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카일리 블루스' 이곳과 다른 저곳의 시공간
'카일리 블루스' 이곳과 다른 저곳의 시공간
  • 배명현
  • 승인 2023.06.04 11: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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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일리가 아닌 비간의 카일리"
ⓒ 찬란

우리의 직관과 다르게 과학은 "시간이 흐르지 않는다"고 말한다. 시간은 공간과 분리할 수 없는 '시공간'이라는 상태로 존재하며 과거, 현재, 미래라 부르는 시간의 관념은 사실 '모두 동시에 온전한 상태로' 존재한다고 말이다. 하지만 이런 과학적 사실을 선뜻 받아들이기란 쉽지 않다. 우리는 세계를 3차원으로 '인식'하고 시간의 흐름을 '체감'하며 현재를 '경험'하는 삶을 살아가기 때문이다. 그리고 과거와 미래에서 삶을 추동케 하는 의미를 가지고 온다. 제아무리 과학에서 시공간이 '사실'이라 말한들, 우리는 이해를 할 뿐 온몸으로 받아들이진 못한다. 과학은 인간이 인식하는 세계와 무관한 것을 거리낌 없이 이야기하지만, 인간은 사실 자체만으로는 삶을 지속하지 못하며 그 너머에 있는 어떤 의미의 형태를 갈구한다.

과학과 예술의 차이는 여기서 발생한다. 과학이 실제와 현실의 진리를 밝혀내려 할 때, 사용하는 도구는 '객관'이다. 수많은 과학자들은 객관이란 날을 세워 세계와 대상의 존재를 해부하고 관찰한다. '과학은 객관적 시각이다'라는 주장에 대한 반증이 무수히 많지만, 과학은 수정을 거듭해 나가며 객관이란 방향성을 향해 계속해서 나아가려 한다. 이와 반대로 예술은 행위의 주체인 예술가를 경유함으로써 왜곡된 현실과 실제를 제시한다. 이때 필요한 도구는 '주관'이다. 예술가는 세계에 존재하는 무수한 대상 중 몇몇을 고른 후, 뒤섞고 재배치하여 재구축한다. 예술(가)은 의도적으로 왜곡된 현실을 제시하는 것으로 실재의 현실에선 미처 발견할 수 없었던 '의미'를 발명해낸다. 다시 말해서 과학은 수많은 과학자가 쫓는 하나의 진리라면, 예술은 수많은 예술가가 쫓은 무한한 진리이다.

 

ⓒ 찬란

바로 이 지점에서 우리는 시간과 공간을 함께 다루는 오늘날의 작가(들)을 흥미롭게 바라볼 수 있게 된다. 비간 감독은 <카일리 블루스>(2015)와 <지구 최후의 밤>(2019)에서 시간과 공간이란 테마를 반복한다. 두 작품은 '카일리'라는 중국에 실재하는 공간을 배경으로 하고 있으며, 감독은 영화를 움직이는 동력을 시간과 공간을 통해 얻는다. 비간은 영화에서 낯선 현실을 포착해 의미를 생성하려는 시도 대신, (감독 자신에게) 익숙한 현실에서 발견한 이해되지 않는 친숙함과 친밀함을 탐구의 대상으로 선택한다. 그리고 시간의 순서를 복잡하게 뒤섞어 놓은 뒤 스크린 위에 전시한다. 이때 그의 영화는 카일리 자체로써가 아닌, 새로운 시공간으로 구축된 카일리로 향유되기를 기다린다.

비간이 의미를 생성해내는 방법론은 자연스럽게 '안드레이 타르코프스키'와 '아피찻퐁 위라세타쿤'을 떠올리게 한다. 이미 다수의 글은 비간의 작품을 두고 <잠입자>(1979), <거울>(1975), <노스텔지아>(1996), <엉클 분미>(2010)등의 작품을 나열하며, 그의 영화가 다루고 있는 '소재–물과 유동적 속성, 시간, 환기를 일으키는 오브제' '테마–기억, 환상적 구원' '형식-비선형적 서사와 파편화된 이야기' 등과 같이 표면으로 드러나는 공통점에 집중한다. 그리고 이 점들이 두 감독으로부터 영향받았다는 증거로 채택되어진다. 물론 동의하는 바이지만, 보다 중점을 두고 살펴보고 싶은 부분은 영화의 요소가 아니라 앞서 언급한 '예술가가 재구축한 현실'이란 결과물을 만들어 내는 '방법'이다.

