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ritique] 도대체 영화란 무엇인가?
[Critique] 도대체 영화란 무엇인가?
  • 이상용
  • 승인 2023.05.31 13:00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파벨만스> 혹은 우화를 내세워 말하거나 말하지 않는 것에 관하여
ⓒ CJ ENM

스티븐 스필버그의 <파벨만스>(2022)는 당혹스러운 한글 제목이다. 영화 속 인물들은 주인공을 향해 '페이블'이라 부른다. 페이블은 주인공 새미의 '성씨'다. 심지어 페이블을 발음하기 어려워하며 놀리는 장면도 등장한다. 실제로 페이블은 부르기가 어려운 발음은 아닌 것 같은데, 여기에는 연유가 있는 것으로 보인다. 다수의 전기는 독일계 유대인이었던 '스필버그'라는 성이 사람들 사이에서 종종 놀림감이 되었다고 설명한다. 이름이 지닌 의미는 다음과 같다.

"스필버그의 가족 이름(성씨)은 독일어로 '유희의 산'이라는 뜻이다. 스필(독일어 발음으로 슈필)은 오락이나 무대 연극(영어 단어 '스필 spiel'은 암송을 의미한다)이라는 의미를 담고 있으며, 버그(독일어 발음으로 베르크)라는 말은 산이나 언덕을 뜻한다. 이는 엔터테인먼트계에 종사하고, 아동기 이후 축소판 산을 만들어 촬영하기 좋아했던 유희성이 농후한 어른에게는 아주 적합한 이름이다." ―『C학점의 천재 스티븐 스필버그 1』, 조셉 맥브라이드, 자연사랑, 국역본 p.28

조셉 맥브라이드가 쓴 책의 원제는 『Steven Spielberg: A Biography』다. 오래전 국내에 번역된 'C학점의 천재 스티븐 스필버그'라는 번역도 <파벨만스>만큼이나 당혹스러운 제목이다. 아무튼 이 책의 초반부는 스필버그 집안의 내력과 함께 성이 가진 특별함을 설명하고 있다. 그것은 스필버그가 감독 혹은 예술가로서의 운명을 지녔다는 뜻일 것이다. 중요한 것은 스필버그가 이를 어떻게 받아들였는가 하는 것이다. 훗날 스필버그는 아버지와 함께 영화사를 건립하면서 회사명을 '플레이마운트'(Playmount)라고 짓는다. 플레이마운트는  지금도 현존하는 프러덕션이다. 해당 홈페이지에는 다음과 같은 소개글이 등장한다.

Playmount is the literal translation from German to English of "spiel" and "berg.”  Playmount Productions has been in the Spielberg family for more than 50 years. Started by Arnold Spielberg in 1962, it was first used by his son, Steven, for his early productions and is now headed by Arnold's daughter, producer Nancy Spielberg. Playmount pursues projects with talented writers, directors, and producers to create meaningful and important documentaries and films.

플레이마운트는 아버지 아놀드 스필버그에 의해 1962년에 설립되었고, 스티븐 스필버그가 처음으로 사용했다. 현재 대표로 있는 인물은 여동생 낸시 스필버그다. 그런데 50년 넘게 유지해 온 제작사 소개의 첫 문장은 "플레이마운트"라는 이름의 사연이다. 위에서 설명하였듯이 독일어 '스필버그'를 영역한 것이었다. 현재 스필버그의 영화를 제작하는 곳은 플레이마운트가 아니라 '앰블린'이다. 스필버그 감독의 초기작 제목이자 <E.T>(1984)의 로고를 가져와 설립한 영화사 '엠블린'은 1981년에 건립한 이후 현재까지 스필버그의 영화를 제작하고 기획하는 근간이 되었다. 

영화 <파벨만스>는 엠블린 시절의 스필버그가 아니라 플레이마운트를 세우기 전까지의 스필버그를 보여준다. '플레이마운트'는 이름 그대로 스필버그가 성장하면서 감독의 운명, 영화라는 '놀이동산'에서 살아갈 존재임을 어떻게 시도했는지를 다룬다. 그런데 <파벨만스>의 이상한 점은 스필버그나 플레이마운트가 아니라 '페이블'이라는 새로운 성을 내세웠다는 점이다. 또 다른 이름의 필요성, 이를 통한 어떠한 작용을 염두에 두었을지가 궁금해지는 대목이다. 

페이블(fable)은 우화라는 뜻을 지닌 단어다. 이야기나 허구(Fiction)라는 뜻으로 통용되기도 한다. 여기에 'mans'를 붙여 'fablemans'라고 만들었으니 새로운 이름(성)이 지닌 의미의 직역은 '우화인간' 이다. 그런데 'mans'를 개인을 넘어서는 단위의 가족이나 인류로도 상정할 수가 있다. 영화의 제목이자, 스필버그를 내세운 이름이자, 새로운 작명의 합성어인 '페이블먼'은 이야기와 사람이 만나 여러 가지로 변형된다. '이야기꾼'에서 출발하여 '이야기하는 가족'이 될 수도 있고, '이야기하는 인류'가 될 수도 있다.

영화 <파벨만스>는 스필버그 개인에게 초점을 맞추고 있을 뿐만 아니라(이야기꾼), 그의 가족사를 다루고 있으며(이야기하는 가족), 그것을 통해 20세기 중반을 통과한 시대성도 지향하는 셈이다(이야기하는 인류).

