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th SIEFF] '스트라이킹 랜드' 인간과 땅은 어떻게 서로를 도구화할까
[20th SIEFF] '스트라이킹 랜드' 인간과 땅은 어떻게 서로를 도구화할까
  • 이현동
  • 승인 2023.06.08 11: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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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이 땅을 표식하는 것일까 혹은 땅이 표식을 기다리는 것일까."

<스트라이킹 랜드>는 라울 도밍게스의 두 번째 작품으로 에이미 j. 엘리아스와 크리스찬 마라루의 책 『행성의 전환』(2015)을 모티브로 한다. 이 책은 지구 생명체의 자연적 상호공간을 테마로 작가와 예술가들이 문학과 시각 예술, 인문학 등에서 등장하는 새로운 작업에 관해서 설명한다. 다시 말해, 세계화 시대를 살아가는 인류에게 앞으로 초래하게 될 생태계의 위기의 결과와 담론을 유도하기 위해 쓰여졌다.

 

ⓒ 서울환경영화제

여기서 영화를 통해 모색해야 할 것은 '인간과 자연이 어떤 관계를 맺고 있'으며, 그것이 영화 예술로 전환되었을 때 '감독이 무엇을 탐구하고 있는지'를 유심히 보는 것이다. 특정한 서사도 없고, 해석의 여지를 아주 미세하게 남겨두는 이런 다큐멘터리 영화에서 관객은 충만한 관찰력을 동원해야 한다. 사실과 허구의 문제를 구분하는 일차원적인 시선을 넘어서 도약해야 하는 건 카메라가 주시하고 있는 윤리성뿐만 아니라 영화 내에 있는 리듬을 파악할 수 있는 감식안이다.

이를테면, '피터 휴튼'이나 '제임스 베닝'의 정적인 리듬과 지리적 요소를 영화의 대상으로 표명한다면, '왕빙'이나 '오다 카오리'는 운동성을 지닌 인물과 장소로부터 대상과 리듬을 찾는다. 이런 영화들의 특징은 본질적으로 '본다'라는 행위가 무엇인지를 끊임없이 되묻는 수행적 차원에서의 활동을 요구한다는 것이다. 파편적으로 나열된 이미지는 어떤 의미소로 역할을 한다기보다 감상자에 의해 재해석되고 구축되는 모종의 중립성을 지닌다.

영화의 영어 제목(Striking Land)은 강렬하고 공격적인 어감을 갖고 있지만, 본래 제목인 테라 퀘 마르카(TERRA QUE MARCA)는 직역하면 '표시하는 땅' 정도로 번역된다. 이때, 우린 영화를 다른 각도로 관찰하게 된다. 땅의 표시자인 인간과 표식된 자연이란 이미지가 다채롭게 수집되고, 두 종류의 상호관계에 대한 관찰이 시도된다. 하지만 이 영화를 주체화하고 있는 건 인간인지 자연인지 불분명하다. 굳이 화면에 등장하는 빈도를 따지자면 5:5 정도다. 또한, 자연을 대상으로 하면서도 그 풍광을 찬미한다거나 반대로 훼손된 자연을 복구해야 한다는 필요성을 적극적으로 호소하지도 않는다. 영화는 오직 땅의 역사만을 보게 한다.

 

