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상용의 영화일기] 2023년 5월 5일
[이상용의 영화일기] 2023년 5월 5일
  • 이상용
  • 승인 2023.05.09 11: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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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딘가 씁쓸해지는 기록"

새로운 영화들이 많은 4월 말과 5월. 한동안 쓰고 싶어 근질근질했지만 '하마구치 류스케' 원고 때문에, 목감기에 시달리느라 시름시름 한 탓에 손가락의 감각이 무거워졌다. 이상하게 공기가 좋아지지 않는다는 생각이 드는 한 달간의 대기 상태. 그래도 하고 싶은 말들은 꽤 쌓여 있던 머리. 모두 모아 주섬주섬 적어본다.

 

<라이스보이 슬립스>(2022)와 <리턴 투 서울>(2022) 그리고 <커밍 홈 어게인>(2019)

영화가 개봉을 하고, 감독이 내한을 해도 거의 반향이 일어나지 않았다. 그래도 최근 한국영화의 한 흐름은 '포스트 미나리'다. 국내가 아니라 '밖'에서 바라보는 한국의 주요한 영화가 그렇다는 뜻이다. 개인적으로 <미나리>(2020)가 그다지 흥미롭지는 않았다. 많은 한국인 이민자 혹은 입양아 영화들은 이전에도 있어 왔지만, 소재주의를 돌파하기는 쉬워 보이지 않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런 영화들이 국제영화제에서 주목을 받는 현상에 대해 생각해 볼 필요는 있다. 쉽게 생각하면, 이민자 혹은 입양아 감독들이 영화를 만들기 시작하면서 자신의 이야기를 출발점으로 삼는 탓이다. 그것은 자연스럽게 '진정성'을 형성한다. 하지만 경험의 당사자이든 이민 2세대나 3세대이든 결국 '이야기를 통해 무엇을 보여줄 것인가'를 넘어서 '무엇을 건드릴 것인가' 하는 문제가 여전히 남는다. '과거에 그랬지'라는 향수(노스텔지어)로 버티는 것은 흥미롭지 않다.

 

ⓒ 판씨네마

<라이스보이 슬립스>가 바로 여기에 해당한다. 전반부는 1990년대 캐나다로 아들과 함께 이주한 엄마 '소영'(최승윤)과 아들 '동현'(황도현·황이든)의 모습을 보여준다. 충분히 예상가능한 장면들이지만 여전히 낯선 것이 있다. 무엇을 위해 소영은 어린 아들과 함께 캐나다에 왔는지, 이곳에서 살아간다는 것이 어떤 의미를 갖는지 보는 동안 궁금해진다. 학교에서 따돌림을 당하는 아들의 문제를 당당하게 따지는 소영의 모습에는 어떤 절박함이 느껴진다. 영화 전반부의 긴장감은 그녀에 대한 궁금증과 절박함으로, 그리고 동현의 성장 과정으로 뒤엉킨다. 그런데 이 영화의 후반부는 기운이 빠진다. 사춘기 소년이 된 동현은 친구와 마약을 하며 반항적인 모습을 보인다. 그러던 중 위기가 닥친다. 소영이 병에 걸린 것이다. 두 사람은 한국에 다녀오기로 한다. 전반부에 가졌던 궁금증의 일부가 여기서 해소된다. 하지만 한국에서의 장면은 이 영화가 '노스텔지어'의 한계에 갇혀버리는 이유가 되기도 한다. 뿌리에 대해, 기원에 대한 묘사는 삐딱한 캐나다 소년 동현을 평범한 한국인으로 만들어 버린다. 동현은 아빠의 유품을 받는다. 소년은 달라진다. 왜 그래야 할까. 그것은 위대한 유산이 아닐진대, 한국에 오는 것이 이 영화의 목표였을까.

<라이스보이 슬립스>는 한국계 캐나다인 '앤소니 심' 감독의 영화다. 그리고 자신이 하고 싶은, 할 수 있는 이야기를 보여준다. 어째서 그런 이야기를 하고 싶었는지 감독의 목소리를 듣고 싶었지만, 기회를 얻지는 못했다. 영화가 아니라 감독이 궁금했던 것은 영화가 충분히 보여주지 못하고 있기 때문이었다. 달리 말하면, 더 궁금해지는 영화를 만들 필요가 있기도 했다. 캐나다에서 과거를 지운 채 버티며 살아간다는 것은, 동현이 성장한다는 것은 무엇이었을까. 집으로 돌아온 모습은 이 모든 것을 망각한 채 평범한 회귀에 머물러 버린다.