 

ⓒ CJ ENM

인류의 차원까지 언급하는 것은 다소 어색할 수 있을지 모르겠다. 하지만 <파멜만스>에는 테크놀로지의 변화와 함께 시대적 상징들이 튀어나온다. 새로운 카메라 장비가 끊임없이 나오고, 아버지로 인해 캘리포니아의 실리콘 벨리가 형성되던 1960년대의 상황이 언급되며, 어린 시절에 본 세실 B. 드밀 감독의 <지상최대의 쇼>(1952)를 비롯하여 존 포드의 <리버티 밸런스를 쏜 사나이>(1962)의 포스터까지 등장한다. 역사를 기억하는 방법에는 여러 가지가 있지만, 이 영화에 등장하는 테크놀로지와 영화들은 주인공을 둘러싼 세계인 동시에 역사의 현실이 된다. 주인공 새미는 <지상 최대의 쇼>를 본 후의 충격과 공포를 재현하는 기차가 충돌의 영화를 만들어 냈고, 1950년대 서부극과 전쟁영화를 보면서 <Escape to Nowhere>(1961)를 제작하기에 이른다. 이것은 스티븐 스필버그의 유년기에 가장 유명한 작품으로 알려져 있는데(※참고), 전쟁이 던지는 거대한 현실을 응시하는 마지막 대목들은 영화를 통해 세상을 어떻게 인식하고 있었는가를 충분히 짐작하게 만든다.  

아무려나 <파벨만스>는 주인공 새미가 처음 극장에서 영화를 보았던 <지상 최대의 쇼>를 시작으로, 그 영화에 영향을 받은 어린 소년이 어떻게 영화라는 '진짜 최대의 쇼'를 만들어 가게 되는가를 보여준다는 점에서 문화의 영향사를 드러낸다. '페이블먼'은 개인의 차원을 넘어  '이야기하는 보편적 인간'의 존재성을 대변하는 제목일 수밖에 없는 셈이다. 

스필버그는 본래의 성을 버리고 '우화(페이블)'를 자신의 성으로 내세움으로써 어떤 방향을 끊임없이 지시한다. 우화는 유희적이고, 다른 상상을 가능하도록 이끄는 이야기의 형식이며, 이를 통해 자신의 유년기와 가족사를 보여주는 동시에 이 영화를 자전적인 작품이 아니라 누구나 겪을 수 있는 보편적인 우화의 영역에 자리매김하기를 원하는 제목이다. 이러한 보편성은 부모의 이혼이라는 영화 속의 가장 큰 사건과 맞물린다. 알려졌다시피 <파벨만스>는 부모님의 죽음 이후에 만들 수가 있었다. 그것은 가족과 자신의 성장에 대한 내밀한 이야기를 말하고자 했다는 뜻이다. 그리고 '우화'라는 제목을 통해 스필버그 집안의 '사실'이라고 말하기보다는 거리를 두고 보다 자유롭게 자신의 과거와 상처를 말할 수 있는 가능성을 열어두고자 했다. 그런 점에서 '페이블'은 중요하다. 우화인간으로써, 영화인간으로써, 우화를 말하는 순간을 통해, 영화와 영화가 만나는 장면들을 통해 전하고자 하는 것들이 있다. 그것은 영화에 대한 영화이기도 한 <파벨만스>가 한 감독의 초상을 넘어서 '영화란 무엇인가'에 대한 질문과 답을 향하도록 이끈다. 

 

페이블먼 vs 스필버그의 영화

<파벨만스>를 읽는 가장 단순한 방법은 영화의 장면과 스필버그의 영화들과 엮는 것이다. 세실 B. 드밀의 <지상최대의 쇼>를 보고 충격을 받은 새미가 아버지가 사 온 장난감 기차가 충돌하는 장면을 촬영하게 되고, 이러한 격돌의 순간은 스필버그의 초기작인 <듀얼>(1971)로 연결된다. 거대한 트럭과 자동차의 대결 구도로 한 시간 넘게 이끌어가는 충돌의 구도는 스필버그 영화의 원형 중 하나라는 식으로 연결하는 방법이다. 

보이스카웃 소년들이 자전거를 타고 무리를 지어 질주할 때, 자연스럽게 <E.T.>의 한 장면을 떠올릴 수도 있다. 외계인의 초능력에 의해 자전거가 공중부양하는 장면은 등장하지 않지만, 어린 시절의 한 기억이 훗날 SF영화의 한 장면으로 변모한다. 또한 자전거의 이동은 자연스럽게 <지상최대의 쇼>의 추격 장면과 연결이 된다.

 

ⓒ CJ ENM

그런데 <파벨만스>의 장면들과 스필버그의 영화를 이러한 방식으로 연결하는 것은 단편적인 장면의 연결 차원을 넘어서지는 못한다. 35편이 넘는 영화를 연출하였고, 제작을 맡은 영화를 포함하면 훨씬 더 많은 작품에 관여한 스필버그의 영화적 이미지는 <파벨만스>를 이루는 대부분의 장면들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영화 대 영화의 비교는 어느 정도 흥미를 주지만 영화 전체를 보게 하지는 않는다. 

보다 흥미롭게 스필버그(의 영화)와 <파벨만스>를 연결하는 방식은 '영화 대 영화'의 비교가 아니라, '삶 대 영화'로 비교하는 일이다. 페이블 가족에게 일어난 가장 큰 사건은 부모의 이혼이다. 그것은  스필버그 영화 전편에 걸쳐 다뤄져 왔다.

<E.T>의 시작은 주인공 엘리엇이 엄마의 눈치를 보는 상황으로 시작한다. 떠나버린 남편으로 인해 엄마는 우울증에 빠져 있고, 삼 남매는 눈치를 보며 숨을 죽이고 있다. 그러던 어느 밤 창고에 이상한 소리가 난다. 외계인 'E.T.'였다. 이 외계인은 아버지를 대체하는 존재감을 지니고 있다. 심지어 엘리엇과 텔레파시가 연결되어 서로의 상황을 알아차리기까지 한다. <파벨만스>의 후반부는 아들 새미와 아버지의 관계가 소원해지는 것을 보여주지만, 어린 엘리엇은 외계인의 등장으로 그 어느 때보다도 강력한 아버지를 경험한다. 그것은 스필버그의 <E.T.>가 프로이트적 의미에서 일종의 소망충족일 수 있음을 대변한다. 

