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는 모두 제각기 이유로 영화를 감상한다. 누군가는 재미를 찾기 위해서, 다른 누군가는 고된 노동 이후 심신을 달래기 위해서, 또 다른 누군가는 현실 너머의 공상으로 여행을 떠나고자 영화를 본다. 이유는 제각각 다르지만, 대부분의 감상자가 영화를 통해 일상과 '다른 것'을 보고자 한다는 점은 느슨한 공통분모를 이룬다.
필자 역시 영화를 통해서 무언가 '다른 것'을 본다. 다른 나라의 여러 사람들. 특히나 영화감독이나 배우. 코아르CoAR에서 새롭게 시작하는 「영화로 세계속으로」는 한 나라의 무수한 영화에 나타난 공통된 특징을 소개하고, 그것이 국가의 어떤 면모를 반영하는지를 소개하는 연재이다.
연재의 첫번째 나라는 '벨기에'다. 이 나라를 선택한 이유는 아주 사적인 이야기에서 출발한다. 필자는 광주에서 예술 영화 및 다양성 영화를 전문적으로 상영하는 광주극장을 2014년 말경 알게 되었고, 이후 자연스럽게 광주극장을 통해 영화에 빠져들었다. 이 출발선에 위치한 영화가 벨기에의 다르덴 형제가 연출한 <내일을 위한 시간>(2014)이었기 때문에, 마찬가지로 본 연재의 시작도 벨기에를 선택했다.
벨기에는 지역에 따라 사용하는 언어가 각기 다른 나라다. 플란데런 지역에서는 네덜란드어를 주로 사용하고, 왈롱-브뤼셀 연방에서는 불어로 소통하며, 오스트벨기엔에선 독어가 일반적이다. 각기 다른 언어에 따라서 문화권 또한 나뉜다. 플란데런은 네덜란드 문화와 유사한 반면, 왈롱-브뤼셀 연방은 프랑스 문화와 밀접하며, 오스트벨기엔은 독일 문화권에 속한다. 그래서 벨기에 영화를 사전정보 없이 접하면 다른 국가의 것으로 오해하기 십상이다.
1.
가장 오해하기 쉬운 벨기에 영화는 '왈롱-브뤼셀 연방'의 영화다. 왈롱-브뤼셀 영화에선 아주 유창한 불어가 음향을 가득 채우고 더욱이 자국 배우뿐만 아니라, 조아생 라포스 감독의 <사유재산>(2006)에 출연한 '이자벨 위페르', 다르덴 형제의 <자전거 탄 소년>(2011)에 출연한 '세실 드 프랑스', <내일을 위한 시간>(2014) 속 '마리옹 꼬띠아르', <언노운 걸>(2016)의 '아델 하에넬' 등 프랑스의 유명 배우들이 서슴없이 턱턱 출연한다. 그래서 왈롱-브뤼셀 영화는 언뜻 보기엔 "프랑스 영화 아니야?"라는 착각을 자아낸다.
그러나 왈롱-브뤼셀 영화는 프랑스 영화와 차별화된 고유한 미학적 전통을 20세기 후반부터 확립해가고 있다. 바로 '리얼리즘'이다. 이 영화를 볼 때 우리는 화면이 세차게 흔들리면 현실적이라는 느낌을 받는다. 안정적이고 완벽한 기계가 아니라, 불완전하고 어설픈 인간의 팔과 다리를 환기하기 때문에, 그 인간이 놓인 현실이 느껴지기 때문이다. 이러한 카메라의 흔들림, 곧 핸드 헬드가 왈롱-브뤼셀 영화의 특징 중 하나다.
'핸드 헬드'(Hand-Held)라는 형식은 현대 왈롱-브뤼셀 영화의 선각자인 다르덴 형제(Luc Dardenne, Jean Pierre Dardenne)의 영향이 막대하다. 다르덴 형제는 다큐멘터리 작업으로 필모그래피를 시작하였다. 그래서 다르덴 형제의 핸드 헬드는 감독들이 다급하게 뛰어다니며, 사라져버릴지도 모르는 진실을 기록하는 현장의 르포성에서 비롯하였다. 이후 픽션으로 작업을 확장할 때도 다르덴 형제는 핸드 헬드를 포기하지 않았다. 그들의 픽션은 다큐멘터리 작업에서, 곧 현실에 뿌리를 내리며 자양분을 얻고 있었기 때문에, 영화가 비롯한 현실과의 끈을 핸드 헬드로 남겨두었다. 즉, 핸드 헬드는 르포적인 다큐멘터리에서 시작한 양식이다.