 

ⓒ 엣나인필름

<리턴 투 서울>은 '프레디'(박지민)라는 25세의 입양아 여성을 그려낸다. 이 작품에 향수가 전혀 없는 것은 아니지만, 많은 부분을 비켜 나간다. '데이비 츄' 감독은 캄보디아계 프랑스인이다. 그런데 캄보디아의 입양아가 아니라 한국계 프랑스인 프레디의 이야기를 다룬다. 이 선택이 일정한 거리를 둘 뿐만 아니라 보편성을 쫓기 시작한다. 무엇보다 이 영화는 과거가 아니라 '현재'의 서울을 보여준다. 프레디는 일본으로 가려다 우연히 서울에 오게 되고, 이곳에서 만난 친구들의 말에 따라 자신의 입양 기록을 찾아보기로 한다. 자신의 과거를 찾는 것에 대해 프레디는 크게 흥미가 없었다. 하지만 점점 더 알 수 없는 감정에 빠져든다. 서울이라는 대도시의 혼란스러움과 프레디가 지닌 정체성의 혼란이 자연스럽게 섞여 든다. 특히, 김추자의 '꽃잎'을 비롯한 여러 음악들은 매 장면마다 독특한 리듬을 만들어 내면서 혼란의 세계를 고스란히 드러낸다.

<리턴 투 서울>의 혼란스러움이 좋았다. 25이라는 나이도, 프레디의 정체성도, 그녀가 맞이해야 하는 가족들의 모습도 모두가 혼란이다. 오광록이 연기하는 아빠는 술에 취하면 프레디에게 문자를 보낸다. 하지만 프레디는 이 상황이 전혀 달갑지 않다. 많은 이민자 영화와 입양아 영화에서 가족과의 만남은 애달프고, 아프기만 한데 실제로는 그렇지 않을 것이다. 이 영화의 몇몇 가족 묘사처럼 괜히 연락했나 싶을 정도로 부담스럽기만 한 일일 수 있다. 그러한 순간들을 잡아낸 것은 '진짜'라는 생각이 든다. 다만, 후반에 이르러 누아르 영화의 장르적 분위기를 연출한 것은 좀 과하지 않나 생각이 든다. 아마 마무리의 방식에 대한 고민이 있었을 것이다. 아무려나 근래에 나온 '포스트 미나리' 중 이 작품은 구태의연한 방식을 택하지 않는다. 뻔하지만 뻔하지 않은, 혼란스럽지만 결국 어머니를 만나게 되는 과정에서 현재를 살아가는 프레디에 집중한다.

 

ⓒ 영화 <커밍 홈 어게인>

'웨인 왕'의 <커밍 홈 어게인>을 본 것은 꽤 오래전 토론토 영화제에서였다. 여전히 기억나는 그의 영화들은 <스모크>(1995)와 <블루 인 더 페이스>(1995)와 같은 오래전 작품이다. 이전에는 <조이럭 클럽>(1993)을 만들기도 했는데 이 작품들은 모두 소설가와 함께한 영화다. <소모크>와 <블루 인 더 페이스>는 국내에도 독자들이 많은 '폴 오스터'다. 

<커밍 홈 어게인>은 이창래 작가의 작품에서 가져왔다. 개인적으로 한국의 이민자에 대해 본격적으로 생각하게 된 계기는 이창래의 소설 『영원한 이방인』 때문이었다. 원제는 '네이티브 스피커Native Speaker'. 이창래는 이민자의 자녀 세대에 속한다. 프린스턴 대학교 문예창작과 교수로 재직 중이라고 알고 있는데, 미국의 유명한 작가 중 하나다. 하지만 그의 이야기는 많은 부분 이민자 세대의 가족을 다룬다. 이민자 가족이라는 현실이 이창래의 작품 활동에 도움이 되었을지도 모른다. 1990년대 '뉴요커 지'를 중심으로 인도계 줌파 라이히나 이창래와 같은 이민자 세대의 작가들이 주목을 받던 시기가 있었다. 하지만 그것이 전부는 아니다. 『영원한 이방인』을 보고 있으면, 미국인과 아님을 가르는 것은 이민자인가 아닌가의 문제가 아니라 '영어'의 구사력 문제다. 미국 사회에서 언어는 인종보다, 국가보다 더 국가적이다.

