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니셰린의 밴시' 가닿을 수 없는
'이니셰린의 밴시' 가닿을 수 없는
  • 변해빈
  • 승인 2023.03.30 12:00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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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외로움과 좌절감, 내 고통과 화해하는 일은 가능한가"

"새 곡은 잘 써지나?" 파우릭(콜린 파렐)이 절교를 선언한 상대 콜름(브렌단 글리슨)에게 묻는다. '귀찮게 굴면 내 손가락을 잘라 네게 주겠다'라는, 콜름의 경고가 앗아간 그의 잘린 손가락이 무색하게 간신히 유지되던 정적이 다시금 깨진 대목이다. 이 짓궂은 상황으로 긴장했을 관객을 달래는 건 뜻밖에도 콜름의 호응이다. 그가 완성한 새 곡의 이름은 영화와 동명인 '이니셰린의 밴시'. 그가 덧붙이길, "더 이상 죽음을 암시하며 비명을 지르는 대신 벌어진 그 상황을 가만히 즐길지도 모를" 신화 속 정령 밴시에 대한 이 곡은 파우릭의 장례식에서 울려 퍼질 무엇으로 예고된다. 충동적으로 일어난 감정을 못 이긴 으름장 정도로 그쳤으면 좋으련만, 이후 콜름은 나머지 네 손가락을 보란 듯이 절단하며 자기 말을 증명해낸다.

<이니셰린의 밴시>에는 헛되게 식어버리는 말 한마디 없고, 예고하지 않은 채 인물들이 벌이는 일 하나 없다. 우선은 그렇게 보인다는 표현이 적합하겠지만, 영화가 시작되고 얼마 동안 인물들은 자신이 뱉은 말은 지켜야 성에 차는 심정으로 산다. 극에서 밴시로 견주어지는 맥코믹 부인(쉴라 플리톤)은 시종 불길한 말로 불안감을 조성하고, 인물들은 '두 개의 죽음'이 올 거라던 그의 문장의 빈틈을 의도치 않게 메운다. 콜름의 손가락은 그의 말대로 계속 잘리고, 파우릭은 그걸 받는다. 사태를 돌이켜보려 해도, 상대의 입을 통해 직접적으로 명시된 바를 그대로 믿지 못해 갈등의 골은 깊어진다. 그로 인해 파멸의 이유보다 파멸의 실행, 나아가 서서히 그 정도의 깊이에 현혹되고 말 때, 원인을 파악하려는 파우릭의 물음은 이미 소용없는 것이 된다.

 

ⓒ 월트 디즈니 컴퍼니 코리아

<이니셰린의 밴시>의 인물들은 통제할 수 없는 시간의 문제 속에서 돌려서 말할 기력이 소모된 상태다. 이들의 분명함은 그런 무기력한 상태를 벗어나려는 강박으로 이해된다. 콜름은 "시간이 너무 빠르다는 생각"으로 견디지 못하고, 시오반(케리 콘던)은 "죽을 때까지 느리게 흐르는 시간" 때문에 터전을 떠난다.

과거와 타협할 생각 없는 상대 앞에서, 지금의 사태에 고심하는 파우릭의 시간은 (콜름이 핀잔하듯) '썩어나는 시간'에 불과해지는 법. 문제는 인물들이 강박적으로 무언가를 증명해내면서 "이제는 달라졌어!" 하고 말하지만, 엄연하게는 원점을 맴돈다는 것이다. 벗어남과 동시에 가로막힘, 나아갈 곳도 물러설 곳도 없음. 통상적으로 생각해봐도 그렇듯 삶이 지겹고 좌절스럽다는 생각이 촉발한 관계의 균열, 자기 파괴의 행위가 원하는 삶을 주기는커녕 악화시킬 뿐이기 때문이다.

인물들 역시 이 사실을 모르지 않는다. 첫 번째 잘린 손가락을 파우릭에게 전한 뒤 곧장 바이올린을 켜던 콜름의 행위만 봐도 그렇다. 음악이 흐르는 삶, 이것이 지속 가능한지 그는 확인해야만 했을 것이다. 무엇보다, 죽어서도 바로 이 음악(예술)을 남겨야 한다고 강조하던 콜름은 손가락이 없으면 음악에 도움 되지 않는다는 시오반의 지적에 망설임 없이 답한다. "이제야 알았구나." 분명 이때의 호응에는 지난날 털어놓았던 좌절감을 보태는 선택에 자신의 의지가 내포되어 있다. 이 모순적인 상황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까.

콜름은 폭행과 자해는 고해할 의사가 없으나 뜻하지 않은 당나귀의 죽음은 깊게 뉘우치면서 이 차이가 '알고 한 것과 모르고 벌어진 것' 사이의 간극이라고 말한 적 있다. 이에 근거해서 영화 속 상황들에 대해 고통을 겪은 뒤 넓어지는 삶의 지평을 논할 수도 있다. 하지만 <이니셰린의 밴시>는 그런 도식화된 방식과 추상적인 관념으로 더 나은 미래가 있다고 전하는 영화가 아니다. 밴시의 사라진 비명은 이제 고통에 의연하게 대처할 수 있다는 의미보단 무언가를 더 알아갈수록 미리 비명을 지르는 일 따위가 아무런 소용없는 걸 알아버렸다는 쪽 같다.

