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상용의 영화일기] 2023년 4월 3일
[이상용의 영화일기] 2023년 4월 3일
  • 이상용
  • 승인 2023.04.09 12: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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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분간 유지될 것 같은 숙제의 성수기…"

3월 말과 4월에 걸쳐 흥미로운 작품이 많지는 않다. 전통적으로 이 시기가 '비수기'라 불렸던 때에 해당하는 탓일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비수기라는 말은 과거 속에 존재했던 영화 관람의 환경이 되어 가고 있다. 3월 31일만 해도 넷플릭스와 티빙에서 새로운 시리즈를 내놓았다. 관객에게 던져지는 것은 '선택의 고민'일 뿐이다. 

이제 과거처럼 비수기라는 명칭이 통용된다고 해도 드라마를 아우르는 영화 관람 문화에 극장을 겨냥한 비수기라는 명칭은 사용하기 어렵다. 중요한 것은 선택지 자체다. 볼만한 혹은 보고 싶은 영화가 있는지 없는지에 따라 달라질 따름이다. 온라인이든 오프라인이든 선택할 영화가 많다면 '성수기'다. 그렇지 않을 때 영화 시장은 언제나 비수기가 된다. 기준은 극장 시스템이 아니라 선택하는 개인에 달려 있다. 이달의 일기는 비수기를 떠올리며 적어 내려간다. 

그나저나 스필버그의 신작을 보러 가야 할 텐데… 비수기라고 해도 숙제는 쌓인다. 세상은 넓고 영화는 많다. 이 또한 OTT의 시대와는 다른 근본적인 문제다. 극장이든 OTT 플랫폼이든 찜해둔 영화는 결코 줄어드는 법이 없다. 당분간 유지될 것 같은 숙제의 성수기…

 

<오디션Audition> 미이케 다카시Miike Takashi|1999

ⓒ 와이드 릴리즈

<오디션>이 23년 만에 정식으로 처음 개봉된다. 하지만 이 작품은 영화제를 포함하여 여러 번 본 적이 있다. 이야기 구조는 단순하다. 사별한 중년의 사내가 오디션을 열고, 이를 통해 새로운 부인을 구한다는 설정이다. 이 설정만 읽고 '이 작품은 윤리적으로 문제가 있는 거 아니야'라고 생각할지 모르겠다. 글쎄… 오늘날의 문화적 환경이 이러한 설정보다 훨씬 나아졌다고 생각하는 거라면 선뜻 동의하기는 어렵다.

오 편집장의 「"손가락 하나면 충분해요!"」가 건드리는 현실은 클릭 하나로 상대방을 오디션 하는 오늘날의 풍토를 가리키는 글이 아니었을까. 물론, 편집장의 의도와는 상관없는 맘대로 읽는 것이지만 짝을 찾는 오디션의 풍토는 오늘날 일상이 되었고, 자연스러움을 가장한다. <오디션>에서의 문제는 이것이 사기 행각으로 출발했다는 차이다. 하지만 분명한 것도 있다. 

오늘날 여러 사이트나 앱에서 일어나는 손가락 오디션의 결과가 어떨지 몰라도 미이케 다케시의 영화는 죗값을 치른다. 결과적으로 이 영화가 꽤 윤리적이라고 말할 수 있는 것은 아닐까. 공포 장르의 관습을 따른 결과라고 해도 오디션을 보았던 남자는 영화가 끝나도 결코 편히 잠들지는 못할 것이다.

아무튼 이러한 윤리적인 판단 때문에 미이케 다케시의 영화를 언급하는 것은 아니다. 개인적으로 호기심을 건드리는 것은 '어째서 이 작품이 클래식 공포의 반열에 한 발을 걸칠 수 있을까'하는 이유였다.(걸작이라는 생각은 다시 보아도 들지 않는다) 

 

ⓒ 와이드 릴리즈

<오디션>에서 대가를 치르는 것보다 흥미로운 지점은 근원을 알 수 없는 여주인공 캐릭터다. 그녀가 어린 시절에 받은 학대를 보여주는 장면은 전형적이어서 싱겁다는 생각이 든다. 하지만 뭇 남성들을 살해하면서 벌이는 일련의 몽타주들은 여전히 서늘하다.