<커밍 홈 어게인>은 뉴요커 지에 실렸던 이창래의 자전적 에세이를 옮긴 것이다. 영화 속에서 "창래야!"라고 부르는 어머니의 음성이 정확히 나온다. 그런데 토론토 영화제에서 처음으로 이 영화를 보았을 때, '영화 속 가족이 과연 한국의 이민자 가족인가' 하는 생각이 들기도 했다. 뭐라고 쉽게 말하기 어려운 대목인데, '홍콩계 감독인 웨인 왕이 바라보는 가족의 모습과 이창래가 그리는 한국계 가족의 차이 때문인가' 싶은 것도 있었고, 배우들의 한국어 연기가 보여주는 이물감 때문일 수도 있었다. 다른 영화에서는 훌륭해 보이는 스티븐 연의 연기가 <미나리>에서는 그다지 흥미롭게 보이지 않았던 것도 언어 구사의 문제일 수 있다. '그 영화에 맞는 한국어를 구사하는가'라는 문제는 언제나 쉽지 않은 일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커밍 홈 어게인>에는 홍콩인가 한국인가와 상관없이 보편적으로 벌어지는 이민자 가족의 상황이 있다. 이 영화가 집중하는 것도 그런 쪽이다. 특정한 인종이나 국가를 넘어서 오늘날의 보편적인 역사가 된 '이민'이라는 현실에 대하여, 그 속에서 일어나는 가족의 내밀함에 대하여, 부모 세대와 자식 세대가 받아들이고 섭취한 문화와 현실의 차이에 대하여 마주한다. 이민자와 입양아의 이야기는 특수하기 때문에 만들어지는 것이 아니라 보편적이기 때문에 만들어지는 것이다.

오늘날 K-콘텐츠의 우수성을 운운하는 말들이 곳곳에서 넘쳐나지만, 정작 동시대의 중요한 영화들은 입양되어야 했던, 이민을 떠나야 했던 역사와 현실의 고통을 다루고 있다. 그런데 이 영화들에 대해 정작 한국 사회의 관심은 드물다.  OTT의 인기작들이 고통의 문제를 가장한 자극일 때가 많다. 현실의 고통은 외면당하고, 시대의 자극은 반향을 일으킨다. 한국 사회만의 문제는 아니겠지만 이 영화들이 무심히 흘러가는 것은 현재임을 목격한다. 이 일기는 그 단면을 기록할 뿐이겠지만, 어딘가 씁쓸해지는 기록이다.

 

<내 아내 이야기The Story of My Wife> 일디코 엔예디Ildiko Enyedi|2021

ⓒ 안다미로

일디코 옌예디의 <우리는 같은 꿈을 꾼다>(2017)를 국내에 소개했던 입장에서 가장 기다렸던 신작이다. 이 영화의 제목을 싫어하는 경우도 있었지만, <몸과 영혼>이라는 원제는 지금 생각해도 크게 끌리지 않는다. 옌예디의 작품 중 가장 뛰어난 제목은 <나의 20세기>(1989)다.(영화적으로도 가장 뛰어나다고 할 수 있다) <우리는 같은 꿈을 꾼다>를 상영하면서 이 작품도 함께 공개한 바가 있는데 에디슨의 시대와 여성의 삶을 이중주 삼아 현실과 초(비)현실을 넘나드는 화면은 확실히 매력적이다. 

국내에 거의 소개가 되어 있지 않은 탓이기도 하지만, 동유럽의 여성 감독들 중에 이러한 스타일을 선보이는 인물들이 있었다. 단적으로 떠오르는 인물은 체코의 '베라 히틸로바'다. 그의 <애플 게임>(1977)과 같은 작품만 보아도 충분히 확인할 수 있다. 젠더적 권력 투쟁에 관한 영화로 보기도 하지만, 새로운 시대의 물결 속에서 영화가 할 수 있는 표현의 영역들을 넓힌다. 일디코 옌예디도 그러한 흐름의 바통을 잇는다. 그런데 <내 아내 이야기>는 규모는 커지고, 이야기는 방대해졌다. 그 결과 '버겁다'는 인상을 준다. 선장 야코프는 친구와 내기를 하듯 말하며 카페에 들어오는 여자와 결혼하기로 결심하는데, 그의 아내가 되는 인물은 레아 세이두다. 사실 주요한 감독들의 영화에 레아 세이두가 빠지는 경우가 없을 정도여서 '또 인가' 하는 생각이 들기는 하지만, 사랑의 놀라움과 사랑의 권력관계를 대변하는 인물로 이만한 배우가 없기도 하다.