비간과 안드레이 타르코프스키, 아피찻퐁 위라세타쿤은 '공간'과 '시간'을 각자의 방식으로 재구성한다. 이들의 영화는 비선형적 서사로 진행되기에, 우리는 세 감독의 유사성을 강하게 느끼지만, 보다 감각을 예민하게 세운다면, 각자의 차이점에 집중할 수 있다. 타르코프스키는 러시아의 농촌을 기억의 방식으로, 아피찻퐁은 태국의 정글을 환상의 방식으로, 그리고 비간은 중국의 카일리를 시의 방식으로 재구성한다. 이때, 세 감독 모두 시적 영화를 만든다는 평을 듣는 감독이기에, 비간 감독이 시의 방식으로 재구성해낸다는 점에 의구심을 가질 수 있지만 잠시 생각해보자. 타르코프스키의 영화는 과거(기억)의 새로운 집합이고, 아피찻퐁의 영화는 현실의 외곽에 있는 것이 스크린 안으로 침투해 들어오는 기적이다.

그러나 비간의 영화는 카일리의 과거인 동시에 현재이고 미래이다. 그리고 과거와 미래가 공존하며 현재가 사라지기도 한다. 그의 영화는 개인의 내밀한 고백에서 출발하며, 비선형적 시간의 충돌 속에서 리듬을 타며 선형적으로 공간을 이동―가령 <지구 최후의 밤>에서 가장 유명한 롱테이크신―은 비논리와 초월의 장이기도 하다.

 

ⓒ 찬란

특히, 장편 데뷔작 <카일리 블루스>는 이 점이 적극적으로 반영한다. 시놉시스는 이렇다. 주인공 천성의 꿈에 망자가 된 어머니가 등장하고 시계를 좋아하는 조카 웨이웨이가 다른 지역으로 버려진다. 천성은 조카를 찾기 위해 카일리를 떠나 전위안으로 향하는 와중에 당마이라는 도시를 통과한다. 이 과정에서 천성의 시간이 뒤섞이게 된다. 의사이자 시인인 천성의 이동을 중심으로 따라가는 영화는 작품 안에 등장하는 시집을 내래이션으로 들려주기까지 하면서 시를 영화의 흐름 사이에 끼워 넣는다.

<카일리 블루스>의 전반부는 현대 미술 전시실에 서 본 듯한 분절된 씬들의 합으로 이루어져 있는데, 꿈인지 현실인지 알 수 없게 만든 연출 중간중간 서사의 단서가될 대사와 소재들이 흩뿌려져 있다. 죽은 어머니와 어린 조카 웨이웨이, 레일을 타고 도는 놀이기구, 그린 손목시계와 벽의 못, 기차, 공과 미러볼이 스크린 위에 자꾸만 등장한다. 이후 영화는 37분에 달하는 긴 롱테이크로 당마이에서 이리저리 움직이는 여러 인물의 동선을 하나의 카메라로 연결해 나가며 궤적을 그린다. (극단적으로 길고 이동 거리가 먼 롱테이크이기에 중간중간 어설픈 움직임이 두드러져 보이긴 하지만 각기 다른 공간에서 이곳까지 온 인물들을 집결시키려는 의지가 놀랍다. 그리고 이후 <지구 최후의 밤>에서 더욱 세련된 방식으로 반복된다) 정말 이상하게도 버려진 어린이였던 조카 웨이웨이는 이 순간 웃자란 소년이 되어있었고 삼촌은 그가 자신의 조카임을 인지하지 못한다. 성장한 웨이웨이는 그에게 기차에 시계를 그려야 자신의 고향을 구할 수 있다는 말을 남긴다. 이 과정에서 각 인물의 이동 과정이 산발적으로 보여지긴 하지만 이들 모두 사건이라 부를만한 인과적 갈등과는 거리가 멀다.

 

ⓒ 찬란

영화는 사건을 다루지 않는다. '애초부터 사건에 관심이 없었다'가 더 정확한 표현일 터이다. 만약 영화가 카일리라는 공간에서 벌어진 사건을 다루고자 했다면, 서사는 소화될 수 있는 형태로 전달되어야 했다. 감독은 자신이 딛고 서 있는 객관적 카일리를 주관적 공간으로 재구성(영화화)하는데 집중한다. 감독은 실제의 카일리를 비간의(자신의) 카일리로 재구성해내기 위해 시간성을 빼앗고 인과를 분절시켰으며, 질문하는 인물에 제대로 된 답을 한 번도 주지 않음으로써 소통 불가능성과 불화하는 관계를 보여준다. 그가 선택한 소재들은 너무나 명징하게 시간을 시각화하고, 카메라는 고정된 채 시계방향으로 패닝한다. 영화는 러닝 타임 내내 발생하는 의미의 생성 과정을 통해 카일리라는 물질적 공간이 위도와 경도로 표시될 리 없는 곳으로, 요컨대 새로운 시공간적 자리에 위치시켜 놓는다. 그는 소설이 아니라 시로 전위시킨다.