무엇보다 그녀의 복수심에는 바닥이 잘 보이지 않는다. 남자 주인공에게 하는 말을 들어보면 집착의 결과처럼 보이기도 하고, 과거에 당한 행위를 보면 남성에 대한 복수심으로도 읽힌다. 이런저런 욕망과 폭력이 뒤엉킨 정체를 알 수 없는 공포다. 이를 드러내는 것 중의 하나가 사운드의 활용이다. 아는 사람은 다 알고 있는 "끼리끼리끼리끼리"는 인간의 것도, 짐승의 것도 아닌 특정한 소리에 수렴되지 않는 소리 아닌 소리다.

사실, '근원을 알 수 없는 공포'는 이 당시 등장한 일본 공포의 특징이기도 했다. 나카다 히데오의 <링>(1998)은 원귀를 다룬 공포처럼 보였지만, 마침내 원한을 해결해도 저주가 풀리지 않는 당혹스러운 상황을 맞이해야 한다. 주인공 부부는 비디오를 본 아이의 저주를 풀어주기 위해 부모님을 찾아간다. 문제의 비디오테이프를 보여주려는 심산이다. 그리하면 저주는 풀리는 게 아니라 '옮겨'간다. 그것이 원한을 풀어도 해결되지 않는 공포의 최후인 '죽음'을 피하는 유일무이한 방법이다.

그러니까 죽음을 피하기 위해서는, 자신이 살기 위해서는 타인에게 죽음을 전가시켜야 한다. 자식을 살리기 위해 부모를 희생시키는 영화의 마지막이야말로 죽음의 공포보다 더 끔찍한 이기심과 타락의 공포이며, 당시 일본 영화의 새로운 전통이 된 '끝나지 않는 공포'다.

 

ⓒ 와이드 릴리즈

풀리지 않는 공포는 <주온>(2002)과 같은 작품에서도 잘 보여진다. 밀레니엄을 전후로 한 시기에 일본의 공포영화는 밑바닥을 감춘 채 풀리지 않는 저주를 다루기 시작했고, 그 결과 일본 공포 영화의 세계적 유행을 낳기도 했다. 새로운 천년이 시작될 때마다 반복되는 여러 음모설과 풀리지 않는 저주의 이야기는 바닥이 보이지 않는 일본의 공포 영화로 집결되어 관객의 눈을 사로잡았다. 이 영화들을 보면 왜 '눈'이 문제가 되는지도 알 수 있다. 이불 밑 귀신과 눈이 마주치는 연출들은 공포 영화의 관습을 일상에 밀착시켜 버렸다. 

하지만 <오디션>의 기운이 여전히 새로운 것만 있는 것은 아니다. <쏘우>(2004)나 <호스텔>(2005) 시리즈로 슬래셔 무비의 관습에 익숙해진 관객들은 인간의 몸 전체에 침을 꽂는 장면이나 발목을 자르는 장면이 아주 강렬하지는 않을 것 같다. 무엇보다 여주인공 아사미가 "나만 사랑해야 해, 나만!"이라는 대사는 오늘날에는 좀 깨는 대사다. 만약 <오디션>이 다시 리메이크된다면, 기본적으로는 복수하는 여성을 더 강조했을 것이다. 

그렇다고는 해도 상상력을 자극하는 장면들은 여전하다. 아사미의 집에 있는 자루는 기괴한 상상을 자극한다. 이때 자극의 근원은 자루가 흔들리는 것을 보여주지만, 자루 속은 손쉽게 드러내 보이지 않기 때문이다. 그것은 발목을 절단하는 장면보다 더 강렬하다. 진정한 공포는 난도질하며 훼손하는 공포가 아니라 무언가를 예상하면서도(이미 알면서도) 확정할 수 없는 불확정의 공포가 아닐까. 혹은 잘려진 발목, 잘려 나간 손가락을 세는 것보다 더 찌릿한 공포의 쾌감은 발목을 잘렸으면서도 잘렸음을 인지하지 못하는 무감함이 스크린 전체를 메울 때가 아닐까.