아무튼 부부의 밀당이 거의 세 시간에 달하는 영화의 대부분을 차지한다. 그런데 그 상황이 반복되기만 하다 보니 부부 사이의 오해와 불신 그리고 애증섞인 관계의 소용돌이가 제자리를 맴돌 뿐이다. 해외의 리뷰에서 한결같이 비판하는 것은 이들이 사용하는 영어의 문제다. 다국적으로 제작된 영화이다 보니 영어를 사용할 때가 많다. 독일어를 비롯한 여러 언어들이 등장하는데 많은 리뷰어들의 배우들의 영어 대사가 책을 읽는 것 같다는 비판한다. 자막으로 보는 관객들에게는 크게 문제가 될 것 같지는 않지만 분명 현장에서 몰입감이 떨어질 수밖에 없었을 거라는 생각이 든다. 영화 내내 인물 사이에 벌어져야 할 긴장의 끈이 전반적으로 느슨하다는 기분이 든다. 무엇보다 일디코 옌예디의 영화에는 어떤 비약과 도약의 순간들이 있는데, 이번 영화는 밋밋하다. 만연체의 영화라고나 할까. 초기작들에서 보여진 감각적인 비약들이 그리워진다. 그럼에도 특유의 시대를 재현방식은 신비롭다. 그것은 중부유럽이라는(밀란 쿤데라는 체코나 헝가리를 이렇게 부른다) 독특한 역사적 지리적 위치를 담고 있는 옌예디 감독의 스타일 때문일 것이다. 

 

<클로즈Close> 루카스 돈트Lukas Dhont|2022

여러 가지 화제성이 있다. 첫 장편인 <걸>(2018)로 칸 영화제에서 황금카메라상을 받았고(칸의 주요한 부문에 상영된 첫 장편을 심사 대상으로 삼는다), 두 번째 장편인 <클로즈>는 2022년 칸에서 심사위원대상을 수상했다. '루카스 돈트'는 새로운 시네아스트로써 각광받는 인물이다. 

 

ⓒ 찬란

그런데 <클로즈>는 평범했다. 아니, 이 영화는 평범성 속에서 빛나는 순간을 끄집어내고자 하는 작품일 것이다. 레오와 레미는 항상 붙어 다닐 뿐만 아니라 함께 놀고 먹고 자는 것이 다반사다. 흔히 말하는 불알친구다. 그런데 학교에 다니기 시작하면서 문제가 생긴다. 그것은 다른 아이들의 시선 때문이다. 두 아이의 관계를 의심하거나 질투의 말들을 던진다. 레오와 레미는 이를 의식하기 시작한다. 특히, 레오는 자신의 정체성을 의심받는 것에 대한 반감을 드러내면서 레미를 밀어내기 시작한다. 남자다움을 과시하려고 한다. 그리고 사건이 일어난다. 레미의 죽음. 이후 레오의 죄의식을 따라가면서, 레오를 찾아오는 레미의 부모님을 보여주면서, 죽음 이후의 순간들로 영화의 절반을 채운다. 레오가 짊어지고 있는 죄의식의 문제가 성장의 고통으로 드러난다.

루카스 돈트 감독은 이를 세밀하게 연출한다. 하지만 그것이 전부라는 생각이 들기도 한다. 이러한 상황은 근래 들어 여러 비슷한 영화를 통해 많이 보았다. 동시에 이를 벗어나는 것은 <클로즈>에서 찾기 어렵다. 루카스 돈트는 분명 재능이 넘치는 감독이다. <걸>에서 가장 논쟁적인 부분은 주인공의 몸을 보여주는 카메라의 방식 때문이었다. 그것은 피할 수 없는 선택인 동시에 몸을 통해 돌파하려는 퀴어 영화의 도발적인 선택에 대한 반감을 가져오기도 한다. 그에 반해 <클로즈>에는 논쟁적인 요소가 거의 없다. 아이의 순수성 속에 엇갈린 여러 가지 혼돈을 얌전하게 다룬다. 정체성은 흔들리기 마련이고, 순수성은 존재를 약하게 만들고, 죄의식에 쉽사리 감염된다. 상처의 크기를 그 누구도 함부로 말할 수는 없는 일이겠지만, 최소한 <걸>을 보았을 때 아무나 할 수 없는 방식으로 인물을 담는 결연함에 놀랐다.

