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인 라이브즈' 다른 삶을 살아보리란 심정으로…
'나인 라이브즈' 다른 삶을 살아보리란 심정으로…
  • 변해빈
  • 승인 2023.04.13 1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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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타인과 나눌 수 있는 인생이란 게 존재하는가"
ⓒ 영화 <나인 라이브스>

공동묘지를 찾은 '매기'(글랜 글로즈)와 그의 어린 딸 '마리아'(다코타 패닝)가 발걸음을 멈춰 선다. 누군가의 묘비 위에 머물던 고양이 한 마리가 황급히 자리를 뜬 다음이다. 그 앞에 자리를 펴고 앉은 두 사람은 얼마간 곳곳을 둘러보며 오붓한 시간을 보낸다. 영화는 인물들의 시선이 닿는 저 너머를 카메라로 직접 비추는 대신, 대화 속에 녹여 넣고는 서서히 그 흐름을 따라가게 만든다. 우리는 몰랐지만, 다른 이야기가 오가는 와중에도 마리아의 머릿속은 스쳐 간 고양이가 남긴 여운으로 채워졌던 모양이다. "왜 고양이는 아홉 번 산다고 해요? (...) 정말 그런가요?" 마리아의 물음에 매기는 이렇게 답한다. "아니 한 번 살겠지." 이때까지 우리는 모녀가 나눈 대화 속에 은밀하게 도사리고 있는 비밀의 유무를 모른다. 하물며 그들이 누구의 묘를 찾았는지, 예고 없어 벌어진 매기의 울음의 이유조차 불투명하지만 살면서 무언가를 잃어본 경험 하나쯤은 있을 것이란 이해의 차원 안에서 납득이 어려운 건 아니다.

의미심장한 것은 그 후에 벌어지는 패닝하는 '카메라 움직임의 쓸모'다. 로드리고 가르시아 감독은 <나인 라이브즈>에서 총 아홉 인물의 이야기를 각각 롱 테이크 촬영하여 어떤 이의 인생의 단면을 10분 남짓한 시간 동안 통째로 펼쳐 보여준다.

줄곧 매기와 마리아를 따르던 카메라는 시간적 연속성을 유지한 채 인물을 벗어나 시계방향으로 회전을 그리기 시작한다. 그 안에는 드넓게 펼쳐진 주변 풍경이 평온하다는 느낌뿐, 간접적으로 전달하던 무언가의 거대한 실체를 담고 있지는 않다. 카메라는 차라리 잠시 시간을 벌어주려는 심정으로 인물을 등지고 있는 것 같다. 그동안 인물이 보는 세상은 또다시 프레임 바깥에 위치한다. 카메라가 원래의 자리로 복귀하면, 홀로 자리를 털고 일어서는 매기의 모습을 통해, 떠나고 없는 마리아의 행적은 어렴풋이 짐작되는 데 그친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영화와 현실은 물리적으로 동일한 시간의 흐름을 버티고 있지만, 누군가는 생과 사, 현존과 현전의 간극을 이해하는 일처럼 이전과 다르게 변화된 국면을 떠안고야 만다.

매기에게도 죽은 딸의 환영과 만나는 날 말고 다른 날도 있었다. 그러나 가르시아는 인생의 여러 면면 중 미래에 대한 가망이 없고(산드라), 불가능한 관계에 걷잡을 수 없이 동요되는가 하면(다이애나), "이렇게 살면 안 돼"라고 생각하면서도 난관을 피해 갈 방법을 모르는(홀리) 처지를 포착한다. 괴로운 쪽을 피하려다 외로워지는 이(사만다)와 기어코 더 괴로운 쪽을 선택하고 마는 연인(소니아, 로나)은 되돌려져선 안 되거나 되돌아갈 수 없는 과거의 관계와 감정에 속박된 존재들이다. <그녀를 보기만 해도 알 수 있는 것>(2000)에서 어느 인생이든 막다른 길은 존재할 수 있지만, 뒤편으로 뚫린 길, 바로 자신이 걸어온 지난 인생을 되짚을 때 상황은 달라질 수 있다고 전하던 가르시아였다. 하지만 "안 되는 사람은 뒤로 자빠져도 코가 깨진다"는 말이 마치 내 이야기처럼 들려서 아픈 인생(루스) 앞에선 그저 낭만적으로 들리는 말에 불과하다.

 

ⓒ 영화 <나인 라이브스>

   

'타인과 나눌 수 있는 인생이란 게 존재하는가'에 대한 가르시아의 고뇌는 앞뒤 내용이 거칠게 절단된 나머지, 이음새가 마모된 조각 형태로 이야기를 고립시키는 시도에 이른다.