<오디션>에는 무감함 속에 맞이해야 하는 공포, 불확정적인 끝나지 않는 공포의 순간들이 있다. 나홍진의 <곡성>(2016)의 마지막에서 맞이해야 하는 공포의 장면들도 이와 유사하다. 끝나지 않고, 정체가 확인되지 않으며, 서사는 멈추지 않는다. 그렇다. 멈추지 않는다는 것 자체가 공포로 스며드는 것이다.

 

<어떤 영웅A Hero> 아쉬가르 파라디Asghar Farhadi|2021

<씨민과 나데르의 별거>(2011), <세일즈맨>(2016) 이외에도 파라디의 영화는 꾸준히 소개되어 왔다. 하지만 그의 영화를 찾는 이는 많이 늘어나지 않는다.

하마구치 류스케가 어느 순간 다큐멘터리를 제외한 전작들이 개봉되거나 재개봉되는 풍경을 보면서, '파라디에게도 그런 시절이 올 수 있을까'라는 질문이 생겼다. 두 감독 모두 직접 이야기를 쓰는 방식을 선택하고 있으며, 배경과 인물이 달라져도 엇비슷한 주제를 반복한다. 어떤 경우는 비교적 큰 호응을 얻고, 어떤 경우는 그렇지 못하다. 차이가 무엇일까. 이런 것을 본격적인 비평의 대상으로 삼는 것을 본 적은 없다.

영화(텍스트)가 아니라 바깥으로 눈을 돌려서 하마구치 류스케처럼 '아카데미 영화제'의 힘을 받아야 하는 것인가라고 생각할지 모르겠지만, 그런 입장이라면 아쉬가르 파라디는 진즉에 호응이 있어야 했다. <씨민과 나데르의 별거>로 이미 아카데미 국제장편영화상을 수상했으니 하마구치 감독보다 십 년 정도 먼저 수상한 경우였다. 그때의 명칭은 '외국어 영화상'이었다. 그럼 바뀐 명칭으로 받아야 하는 건가? 아무튼 이런 말도 안 되는 생각까지는 접기로 하자. 

 

ⓒ 영화사 진진

파라디의 반복되는 스타일은 진실과 허구의 경계를 넘나들면서, 진실인 줄 알았던 것의 허구성을 드러내고, 허구 속에 감춰진 진실을 엿보여 준다. 이번에도 마찬가지다. 감옥에서 잠시 외박을 나온 주인공은 하루아침에 주운 돈을 돌려준 영웅이 된다. 그런데 감옥의 동료들도, 자신을 인터뷰한 방송국 사람들도, 심지어 가족까지도 의심하고 외면하기 시작한다. 사태를 수습하려다가 더 큰 거짓말을 한다. 자신의 여자 친구를 가짜로 연기시키다가 스스로 파멸을 가져온다. 처음에는 '돈'이 문제였다. 돈은 주인공의 빚과 관련된 문제이기도 하고, 출소하는 조건이 되기도 한다. 흥미로운 것은 적은 돈은 아니지만 어차피 빚을 갚아 출소하기에는 턱없이 부족했다. 그런데 이 돈을 찾아준 후에는 돈이 중심이 아니라 그가 선량한 행위를 증명하는 것이 문제가 된다. 대다수 사람들은 쉽게 믿어버리지만, 공무원은 이를 확인하려고 든다. 돈을 받아 간 사람을 만난 적도 없는 주인공의 명예는 시간이 흐를수록 위기에 처한다. 