그런데 의문이 생긴다.
최근 국제 영화계에서 주목받는 '루카스 돈트'(Lukas Dhont), '로라 완델'(Laura Wandel) 등 젊은 왈롱-브뤼셀의 영화감독들은 다큐멘터리 작업을 거의 하지 않았다. 이들은 단편에서도 주로 픽션을 연출하였다. 그런데도 다큐멘터리에서 비롯한 다르덴 형제의 핸드 헬드가 다큐멘터리와 유리된 청년 감독들의 곁에 남아있다. 이들의 영화가 포착하는 대상들은 불안하게 요동친다. 이들의 영화가 흔들려야만 하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다르덴 형제의 영화뿐만 아니라 최근 청년 감독들의 작품에서도 인물들은 올곧게 서 있기가 어렵다. 세찬 바람과 파도와도 같은 사회의 광풍이 인물들을 철썩인다. 이제 막 사회에 뿌리를 내리거나 심지어 미처 뿌리를 채 내리지도 못한, 벨기에 영화의 주인공인 청소년·사회초년생들은 기반이 없다. 넘어지고 무너지기 일보 직전이다. 그럼에도 어떻게든 서 있다. 흔들흔들 거리면서 겨우내 버틴다. 그래서 이들을 포착하는 양식은 핸드 헬드여야만 한다.
그렇다면 무엇이 그토록 그들을 흔들리게 만드는가.
다르덴 형제의 <로제타>(1999)나 <자전거 탄 소년> 속 아이들은 최소한의 보호 장치도 주어지지 않은 상태로 삭막한 세상에 내던져진다. 그들에게 주어진 것은 최소한의 복지나 보호자의 울타리가 아니라, 오직 그들의 가냘픈 팔과 다리뿐이다. 그 앙상한 팔다리를 이용해, 아이들조차 착취하려는 비인간적인 세상에서 어떻게든 살아남고자 고군분투하기에 이들은 흔들린다.
루카스 돈트의 <걸>(2018)에선 선천적으로는 남성으로 태어났지만, 후천적으로 여성임을 선택한 라라가 등장한다. 라라는 불가항력적으로 주어진 족쇄를 풀어헤치고 자유롭게 성별을 선택하며, 이로써 자신이 삶을 개척한다. 그러나 사회는 선천적으로 타고난 성별만을 승인하고, 그 성별에 따른 행동 양식을 제한한다. 자유를 제한하는 사회의 알력과 투쟁하는 라라는 역시나 흔들린다. 로라 완델의 <플레이그라운드>(2021)에서 생애 처음, 축소된 사회인 학교에 진입하는 아이는 조마조마하게 흔들린다. 그 사회가 아이의 기대를 앗아가 버릴 것이라는 듯이. 또 타자나 약자를 혐오하는 기성의 사회를 고스란히 모방한 학교에서 마찬가지로 타자이자 약자인 아이들이 강한 아이들의 손에 붙들려 흔들린다.
영화 속 인물들은 가혹하고 비정한 사회에 의해서 흔들린다. 사회는 그들을 있는 그대로의 상태로 존중하거나 보듬지 않는다. 착취하거나 왜곡하거나, 심지어 존재를 지운다. 이러한 가운데 흔들림은 세상의 비인간적인 압력임과 더불어, 맥없이 주저앉지 않고자 하는 불안정하게라도 서 있고자 하는 강인한 의지다. 이렇게 동시대 왈롱-브뤼셀 영화에선 고압적인 사회가 개인에게 어떤 영향을 미치는지 탐구하고, 그 사회가 잠식하지 못한 개인, 특히 아이들을 보존한다.
개인들이 원치 않았던 세상, 이는 성인 또한 다르지 않다. 앞서 언급한 영화감독들과 조금은 다른 영화감독으로 '조아생 라포스'(Joachim Lafosse)가 있다. 일단 그의 영화는 덜 흔들린다. 또 영화의 색감을 따스하거나 차갑게 조절하는 등, 현실 그 자체를 건조하게 묘사하던 감독들과 달리 색채와 빛의 촉촉함을 부각한다. 또 비전문 배우들이 주로 등장하던 앞선 작품에 비하면, 라포스의 작품에서는 기성 배우들이 자주 등장한다. 그러나 현실을 반영한다는 점에선 왈롱-브뤼셀 영화의 공통적인 흐름을 보여준다.
