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벨만스' 단언컨대 가장 완전한 예술가의 탄생
'파벨만스' 단언컨대 가장 완전한 예술가의 탄생
  • 김경수
  • 승인 2023.03.28 11: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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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를 이해하고자 하는 치열한 시간"
ⓒ CJ ENM

'샘 파벨만'(마테오 조리안)은 부모 버트(폴 다노)와 미치(미셸 윌리엄스)와 극장으로 간다. 영화관이 어두운 곳이라 무섭다는 샘에게 둘은 각자 영화를 설명한다. 컴퓨터 기술자 '버트'는 "1초에 24개의 사진이 연속 재생되어 발생하는 잔상 효과"로, 피아니스트가 될 뻔한 '미치'는 "영화를 꿈이라는 표현으로 영화 미학"을 이야기한다.

예술의 어원은 동시에 기술의 어원이기도 한 '테크네techne'라는 것을 생각하면 이 둘은 양날의 검 같기도 하다. 샘은 둘 사이에서 혼란을 느끼며 세실 B.드밀의 <지상 최대의 쇼>(1952)를 보러 극장으로 간다. 이윽고 그는 기차 충돌 장면에서 위험천만한 매혹을 느끼게 된다. 그는 자신이 본 영화가 무엇인지도 잘 모르는 채로 그 매혹을 이해하고자 선물 받은 장난감 기차로 영화 속 기차 충돌을 재연하고자 한다. 버트의 카메라로 자신만의 <지상 최대의 쇼>(1952)를 찍으려는 샘의 모습은 왜인지 실험에 몰두하고 있는 과학자처럼 보인다.

공학과 순수예술이라는 제각기 다른 세계에 사는 부모는 샘을, 아니 예술로의 영화를 저마다의 시선으로 최대한 이해하고자 한다. 샘은 그저 미치의 말마따나 "자기만의 세계를 통제하고 싶은 것"에 불과할까.

 

ⓒ CJ ENM

<파벨만스>는 스티븐 스필버그 감독이 샘 파벨만이라는 캐릭터로 자신의 유년기를 그려낸 자전 영화다. <A.I>(2001) 이후 오랜만에 각본에 참여했고, 감독이 처음으로 쓴 사적인 이야기라는 이유로 주목받았다. 또 각본가 토니 쿠쉬너, 평생을 함께한 음악 감독 존 윌리엄스, 오랜 파트너인 촬영감독 야누즈 카민스키 등 그와 오랜 동료가 작업에 참여해 있다. 말 그대로 스필버그 영화의 정수를 구현할 수 있는 조합이다.

스필버그가 오래전부터 <파벨만스>를 찍으려 한 것도 분명 눈여겨볼 만하다. 1978년 진행된 한 인터뷰에서 이를 확인해 볼 수 있다.

"희망컨대, 삶과 덕목 면에서 더 깊어짐에 따라 주변 사람들, 사랑하는 사람들, 가족을 더욱 소중히 여기게 되고, 또 영화들이 훨씬 더 사적, 감정적으로 풍부해진다면, 그리고 마침내 그런 전환을 거쳐 그와 같은 소재를 다룰 수 있게 되어 개인적인 문제에서 시작하는 흥미진진함을 유발할 수 있게 된다면, 비로소 내가 좋은 영화감독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스필버그의 말』, 스티븐 스필버그, 브렌트 낫봄, 레스터 D.프리드먼 엮음, 마음산책, p.117)

스필버그는 여태껏 블록버스터와 <쉰들러 리스트>(1994)와 <뮌헨>(2007) 이후의 정치적인 영화를 만들었다. 그러한 와중에도 사적인 이야기를 담은 영화를 만들려는 열망이 마음 한편에 자리했다는 것을 짐작할 수 있다. 마치 지금까지의 필모그라피가 <파벨만스>를 찍어서 좋은 감독으로 거듭나고자 하는 과정으로 보일 정도다. 그래서 작품의 제목을 눈여겨보아야 한다. 이야기꾼을 뜻하는 '페이블맨fableman'으로도 읽히는 '파벨만fabelman'이 아니라 '파벨만스fabelmans'다. 스필버그는 감독으로 성장하는 샘 파벨만의 이야기가 아니라 파벨만 일가의 이야기를 그리려 했다. 샘이 혼자 있는 순간을 발견하기 힘들 정도로 그는 거의 모든 장면에서든 가족 일원과 함께 있다.