여기에 시나리오의 영리함이 있다. 관객들은 어떤 여성이 나타나 잃어버린 금화를 찾아가는 장면을 보았다. 그런데 이에 대한 의혹이 제기되고, 그 여자를 찾을 수 없는 상황이 인물들을 통해 그려진다. 관객들로서는 답답할 수밖에 없다. 저 남자의 말은 사실이었는데, 영화 속 인물들은 이를 증명하기 위해 애쓴다. <어떤 영웅>에서 벌어지는 증명의 과정은 인물들보다 관객에게 더 크게 작용한다. 관객은 모든 것을 보는 위치에 앉아 있기 때문이다. 모든 것을 보여주고 관객이 판단해야 하는 윤리적 상황을 알프레드 히치콕 감독은 '서스펜스'라고 불렀다. 서스펜스는 공포나 스릴러 장르와는 크게 상관없는 문제다. 파라디 감독이야말로 이야기에 있어 서스펜스를 만들어 내는 천재 중 한 명이다. 결국, 주인공은 위기를 넘기기 위해 악수를 쓴다. 그럴수록 사태는 꼬여간다. 동시에 관객들에게는 주인공을 향한 연민이 일어난다. 이 또한 서스펜스의 효과와 이어지는 감정의 문제다. 

그래도 변한 것이 있다. '고구마'를 몇 그릇 먹어야 한다는 점에서 동일하지만, <씨민과 나데르의 별거>가 법정에서 딸의 선택을 기다리며 초초히 법정 문밖에 서 있어야 했던 것과는 달리 <어떤 영웅>은 문의 안쪽으로 들어가기를 선택한다. 안쪽으로 향하는 문은 카프카의 『법 앞에서』를 떠올리게도 하고, '법의 문과 명예란 무엇인지'를 고민하게도 만든다. 주인공이 감옥 안에 있을 때 문밖으로 출소하게 된 인물이 대비를 이룬다. 문 하나를 두고 엇갈리는 세계의 풍경은 문 앞에서 초조하게 기다리던 <씨민과 나드레의 별거>보다는 한 걸음 더 들어간다. 그렇게 되기까지 파라디의 영화는 조금씩 변화해 왔다. 

 

ⓒ 영화사 진진

원제는 '어떤 영웅'보다는 그냥 '영웅'에 가깝다. 하루아침에 영웅이 되었지만 '이틀 아침'에 파렴치범으로 몰락한 주인공의 두 가지 모습 모두가 영웅의 단면이다. 영화를 보고 있으면 그의 선택에 관객들도 의혹을 품게 된다. 정말이지 그는 아무런 대가 없이 돈을 돌려주기로 결심한 것일까? 이 모든 과정이 주인공의 계략이었고, 그것이 실패로 돌아가는 이야기를 보여주고 있다고 해석한다면 얼마나 설득력이 있을까.

역사에서도, 현실에서도, 영화에서도 영웅과 악당의 차이는 생각만큼 크지 않을지 모른다. 어제의 영웅이 오늘의 악당이 되고, 악당도 각성하면 영웅이 될 수 있다.

영웅의 모습과 관련하여 흥미로운 장면은 감옥에서 휴가를 얻어 나온 이후 매형을 만나러 가는 영화의 초반부다. 유적지 보수 공사를 하고 있는 모습이 익스트림 롱쇼트로 잡히는 데 이곳은 낙쉐 로스탐이라는 이란 남쪽의 유명한 유적지다. 왕들의 무덤이며, 쉽게 말하자면 영웅둘의 유적지다. 주인공은 이곳을 오르내리며 시작을 보여준다. 그것은 영화 전체를 함축하는 동시에 예고한다.

실재와 이야기는 그렇게 만난다. 그리고 영화의 마지막에 머리를 깎고 감옥에 다시 투옥되는 주인공을 보여준다. 그것은 몰락이라고 볼 수 있겠지만, 그 어느 때보다 자신의 결심과 선택으로 감옥을 택했다는 점에서 근사해 보이기도 한다. 미디어와 소셜 네트워크를 통해 유명세를 누렸지만, 하루 아침에 몰락해 버린 영웅의 최종 선택은 스스로 죄를 치르는 것이다. 그것은 개인이 책임질 수 있는 최대한의 모습으로 '영웅'적이다.