 

ⓒ 월트 디즈니 컴퍼니 코리아

<이니셰린의 밴시>는 아무리 알기 위해 애를 써도 살아가면서 완전히 알아낼 수 없는 사실이 얼마나 많은지 묻고 있다. 이를테면 맥코믹 부인의 입을 빌려 경고한 '두 개의 죽음'은 애초에 파우릭과 시오반의 것으로 예고되지만 실제로 죽은 건 도미닉(베리 키오건)과 당나귀 제시다. 하나씩 잘라내겠다던 손가락 네 개를 단번에 잃을 다짐을 하리라고 콜름 스스로는 예상했겠는가. 무언가를 미리 안다고 해도 이 잔인한 우연의 질서는 우리를 허무와 무기력 앞으로 데려다 놓을 따름이다.

<이니셰린의 밴시>에서 ‘모르고 벌어진 것으로써 인물들을 고뇌하게 만들어야 하는 핵심은 그들의 감정이다.

예고된 운명을 다른 흐름으로 바꾸는 요소에는 엄연히 나의 의지와 바깥의 다른 의지들의 충돌이 존재하지만, 각 의지를 추동시키는 끈끈한 접점은 바로 감정이다. 죽는 운명처럼, 발현된 감정, 이를 자각하는 순간은 머리와 몸으로 예상하고 통제하기 어려운 우연의 속성을 띤다. 영화 속 신체의 파괴, 죽음의 형상은 특정한 이미지를 통해 동일한 형태로 반복 등장하고 현실을 자각시킨다. 하지만 분절된 관계를 잇는 데 핵심 동력이 되어야 할 감정은 보편성, 분명함의 축이 저마다, 때에 따라 다르다.

인물들이 다투는 대화나 콜름의 자해는 영화를 통해 분명하게 보여주고 담아낼 수 있지만, 정작 그 근원인 좌절감, 지루함, 불순한 마음, 여기서 파생된 '시간이 너무 빠르다는 생각'은 심지어 앞의 과정이 다 잘리고 없는 장면 안에서, 대사 속에 심은 단어 하나로 툭 치고 넘겨진다.

전술한 콜름의 손가락에 관한 문제는 두 번의 고해성사 장면에서 반복 언급되는 좌절감을 물고 늘어져야 하지만, 이는 절교 선언 전에 벌어진 일이므로 현시점에서는 잘린 손가락의 통증에 몰입할 뿐이다. 파우릭이 그리워하는 부모와 콜름이 다정했다는 느낌 역시 그의 기억과 마음속에 머물 뿐, 우리가 장면 안에서 함께 느낄 수 있는 건 사실 없다. 시오반이 읽던 책이 그녀 자신을 슬프게 만들지만, 그 슬픔의 상투성이 지닌 본연 그대로의 느낌은 적정 거리를 넘어 타인(인물, 관객)에게 도달하지 못한다.

 

ⓒ 월트 디즈니 컴퍼니 코리아

특정한 시간의 속도, 그 누구의 시점과 태도로도 이 영화가 분명하게 뚫고 들어가지 못하는, 실은 그렇다기보다 애초에 건드리지 못하는 문제, 다름 아닌 크기와 깊이, 형태가 매번 달라지는 느낌들의 움직임, 감정에 의해 일어나는 억눌러지지 않는 생각들을 통해 의지의 충돌과 행위의 인과관계가 만들어진다. 영화는 끌어안은 그 사람의 괴로움, 타인의 생각과 감정을 인물들은 다 알 수 없거나 가닿지 못하며 자기 자신의 마음으로 이해하려 다가서므로 서로의 세계는 계속해서 무너지고 단절된다.

콜름이 왼손 손가락을 모두 잘라낸 날, 시오반은 타지로 이동하는 배에 오른다. 제안받은 일자리를 찾아간다지만 끔찍한 상황에서 도피하듯 떠나기에 남매의 작별은 더 애처롭다. 절벽에 선 파우릭이 갑작스러운 현실을 절감하는 동안, 그의 우측으로 검은 실루엣 하나가 나타난다. 거울처럼 맞붙은 시오반의 어두운 표정으로 보아 불길하다는 인상을 떨쳐버릴 수 없는데, 의문스럽게도 영화는 실루엣의 정체를 밝히지 않은 채 다음 장면으로 향한다. 이것이 죽음을 예언한 맥코믹 부인이든, 그저 헛것이든 이어서 파우릭이 잘린 손가락 때문에 죽은 당나귀를 발견하고, 콜름의 집에 불을 질러 죽이겠다는 복수를 선포하므로 어떤 죽음의 기운이 당도했음은 분명하다. 그런데 이것은 결과를 확정하는 쪽이지 피하게 만들지 못한다.