스필버그 감독이 '피터팬 컴플렉스'를 지닌 대표적인 인물로 언급되었던 이유도 이와 연결되어 있다. 그는 어린 시절의 행복감에서 벗어나고 싶어하지 않는 남자들을 주인공으로 내세우는 일련의 영화들을 만들기도 했다. <캐치 미 이프 유캔>(2002)의 프랭크, <후크>(1991)의 전형적인 설정들 그리고 <미지와의 조우>(1977)에서 프랑소와 트뤼포 감독이 연기하는 박사의 모습은 어린 시절 환상의 실현이야말로 스필버그가 영화를 만드는 주요한 이유가 아닐까 하는 짐작을 하게 만든다. 

부모의 이혼은 <우주전쟁>(2004)의 출발점이기도 하다. 주인공 톰 크루즈는 이혼한 아내의 부탁으로 자신의 딸과 아들을 돌봐 주어야 하는 상황에 처한다. 노동자 계급인 톰 크루즈는 자식들에게 제대로 아버지 노릇을 하지 못했으며, 오랜만의 만남에 서로 어색함을 느낀다. 그런데 임시로 형성된 가족 앞에 땅속에 묻혀 있던 '외계인'의 기계 장치가 등장하면서 위기가 시작되고, 아버지는 자식을 보호하기 위해 동분서주하기 시작한다. 웰즈의 소설을 각색한 이 작품에서 원작과 달리 강력하게 부각된 요소는 자식을 지키는 아버지다. 

<캐치 미 이프 유 캔>에서도 아버지와 아들은 쉼 없이 강조가 된다. 부모의 이혼이 주인공을 고아의 상태로 만들어 버렸지만, 소년은 아버지가 살아온 방식을 적극적으로 따라간다. 그러나 디카프리오가 연기하는 주인공 프랭크는 아버지의 방식에 점점 의문을 품기 시작한다. 그것은 또 다른 아버지인 칼(톰 행크스)을 통해 현실이라는 아버지를 만났기 때문이다. <파벨만스>에서 실질적 아버지 '버트'와 상징적 아버지 '존 포드'가 등장하는 것처럼 최소한 두 명의 아버지는 소년을 이끈다. 

<캐치 미 이프 유 캔>은 위폐범 프랭크의 이야기이기도 하지만 두 명의 아버지를 오가며 벌이는 결혼사기범의 이야기기도 하다. 안정된 가족을 이루고자 하는 열망은 위폐범의 이야기에 묘한 활력을 불어넣는다. 실화를 바탕으로 한 작품으로 알려져 있지만 스필버그가 바라보는 '가족'으로 들어갈 때 인물 설정의 많은 부분들이 흥미로워진다. 

공항에서 오랜 기간을 살았던 한 이란인의 실화를 바탕으로 각색한 <터미널>에서도 톰 행크스가 연기하는 빅터 나보스키가 JFK 공항을 벗어나 뉴욕으로 가고 싶은 이유로 '아버지의 유산'을 보여준다. 곡절끝에 공항을 나올 수 있게 된 그는 아버지가 받지 못했던 색소폰 연주자 베니 골슨의 사인을 받기 위해 렉싱턴가로 향한다. 이 사인이 나보스키가 공항에서 버티게 할 만큼의 강력한 이유가 될 수 있는지에 대해서는 생각이 갈릴 수 있지만, 스필버그의 영화가 '아버지를 소환해 내는 설정들'에는 집요한 구석이 있다. 

 

ⓒ CJ ENM

여하튼 부모의 이혼을 통해 <파벨만스>와 스필버그의 영화를 비교하는 것은 스필버그의 영화 전체를 다루지는 못한다. 오히려 흥미로운 것은 스필버그의 전작들이 '피터팬 콤플렉스'라고 불릴만한 요소를 포함하고 있지만, 정작 이 영화에는 환상에 빠진 새미가 아니라 끊임없이 현실을 인식하고 마주하는 인물로 묘사되고 있다는 점이 흥미롭다.

<페벨만스>는 영화에 빠져, 영화를 통해 세계를 보는 것이 아니라 현실이 어떻게 영화를 흔들고 있는지, 이러한 현실을 영화적 환영으로 만드는 것이 정당한지에 대한 의문을 던진다. 비록 엄마 미치의 충고에 의해 카메라를 들고, 공포를 통제하기 위한 기차의 충돌 장면을 만들기 시작했지만 그 후 새미가 만든 영화들이 가져오는 충격과 공포는 이미지의 통제나 충돌의 문제가 아니라 가족의 내밀한 비밀을 폭로할 수 없고, 친구들의 진짜 모습을 알면서도 왜곡하는 방식을 선택한 새미의 고민과 맞물리기 시작한다.

그것이야말로 영화란 무엇인지, 새미의 성장담이 영화와 어떻게 맞물리는지를 보여주는 이 영화의 문제제기로 이어진다. <파벨만스>는 스필버그의 필모그라피와 어떻게 연결되는가에 대한 고민이 아니라 '새미를 통해 어떻게 영화를 바라보고 있는가'가 중심을 이룬다. 그것은 곧 자신의 가족과 친구를 바라보는 것으로 이어진다.

