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정수의 영화로 세계 속으로] 독일·오스트리아: '미쳐가는 여성들'의 궤적을 밝으며
[박정수의 영화로 세계 속으로] 독일·오스트리아: '미쳐가는 여성들'의 궤적을 밝으며
  • 박정수
  • 승인 2023.05.11 11: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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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가레테 폰 트로타'·'앙겔라 샤넬렉' 이후의 여성 작가들

교도소나 정신병원에 갇힌 '어떤 여성들'이 있다. 설령 사회에서 배제되지 않더라도, 이들은 잘 보이지 않는 어둠 속, 아니면 지하실에서 조심스레 은거한다. 이들이 수감된 죄목이나, 강제 입원을 당한 이유는 다음과 같다. "진실을 얘기하였기 때문에", "자유를 바랐기 때문에", "평범한 전체가 아닌 특유한 개인으로서 사유하였기 때문에" 이러한 부당한 사유로 범죄자, 광인이 된 여성들을 독일 영화감독 '마가레테 폰 트로타'(Margarethe von Trotta)가 온 인생을 바쳐 조명하였다.

 

ⓒ 영화 <로자 룩셈부르그>(1986)

20세기 독일 작가주의 영화운동인 '뉴 저먼 시네마'(New German Cinema)의 유일한 여성 감독이었던 마가레타 폰 트로타는 해당 사조에 '여성 영화'라는 족적을 남겨놓았다. 트로타의 작품에서는 '한나 아렌트', '로자 룩셈부르크' 등 식자이자 정치인으로서 중요한 여성들이 등장하거나, 또 '평범한 여성', '광인 여성' 등 중요함과는 거리가 먼 여성도 등장한다. 분명 영화마다 여성의 지위는 격차가 있다. 그러나 그녀들은 모두 다 똑같아진다, '범죄자' 혹은 '광인'. 트로타가 범죄자, 광인으로 전락한 여성을 조명한 이유는 '현실'에 있다. 20세기 독일 가부장제의 역사는 매우 악명이 높았다. 나치는 가부장제를 극단화하여 여성을 오직 집에서 아이 낳는 도구쯤으로 취급했다. 패전 이후 동·서 분단 당시, 동독에선 여성들에게 경제활동 참여를 독려했으나, 서독은 전업주부를 주문하였다. 패전 이후 독일 여성은 전업주부-노동자로 양립됐는데, 동독이 서독에 흡수되다시피 통일되며 동독의 노동자 여성들은 다시 전업주부로 되돌아갔다. 그래서 여성은 '당당한 사회적 주체'가 아니라, '남성에 의한 전업주부'여야만 했고, 나치 시대와 서독 중심 사회에서 주체적인 여성은 범죄자 내지 광인이었다. 결국, 국가의 법이 가부장제에 기초함에 따라 자유를 외치는 여성들이 가부장제를 반박하며 법을 위협한다.

여기서 트로타의 작품 속 여성들의 처벌 사유를 좀 더 살펴보자. "가장 남성이 아니라 여성이 사랑을 주도함", "여성에게 강제된 돌봄 의무에 부당함을 느껴 그 책임을 남성에게 전가함" 결국, '여성의 주체성'이 죄목이다. 뿐만 아니라 남성과 여성의 형량이 각기 다르다. 실제로 여성 혁명가 '로자 룩셈부르크'의 경우, 기성의 정치 체제와 더불어 가부장제 또한 전복하려 했기에, 똑같은 죄목이어도 그녀의 수감 기간이 남성들보다 더 길었다. 트로타의 작품 속 가부장제의 터부를 발설한 여성들은 가부장제를 기준으로 '미친 소리'를 지껄이고, 하지 말라는 것을 기어코 행동에 옮김에 '난폭하고 유별난 모습'으로 묘사된다. 그러나 미친 소리와 난폭함과 유별남이 일반화되어야 함을, 그녀들의 자유를 법으로 금기시하고 있으니 자유로워지고자 한다면 날카로워져야 함을 트로타의 영화는 보여준다. 트로타의 여성들은 광인이 무지하다는 편견과 달리, 오히려 현명하다. 식자, 교수, 예술가 등 남다른 재능을 갖고 있다. 특출난 여성의 존재는 나약한 여성을 필요로 하는 가부장제에 균열을 일으키니, 정신병원에 수감되어 '고분고분'해질 것을 처방받는다. 하지만 그녀들은 범죄자나 광인이 되는 것을 조금도 두려워하지 않으며 왕성하게 뛰쳐나온다.

