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경수의 싸구려 이미지 시대] 참을 수 없는 존재의 매끈함
[김경수의 싸구려 이미지 시대] 참을 수 없는 존재의 매끈함
  • 김경수
  • 승인 2023.04.21 13: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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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월리스와 그로밋> 시리즈와 '아드만 스튜디오'에 대한 추억

2005년 10월 10일, '아드만 스튜디오'(Ardman Studio)가 전기 사고로 불탔다. <월래스와 그로밋> 시리즈, <치킨 런>(2000) 등등 아드만 스튜디오에서 제작한 모든 애니메이션의 세트장, 캐릭터의 원본 인형, 스토리보드가 순식간에 잿더미가 되었다. 1972년 설립 이후 30년이 넘는 세월의 흔적이 단번에 사라진 셈이다. 다행히 모든 애니메이션의 필름 원본은 남아 있다. 애상에 잠긴 문장을 쓰는 중이지만, 그때의 나는 아드만 스튜디오의 화재 소식을 몰랐다. 아마 그 뉴스를 보았다고 해도 무심코 지나가는 소식 중 하나로 보았을 것이다. 그때도 <월래스와 그로밋>은 내 기억에서 차츰 잊혀 가던 이름이었으니까.

그해는 유년기가 끝난 해다. 그때의 나는 인생의 한 시절이 끝에 이르고 있다는 것을 당연히 몰랐을 것이다. 유년기가 그때 끝난 듯하다는 느낌은 지금 내가 덧붙이는 해석에 불과하다. 유년기니, 청춘이니, 중년이니 하는 삶을 계절에다가 비유하는 직유는 사실 현재를 살아가고 있는 이에게 허상에 불과할지도 모른다.

"아침에는 다리가 넷, 점심에는 다리가 둘, 저녁에는 다리가 셋"이라는 스핑크스가 내는 수수께끼의 진정한 교훈은 여기에 있지 않을까. 문명으로부터 버려진 데다가, 자기가 아버지를 죽이고 어머니와 결혼한 줄도 모르는 눈앞의 세계에 무지한 인간만이 인생을 안다고 이야기할 수 있으니까. 나는 아직도 '아드만 스튜디오의 화재가 내 유년기의 마법적인 세계를 닫아버린 것이 아닐까'하는 생각을 떨치기 어렵다. 그날을 기점으로 나는 성인으로 자라날 때까지 클레이 애니메이션만이 주는 생동감을 더는 느끼지 못했다.

 

ⓒ <월래스와 그로밋 : 거대토끼의 저주>

그해 11월 4일 <월래스와 그로밋 : 거대토끼의 저주>를 보았다. 2005년쯤부터 나는 서서히 영화에 재미를 느끼기 시작한 관객이었다. 극장에 1년에 한두 번 가던 아이가 그해는 한 달에 한 번씩은 극장으로 갔다. 처음으로 블록버스터가 아니라 중소규모의 영화를 보기도 했다. 나는 그해에 개봉한 영화를 아직도 사랑한다. 물론, 기억에서 잊힌 영화도 더러 있다. <아일랜드>(2005), <사하라>(2005), <천군>(2005)은 보기야 했지만 이야기는 물론, 이미지까지 기억이 나지 않는 그저 그런 작품이었다. 반면에 <밀리언 달러 베이비>는 그 깊이를 다 이해하지 못한 작품인데도 그저 울었다.

그때 유행하던 만화 시리즈인 '~에서 살아남기 시리즈' 풍의 영화인 줄 알고 본 임필성 감독의<남극일기>(2005)도 있다. 아직 무슨 내용인지는 잘 모르겠으나 처음 본 공포영화라서 이미지만은 기억에 선명히 남아 있다, 무엇보다도 그 해 스티븐 스필버그의<우주전쟁>(2005)과 피터 잭슨의<킹콩>(2005)이 준 감동은 상상을 초월한 것이었다. 게다가 팀 버튼의 <찰리와 초콜릿 공장>(2005), <나니아 연대기> 시리즈까지 판타지 영화도 가득했다. 그해는 우연히도 CG가 할리우드 블록버스터에 제대로 쓰이기 시작한 해다.