 

페이블먼, 영화인간

페이블 새미에게 영화는 이야기가 아니라 '이미지'로 시작된다. 1952년 1월, 뉴저지 하던 타운쉽에 살던 미치 파벨만, 버트 파벨만 부부는 어린 새미를 극장에 데려간다. 새미는 이날 인생의 첫 영화로 세실 B. 드밀 감독의 <지상 최대의 쇼>를 본다. 기차가 충돌하는 장면을 보고 충격을 받은 새미는 아빠에게 졸라서 유대인의 명절인 '하누카'의 선물로 모형 기차를 선물로 받는다. 새미는 밤에 몰래 기차를 충돌시키며 놀던 중 아빠 버트(폴 다노)에게 들키고, 고장을 내면 안 된다고 혼이 난다. 그런 아들에게 엄마 미치(미셸 윌리엄스)가 대화를 시도한다. 새미는 영화 속에서 기차를 본 충격(공포)을 잊지 못하고 있음을 고백한다. 미치는 그 충격(공포)을 통제하자고 제안한다. 기차를 자꾸만 충돌시키는 대신 아빠의 8미리 카메라로 충돌 장면을 촬영하고, 보고 싶을 때마다 꺼내 보자는 것이다.

이 장면은 '영화인간 새미'의 탄생을 보여준다. <지상 최대의 쇼>(1952)를 보고, 그 충격을 눈앞에서 재현하려고 하는 어린 아들에게, 엄마는 영화가 충격을 기록할 뿐만 아니라 재현을 통해 다시 꺼내봄으로써 자신의 것으로 안전하게 통제할 수 있음을 알려준다. 이를 통해 영화는 경험(충격)을 전하는 매체일 뿐만 아니라 현실의 경험들을 역으로 기록할 수 있는 매체라는 것에 눈을 뜬 새미가 시작된다.

가족은 피닉스로 이사를 가게 되고, 새미는 이곳에서 만난 보이스카우트 친구들과 함께 돈을 모아 카메라와 필름을 구매하여 영화를 촬영한다. 그런데 촬영한 영화의 총격씬이 자신이 본 영화들과는 달리 너무 가짜 같았다. 새미는 엄마가 피아노 연주 도중 실수로 하이힐을 신고 밟는 바람에 구멍이 난 악보를 보게 된다. 이를 본 새미는 필름에 구멍을 뚫는 방식으로 총격 장면을 연출한다. 영화 인간의 창조력이 돋보이는 이 에피소드에서 영감의 원천은 엄마의 피아노 악보와 하이힐이다. 

<파벨만스>가 묘사하는 영화의 유산은 두 가지 방향으로 제시된다. 기계적이고 논리적인 영화의 공학적 메커니즘은 아버지로부터 온 것이지만 감정을 통제하고, 아이디어를 창조하고, 가짜를 진짜처럼 연출하는 재능은 어머니의 세계로부터 온 것이다. 한 명의 영화인간이 탄생하기까지 극장, 영화, 모형 기차, 카메라와 같은 장비와 테크놀로지도 필요하지만(아버지 혹은 남성들의 세계. 베니 또한 카메라를 새미에게 선물한다), 예술적 기질이자 공포와 충격의 경험을 전달하고(구멍 뚫기)과 그것을 통제하는 것은 어머니의 세계로부터 온 것이었다.

무엇보다 어린 새미에게 중요한 것은 어떻게 감각과 경험을 관객들에게 전달할 것인가 하는 점이었다. 영화 촬영과 편집을 위한 장비가 부족한 상태에서 이를 대체하는 것은 창조력이다. 이러한 경험의 전달은 영화사의 기원과도 느슨하게 연결이 된다. 뤼미에르 형제의 최초 영화 중 하나로 알려진 <라 시오타 역의 기차의 도착>(1895)을 그랑카페에서 보던 사람들이 진짜 기차가 오는 줄 알고 도망쳤다는 일화는 영화의 최초 이미지 중 하나가 충격 자체였고, 허구와 현실 사이의 혼돈이었음을 시사한다. 기차의 충돌 장면을 영화관에서 본 새미 역시 진짜와 가짜 사이의 혼란이 일어난다. 하지만 엄마의 충고로 이 혼란을 통제하기 위한 촬영을 시작하고, 친구들과 총격씬을 만들어 내면서는 필름이라는 가짜 위에 구멍을 뚫기에 이른다. 그것은 가짜를 진짜처럼 보이는 도록 이끈다. 처음에는 가짜의 충격에 공포를 느꼈던 새미가 어느새 가짜의 충격을 어떻게든 진짜처럼 보이도록 고민하기 시작한 것이다.

 

ⓒ CJ ENM

이제 성장한 새미가 등장한다. 그는 보이스카웃 친구들과 전쟁 영화를 준비하고 있다. 한편으로는 가족 캠핑이 시작되고 카메라를 든 새미가 모든 것을 담는다. 중심에 선 장면은 엄마가 춤을 추는 모습이다. 캠프파이어를 하면서 아빠와 베니 아저씨는 IBM에서 받은 스카웃 제안을 두고 캘리포니아로 이사할 계획을 고민한다. 그런데 이를 듣고 있던 엄마가 갑작스럽게 모닥불 앞에서 춤을 춘다. 아빠는 새미에게 촬영을 하라며 자동차 헤드라이트를 켜고, 엄마는 자동차 불빛 앞에서 춤을 춘다. 조명 때문에 몸의 윤곽이 적나라하게 비치자 딸들은 기겁을 하지만, 그녀는 아랑곳하지 않고 춤사위를 이어 간다. 어떤 우연과 어떤 시간이 기록되면서, 영화는 가족들의 행복한 시절을 담아낸다.