이렇듯 '광기'와 '반가부장적 범죄'로써 여성 해방의 물결을 열어젖힌 마가레테 폰 트로타를 1세대로, 2세대로는 앙겔라 샤넬렉을, 이 두 사람을 거쳐 오늘날 3세대의 감독으론 '마렌 아데'(앙겔라 샤넬렉도 속하는 베를린파로 묶이므로 2.5세대쯤으로 볼 수도 있다), '마리 크로이처', '에밀리 아테프', '니콜레트 크레비츠', '마리아 스테프', '앤 조라 베라치드' 등으로 이어진다.

 

ⓒ 영화 <나는 집에 있었지만…>(2019)

뉴 저먼 시네마가 1980년대에 이르러 퇴조하고, 2000년대에 '베를린파'(Berliner Schule)가 부흥하며 다시 독일 작가주의 영화는 국제적인 주목을 받는다. 뉴 저먼 시네마의 기수들은 실험적인 연출을 비교적 명확한 서사 위에서 추구했다. 그런데 베를린파는 뉴 저먼 시네마와 비교하여 서사를 급진적으로 해체하고, 대신 이미지 그 자체로 말하는 작법을 실험하였다. 이후 2010년대부터 서사와 타협하며, 그 결과물이 국내에서도 접할 수 있는 '크리스티안 펫졸드'의 영화, 마렌 아데의 <토니 에드만>(2016) 등이다.

이런 점에서 베를린파에 속하는 '앙겔라 샤넬렉'(Angela Schanelec)의 작품도 처음에는 내용이 눈에 잘 들어오지 않는다. 그녀의 작품에서 가장 먼저 눈에 띄는 것은 기묘하고도 독특한 이미지다. 일반적으로 우리는 사람의 얼굴을 정면에서, 동등한 시선을 교환하며 접한다. 그런데 샤넬렉은 감상자의 시선에 정면과 동공을 매개하지 않는다. 대신 정수리나 이마 부근을 비춘다. 샤넬렉은 인물을 아이 레벨 뷰가 아닌 하이앵글 구도로 촬영한 이미지가 특징이다. 이에 더해 얼굴이 있어야 할 구도에 손을 클로즈업하거나, 그 손이 잡는 것에 의해서 서사가 전개되기도 한다. 이윽고 미스테리한 형식을 점차 소명하고 해독함으로써, 서서히 형식이 함의하는 내용이 드러나는데, 그렇게 발굴된 내용 중 하나가 트로타의 유산인 여성이다. 샤넬렉의 하이앵글은 어디선가 내려다보고 있다는 것, 이로써 누군가의 지배 아래서 억눌려 있는 인상을 풍기고, 특정한 목적을 가진 사물을 집는 손으로 이어지는 편집 또한 도구이자 장치로 전락함을 가시화한다. 타인의 기대가 담긴 시선 아래서, 사물과 같은 특정 목적으로 움직이는 인물들은 '조각'처럼 얼어붙는다.

특히나, 샤넬렉의 여성들은 주로 '어머니'로서 굳어있다. 어머니의 반응은 둘로 나뉜다. <오후>(2007)에서 여성은 어머니인 자신을 유지하고자 집착한다. 반면 <나는 집에 있었지만…>(2019)에서 어머니는 아이들을 강제로 떠안게 되자 고함을 치고 신경질을 부린다. 이들은 어머니의 상태에 집착하거나, 아니면 어머니의 상태에서 달아나고자 안간힘을 쓴다. 이들이 모성에 집착하는 이유는 어머니가 아닐 시 여성 그 자체를 부정당할 거라는, '아무것도 아닌 상태'에 대한 불안 때문이다. 샤넬렉은 자유에 따른 대가로 무엇이든 될 수 있지만, 그 어떤 것에도 얽매이지 않음으로써 아무것도 아니게 되는 불안, 극단적인 대가로는 '죽음'을 제시한다. 반면 모성에서 달아나는 이유는 여성의 '어머니됨'이 독일에서 사실상 강제였기 때문에, 그녀들은 이를 원치 않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샤넬렉의 여성 또한 어머니의 상태에서 해방되려고 광인이 되거나, 샤넬렉만의 관점으론 어머니 외의 다른 여성을 허용하지 않는 사회 속에서 모성에 집착하는 여성들 또한 강박적인 광인이다. 샤넬렉은 두 광기 중 어느 하나를 긍정하기보단 절충을 택한다. 어머니가 되었다면 최소한의 책임을 짐과 동시에, 해방되는 방식으로 말이다.