 

<스즈메의 문단속Suzume> 신카이 마코토Shinkai Makoto|2022

ⓒ 미디어캐슬

근래에 본 가장 재미없는 영화. 이는 작품에 등장하는 캐릭터 하나를 생각해 보는 것으로 충분하다. 요석에서 고양이로 변한 다이진은 초반부를 이끌어가는 빌런이자 동력을 제공한다. 스즈메와 소타는 뒷문을 막기 위해 요석을 되찾는 것이 필요하고, SNS의 정보를 확인하며 다이진을 찾아다닌다. 다이진이 있는 곳을 찾을 때마다 뒷문은 열려있고 지진이 시작된다. 이를 막기 위해 안간힘을 쓰는 과정이 반복된다. 그것이 대부분의 이야기다. 새로운 뒷문이 열릴 때마다 액션은 점점 크고 화려해진다. 그것은 통상적인 재난 영화의 표현 방식이다.   

그런데 빌런인 줄 알았던 다이진이 좋은 편이 되는 순간, 아연실색해진다. 다이진에 대한 주인공들의 오해와 반전일지는 몰라도 모른지기 이야기란 주인공의 오해를 이해로 바꾸는 과정이라고 할 수 있다. 갑작스럽게 스즈메가 "네가 도와주려고 한 거구나."라는 식으로 서사의 방향을 한 마디로 뒤집을 수는 없는 일이다. 이 정도면 '스즈메의 뒤집기'다.

결론의 느낌도 부대낀다. 뒷문을 막던 스즈메는 최종적인 결과를 얻기 위해 처음으로 돌아간다. 이 작품의 첫 장면에 등장하는 스즈메의 꿈 장면인 동시에 어린 시절로의 회귀를 보여준다. 일본의 서브컬쳐나 애니메이션의 세카이계가 개인적인 것과 세계적인 것이 결합되어 있음을 보여준다고 할 수 있고, 이 작품 또한 그러한 방식을 따라간다. 하지만 설정과 설득은 다른 차원의 문제다.

 

ⓒ 미디어캐슬

<스즈메의 문단속>에 등장하는 재난은 전작들과 달리 동일본 대지진을 직접적으로 호명한다. "거기에는 보다 큰 책임이 따른다."(스파이더맨의 대사다) 그런데 결론을 통해 취하는 화해의 대상이 공동체가 아니었다. 현재의 내가 어린 시절의 나를 위로하고 설득하는 모양이다. 자기 위로의 세계다. "나 잘 견뎠어. 나 잘 버텼어."라는 자기 위로는 공동체의 고통으로부터 달아나 버린다. 그건 흔들리는 현실 세계를(지진과 진동을) 개인으로 환원하면서 외면하는 방식이다. 나르시시즘적이라고밖에 할 수 없는, 개인화에 가두는 결론이다.

   

동시대의 많은 이야기가 지독한 자기 연민과 위로에 빠져있다는 것은 새삼스럽지 않다. 그리고 사람들에게 큰 호응을 일으키는 것은 "그래, 나 괜찮아, 나 잘했어."라고 말하는 자기 위로의 세계다. 이는 신카이 마코토만이 아닐 것이다. 문제는 동일본 대지진을 직접적으로 호명하면서도 여전히 둔감했다는 것이다. 결국, 자기 위로와 연민으로 끌고 갈 거라면 전작들처럼 우화적인 형태로 에두르는 게 그나마 윤리적이었다. 정면으로 돌파하려는 의지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정면으로 마주할 용기가 필요하다.  

<스즈메의 문단속>의 이야기가 보여주는 한계에 공감하면서도 작화나 화면을 칭찬하는 경우를 자주 목격한다. 이러한 분리적 평가에도 공감하기는 어렵다. 분리를 통해 작품을 옹호하려는 모습은 과거에도 자주 반복되어 왔다. '이야기는 평범(부족)하지만, CG는 훌륭하다'는 식의 감상들 말이다. 그것은 작품의 부족함을 자인하는 말이다. 즉, 이야기와 화면이 따로 놀고 있다는 자기 고백이다. 좋은 작품은 스타일과 이야기가 긴밀하게 결합되어 있기 마련 아닌가. 이러한 작가의 역량이야말로 작품을 사랑하게 되는 기초적인 이유다.