<클로즈>는 차분함으로 담아내는 데 주력한다. 이러한 영화들이 최근 국내에 주를 이룬다. 더군다나 아이를 주인공으로 내세울 때 한결같이 관조하는 영화들이 주를 이룬다. 그리하여 세계는 변하지 않고, 주인공은 성장을 감내하는 것이라고 보여준다. 정말 그런 것일까. 영화는 한 가지 모양만 생존할 수 있는 것일까. 그런 궁금증이 밀려온다.


 
<파벨만스The Fabelmans> 스티븐 스필버그Steven Spielberg|2022

벼르고 벼르다 <파벨만스>를 보았다. 좀 심심했다. 생각해 보면 스필버그의 영화를 거의 전부 보면서 오늘날에 이르렀다. 텔레비전에서 <듀얼>(1971)을 방영할 때 흥분하면서 보았던 것이 너무나 아득한 옛날의 기억이다. 이 설정은 고스란히 미드 <전격 Z작전>(1982)에서 최첨단 자동차 키트와 악마의 화신이자 대형 트럭인 골리앗의 대결로 재현된다. 스필버그의 야심작들인 <컬러 퍼플>(1985)이나 <태양의 제국>(1987)을 볼 때는 뭔 생각인 거지라며 비판할 수밖에 없었다. <쉰들러 리스트>(1993)처럼 진지함을 전면에 내걸고 만들 때보다 1980년에 개봉한 <E.T.>(1982)나 최근에 가장 흥행한 작품이라고 할 수 있는 <레드 플레이스 원>(2018)의 스필버그를 선호하는 셈이다.

 

ⓒ 영화 <우주전쟁>

<우주전쟁>(2005)은 스필버그의 연출력이 돋보이는 작품이기는 한데 외계인을 피해 모녀가 지하에 숨어들었을 때 정신 이상을 보이는 할란(팀 로빈스)을 레이(톰 크루즈)가 살해하는 장면은 이상하게 끔찍했다. 포스트 9.11 영화로 볼 수 있는 <우주전쟁>이 미국인들의 공포에 의한 폭력을 드러내는 영화라는 것을 부인할 수는 없을 것이다. 그런데 이 영화의 진짜 테두리는 시대나 테러가 아니라 스필버그 특유의 가족주의다. 블루칼라에 해당하는 레이는 이혼한 아내가 아이들을 맡기고 여정을 떠난 후, 외계인의 침공이 시작되는 상황을 보여주고 있다. 아이들은 더 이상 친부를 따르지 않으려고 한다. 심지어 아들은 <태양의 제국>에 나오는 소년처럼 전쟁에 열광하며 군인들을 따라간다. (이 소년은 나중에 흐지부지 돌아온다. 서사가 완전히 배제되어 버리는 이상함을 보여준다)

막내딸인 레이첼(다코타 패닝)도 마찬가지다. 지하실에서 들통이 날 위험에 처한 상황에서 할란이 광기를 드러내자 하는 수 없이 레이는 그를 살해한다. 그 모습을 보게 된 레이첼이 레이의 팔을 붙잡는다. 딸이 헤어진 아버지를 재인정하게 된 계기는 살인이었고, 영화는 그것을 정당하다고 보여준다. 레이가 그토록 시달리던 아버지로서의 인정 욕구를 살인이 안겨준다. 더 상세한 검토가 필요하겠지만, 스필버그의 빼어난 연출력에도 불구하고 종종 가족의 문제를 전면에 드러낼 때 보이는 태도가 있다. 이 순간 스필버그는 지독한 보수주의자의 외양을 띤다.