제아무리 <월래스와 그로밋 : 거대토끼의 저주>가 재밌다고 한들, 범작에 불과한 이 작품이 그해 영화에 비할 바는 아니었다. 물론, 비주얼과 스토리만큼은 탁월한 편이었다. 뱀파이어 장르 규칙에 충실한 스토리는 다소 삐걱거리기는 해도 장르물로의 재미는 충분하며, 영화 곳곳에 <런던의 늑대인간>같은 B급 영화에 대한 오마주가 녹아 있어서 그것을 발견하는 재미도 있다. 다만, 더는 클레이 애니메이션에 생동감을 느끼지 못했을 뿐이다. 함께 본 어머니와 아무런 감상도 나누지 않고 곧장 집으로 돌아갔다. 그날은 왜인지 입맛에 없는 날이었다.

 

ⓒ <꼬마펭귄 핑구>(1986)

"무언가 사라져 버렸다"는 감흥을 느끼는 사람이 나뿐만이 아니라는 것이 가끔 위로가 된다. SNS에서 한동안 <꼬마펭귄 핑구>의 에피소드 하나가 추억팔이로 돌아다닌 적이 있다. 이 에피소드가 한국을 제외한 국가에서는 상영이 금지되었다는 설명이 더해져 있다. 영상은 커다란 바다표범이 호탕한 웃음을 지으며 불쑥 등장하는 것으로 시작한다. 숏츠가 그러하듯이 전후 맥락은 잘려져 있다. 바다사자는 도저히 의중을 알 수 없는 눈빛으로 핑구를 보더니 핑구를 이글루에다가 가두는 장난을 여러 번 한다. 요즈음 유행하는 맑은 눈의 광인처럼. 핑구는 바다사자가 방심한 틈을 타서 겨우 탈출한다. 빙판 한가운데에서 미끄러진 뒤에야 핑구는 악몽에서 깬다.

영상의 댓글창은 그야말로 집단 트라우마를 호소하는 현장이다. 바다사자로 인해서 어릴 때 악몽을 꾼 적 있다고 하는 것이었다. 악몽이라는 맥락을 생각한다면 충분히 가능한 상상이다. 이 숏츠야말로 서사나 맥락이 부재해 있는 어린 시절의 영상 감상법을 그대로 보여주는 듯했다. 지금 보기에 바다사자의 디자인은 제법 허접하다. 찰흙에다가 전혀 어울리지 않는 반짝이 눈을 박아 넣어서 생긴 부조화는 색다른 공포를 느끼게 했다. 핑구와 월래스와 그로밋 등 모든 클레이 애니메이션의 캐릭터가 눈까지 찰흙으로 그려져 있다. 물개만큼은 달랐다. 찰흙에 불과한 것이 생생한 눈동자를 지니고 살아 움직인다는 공포가 그때의 우리를 사로잡은 것이 아닐까. 영상에 담긴 것이 너무 사실이어도, 너무 거짓이어도 우리는 기이함을 느끼게 된다. 단순히 이를 불쾌한 골짜기로만 이야기할 수는 없을 듯하다.

마크 피셔는 '기이한 것을 이야기하며, 인간의 흔적이 부분적으로만 남아 있는 자리에서 파생하는 감정'이라고 이야기한 적이 있다. 클레이 애니메이션의 세계는 모든 것이 흙으로만 재구성된 평행 우주이다. 인간의 흔적이라고는 없어야 하는 세계다. 바다사자의 눈동자가 안기는 공포는 거기에 사람이 개입한 듯한 흔적이 있어서 생긴 것이다. 사람이 있는 잠깐의 흔적을 제외한 세계가 온통 흙이라는 물질로 이루어져서다. 아기자기한 세계가 가짜에 불과하다는 실망감과 까닭 모를 공포가 뒤엉킨다. 클레이 애니메이션 장르에 담긴 물질성이 급작스레 드러나서다. 이는 CG가 자연과 인간을 한 데에 어우러지게 해 경탄을 불러일으키는 것과는 또 다른 매력을 지니고 있다.