하지만 이 장면은 집으로 돌아온 후 달라진 세계와 연결이 된다. 미치는 새미의 할머니이자 자신의 엄마가 사망했다는 소식을 접하게 된다. 우울한 날들이 이어지는 가운데 아빠는 새미가 원하는 편집 장비를 사주면서 엄마를 위해 캠핑 영화를 빨리 완성해 달라고 부탁한다. 새미는 준비 중인 전쟁영화 <Escape to Nowhere>의 준비로 정신이 없었지만, 아빠의 압박과 제안(편집 장비)에 못이겨 캠핑 장면을 편집하기 시작한다. 그런데 자신이 담은 기록 속에는 낯선 것이 포함되어 있었다. 그것은 엄마와 베니 아저씨의 불륜 현장이었다. 새미는 이 장면을 제외한 것들로 편집을 한 후 가족들과 함께 관람을 한다. 그리고 야심작인 <Escape to Nowhere>를 촬영하기에 이른다. 이 영화의 엔딩 장면을 준비하면서 감독 새미는 주인공을 맡은 친구에게 "자신이 수많은 병사들을 죽음으로 몰아넣었다고 생각하라."면서 쓰러진 병사들 사이를 걸어가도록 디렉팅을 한다. 그런데 친구가 연기에 너무 몰입한 나머지 촬영이 끝났음에도 울상을 지으면서 계속 걸어가는 장면이 담기게 된다. 새미는 그 장면을 고스란히 살려두기에 이른다. 

새미에게 영화의 시작이 충격과 경험을 통제하는 '영화의 표현'의 문제었다면, 캠핑 장면과 <Escape to Nowhere>을 통해 배우게 되는 것은 '통제할 수 없음'에 관한 것이 된다. 캠핑 장면에는 엄마와 베니 아저씨의 불륜 현장이 고스란히 담겨 있었고, <Escape to Nowhere>의 가장 큰 감동은 연출자의 생각을 벗어난 연기자의 표정이 담길 때, 그것이 배우 쟈체에 의해서든, 현장의 우연성을 통해서든 무엇인가 일어날 때 더욱 중요하고 가치일 수 있음을 알려준다. 캠핑 장면에 담긴 엄마와 베니 아저씨의 불륜도, 죽은 병사들 사이를 지나가는 배우의 선택도 감독 새미의 의도와는 다르게 나온 장면들이다. 그럼에도 <Escape to Nowhere>는 사람들의 칭찬 속에서 마무리되었고, 엄마의 불륜 장면은 영화를 편집한 사람만이 알 수 있는 비밀이 되었다.

'통제할 수 없음'은 영화에 따라서 사람들을 감동을 주기도 하고(<Escape to Nowhere>), 사람들에게 보여줄 수 없는 비밀이 된다(불륜 장면). 새미는 자신이 화를 내는 이유를 묻는 엄마에게 편집해 둔 캠핑 영화의 장면을 보여주기에 이른다. 그리고 두 영화의 경험은 새미로 하여금 영화를 중단하도록 만든다. 학업을 비롯한 여러 연유가 있었지만 통제할 수 없음이 가져온 충격은 '영화란 무엇인가'에 대한 고민을 안겨준다. 그것을 본격적으로 건드리는 것은 장례식으로 인해 집을 찾아온 보리스 삼촌의 말 때문이었다. 보리스는 할리우드에서 겪은 자신의 경험담 등을 들려주며 가족들을 떠나 예술을 선택한 자신과 피아노 연주에 재능이 있으면서도 꿈을 포기하고, 평범한 주부의 삶을 선택한 미치의 이야기를 해주며, 새미 역시 가족과 예술 중에서 무엇을 선택할 것인지 결정해야 할 것이라며 충고한다.

"새미 내 혈육, 넌 가족을 사랑하지. 가족은 너에게 사랑이야. 하지만 예술은 너나 나에겐 마약이지. 널 미치게 하는 존재야. 결국 혼자 외롭게 남겨지게 될 거라도 넌 예술을 포기 못 할 게다." 어쩌면 새미가 영화를 중단한 것은 홀로될 것에 대한 두려움, 영화에 중독될 것 같은 공포 때문인지도 모른다. 캠핑 장면을 두 가지로 편집한 것도 같은 이유다. 하나는 가족들 모두에게 공개할 수 있는 버전이었지만 다른 하나는 오직 엄마와 자신만이 본 영화가 된다. 예술가의 시선은 같은 캠핑 장면들 속에서도 전혀 다른 것을 발견할 수가 있다. 

보리스 삼촌이 "결국 혼자 외롭게 남겨지게 될 거"라고 말하는 것은 영화(예술)를 통한 삶의 비밀을 발견할 수 있지만 그것을 모두에게 손쉽게 공개할 수 있는 것은 아님을 시사하고 있다. 어쩌면 진실을 가린 채 누구나 다가갈 수 있는 것처럼 가장하여 영화를 완성해야 한다. 그것을 온전히 감내해야 하는 것은 예술가의 몫이다. 선택의 고통이 영화를 중단하는 새미의 모습으로 이어진다. 예술가의 시선은 통제할 수 없는 진실 앞에서 고민과 방황을 하기에 이른다.

 

ⓒ CJ ENM

<파벨만스>에 등장하는 새미의 마지막 영화는 <땡땡이의 날>(Ditch day)이다. 캘리포니아로 이사를 간 후 새로다니게 된 고등학교에서 새미는 유대인 혐오를 경험한다. 그 중심에 서 있는 인물은 로건과 채드다. 새미는 로건이 바람피우는 현장을 목격하기도 하고, 채드는 새미의 행동에 사사건건 시비를 건다. 물론 좋은 일도 있다. 기독교인 모니카와 연애를 시작하며 고교 시절의 한때를 경험한다.