라포스는 여러 현실 중에서도 '부부의 삶'을 비춘다. 연인들은 서로에게 창창한 미래와 순수한 사랑을 기대했다. 하지만 결혼과 동시에 기대는 무너진다. 결혼하기 전에는 자유로웠다면, 결혼 이후에는 사회가 규정한 남편과 아내의 획일화된 역할에 의해서 개개인들은 강제된 정체성과 자신이 추구하는 자아 사이에서 혼란을 겪는다. 왈롱-브뤼셀 영화에서 아이와 어른 너나 할 것 없이, 그들이 맞닥뜨린 세상은 바라고 기대하던 풍경이 아니었다.
그러나 <걸>에서 라라가 우직하게 후천적으로 선택한 성별을 밀고 나가듯, 다르덴 형제가 비인간적인 세상 속에서도 양심의 따끔거리는 통각을 부각하듯, 인간다움을 앗아가는 세상 속에서 '나'라는 인간을 꿋꿋하게 지켜가야 함을 왈롱-브뤼셀 연방의 영화는 항시 천명한다. 그렇게 인간을 보존하고, 그 과정에서 세상은 조금씩 변해간다.
심지어 앞서 언급한 감독들과 스타일이 전혀 다른, 리얼리즘 영화가 아니라 공상적인 영화를 연출하는 '자코 반도르말'조차도 말이다. 현실을 초월한 무궁무진한 상상력을 스펙타클하게 펼쳐놓는 반도르말은 최근 작품 <이웃집에 신이 산다>(2015)에서 가부장적인 절대자가 구성해놓은 이데올로기를 전면 갈아엎고 수정한다. 만인이 제 삶을 누릴 수 있도록 말이다. 그렇게 왈롱-브뤼셀의 시네아스트들은 영화로써 좀 더 나은 세상을 기대한다.
2.
플란데런 지역의 특색을 반영한 영화도 꽤 유명하다. 플란데런 영화는 '펠릭스 반 그뢰닝엔'(Felix van Groeningen)이 이끌고 있다. 플란데런 지역에서 나고 자란 그는 인접한 네덜란드 영화와 유사한 특징을 공유한다. 그런데 여기서 드는 고민은 "네덜란드 영화는 대체 무엇인가?"이다.
사실 네덜란드 영화는 국제적으로 크게 주목받진 못했다. <엘르>(2016)와 <베네데타>(2021)로 유명한 네덜란드 출신의 '폴 버호벤' 감독이 그나마 많이 알려진 정도. 보통 프랑스(<엘르>, <베네데타>)나 미국(<원초적 본능>, <쇼걸>)에서의 작품이 유명한 버호벤이지만, 사실 그의 특징을 가장 원초적으로 보여주는 작품은 네덜란드에서 연출하던 초기에 집약되어 있다.
미국이나 프랑스에서의 버호벤은 언뜻 보기엔 점잖다. 카메라 워킹은 흡사 발레 동작을 연상케 하듯 부드럽고 우아하게 미끄러진다. 연출은 질서정연하며 차갑다. 그러나 그 안에 담기는 것은 정반대다. 그는 뜨겁고, 심지어 사악한 에로티즘의 봉인을 푼다. 그래서 온화한 형식에 담기는 것은 항상 우발적이고 충동적이며, 심지어 적나라하고 추잡하다. 그것이 기술이 진보되어가는 와중에도 인간이 거세하지 못한 동물적 본성이라는 듯이.
그런데 네덜란드 시절의 버호벤의 영화는 내용에 있어서도 더 천박했고 형식 또한 우아하기보단 조악하고 적나라했다. 프랑스와 미국에서 찍은 영화가 '점잖은 변태'라면, 네덜란드에서 찍은 영화는 '알코올중독자', '마약중독자'로 요약할 수 있다. 그래서 영화가 꽤 정돈된 상태에서 시작하더라도, 어느새 모든 것이 너저분해지고 망가지며 혼란의 상태로 귀결된다. 연출 또한 프랑스, 미국의 것과 달리, 하하호호 가식 떨지 않는다. 쉴 새 없이 흔들리고 미장센은 혼탁하며 악취가 풍길 듯하다.