 

<사랑의 고고학Archaeology of love> 이완민|2022

ⓒ 맑은시네마, 엣나인필름
ⓒ 맑은시네마, 엣나인필름

최근 본 독립영화 중 가장 인상에 남은 작품이다. 얼핏 보기에 아주 새롭다고 여기지 않을지는 몰라도 이완민 감독은 주인공을 연기하는 옥자연의 신체에 시간과 불행 그리고 오해와 불신의 이미지들을 집요하게 붙들어 놓는다. 관능적이라는 것이 아니라 자주 등장하는 풀 샷의 이미지들이 이 배우를 통해(정확히는 신체적 이미지)  직면해야 하는 현실을 '성찰'하게 이끈다.

전작 <누에치던 방>(2018)보다 더 집요해지고, 주인공이 처한 현실을 가둬놓는 것이 아니라(그런 독립영화들은 요사이 넘쳐난다.) 어떻게든 끄집어내려고 애쓴다. 그리하여 이따금 화면 전체에 기운을 끌어온다. 발굴 현장이 등장하지만, 이 영화가 목표로 삼는 것도 인물(신체)을 통해 고통의 시간을, 괴로움의 세월을 끄집어내는 것이다. 이를 위해 긴 호흡의 시간은 필요하다. 조금 더 많은 이들이 보고 스며들기를.

 

끝으로… 예능 《서진이네》 몇 화를 지나치며

ⓒ tvN

멕시코 휴양지에서 식당 차리기. tvN으로 옮긴 후 나영석 피디 작품의 초기 특징은 한가함과 휴식이 섞여 있었다. 《삼시세끼》는 하루 종일 자급자족하는 모습을 보여 준다. 어쩌면 빵을 굽고, 밭에서 채소를 뜯어 만들어 먹는 게 종일 소요될 만큼 시간을 필요로 하지만 일과 휴식은 흥미롭게 결합되어 있었다. 그런데 점점 휴식이 사라지기 시작했다.

프로그램의 포맷들이 '삼시두끼'를 판매하기 시작한다. 《서진이네》의 출발점인 《윤식당》이나 《윤스테이》가 그런 변화의 시작이었다. 어느새 휴식은 사라지고 스페인의 멋진 섬에서, 멕시코의 휴양지에서 빡세게 노동하는 모습을 보여준다. 그것도 <기생충>, <부산행>의 배우와 <이태원 클라스>의 주인공과 BTS의 멤버를 모셔 와서 말이다.

서진이네 식당에 온, 멕시코 휴양지에서 휴식을 취하는 이들은 최우식 배우를 기생충의 주인공과 쉽게 연결 짓지 못한다. BTS의 멤버가 주방에서 설거지를 하고 치킨을 튀길거리 생각하지 못한다. 그들은 슈퍼스타이기 때문이다. 이 간극이 《서진이네》의 재미라면 재미다.

하지만 이런 생각이 다시금 든다. '어째서 우리는 슈퍼스타가 멋진 휴양지에서 24시간 놀고먹는 꼴을 보지 못하는 것일까.' '버라이어티 프로그램은 쉼 없이 윤리적 담보물을 만들 수밖에 없는 현실에 처해 있는 것일까.'

나영석 피디와 강호동의 결합이자 '나피디표 예능'으로 통칭되는 세계의 시작이었던 《1박 2일》에서 강호동 씨는 종종 정도를 넘어선 최선을 보여주려고 했다. 한겨울에도 얼음을 깨고 계곡으로 입수하면서 빡센 예능의 정신을 포효했다. 실상 이 장면들은 예능인들의 빡센 노동을 보여주는 순간이었다. 

《서진이네》에는 이따금 멕시코의 거대한 호수가 등장한다. 휴양지에 온 사람들은 물과 태양을 즐긴다. 하지만 최우식 배우는 그들 사이에서 전단지를 돌린다. 물론, 어떤 에피소드에서는 호수를 즐기는 모습을 보여줄 것이다. 