 

ⓒ <월래스와 그로밋 : 거대토끼의 저주>

클레이 애니메이션은 흙 등 물질이 유기체처럼 살아 움직이는 것으로 보이게 조작하는 장르다. 물론 그 인형의 움직임 하나하나는 화면에는 드러나지 않는 인간이 수작업으로 만들기는 한다. 그런데도 클레이 애니메이션의 세계에서는 부자연스러운 움직임이 현실의 자연스러운 움직임과 같다. 스톱 모션 애니메이션은 자연스러울수록 그 뒤에 있는 인간이 상상되기 때문이다. 핑구의 바다사자는 인간 없는 세계를 상상할 수 있는 통로인 셈이었다. CG는 인간과 가공된 자연이 한 데에 어우러지게끔 하는 데에 비해서 클레이 애니메이션은 오로지 흙이라는 물질만을 위한 세계라 할 수 있다.

최근에야 철학은 인간이 없는 세계를 상상하기 시작했다. A.I(기계)와 기후위기(자연)가 인간의 세계를 점차 좁히고 있어서다. 인간이 도구를 발명한 뒤로, 성경 속 신이 인간에게 동물을 다스리라는 전권을 위임한 뒤로 우리는 이 둘이 우리의 통제권에 속해 있는 것으로 생각했다. 클레이 애니메이션이 주는 마법적인 상상력은 이를 벗어난다. 클레이 애니메이션의 무한한 상상력은 그야말로 생태적이다. 흙이라는 물질이 모든 것을 생생히 살아 움직이게끔 해서다. 인간 없는 세계가 가능해진 셈이다.

아드만 스튜디오의 클레이 애니메이션은 사실 어린이를 대상으로 한 듯하지만, 성인에게 자신이 동물과 동일시되는 거친 질감을 보게끔 하는 데에 목적이 있는 듯하다. 이는 앞선 연재에서 이야기한 만화적 신체성이 인간 신체와 만화적인 기호로 구성된 신체를 나누는 것과는 반대다. 또 컴퓨터 그래픽에 불과하기에 언제든 망가질 수 있는 킹콩과 외계인의 신체와는 또 다르기도 하다. 클레이 애니메이션은 신체라는 개념을 제거한다. 이를 <짱구는 못말려> 1기의 오프닝만큼이나 잘 드러낸 작품은 없다. 찰흙으로 된 짱구는 액체와 고체 사이에 있어서 언제든 뭉쳐지고 다시금 뭉쳐진다.

 

ⓒ 영화 <치킨 런>

'클레이 애니메이션'은 모든 것을 찰흙으로 만든다. <월래스와 그로밋: 화려한 외출>(1989)의 월래스와 그로밋은 달로 여행을 떠난다. 거기서 월리스는 달에다가 돗자리를 펼친다. 달이 치즈로 이루어진 것을 알고는 달 일부를 잘라다가 크래커에다가 올려 먹는다. 지금까지도 이 에피소드는 클레이 애니메이션을 널리 알린 에피소드로 이야기된다. 여기서 달과 치즈 둘 다 흙으로 제작되었기에 이 둘은 얼마든 치환될 수 있다. 물질과 물질 사이의 교환이 가능해지고, 이들 사이에 네트워크가 생긴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인간도 예외는 아니다. 클레이 애니메이션의 미학은 인간과 동물 모두가 흙이라는 물질로 전환되고, 월레스와 그로밋이 동일한 움직임의 척도를 지닌다는 데에서 비롯한다. 인간도 결국 물질에 불과하다는 것을 이만큼이나 급진적으로 드러내는 장르는 없다. 아드만 스튜디오는 이를 더없이 잘 드러내는 제작사다.