 

ⓒ CJ ENM

그것은 영화 <파벨만스>에서도 마찬가지였다. 이 영화는 한 감독의 성장담인 동시에 가족사다. 여러 장면들이 스필버그의 영화를 연상시킨다. 장난감 기차로 영화를 만드는 재능 많은 소년의 모습은 초기작 <듀얼>을 연상시킨다. 충돌의 몽타주를 선천적으로 만들어 낼 만큼 그는 감각적인 편집 능력과 아이디어를 지니고 있었다. 또한 자전거를 타고 친구들과 가는 장면은 누가 뭐래도 <E.T.>다. 이 작품은 자전rj 추격씬으로도 자동차들끼리의 추격 장면 못지않은 긴장감과 놀라움을 선사할 수 있다는 것을 증명했으니 말이다. 그런데 이 영화에서 끝내 해결되지 않는 것은 '어머니'다. 아빠의 친구를 선택한 어머니를 향한 주인공의 감정은 끝까지 혼란으로 남는다. 주인공 파벨만은 아버지의 세계와 어머니의 세계를 오가는 인물인데, 아버지의 말마따나 그는 어머니를 더 닮아있는 것 같다. 어딘가 혼란스럽고, 예술적이며, 직관적인 선택을 하는 인물. 하지만 스필버그의 영화를 막상 보고 있노라면 컴퓨터 공학자인 아버지처럼 계산적이고 논리적일 때가 더 많다. 

그런데 이 영화가 흥미로운 것은 파벨만이 현실의 아버지나 어머니를 선택하는 것이 아니라 영화로 달아나는 순간이다. 두 명의 유사 아버지가 등장한다고 할 수 있는데 한 명은 친척인 보리스 삼촌이다. 그는 파벨만에게 “예술이 하늘의 왕관과 땅의 월계관을 줄 테지. 하나 네 가슴을 찢어 놓고 널 외롭게 할 게다. 넌 네 가족들의 수치가 되고, 사막으로 추방당한 집시가 될 게다.”라고 말한다. 예술의 운명에 대한 것인데 보리스 삼촌의 말처럼 걱정스럽게 들리기보다는 한편으로는 근사하게 들리기도 한다. 이 이중성은 영화라는 것이 스필버그의 인생을 차지할 운명적 선택이자 신화화의 과정임을 가리킨다. 스필버그는 이 열망을 영화의 마지막에 그토록 존경해 마다하지 않는 '존 포드'(데이비드 린치 감독이 연기하고 있다)와의 만남을 통해 마무리하고 있다. 그는 지평선을 가운데 둘 것이 아니라 위로든 아래로든 두는 것이 관심을 끈다고 설명한다. 누구나 알고 있는 눈높이가 아니라 위든 아래든 다른 위치에 둘 때 예술이 일어난다.

소년 파벨만은 이 말을 따라 자신만의 세계로 향한다. 거기에는 어머니도 아버지도 존재하지 않는다. 이번 영화를 위로 둘 것인가(작가영화), 아래로 둘 것인가(대중영화) 사이만 있을 뿐이다. 그리하여 <인디애나 존스>, <쥬라기 공원> 시리즈를 비롯한 훌륭한 대중영화들을 만들었고, <라이언 일병 구하기>(1998)를 비롯한 진지한 영화들을 만들기도 했다. 그의 영화에서 가운데는 없다. 그것이 영화라는 아버지의 길이었다. 하지만 이 길을 선택한 순간 그의 가족은 더 이상 영화 속에 등장할 수가 없게 된다. 보리스 삼촌의 말처럼 가족과 멀어지는 길이기도 했다. <파벨만스>가 그 결론을 '존 포도'의 멋있는 말이 아니라 좀 더 처절하게 보여주었으면 어땠을까. 스필버그는 충분히 대중적이고, 충분히 훌륭하지만, 충분히 솔직한 감독은 아닐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든다.

 

<피기Piggy> 카를로타 마르티네스-페레다Carlota Martinez-Pereda|2022

단편 <피기>를 국내에 처음으로 상영했던 입장에서 보면 장편의 결과는 의아해진다. 왜 장편으로 만들어야 했을까. 단편에 덧붙여진 것은 도대체 무엇이었을까. 그다지 보이지 않는다. 단편은 여전히 흥미롭고 충분한 긴장감이 있다. 최소한 장편이 되려면 주인공의 가족이 보여주는 보다 내밀한 사연이 필요하지 않았을까.

[글 이상용 영화평론가, poema@ccoart.com]

이상용
이상용
 1997년 『씨네21』 2회 신인평론상을 수상하며 영화 비평을 시작했다. 부산국제영화제와 전주국제영화제 프로그래머를 역임했다. 지은 책으로 『봉준호의 영화 언어』, 『영화가 허락한 모든 것』, 공저로 『씨네쌍떼』 『30금 쌍담』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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