다만, 재구성뿐이라면 <카일리 블루스>는 개인의 내면에 함몰된 혼잣말에 지나지 않았을 것이다. 영화의 설득력은 롱테이크와 그 이후를 통해 생성된다. 주인공 천성이 카일리로 돌아오는 기차에서 벌어지는 기적(성장한 웨이웨이가 기차에 그린 시계가 바늘을 거꾸로 돌리며 천성의 옆을 지나간다)은 그가 잠든 동안 벌어진 일이라 미처 인지하지 못했지만, 카일리로 도착했을 때, 이전과 무엇이 달라져 있음을 감각 한다. 여기서 달라진 무엇은 언어로 포착될 수 있는 형태의 무엇이 아니다. 그가 '시'라는 방식으로 구현해 낼 것이라 마음먹은 순간 혹은 그 이전부터 단어로는 붙잡을 수 없는 '그 무엇'이다. 성장한 웨이웨이가 천성이 없는 공간에서 발생시킨 기적과 사라진 웨이웨이를 찾으려는 천성의 사랑, 그리고 또 다른 등장인물들의 생과 이동은 카일리라는 공간을 개인 너머의 보편으로 의미를 확장 시킨다. 이렇게 '새로운 시간과 공간으로 구축한 카일리'는 '그 무엇'이라는 의미를 발명해낸다. 작품의 당위성과 정당성은 여기서 생성된다.

 

ⓒ 찬란

비간의 카일리는 공간인 동시에 과거이고 현재이며 미래이다. 영화의 시간은 환상이라기보단, 현실의 논리를 거부하는 의지이며 감독이 지켜내려는 공간에서 태어난 하나의 감각이다. 영화는 카일리를 과거에도 여기 현재에도 저기 미래의 지금에도, 언제나 존재하게 만들었지만, 실제의 카일리는 멈추지 않고 늙어가며 낡아간다. 문득 절망적인 생각이 들지만, 비간은 희망을 택한 것으로 보인다. 당마이에서 이동하는 여러 인물의 궤적을 담은 롱테이크 중에는 이런 장면이 담겨있다. 배를 타고 강을 건넌 양양은 어린 조카를 위해 바람개비 하나를 산다. 하지만 바람이 불지 않아 바람개비는 돌지 않는다. 이때 양양의 뒤에서 소년 웨이웨이가 등장한다. 그는 어렸을 때와 마찬가지로 손목에 시계를 그리고 다니지만 마을을 지키기 위해 기차에 시계를 그리겠다는 마음을 가진 성숙함을 가진 사람이기도 하다. 그런 그가 양양의 바람개비를 빼앗아 흔든다. 멈춰있던 바람개비는 드디어 돌기 시작한다. 손목에 그린 시계와 기차에 그린 시계 그리고 바람개비 모두 정지되어 있는 시간이지만, 웨이웨이는 결국 시침과 분침을 움직이게 만든다. 영화의 시간과 공간은 결국 가만히 바람을 기다리기보다 움직이기를 택한다.

[글 배명현 영화평론가, rhfemdnjf@ccoart.com]

 

ⓒ 찬란

카일리 블루스
Kaili Blues
감독
비간
Gan Bi

 

출연
진영충
Yongzhong Chen
사리순Lixun Xie
여세학Shixue Yu
곽월Luna Kwok

 

배급|수입 찬란
제작연도 2015
상영시간 110분
등급 12세 관람가
개봉 2023.05.24

배명현
배명현
 영화를 보며 밥을 먹었고 영화를 보다 잠에 들었다. 영화로 심정의 크기를 키웠고 살을 불렸다. 그렇기에 내 몸의 일부에는 영화가 속해있다. 이것은 체감되는 영화를 좋아하는 이유이기도 하다. 영화를 보다 문득 '아.' 하고 내뱉게 되는 영화. 나는 그런 영화를 사랑해왔고 앞으로도 그런 영화를 온몸으로 사랑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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