이렇게 투박하고 거친 버호벤의 초기 영화에는 네덜란드의 사회·문화적 풍토가 깊이 영향을 미치고 있다. 성매매나 마약에 있어 비교적 개방적이고 느슨한 사회적 분위기가, 방탕하고도 폭력적이며 오물이 난무하는 버호벤의 초기 영화와 조응한다.
'펠릭스 반 그뢰닝엔'은 이러한 네덜란드 영화의 특징을 플란데런에서 반영한다. 그뢰닝엔은 항상 술집, 홍등가를 작품의 배경으로 삼는다. 환락적인 공간에 머무는 인물들의 입에선 술과 마약, 담배가 떠나지 않는다. 그래서 이성적으로 예측할 수 없다. 버호벤의 초기 영화처럼 우발적이고 즉흥적인 본능, 야성적인 무의식으로 전개되는 그뢰닝엔의 작품은 한 치 앞도 내다볼 수 없다. 혼돈을 대가로 느끼는 쾌락, 그 자체다.
한편 이들이 쾌락에 탐닉하는 데는 다 이유가 있다. 그 점은 왈롱-브뤼셀 영화와 유사한데, 대체로 그뢰닝엔 작품 속 보호자들은 방탕하여 아이들을 내팽개치거나, 반대로 폭력적으로 구속한다. 특히 남성들이 말이다. 주인공들은 그 트라우마를 잊고자 달아나며 항상 노래를 부른다.(<개 같은 인생>, <브로큰 서클>, <클럽 벨지카>) 그럼으로써 자신을 되찾지만, 가정에서 침탈당한 사회적인 자아, 나의 의식은 회복되지 않는다. 되찾은 것은 오직 무의식적이고 본능적인 자신뿐이다.
그래서 그뢰닝엔 또한 세상을 개선한다. 그는 포용적인 여성성을 부각하여 거칠고 야성적인 연출을 부드럽고 온유한 형식으로 전환한다. 대상이 어떤 상태이든 긍정해주는 어머니에 의하여 인간은 비로소 인간답게 자유로워진다. 그뢰닝엔의 스타일은 네덜란드 영화와 밀접하다. 그러나 세상을 재편성하는 내용에 있어선 왈롱-브뤼셀 영화의 경향이, 이로써 어떤 언어를 사용하고 어떤 스타일을 보여주든지 세계를 개선하려는 활동적인 의지가 벨기에 영화에서 공통적으로 등장함을 확인할 수 있다.
3.
벨기에 영화에는 '바라지 않은 세계'가 묘사된다. 한편 이를 풀어내는 방식은 지역별로 제각각이다. 왈롱-브뤼셀 영화 속 사람들은 세차게 흔들린다. 나를 나로서 놔두지 않는 세상에 의해서. 반면 플란데런 영화는 비교적 자신에게 솔직하다. 그러나 사회적이고 의식적인 인간이 불발됨에, 그저 술과 마약으로 도망친 것뿐이다. 더욱이 그 솔직함은 대체로 남성에게만 허용된다.
벨기에는 매우 현실적으로 영상화된다. 그래서 벨기에 영화는 가상이라고 외면할 수 없다. 벨기에의 시네아스트들은 영화를 현실로 여겨 정화하고, 또 영화가 현실을 개선한다. 실제로 다르덴 형제의 <로제타>는 벨기에의 청년 지원 정책인 '로제타법'의 원동력이 되어 현실에 지대한 영향을 미쳤다. 그렇게 바랐던 세계 속의 나에게로 그들은 한 발짝씩 다가간다, 영화로써 현실에서.
이렇게 하나의 국가임에도 사용하는 언어와 인접한 문화권에 따라서 각기 다른 색채가 반영되는 벨기에 영화를 올해는 한국에서 자주 만날 수 있을 것이다. 다르덴 형제의 <토리와 로키타>(2022), 루카스 돈트의 <클로즈>(2022), 펠릭스 반 그뢰닝엔과 샤를로트 반더미르히가 함께한 <여덟 개의 산>(2022)이 올해 국내 관객들과 만나기를 기다리고 있다.
[글 박정수 영화전문기자, green1022@ccoart.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