ⓒ 서울환경영화제

<스트라이킹 랜드>의 첫 장면은 숲에 있는 한 남성의 손놀림으로 시작된다. 오른손 손가락으로 어떤 장소를 지목하고 이어지는 장면엔 왼쪽 손목이 카메라 가까이에 붙어 있다. 이는 정확히 식별하기 힘들지만 붉게 그을려 농사를 많이 한 팔처럼 보인다. 곧이어 카메라는 두 사람을 쫓다가 나무를 벌목하는 사람으로 전환되고, 소리를 내며 쓰러지는 나무를 본다. 과실을 맺은 나무가 경작되지 않은 토양 위에 서 있고, 삽을 들고 땅을 경작하는 이들이 나오다가 포크레인으로 땅을 굴착하고 있는 장면이 나온다. 건축 장면과 아스팔트 위를 달리는 자동차의 행렬, 갈라진 땅, 암석의 구조는 불안정하다. 이를 깨고 나오는 강아지의 짖음은 이런 인간의 행위를 부정하려는 것인지 아니면 분위기를 환기하려는 것인지 알 수 없다. 영화는 종종 그 위에서 살아가는 다양한 생명체의 모습도 담는다. 양의 목줄을 풀어주어 우리 밖으로 풀어주고, 하늘 위를 여유롭게 비행하는 새와 한가롭게 풀을 뜯어 먹는 말 등을 담는다. 감독은 인물과 같이 이를 동등한 방식으로 찍었다. 오히려 인간의 감정과 행위는 굳어있는 것처럼 보이지만, 동물은 더욱 자유롭게 자신의 방향을 찾아 나아가는 모양새로 보인다. 사실 인간과 동물은 일방적인 관계로 여겨지기 쉽지만, 여기에서 동물을 독자적인 형상으로 둠으로 감독은 인간과 다른 역할로 위치시킨다.

사람뿐만 아니라 땅을 고르게 만드는 몫은 기계로도 이어진다. 농부가 편만해진 땅에 씨앗을 뿌리고, 이가 잘 스며들 수 있도록 반복하여 괭이질할 때 다음으로 기계를 교차하는 시퀀스를 삽입한다. 반대로 기계로 감자를 수확하다가 순간 손으로 감자를 채집하는 손의 모습이 등장한다. 여기서 흥미로운 것은 카메라가 손과 발, 얼굴 등을 근접 숏으로 찍는다는 점이다. 이러한 숏을 누군가는 브레송 적이라거나 자크 베케르를 <구멍>(1960)에서의 땅굴 파는 장면에서 오랜 시간 확대되는 손과 콘크리트 파편이 연상될지도 모른다. 인간의 얼굴에서 감정이 표출되는 것이 아닌 특정 신체 부위를 통해 또 다른 감정의 감각을 발굴하고 동시에 기존의 화법을 전복하려는 두 종류의 시도가 함께 있는 것이다. <스트라킹 랜드>는 이 두 가지 시도를 포함하면서도 영화 문법에 대해 거리를 둔다. 영화는 인간의 모습 전체를 담지 않고, 인물들은 단 한 번도 온전한 대사를 내뱉은 적이 없다. 예를 들어 작업을 하는 사람의 얼굴표정은 빛의 발광으로 인한 자연 반사적으로 찌푸림에 불과하다. 자연의 이미지는 인간과 땅의 경계에서 무감각하게 엮여 있다. 그렇기에 땅에서 오로지 채집 활동을 하는 인간은 마치 유흥과 여가를 통해 인간다움을 소유해야 한다는 당위와 탈각된 것처럼 보인다. 우리는 등장하는 인물이 인간인지 자연인지 분간할 수 없을 정도로 탈-인간화되어 있고, 도구화된 인간을 본다.

각기 다른 신체를 활용하는 방식도 그렇지만 이미지의 차이와 반복 속에서 해부할 수 있는 건 인간의 감정이라기보단 비인격적 주체인 땅에서 소모되는 감정으로 보이기까지 한다. 자연을 대상으로 한 <스트라이킹 랜드>에서 주체인 땅은 계속해서 인간에게 노동의 대상이 될 수밖에 없는 필연성을 지닌다. 그래서 땅의 감정이란 제법 우스꽝스럽지만 한 번쯤 공상하게 된다. 땅이 도구화되는 것만큼이나 인간도 땅으로부터 도구가 된다는 사실 말이다.