그런데 모니카와의 만남은 다시 영화로 이어진다. 두 사람은 대화를 나누던 중 졸업 파티에서 보여줄 영화를 만들기로 작정하게 된다. 무엇보다 모니카가 아버지가 갖고 있는 16mm 아리플렉스 카메라를 빌려줄 수 있다는 말에 현혹된 탓도 크다. 새미와 모니카는 해변에서 놀고 있는 동급생들의 모습을 촬영한다. 새미는 이 작품을 편집하면서 진짜가 아니라 가짜를 선택한다. 새가 똥을 싸는 장면을 아이스크림으로 연출하여(편집하여) 웃음을 만들어 낸다. 가장 중요한 선택은 로건과 채드를 보여주는 방식이었다. 새미는 채드를 매우 찌질해 보이는 인물처럼 만들었고, 로건은 그리스 신화에 나오는 영웅처럼 만들어 버린다. 그 덕분에 영화 상영이 끝난 후 헤어졌던 로건과 클라우디아가 키스를 하기에 이른다.

영화 상영은 성공적이었지만 새미는 영화 상영이 끝난 후 답답한 마음을 감출 수가 없다. 다시 카메라를 들고, 현실을 조작한 이미지들을 만들어 냈다. 그것은 사람들을 위한 선택이었지만 여전히 새미는 진실을 왜곡했다는 사실에 자신의 방식에 대한 확신을 하지 못하는 것처럼 보인다. 영화란 무엇인가. 진실을 실어나르는 매체인가? 아니면 진실을 왜곡하더라도 사람들에게 흥미와 몰입을 던져주는 것이 더 중요한 문제인가? 보리스 삼촌과의 대화를 비롯하여 이전의 만든 영화적 이미지의 결과들이 새미를 여전히 압박한다.

그런 새미에게 로건이 다가온다. 그는 새미가 자신처럼 운동신경이 뛰어난 것도 학교에서 손꼽히는 인기남도 아니지만 순식간에 누군가의 실체를 홀라당 벗길 수 있는 아주 특별한 재능의 소유자임을 인정한다. 또한 영화에서 보여진 모습이 현실의 자신과는 다르게 너무 멋있어서 자신이 닿을 수 없다는 사실 때문에 괴롭다며 울어버린다. 새미 자신도 왜 그랬는지 모르겠다며, 그냥 너한테 조금이라도 인정받고 싶어서 아니면 그냥 그렇게 찍고 싶었던 거 같다며 분노를 드러낸다. 새미는 왜 그런 것일까. 아니, 왜 그런 영화를 만든 것일까. 두 사람이 대화를 나누고 있을 때, 진짜로 화가 난 채드가 다가온다. 그런데 채드를 막아서고 제압하는 것은 로건이다. 영화와 현실은 이어지고, 영화는 새미와 로건을 친구로 만들고, 헤어진 연인을 다시 만나게 만든다. 이것은 정당한 영화의 힘일까.

   

영화인간 새미가 보여주는 일련의 작품들은 영화의 힘(공포)에 압도당하고, 그것을 통제해 보기도 하며, 통제할 수 없는 것을 발견하고(캠핑 장면, <Escape to Nowhere>), 또다시 통제와 현실 사이에 서 있는 혼돈을 발견하는 것이다. 통제든 우연이든 모두가 영화의 본질에 속한 것이며, 두 길 사이에 정답은 없다. 다만, 새미라는 인물을 통해, 그가 영화의 두 길 사이에서 방황하고 갈등하며, 인생을 살아간다는 사실을 응시할 따름이다. 

하지만 묻지 않을 수 없게 된다. <땡땡이의 날>은 과연 어떤 영화라고 불러야 할지. 그저 졸업 파티의 유흥을 위한 연출에 불과한 것인지, 아니면 새미가 또 다른 영화의 길을 발견을 한 것인지 말이다. 한동안 영화와 거리를 두던 새미가 끝내 카메라를 잡고, 다시 시작한 이 작품이 졸업이라는 성인의 길에 들어서기 시작한 새미에게의 어떤 결단을 품고있는지 생각해 보지 않을 수 없다.

 

페이블먼, 우화인간

제목의 문제로 시작한 이 글은 다시 제목의 의미를 돌아보는 것으로 마무리해야 할 것 같다. 페이블(fable)은 우화를 가리키는 단어이고, 우화의 정의 중 하나는 18세기 독일의 작가 레싱(Lessinc, G.E.)이 언급한 것이다. "우리들이 하나의 일반적인 원칙을 하나의 특별한 사례에 주고 이 일반적인 원칙이 직관적으로 인식될 수 있게끔 꾸며낸 이야기." 우화라는 단어는 라틴어 'fabula'에서 유래하였는데 “fable(영어), Fabel(독일어), favola(이탈리아어), fàblula(스페인어)” 등으로 파생된다. 어쩌면 '파벨만스'라는 명칭이 독일어에서 온 한글 제목은 아닐까하는 생각이 들기도 하는데, 아무튼 페이블의 의미는 『이솝우화』에서 엿볼 수 있듯이 원칙이 있고, 도덕률이 적용될 때가 많다. <파벨만스>가 '우화 인간'이라면 우리에게 어떤 교훈성과 도덕률을 말하는지 들여다볼 필요가 있다.

이를 위해 언급할 수 있는 것은 누가 뭐래도 영화의 마지막에 등장하는 존 포드와 대면하는 장면이다. 새미에게 온 편지 중에는 CBS에서 방송 중이던 시트콤, <호간의 영웅들>의 제작에 참여를 권유하는 편지가 있었다. 공동 제작자인 버나드 페인을 찾아간 새미는 그로부터 존 포드 감독을 소개받는다. 사실 이 장면은 피터 보그다노비치가 만든 다큐멘터리 <감독 존 포드>에 나온 스필버그가 직접 진술한 일화이다. 그림 두 개를 보여 준 후 무엇이 보이냐고 묻는 존 포드에게 스필버그는 '인디언'이 보인다고 대답했다. 그러자 존 포드가 화를 냈다고 한다. 이어지는 질문은 <파벨만스>에도 고슬한히 쓰인 장면이다. 지평선이 어디에 있느냐고 물었고, 하나는 위에, 하나는 아래에 있었다. 그렇게 답을 하자 존 포드는 "이것이 좋은 구도다. 그것을 깨달으면 좋은 감독이 될 거다."라면서 나가라고 말했다고 한다.