 

ⓒ 영화 <내 안의 이방인>(2008)

마가레타 폰 트로타와 앙겔라 샤넬렉을 거친 오늘날 독일의 여성 감독들은 선각자들이 닦아놓은 토대를 자양분삼아 교도소와 정신병원, 집에 갇힌 광인 여성들을 더욱 급진적으로 해방한다. 이들은 지금까지도 가부장제가 그늘을 드리운 '어머니', '아내', '전업주부'를 거부한다. 최근 국내 개봉한 <안녕, 소중한 사람>(2022)으로 이름을 알린 '에밀리 아테프'(Emily Atef)의 작품 속 여성들은 어머니이자 아내가 된다. 사회가 어머니나 아내가 되는 일이 숭고하고 아름다운 일이라 선전했기 때문이다. 아테프의 <내 안의 이방인>(2008) 속 여성은 어머니가 될 기쁨과 기대에 들떠있다. 그러나 맞닥뜨린 현실은 상상과 달랐다. 시도 때도 없이 날카롭게 울어대는 아이를 위해서 온 시간을 할애해야 하며, 주체적인 직업을 내려놓을 수밖에 없다. <안녕, 소중한 사람>에서도 가장 남성은 아내가 최후까지 자신의 곁에 있었으면 싶다. 그러나 여성들은 집 밖으로 뛰쳐나오면서 남성이 필요하지 않은 여성, 제게 필요한 여성으로 나아간다. 그 여성들을 남성들은 미쳤다고 진단을 내린다.

집 밖으로 뛰쳐나오는 여성들은 전업주부에만 그치지 않는다. 여성에게 허용되었던 또 다른 직업이 있다. 바로 '배우'다. 에밀리는 <키브롱에서의 3일>(2018)에서 '씨씨 삼부작'의 주연으로서 전무후무한 인기를 누린 '로미 슈나이더'의 말년을 포착한다. 흥미롭게도 '마리 크로이처'(Marie Kreutzer)는 로미 슈나이더가 연기한 시대적 아이콘 엘리자베스 폰 비텔스바흐(씨씨)의 삶을 작년 12월 국내 개봉한 <코르사주>(2022)에 담아냈다. 공통적으로 두 작품 속 주인공들(배우들)은 미치기 일보 직전이다. 대중의 시선에 아름답게 보여야 한다는 코르셋이 그녀들의 숨통을 조인다. 이를 잘 보여준 작품이 있다. 배우이자 영화감독으로서, 여배우들이 느끼던 갑갑함을 영화에 반영한 '니콜레트 크레비츠'는 장편 데뷔작 <마음은 어두운 숲>(2007)에서 남과 여 똑같은 연기자라 한들, 남배우는 능동적이고 자의적인 연기자라면, 여배우는 남성에 의해서 배역이 정해졌었다고 분석한다. 이러한 시대적 분위기 속에서 로미 슈나이더는 항상 술에 진탕 취해있고, 씨씨는 어디론가 떠난다.

더욱이 당시 여성들이 자유롭지 못한 가장 큰 이유는 혹독한 가부장제 아래에서 경제력이 허락되지 않았기 때문이기도 하다. 다큐멘터리 <유쾌한 바흐만 선생님>으로 2021년 베를린국제영화제에서 은곰상을 수상한 '마리아 스페스'는 그 이전에 여성의 삶을 픽션으로 다뤘다. 스페스의 작품 속 여성은 광인에 준하는 '떠돌이', '가출 청소년', '노숙자'다. 이들은 비교적 자유롭지만, 안정적이진 않다. 사회가 여성의 경제적 자립을 허용하지 않기에 자해공갈을 하거나, 중년 남성 및 그에 준하는 부르주아 여성과 관계를 맺어서 불안한 삶을 겨우 연명한다. 자유롭고자 떠돌기도 하지만, 불법으로 번 돈을 적발당하지 않기 위해서 달아나기도 한다. 