<치킨 런>(2000)은 극장에서 본 영화 중 가장 오래도록 기억에 남아 있는 작품이기도 하다. <치킨 런>을 이해하기에는 꽤 버거운 나이에 보았는데도 말이다. <치킨 런>은 마르크스가 본 영국을 저만의 스타일로 재해석한 듯한 영화다. 트위디 부부의 통제 아래에 있는 닭 농장은 그야말로 음산하다. 농장 안의 모든 암탉은 달걀을 낳아야 한다. 하루 목표치만큼 알을 생산하지 못하는 순간 트위디 부인에게 도살당한다. 수탉은 둘 뿐이다. 염세적이기까지 한 닭 농장은 공장에 더 가깝다. 이 영화에서 화폐로 기능하는 것은 달걀뿐이다. 농장에 닭이 아닌 존재는 두 마리의 쥐, 닉과 펫쳐다. 이 둘은 달걀을 거래하며 닭에게 도구를 제공한다. 인신매매, 인육 등 2005년에 괴담으로 돌던 것이 여기서는 일상이다.

<치킨 런>은 그저 단순한 디스토피아 동화로 남을 수도 있는 영화다. 한편으로 수많은 해석의 가능성이 있는 영화이기도 하다. 암탉이 자식을 재생산하기보다 함께 탈출을 꿈꾸고, 두 마리의 쥐와 종을 넘나드는 우정을 꾀한다는 설정은 현대적이다. 암탉이 여성으로의 자의식을 지니기보다 오히려 뜨개질을 하는 등 인간 여성의 스테레오타입을 반복하는 것은 이 영화의 한계다. 또한 생명이 화폐로 거래되기에 이르는 비-인간화된 자본주의의 잔혹성을 형상화한 영화로도 보인다. 공장에서의 인간은 양계장에서의 동물로 동일시된다. 이것을 의인화라 보기에는 약간 무리가 있다. 클레이 애니메이션은 동물을 인간으로 그려내지 않는다. 동물과 인간을 같은 재료로 그려낸 것뿐이다.

 

ⓒ 영화 <미드90>(2019)

2005년은 또 가족이 오래된 비디오테이프 재생기를 버리고 DVD 플레이어를 산 해이기도 하다. 나는 고집을 부려서 비디오테이프를 텔레비전을 받치는 흰 서랍장에다가 처박아 두었다. 연말까지 서랍장을 열지 않다가 결국 한꺼번에 가져다 버렸다. <쥬라기 공원>(1992), <월래스와 그로밋>, <패트와 매트>가 담긴 비디오테이프, 테이프를 재생하는 중간에 삽입하고는 했던 쾌청이 제일 먼저 폐기되었다. 이윽고 어린 시절이 담긴 홈비디오는 재생되지도 못하고 사라져 버렸다. 거기 담긴 것은 그것을 찍은 부모님의 머리에도 남아 있지 않을지 모른다. 영원히 돌아갈 수 없는 미지의 세계로 남아 있을 것이다. 왜 그저 영상에 불과한 것인데 비디오테이프를 보고 있으면 왜인지 슬프다.

   

클레이 애니메이션이 거친 물질성을 지니듯이 비디오테이프도 거친 물질성으로 그 너머를 환상으로 보게끔 하는 효과가 있다는 감흥을 느껴서다. 다만 그때가 아름다웠다고만 이야기할 수는 없다. 그저 하나의 세계가 저 멀리 사라져 버렸을 뿐이다.

비디오테이프에 대해서 어렴풋한 기억이 겨우 하나 남아 있다. 온 가족이 가끔씩 거실에서 홈비디오를 함께 보았다. 친형과 나의 어린 시절이 담긴 것들이었다. 화질이 워낙 흐릿했기에 우리는 TV와 겨우 한 뼘 거리에서 그것을 보아야 했다. 그래도 가끔 부모님은 카메라가 대상에 가까이 가지 않는 한 거기에 찍힌 사람이 누구인지를 헷갈렸다. 그때 나에게 저화질의 비디오테이프에 담긴 사람을 사람으로 느낀 적이 없다. 비디오테이프의 입자가 한 데에 뭉쳐 있으며, 그 입자의 흐름으로 사람의 실루엣이 그려지는 듯한 이질감에 신기해했다. 비디오테이프는 저화질로 인해서 그 너머의 세계를 더 환상적으로 보이게 했다.