존 포드의 사무실을 나온 새미가 밖으로 향할 때 카메라가 흔들린다. 마치 지평선의 위치를 새롭게 정립할 것처럼 말이다. 그것은 영화의 선택지로 이어진다. 그것은 영화를 위로 둘 것인가(작가 영화), 아래로 둘 것인가(대중영화) 사이의 선택일 수 있다. 스필버그는 <인디아나 존스>, <쥬라기 공원> 시리즈를 비롯한 훌륭한 대중영화들을 만들었고, <라이언 일병 구하기>(1998)를 비롯한 진지한 영화들을 만들었다. 하지만 이러한 해석은 충분하지 않다.

<파벨만스>에서 재활용된 지평선의 우화가 가리키는 것은 위아래의 구별을 통해 작가 영화와 대중 영화의 갈래만은 아니다. 지평선의 문제는 세상의 모든 시선에 속한다. 

 

ⓒ CJ ENM

누군가는 <파벨만스>를 스필버그의 전기 영화로 볼 것이고, 누군가는 가족사의 영화로 볼 것이며, 누군가는 영화에 대한 영화로 볼 것이다. 우화는 이 모든 것을 아우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화의 본질 중 하나가 '윤리성'임을 망각해서는 안 된다. 그것은 두 편의 영화의 미묘함과 관련을 맺는다.

하나는 엄마와 자신만이 볼 수 있었던, 제목조차 존재하지 않는, 가족 캠핑에서 촬영한 엄마와 베니 아저씨의 장면이다. 새미는 그 영화를 공개하지 않을 뿐만 아니라 불안해하는 엄마에게 그 누구에게도 말하지 않겠다고 말한다. 다른 하나는 <땡땡이의 날>이다. 이 작품을 두고도 엄마와 대화하는 것과 비슷한 장면이 등장한다. 로건은 새미에게 자신이 영화 속 인물과 다르다며 울먹인다. 두 사람의 대화가 끝난 후 로건은 먼 훗날에라도 내가 너한테 질질 짰던 이 사실을 영화로 만들면 죽여버리겠다고 엄포를 논다. 어떤 진실에 대해 영화 혹은 카메라는 어떤 윤리성을 지니고 있을 수 있을까를 고민하게 만드는 장면이자 대화다. 아이러니하게도 스필버그는 이 모든 것을 영화로 만들었다. <파벨만스>를 통해 엄마의 불륜 장면도 담기게 되었고(그래서 부모님의 사후에 이 영화를 만들 결심을 하게 된다), 친구의 엄포에도 불구하고 이 장면까지 담긴 교실 복도 장면을 남기게 되었다.

스필버그는 이 모든 사실에도 불구하고, 결국 영화란 '우화(이야기, 허구)' 속에 모든 것이 포함되어야 한다고 보여준다. 그것을 사실 자체로 받아들인다면 우화는 현실에서 한 발짝도 나아갈 수 없다. 그러나 우화라면 어떤 보편성을 지니고 사실로부터 달아나 감성을 자극하고, 새로운 해석을 이끌어 내고, 영화에 대한 성찰을 이끌 수 있는 가능성을 연다. 그럼에도 어디까지 가능한지에 대한 윤리의 문제 또한 제기가 된다. 공교롭게도 '캠핑 불륜 장면'과 <땡땡이의 날>은 모두 다큐멘터리적 성질을 지닌다. 그 말은 정확하지 않을 수도 있다. <땡땡이의 날>은 사실을 담았지만, 편집과 몇몇 장치에 의해 많은 왜곡을 시도한 허구적 영화이며, '캠핑 불륜 장면'은 공개되지 않은 비밀 속에 존재하는 영화이기 때문이다. 이 영화들이 문제를 일으키는 것은 사실을 전제로 삼기 때문이다. 만약 극(허구)영화 속에 녹여낸다면, 극 영화를 가장 한다면 많은 것을 하나의 우화로 보여주기에 용이하다. 그렇기 때문에 과거에 다큐멘터리 감독이었던 인물들의 상당수가 극영화로의 전환을 선택했다.

"폴란드 감독 키에슬로프스키는 다큐멘터리 감독으로 영화를 시작했지만 어느 순간 극영화로 관심을 돌렸다. 그 이유는 타인의 내밀한 부분에 대해 허락도 없이 파고들어가는 외설성을 견디지 못했기 때문이다. 그 때 현실의 외설성을 돌파하는 가장 좋은 수간은 그 순간을 허구로 만드는 것이며, 그 위장된 허구 속에서 오히려 진실을 탐색할 수 있다는 것이다. 현실의 외설성을 그대로 반복하지 않고 그에 저항하기 위해 그는 허구를 택한 것이다." ― 슬로보예 지젝, 『진짜 눈물의 공포』


『키에슬로프스키가 말하는 키에슬로프스키』」에서 가져온 이 진술은 유명하다. 허구야말로 다큐가 지닌 진짜 눈물의 공포를 중화시킬 수 있고, 글리셰린 몇 방울이면 가짜 눈물을 통해 눈물을 흘리는 진짜 같은 장면을 만들어 낼 수 있다. 그것은 오히려 진실을 탐색할 수 있게 돕는다. <파벨만스>가 보여주는 윤리적인 문제, 즉 엄마라는 혹은 엄마의 외설성과 친구라는 외설성은 모두 이러한 차원에서 논의해 볼 수 있을 것이다. 그리하여 스필버그는 페이블이라는 이름을 통해, 10대의 자전적 경험을 하나의 우화적 이야기로 바꿔낸다. 

