지속될 밤의 세계에 대한 전망을 무던하게 제시한다. 그들이 일하러 가는 장소를 명시하는 법이 없다. 어디든 상관없이 그들에게 봉급을 쥐어주면 그만이기 때문이다. 방대한 에너지가 소비되고 또한 유지하기 위해 소모되는 노동 환경은 암묵적으로 노동의 병폐를 이야기한다.

그러나 단순히 이것이 노동 환경이 개선되어야 한다는 메시지로 소급되지 않으므로 <핵 유랑민들>는 우리의 사유를 이미지만으로 촉진시킨다.

영화 속 원전에 인접한 노동자들의 삶을 보는 것은, 그것만으로도 기괴하고도 섬뜩함을 가져온다. 과연 우리는 그들을 보면서 무엇을 말할 수 있을까. "중요한 건 우리가 함께하는 거야"라는 한 커플의 말은 이 영화에서 씁쓸한 음성으로 남는다. 에너지는 보이지 않지만, 노동은 언제든지 누군가를 유랑하게 만들고, 보이게 할 것임은 분명하다.

[글 이현동 영화평론가, Horizonte@ccoart.com]

 

ⓒ 영화 <핵 유랑민들>

핵 유랑민들
Nuclear Nomads
감독
킬리안 아르만도 프리드리히
Kilian Armando FRIEDRICH
티지안 스트롬프 자르가리Tizian Stromp ZARGARI

 

제작연도 2023
상영시간 73분
공개 제20회 서울환경영화제

이현동
이현동
 영화는 무엇인가가 아닌 무엇이 아닌가를 질문하는 사람. 그 가운데서 영화의 종말의 조건을 찾는다. 이미지의 반역 가능성을 탐구하는 동시에 영화 안에서 매몰된 담론의 유적들을 발굴하는 작업을 한다. 매일 스크린 앞에 앉아 희망과 절망 사이를 배회하는 나그네 같은 삶을 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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