게다가 얼마간의 시간이 흐른 후, 시오반이 쓴 편지에조차 당시 표정의 의미에 관해선 언급이 전혀 없고, 관객에게 드러냈어도 문제 될 게 없는 그 형상의 나타남은 없던 일처럼 넘겨진다. 파우릭의 답장도 마찬가지다. '이니셰린에는 도미닉의 죽음에 따른 슬픈 소식이 있지만 그 외에 별다른 일은 없다.' 콜름에 대한 복수를 언급하지 않은 파우릭의 심정은 시오반이 편지로 무언가를 담지 않을 때의 상황과 닮았다. 분명 존재하지만 어떠한 기능도 하지 않고 힘없이 사라지는 것처럼 보이는 위의 사실들은 주체 스스로 의지에 따라 의도적으로 감추고 침묵한 것이다. 정확히 어떤 마음이 관여하는지는 설명되지 않지만, 두 사람은 각자가 짊어진 괴로운 상황과 그로부터 촉발된 자기 감정안에 머무르며 서로가 알 수 없는 사실을 쌓아간다.

 

ⓒ 월트 디즈니 컴퍼니 코리아

<이니셰린의 밴시>에는 예고되지 않은 사실이 하나 더 있다. 바로 이 영화의 결말. 주어진 장면을 표면적으로 묘사하면 이렇다. 죽이려던 사람과 죽지 않은 사람, 사람이 살려낸 개를 가운데 두고 미안해, 고마워, 서로에게 인사를 나누는 결말. 이 영화에서 이만큼 예고되지 않은 사실은 없다. 파우릭과 콜름도 그들이 이런 엔딩 속에 세워지리라곤 알지 못했을 테다. 이는 분명 앞에서 마주한 뜻밖의 상황들과 질적으로 다르며, 어쩌면 파우릭이 그리워하던 다정함이 다시 존재하고 콜름이 말한 "한 줌의 평온"이 찾아온 걸지도 모른다.

그런데 난 맥코믹 부인의 시선, 곧 밴시의 자리를 경유해 바라본 인물들이 제각기 흩어져 제 갈 길을 가는 가장 마지막 모습까지 본 뒤에 역설적인 슬픔을 느꼈다. 주어진 장면, 들리는 대화만으로 근거를 만들면 이들이 물리적, 정신적으로 독립적인 길을 마련해 꿋꿋하게 나아가는 결말이 되었을 것이다. 그런데 그건 여기 포함되지 않는 더 먼 미래의 일 같다. 지금으로서는 그저 해결되지 않은 문제를 안고 서성이며 골몰하느라 외롭게 남은 인간이 보인다.

파우릭이 마지막 바다에서 "그냥 지나치지 못하는 일도 있다"라고 말할 때 그가 바다 너머 전장을 보며 "무엇 때문에 싸우는지 모르지만 행운을 빈다"라고 했던 과거의 말이 떠오른다. 파우릭이 여전하다는 사실만큼 그가 뱉은 말은 내전을 벌이는 저 먼 곳에 가 닿을 일 없고 세상을 이해하는 원대한 의미로 이어지지 않는다. 여기서 그에게 중요한 건 그 광경을 본 파우릭 자신의 세상이 흔들리고 있다는 점 하나다. 같은 곡인지는 모호하나 콜름의 흥얼거림은 흡사 그가 예고한 진혼곡처럼 들린다. 엄연하게 이 영화의 결말은 예고한 사실은 모두 증명했으나 그것을 예고함으로써 근원적으로 보호하려던 삶의 영역은 파괴되어야 함을 부정하지 못했다.

사건을 겪은 인간은 이전과 동일한 존재일 수 없다. 그런데 인물들은 그들이 벗어나려던 과거, 그 기억으로 요동치는 좌절감과 외로움, 죽음에 견주어지는 고통과 화해하고 계속해서 관계 맺어질 수 있을까. <이니셰린의 밴시>는 이유 없고, 의미 없음이 가정된 일들에 혼신의 힘을 쏟을 수밖에 없는 인간의 근원적인 불안, 이로부터 도망치려는 인간의 절박함이 만들어낸 과거의 굴레 안에 평온하게 머무는 일이 가능한가, 묻고 있다. 분명한 건 과거와 관계 맺어지지 않고 마주할 수 있는 미래는 없다.

[글 변해빈 영화평론가, limbohb@ccoart.com]

 

ⓒ 월트 디즈니 컴퍼니 코리아

이니셰린의 밴시
The Banshees of Inisherin
감독
마틴 맥도나
Martin Mcdonagh

 

출연
콜린 파렐
Colin Farrell
브렌단 글리슨Brendan Gleeson
케리 콘돈Kerry Condon
배리 케오간Barry Keoghan
팻 숏트Pat Shortt
개리 리던Gary Lydon
쉴리아 플리톤Sheila Flitton
데이빗 피어스David Pearse
브리드 니 니치테인Brid Ni Neachtain
아론 모나한Aaron Monaghan

 

배급|수입 월트 디즈니 컴퍼니 코리아
제작연도 2022
상영시간 114분
등급 15세 관람가
개봉 2023.03.15

변해빈
변해빈
 몸과 영화의 접촉 가능성에 대해 고민한다. 면밀하게 구성된 언어를 해체해서 겉면에 드러나지 않는 본질을 알아내고 싶다. 2020 제1회 박인환상 영화평론부문 수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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