하지만 부족한 것이 있다. 새미가 만든 두 개의 영화를 통해,  엄마와 로건과의 대화를 통해, 현실을 담은 영화의 문제를 제기하지만 <파벨만스>가 진짜 눈물의 공포를 각성하는 순간에 이르렀다고 생각기는 어렵다. 이 모든 문제를 안고 가던 영화는 뜬금없이 존 포드와의 실질적 일화를 재현함으로써, 영화를 둘러싼 미묘한 문제를 무화시켜 버린다. 영화에 필요한 것은 지평선의 위아래와 같은 시선의 위치에 대한 문제가 아니라 정면으로 마주친 시선이 어디까지 응시할 수 있을지, 거대한 윤리성을 어떻게 감내해야 할 것인지를 보여주는 것이 아닐까. 그렇게 카메라는 지평선을 찾아 위아래로 흔들리는 것이 아니라 고통을 향해 깊숙히 들어가게 된다. 

만일 그러한 차원의 시선이 있었더라면 스필버그의 영화는 다큐에서 극영화로 전환한 키에슬롭스키나 다르덴 형제, 고레에다 히로카즈의 영화에 훨씬 더 가까이 놓여있을 수 있을 것이다. 중요한 것은 '존 포드'나 '존 포드의 말'이 아니라, 존 포드 이후의 대표적인 미국 감독으로 손꼽히는 '스필버그의 영화란 무엇인가'에 대한 성찰이기 때문이다.

 

ⓒ CJ ENM

영화에 대한 영화이자 영화에 대한 우화로써 <파벨만스>는 실재와 대면하게 되었을 때(엄마, 친구), 비밀을 약속함으로써 혼자의 비밀로 간직해 버리는 새미를 보여준다. 하지만 이미지는 도무지 감춰지지 않는다. 영화 속에 버젓이 드러나 있고, 감독이 선택할 수 있는 것은 보여줄 것인가 보여주지 않을 것인가 하는 선택의 차이만이 있을 뿐이다. 

<파벨만스>는 그동안 보여주지 않은 것을 보여줘야 했던 영화이고(자전적, 개인적, 가족적), 자연스럽게 선택과 갈등 그리고 침묵의 순간이 담긴다. 데이비드 린치가 연기하는 존 포드를 만나는 순간은 이 모든 것을 보여주었음에도 불구하고, 스필버그가 돌파하는 또 한 번의 능청스러움 혹은 회피하는 방식을 보여준다. 하나의 선문답처럼 지평선의 위치를 언급함으로써 위아래 시선으로 전환해 버린다. 

그런 것이 뭐 그다지 중요하다는 말인가. 지평선이 어디에 있든 상관없이 예술이 보아야 하는 것은 지평선 자체가 아니겠는가. 그럴 때만이 지평선의 위치를 논할 수 있고, 지평선을 어떻게 보여줘야 할지 고민할 수가 있다. 개인적으로 이 영화의 마지막 장면을 상상해 본다. 카메라가 위도 아닌, 아래도 아닌, 움직이거나 흔들리는 카메라가 아니라 지평선을 응시하려고 애쓰는 카메라였으면 어땠을까.

이 모든 것은 상상에 불과하다. 어찌 되었든 스필버그는 지평선이 아니라 지평선의 위와 아래를 선택하였고, 덕분에 우리는 실재의 공포를 직면하는 것이 아니라 그의 영화가 만들어 내는 공포를 체험할 수 있었다. 이 또한 충분히 매력적이지만 누가 뭐래도 <파벨만스>는 오늘날 영화라는 우화가, 스필버그의 세계가 어느 지평선에 머물러 있는가를 돌아보게 만든다. 그리고 이 시대의 뛰어난 영화 인간으로서 스필버그가 만들어 갈 '영화 우화'들은 남아있기에 지평선의 위치가 아니라 지평선을 응시하는 영화들을 기대해 본다. 

짧은 기간에 만들었던 <더 포스트>(2017)와 같은 작품들은 스필버그가 얼마나 뛰어나게 지평선을 들여다보는지를 증명한다. 그것은 복잡한 세계를 간결하게 담아내는 스필버그의 카메라의 가치를 드러낸다. 흔들리는 세계는 저 멀리 외계에 있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중심에 카메라를 들이댈 때 오히려 극적으로 조우한다. 그것은 영화가 이미 세계의 중심에 서 있음을 보여주는 선택이다.

 

※ 추신

이 글은 2023년 지역서점 문화활동의 일환으로 5월 13일 '노원문고'와 '더 숲에서 진행한 '필름 온 더북 Scene3'에서 다룬 <파벨만스>의 내용을 바탕으로 작성되었습니다. 

[글 이상용 영화평론가, poema@ccoart.com]

 

ⓒ CJ ENM

파벨만스 
The Fabelmans
감독
스티븐 스필버그
Steven Spielberg

 

출연
미셸 윌리엄스
Michelle Williams
폴 다노Paul Dano
세스 로건Seth Rogen
가브리엘 라벨Gabriel LaBelle
주드 허쉬Judd Hirsch

 

수입|배급 CJ ENM
제작연도 2022
상연시간 151분
등급 12세 관람가
개봉 2023.03.22

이상용
이상용
 1997년 『씨네21』 2회 신인평론상을 수상하며 영화 비평을 시작했다. 부산국제영화제와 전주국제영화제 프로그래머를 역임했다. 지은 책으로 『봉준호의 영화 언어』, 『영화가 허락한 모든 것』, 공저로 『씨네쌍떼』 『30금 쌍담』 등이 있다.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