 

ⓒ 서울환경영화제
ⓒ 서울환경영화제

자연을 찍는 행위

대부분의 파편적인 숏에서 카메라는 대상을 다소 불편하게 찍는다. 아까 말했듯 근접 숏이 압도적으로 많은데, 이는 핸드헬드로 찍혀있어서 굉장히 불안하게 느껴진다. 또 고정된 프레임처럼 보였던 장면도 잘 보면 조금씩 흔들린다. 바람에 의해 흔들리는지 아니면 의도적으로 삼각대가 아닌 핸드헬드로 카메라를 들고 찍는 세팅인지는 알 수 없다. 그러나 분명한 사실은 '자연은 예측할 수 없는 운동성을 지닌다'는 점이다. 아침과 밤을 규명하는 빛과 어둠 사이를 카메라가 절대적으로 조율할 수 없으며 태양을 구름이 막았을 때, 나무와 땅에 음영이 발생하는 장면들은 그 사례다. 이런 장면은 감독이 타이밍을 설계하고 찍은 것이라기보단, 우연히 카메라에 찍혀진 것에 가깝다. 사운드도 마찬가지다. 영화 프레임 내에서 들리는 다양한 디제시스 사운드는 자연이란 사실을 충실히 매핑하고, 자연만이 할 수 있는 소리를 녹음하고 내보낸다. 이때 우린 영화'적'이란 표현이 무용할 수 있음을 깨닫는다. 일반적으로 영화가 표현할 수 있는 서사라는 정합성을 포기하기 때문이다.

영화 속 불가해한 자연은 인간의 눈에 환각처럼 체감되기도 한다. 그때 본다는 행위는 굉장히 힘들어진다. 만약 이 영화가 만약 상영시간을 알 수 없다면 우린 관람을 포기할지도 모른다. 설사 그러할지라도 자연으로부터 발견하는 노동의 반복성과 필요성을 염두에 둔다면, 관객은 가치를 갖고 보기를 계속할 것이다. 특히, 마지막 장면은 이를 잘 설명한다. 한 남자가 오렌지 껍질을 까서 먹는 장면이 나온다. 유일하게 이 장면은 자연과의 관계를 또렷하게 상정한다. 이만큼이나 수많은 과정을 거쳐 수확된 음식을 먹을 수 있다는 것이다. 좋은 방식이든 나쁜 방식이든 인간은 자연을 표식하고 자연은 인간에게 무엇인가를 가져다준다. 영화에서 과일 하나를 수확하기 위해 모종의 과정이 필요한 것처럼 이 활동은 인류에게 있어 너무나 자연스럽다. 여기서 자동화된 기계가 야기하는 도구의 전환이든 순수하게 인간이 손으로 채집 활동을 하든 우린 이 순환 관계 속에서 인간의 말보다 땅의 말에 더 귀를 기울이게 될 것은 분명하다. 왜냐하면 땅이란 모든 생명체의 유지를 담당하고 보이지 않더라도 지금도 어디선가 생명을 발산하고 생성하는 역할을 할 것은 분명하기 때문이다.

이처럼 중첩되는 숏을 통해 우리에게 인간과 자연 사이의 호흡을 들려준다. 성서에서 인간(아담)의 어원이 흙임을 상기해 보면 우린 그 호흡 사이의 본질이 무엇인지 의구심을 가지게 된다. 언어가 존재하지 않고 호흡만이 존재했던 태초에 만약 영화를 찍는다면 <스트라이킹 랜드>와 같은 영화가 될 것이다.

[글 이현동 영화평론가, Horizonte@ccoart.com]

 

스트라이킹 랜드
Striking Land
감독
라울 도밍게스
Raul DOMINGUES

 

제작연도 2022
상영시간 65분
공개 제20회 서울환경영화제

이현동
이현동
 영화는 무엇인가가 아닌 무엇이 아닌가를 질문하는 사람. 그 가운데서 영화의 종말의 조건을 찾는다. 이미지의 반역 가능성을 탐구하는 동시에 영화 안에서 매몰된 담론의 유적들을 발굴하는 작업을 한다. 매일 스크린 앞에 앉아 희망과 절망 사이를 배회하는 나그네 같은 삶을 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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