<그녀를 보기만 해도 알 수 있는 것>, <텐 티니 러브스토리>(2001)에서 에피소드식 구성을 통해 인간의 근원적인 고독과 비애의 정서를 그려 온 가르시아는 <나인 라이브즈>에서 그보다 더 단호해졌다. 하나의 에피소드이자 시퀀스이며 장면을 구성하는 서사의 축은 얼마간 모호하고 삭막하다. 인물은 자신을 설명하기 위해 눈을 마주치거나 목소리를 보태지 않는다. 전작에서 그나마 극을 보조하던 문장형의 부제목도 없다. 인물들은 급작스럽게 프레임 속에 던져지고 우리는 그들의 바로 직전의 과거도 모른다. 덩그러니 표기된 이름 하나를 붙잡고선 주어진 시간 안에서 저들끼리 끓어오르는 행위와 정념으로 하여금 진행되는 상황에 겨우 따라붙지만, 결정적인 순간이 오면 영화는 풀어야 할 문제를 무더기로 남긴 채, 가차 없이 화면을 암전시킨다.

가르시아는 후회로 점철되고 때로 비참하기까지 한 운명과 형편에 주목하면서, 사람 사는 일이란 이토록 주체가 스스로 생산 또는 통제할 수 없고 어떠한 인과관계로부터 기인하는지 속속들이 설명해낼 수 없는 나날의 연속이라는 사실과 직면해 왔다. 그런데 '그런 식의 인생'을 사겠노라고 계획하는 이는 실제로 없을 것이다. 그렇다면 이 인생의 맨얼굴을 어떻게 따라가고 보여줄 수 있을까.

<나인 라이브즈>의 일곱 번째 에피소드에서 한 남자는 그럴싸하게 편집된 TV 프로그램 속 삶은 진짜처럼 여겨지는 환상적인 속임수라고 지적한다. 그런데 물리적으로 편집을 거치지 않은 영화란 없다. 이를 위해 다음 문장을 붙잡아봐야 할 것 같다. "변하는 거란다. 계속 가는 거야. 여기 있는 사람들도 그랬고 무거운 짐들을 지고 갔겠지. (...) 네가 지고 가야 할 것들이지. 다들 어떻게들 견디는지 모르겠다." 아이가 자라면 훗날 '해주려던' 말이었겠지만, 이 말은 매기가 짊어지고 사는 말이 되었다. 그녀가 인생의 진리를 파악한 듯 보이지만 여전히 응답을 기다리는 쪽일 때, 인생은 양립되는 조건으로 작동하는 역설과 모순의 연속이다.

 

ⓒ 영화 <나인 라이브스>

엄격한 형식과 질서 안에 귀속된 영화의 구조는 계획되지 않는 인생에 대한 일종의 대항 표식이자, 그 실재에 가장 근접하게 다가서려는 시행착오이다. 가르시아에게 중요한 건 중단되는 일과 계속되는 것의 틈새를 파괴하고 제거하는 저항이 아니라 '그것들의 관계성을 의식하고 접속'하는 문제다. <나인 라이브즈>의 구조는 오리무중의 인생의 작동법과 다른 역설과 모순을 동시적으로 공존하게 만들려는 시도이다. 

먼저, 아홉 개의 롱 테이크 장면은 능동성을 관객이 아닌 인물들에게 부여한다. 관객은 오히려 지속되는 흐름의 질서 안에서 달라지는 것들 대한 지극한 몰입과 집중을 요구받는다. 이를테면 다이애나(로빈 라이트)는 10년 만에 헤어진 옛 연인과 재회한다. 두 사람은 같은 장소에 있지만 마트 진열대를 사이에 두고 헤어지고 만나기를 반복한다. 시간의 지속이라는 고정된 테두리 안에서 다이애나는 몇 번이고 심경의 변화를 겪는다. 먼저 뒤돌아선 이도, 떠나간 그를 붙잡으려 뒤쫓는 이 역시 그녀다. 파편화된 조각 안에서 파토스는 시시각각 변화의 굴곡을 그린다. 그로 인해 상황은 악화되어 가지만 동시에 서사의 논리는 즉흥적이고 끝없이 유동하는 인물들의 반응 자체로 만들어진다.

불운한 과거는 영화의 물리적 구조를 극복하고 현재에 영향을 미치는 데 반해 미래는 너무 멀리 있다. 구조를 통해 현재에 머무르며 오지 않은 미래의 변화를 긍정하는 일은 영원히 이어지지 못한다. 완결성을 잃은 하나의 에피소드 이후에는 해결의 조짐이나 가능성이 아닌 막막하고 비관적인 예감이 도사린다. 그런데 도리어 암전된 무의 상태의 미래를 더 펼쳐서 이해하려 할 때 중단은 다른 체계의 기능으로 이해된다. 역으로 불운을 감수하려는 태도, 그런 안간힘이 이 영화에는 필요하다. 그러니까 얽매여 있는 과거가 현재의 문제를 절정 단계로 고조시킬 때 어두운 미래를 예감하고 인정하는 태도가 영화를 중단하며 그 예감이 현실에서 벌어지는 미래를 막아 세운다. '불가능하고 못 하는 것'이 가능한 상황을 벌어지게 함으로써 잠재된 미래가 아닌 중단의 잠재성을 보여준다. 가르시아의 이러한 시도는 분절된 하나의 조각으로서의 고립된 삶을 다르게 바라보게 만든다. '지금의 불운한 순간은 내 삶의 가장 작은 단위, 무수한 조각 중 하나에 불과하다.'