홈비디오를 전면으로 내세우는 <에프터썬>(2022)이나 <미드90>(2019)를 보고 느낀 이질적인 감정도 여기에 기인하는 듯하다. 87년생인 샬롯 웰스, 83년생인 조나 힐에게는 그들의 부모가 VHS에다가 유년기를 담는 것이 자연스러운 일일 것이다. 비디오테이프가 이제 막 폐기된 시절을 산 내게 그들이 그려내는 비디오테이프 속 추억은 환상의 세계로만 느껴졌다. 놀랍게도 <월래스와 그로밋> 시리즈는 모두 VHS로 찍힌 것이다. <월래스와 그로밋 : 거대토끼의 저주>가 VHS로 찍은 마지막 작품이다. 이후로는 디지털로 이 시리즈를 찍기 시작했다. 비디오테이프는 정확히 아드만 스튜디오의 화재를 기점으로 사라져 버렸다. 다만, 비디오테이프가 디지털이나 필름에 비해서 우위를 지니는 매체라 생각하는 것은 아니다. 비디오테이프는 추억이 거친 입자로 남아 있게끔 한다는 장점을 제외하면 비효율적인 매체다.

 

ⓒ 영화 <숀더쉽>(2015)

지금은 모든 움직임이 매끈해졌다. CG 시대가 도래하면서 사라져 버린 이도 있다. 그해 내가 본 <찰리와 초콜릿 공장>은 더없이 슬픈 영화다. 팀 버튼의 애니메이션을 본 적 있는 나로는, 이 매끈함을 견디기가 힘들었다. <가위손>에서 얼룩덜룩한 특수분장이 화려한 파스텔톤 색감으로 전환되었다. 로알드 달의 원작을 그려내기에는 이만한 연출이 없다고 생각했다. 팀 버튼의 전성기는 <찰리와 초콜릿 공장>을 기점으로 사라지기 시작했다.

그래도 아드만 스튜디오는 한계에 굴하지 않고 아직도 꿋꿋이 클레이 애니메이션을 제작하는 중이다. 한동안 뜸하나 싶더니 <월래스와 그로밋: 양떼 도둑>에서 맹활약한 서브캐릭터 숀더쉽을 주인공으로 한 <숀더쉽>(2015)과 그 속편은 아드만 스튜디오가 여전히 건재하다는 것을 알리는 데에 성공했다. 특히 능수능란한 스토리텔링과 캐릭터 디자인은 여전했다. 2017년에 국내에도 전시된 아드만 스튜디오 회고전展도 아드만 스튜디오의 추억을 대중의 뇌리에 각인하는 데에 성공했다.

지금은 넷플릭스를 등에 업고 <월래스와 그로밋>과 <치킨 런>의 속편을 만들고 있다. 아드만 스튜디오의 작품은 추억으로 덮어두기에는 여전히 아름답다. CG가 무엇이든 그릴 수 있는 데에 비해서, 클레이 애니메이션은 흙이라는 제약이 있다. 오히려 제약이 있기에 클레이 애니메이션에서는 달이 치즈가 되는 상상력이 가능해지는 것이다. 클레이 애니메이션의 거칠거칠한 질감은 멸종하기에는 너무도 귀하다. 아드만 스튜디오의 세계는 천연기념물로 지켜져야 하는 몇 안 되는 세계다.

[글 김경수 영화평론가, rohmereric123@ccoart.com]

김경수
김경수
 어릴 적에는 영화와는 거리가 먼 싸구려 이미지를 접하고 살았다. 인터넷 밈부터 스타크래프트 유즈맵 등 이제는 흔적도 없이 사라진 모든 것을 기억하되 동시에 부끄러워하는 중이다. 코아르에 연재 중인 『싸구려 이미지의 시대』는 그 기록이다. 해로운 이미지를 탐하는 습성이 아직도 남아 있는지 영화와 인터넷 밈을 중심으로 매체를 횡단하는 비평을 쓰는 중이다. 어울리지 않게 소설도 사랑한 나머지 문학과 영화의 상호성을 탐구하기도 한다. 인터넷에서의 이미지가 하나하나의 생명이라는 생각에 따라 생태학과 인류세 관련된 공부도 하는 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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