 

ⓒ 영화 <내 발 아래>(2019)

그렇다면 과연 여성들이 경제적으로 넉넉한 삶을 산다면 자유로울 수 있을까. 3세대 독일·오스트리아 여성 감독의 특징이라면 경제적 자립에만 만족하지 않는다는 점이다. 마리 크로이처의 <내 발 아래>(2019), 마렌 아데의 <토니 에드만> 모두 다 경제적으로 자립하여 주체적이고 안정적인 '컨설턴트' 여성이 주인공이다. 그러나 전업주부임을 거부하면 살아남을 수 없었던 여성들처럼, 전문직 여성들 또한 자본주의 사회가 주문하는 이성과 합리성에 따라 '유용하지 못하면' 살아남지 못한다는 불안에 벌벌 떤다. 그래서 <토니 에드만>에선 나를 즐겁게 해주지만 이성적으론 무용한 감정을 외면하고, <내 발 아래>에선 비생산적이지만 나를 기쁘게 해주는 레즈비언으로서 성지향성을 억제한다. 특히, <내 발 아래>가 그리는 사회는 무가치하게 평가된 광인이 정신병원에 격리되고, 그 누구도 비용을 쏟아 돌봐주지 않는다. 두 영화가 보여주는 사회는 경제적이지 않은 광인에게 생존을 위협하는 혹독한 처벌을 가하기에, 이를 모면하고자 여성들은 항상 유용해야 한다는 강박에 휩싸인다.

그래서일까. 여성 감독들은 서로를 존중하고 스스로 솔직하도록 하는 '사랑'을 강조한다. 이들은 사랑을 통해서  남편과 아이를 위해서 희생하던 여성의 몸과 마음을, 또 이성적이고 합리적으로 사고하면서 괄시하던 감각을 회복한다. 그리고 이들의 작품 속 주인공들이 향하는 곳은 '자연'이다. 에밀리 아테프와 니콜레트 크레비츠 모두 여성들은 자유로운 '숲'으로 도주하고 심지어 나체로 활보하며 해방감을 만끽한다. 마리 크로이처의 작품에서 여성은 숲이나 호수, 바다로 도망간다. 여성들에게 도시는 갑갑한 무대다. 특정한 배역을 연기해야지만 머무를 수 있다. 반면 숲은 연기를 평가하는 시선을 나무로 차단한다. 배역을 벗고, 그 과정에서 옷까지 벗어 던지더라도 숲은 나무라지 않는다. 또 물로 가득한 자연은 어디로든 나아갈 수 있고 어떤 모양으로든 변형할 수 있는데, 여성 또한 자유롭게 변신한다. 이처럼 자유를 위해서 자연이 필요하다는 것을 여성 감독들은 굳세게 역설한다.

 

ⓒ 영화 <잉게보르크 바하만 - 사막으로의 여행>(2023)

트로타-샤넬렉의 전철을 밟는 오늘날 독일·오스트리아의 여성 감독들은 3대 영화제에도 작품을 올리며 국제적으로 많은 주목을 받고 있다. 그 여성들이 작품에서 환기하는 대상은 '미칠 수밖에 없는 여성'으로, 그녀들은 가부장제에서 자유롭고자 다르게 생각하며 '미친 소리'를 하거나, 아니면 가부장적인 법에서 범죄자가 되어야만 했다. 이윽고 그 투쟁을 가부장제에서 점진적으로 확장시켜 자본주의의 병폐 또한 꼬집고 궁극적인 만인의 해방을 도모한다. 그리고 올해 마가레테 폰 트로타의 <잉게보르크 바하만 - 사막으로의 여행>(2023)과 앙겔라 샤넬렉의 <뮤직>(2023)이 제73회 베를린 영화제에 소개되어 전 세계 관객들과 만나기를 고대하고 있다.

[글 박정수 영화전문기자, green1022@ccoart.com]

박정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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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술은 현실과 차별화된 고유하고도 독립적인 차원입니다. 그중에서도 영화는 타 예술 매체와 구분되는 고유한 시각적 특징을 지니고 있습니다. 이러한 예술만의, 오직 영화만의 경험을 독자 여러분께 소개해 드리고자 합니다. 동시에 영화는 현실에서 비롯되고, 인간에게 이바지합니다. 그렇기에 현실-예술, 인간-영화를 이어내는 교두보와 같은 글을 제공하고자 노력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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