 

ⓒ 영화 <나인 라이브스>

가로막히며 그대로 사라질 것 같던 인물들은 다른 이의 시공간에서 발견된다. 아버지(미겔 센도벌) 앞에서 자살 소동을 벌인 홀리(리사 게이 헤밀턴)는 카밀(캐시 베이커)을 담당하는 간호사로 등장한다. 아버지는 수감 된 산드라(엘피디아 칼리로)를 관리하는 교도관이기도 하다. 감독은 인물들이 서로를 스치게 하거나 타이밍을 의도적으로 어긋나게 만들면서 이들을 긴밀하게 엮진 않는다. 그런데 그들의 시공간이 서로 분리되지 않았다면 가볍고 우연한 만남은 전혀 다른 인상을 주었을 것이다. 가늘고 느슨한 뒤섞임이고 겹침이기에 정답으로 채워지지 않은 저마다의 빈틈은 타인의 삶과 관계되며 뒤엉킨 문제를 풀어갈 실마리를 준다.

가르시아가 통합되고 완결된 하나가 아니라 완성이 유예된 여러 개를 고집하는 이유는 다른 이들의 세상 속에 비친 모습에서 또 다른 인생의 단면이 드러나기 때문이다. 영화는 취약하지만 다양한 삶의 단면이 모여 구성되고, 그래서 '충동적인' (자살이 아닌) 자살의 실패를 불러올 수도, 제자리로 되돌아가야 할 중요한 이유를 떠올리게도 하는 그런 잠재된 순간도 보여준다.

가르시아는 고양이가 아홉 번 산다는 미신은 단호하게 부정했다. 인생의 맨얼굴과 직면한 인간은 다른 삶을 살아보리란 심정으로, 단 한 번을 산다. 따라서 그는 터무니없는 낙관을 제시하기보다 전체를 관류하는 단순한 사실 하나에 어렵게 도달하기를 감행하는 자다. 영화의 첫 시작에서 사방이 막힌 교도소 복도를 담은 무인 프레임이 짧게 등장했다 사라지진 적 있다. 닫힌 문 너머의 존재들은 살아 있지만 영혼은 죽었거나 죽지 않기 위해 발버둥 쳐야 하는 이들이다.

영화의 마지막엔 실제의 죽음, 혹은 다른 질서로 작동하는 삶이 있다. 흘러서 원망스러운 시간(첫 번째)과 영원이 된 하루(아홉 번째)는 무엇이 다르고, 같은가. 어느 쪽이 더 무겁고 덜 아픈가. 차이와 경중을 나누는 건 쓸모없는 일이겠지만, 우리는 시작에서 끝으로 도달하기까지 문이 닫히고 열리는 무수한 헤맴의 과정이 반복되었음을 안다. 이 과정에서 <나인 라이브즈>의 파토스는 절망을 단념하지 않으려는 의지와 끈기를 동력으로 견디는 삶이 무엇인지 보여준다. '변화하지만 계속해서 나아가겠다'는 태도가 있어서 사방이 막힌 길을 트여주고 자기 생의 길을 딛고 일어서는 결론도 만들어낼 수 있다. 미궁을 헤매듯 어렵게 지속되는 삶이기에 아홉 개의 인생 모두를 공평하게 끌어안고 싶다.

[글 변해빈 영화평론가, limbohb@ccoart.com]

 

ⓒ 영화 <나인 라이브스>

나인 라이브즈 
9 Lives
감독
로드리고 가르시아
Rodrigo Garcia

 

출연
다코타 패닝Dakota Fanning
글렌 클로즈Glenn Close
아만다 사이프리드Amanda Seyfried
씨씨 스페이식Sissy Spacek
에이단 퀸Aidan Quinn
엘피디아 카를로Elpidia Carrillo
케시 베이커Kathy Baker
리사 게이 해밀턴Lisa Gay Hamilton
로빈 라이트Robin Wright
제이슨 아이삭스Jason Isaacs
홀리 헌터Holly Hunter
스티븐 딜레인Stephen Dillane
에이미 브렌너먼Amy Brenneman
윌리엄 피츠너William Fichtner

 

제작연도 2005
상영시간 112분
등급 15세 관람가
개봉 2006.08.24

변해빈
변해빈
 몸과 영화의 접촉 가능성에 대해 고민한다. 면밀하게 구성된 언어를 해체해서 겉면에 드러나지 않는 본질을 알아내고 싶다. 2020 제1회 박인환상 영화평론부문 수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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