 

ⓒ tvN

하지만 《서진이네》를 지배하는 이미지는 최고의 매출을 올린 사장님(배우 이서진)이 보조개가 듬뿍 들어간 웃음을 짓는 것이다. 의식적이든 무의식적이든 노동이 투여된 결과 자본이 향상되는  즐거움의 묘사는 우리 시대의 거울처럼 보인다.

언젠가 나영석 피디가 《유 퀴즈 온 더 블럭》에 출연하여 고백한 것처럼 슈퍼스타를 캐스팅하는 것은 시청률 때문이다. 여기에 덧붙여진 것은 노는 스타가 아니라 빡세게 일하는 스타다. 비단 《서진이네》뿐만 아니라 SBS의 《골 때리는 그녀들》에서도 각 팀을 이룬 그녀들은 정말이지 혼신을 다해 훈련하고, 경기 내내 질주한다. 부상이나 경련이 일어나는게 자연스럽게 보일 정도다. 비단, 서바이벌 아이돌 프로그램뿐만 아니라 모든 분야에서 휴식은 사라졌다. 그것이 우리 시대의 예능이라면 생각해 볼 문제다. 

한편으로 이와 유사하지만, 완전히 다르게도 말할 수 있다. 슈퍼스타의 노동은 노동의 강조나 윤리성의 담지가 아니라 전혀 노동처럼 보이지 않는 효과를 만들어낸다는 것이다. 노동을 오락프로그램의 유희처럼 보이게 하는 요소는 자연스럽게 노동의 고통을 추방해 버린다. 그 결과 인스타그램을 비롯한 sns의 게시물처럼 '좋아요'만 허용가능한 세계로 진입한다. 여러 마리의 닭을 튀겨도 서울의 한 치킨집에 비하면 한가롭게 연출된다. 

이래저래 '69시간 노동'은 괜히 나온 말이 아니라는 생각이 든다. 자신은 술 마시며 노래 불러도 누군가는 그렇게 일해야 한다고 말하는 시대의 아이러니가 윤리적 담지자로 있는가 하면, 노동하는 모습이 재현되는 여러 채널의 방식을 통해 노동을 '힘들지 않음'으로 오인하는 결과를 낳은 것일 수도 있다. 

지상최대의 코미디는 자신의 입으로 69시간이라 말해놓고, 그런 뜻은 아니라면서 주변을 당혹시키는 모습이다. 말과 뜻이 다르다는 것은 도대체 어느 코미디의 문법일까. 버라이어티가 현실을 이기지 못하는 이유 같지 않은 이유가 여기에 있는지도 모른다. 

휴식과 오락이라는 차원에 대해 이 사회는 어떤 생각을 가져야 할까. 노동이 결합되지 않으면 과연 진정성을 형성하기 어려운 것일까. 수많은 미디어의 격전지에서 생존과 지속의 방법은 무엇일까.

   

끝으로 이러한 고민도 적어둔다. 나영석 피디의 프로그램이 짤로 보는 세대에게는 빡센 노동을 인지하지 못할 가능성에 대해서 말이다. 요즘은 텔레비전을 잘 보지 않는다. 대신 맛갈 난 것만 편집되어 있는 짧은 영상들을 소비한다. 그러다 보니 짧은 화면에서 고통은 일찌감치 추방되어 버린다. 전체를 보지 않고, 편집되거나 잘려 나간 즐거운 순간만을 소비하는 우리 시대의 이미지가 또 다른 방식으로 이어지고 있는 것은 아닌가 라는 생각. 콘텐츠는 하나여도 소비의 방식은 복잡해진 결과다. 

[글 이상용 영화평론가, poema@ccoart.com]

이상용
이상용
 1997년 『씨네21』 2회 신인평론상을 수상하며 영화 비평을 시작했다. 부산국제영화제와 전주국제영화제 프로그래머를 역임했다. 지은 책으로 『봉준호의 영화 언어』, 『영화가 허락한 모든 것』, 공저로 『씨네쌍떼』 『30금 쌍담』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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