<파벨만스>는 사적인 영화이되 동시에 그를 둘러싼 세계를 그리려는 사회적 영화이기도 하다. 가족사를 파노라마처럼 펼쳐두고는 거기서 자신의 영화가 어떻게 우연히 탄생했는지를 다루려 할 뿐이다.

 

영화를 과학적으로 이해하고자 하는 치열한 탐구의 시간

<파벨만스>는 무려 70년 전 시대에서 시작한다. 스티븐 스필버그는 자신이 인생 처음 영화를 보고 느낀 충격을 시작으로 그가 21살에 영화계에 들어가기까지의 과정을 가족 드라마 문법에 담는다. 다만, 감독은 자신의 유년기를 감상적으로도, 동화 같은 색채로도 그려내지 않는다. 유머러스한 정서가 곳곳에 있기는 하나, 영화를 과학적으로 이해하고자 한 치열한 탐구의 시간으로 각색한다. 그에게 촬영은 영화 매체를 탐구해나가는 실험이다. 특히, 샘이 기차 충돌 장면을 재현한 필름을 영사기로 재생한 것을 양손에 비추어 보는 모습은 과학자가 현미경으로 세포를 관찰하는 장면으로 비유할 수 있다. 동시에 바트의 공학과 미치의 순수 예술로 환원되지 않으면서 그 둘을 종합하는 영화 미학을 발견하는 과정이기도 하다.

샘은 영화를 배울수록 '자기만의 세계를 통제하려는' 영화가 가족과 친구, 사회 등 영화 바깥의 세계를 혼란에 빠뜨린다는 냉혹한 진실을 알아가고, 중간에 개인적인 갈등으로 영화 찍기를 그만두기도 한다. 감독은 서브플롯의 배치로 자신의 성장을 세 층위로 보게끔 유도한다. 하나는 영화를 오락이 아닌 예술로 여기는 신세대 스필버그가 성장하는 과정이다. (샘이 그의 여자친구 모니카와 나누는 사랑은 당시 LA에 유행했던 반문화 운동의 유산으로 보인다.) 다른 하나는 소년에서 정치적 감독으로 거듭나는 예술가 스필버그의 성장이다. 마지막 하나는 영화 매체를 이해하는 감독의 성장이다. 스필버그는 이를 포개어 관객이 다양한 층위로 보일 수 있게끔 한다.

<파벨만스>는 이를 드러내고자 샘이 영화를 촬영하고 완성할 때마다 그에게 새로운 문제점이 생기는 방식으로 전개된다. <지상 최대의 쇼>를 본 7살 샘에게 영화는 무의식에 있는 근원적인 공포를 해소하는 놀이터다. 버트의 8mm 카메라로 몰래 기차 충돌 장면을 카메라에 담은 뒤로 샘은 악몽을 꾸지 않는다. 되려 그 공포가 연출된 것에 불과하다는 것을 안 뒤로 공포를 오락으로 그려낸다. 샘은 세 여동생과 SF와 호러 영화를 찍는다. 이는 <죠스>부터 시작해 그의 필모 이력이 호러와 스릴러로부터 시작되었다는 것을 생각하면 흥미로운 설정이다. 샘은 영화가 연출된 허구에 불과할 뿐만 아니라 그것이 기차 충돌과도 같은 진짜 공포로 이어지지 않는다는 것을 체득한다. 여기까지는 샘에게 영화가 놀이로 머물러 있기에 아무런 문제가 발생하지 않는다. 이는 장르 문법을 배우는 것과도 같다.

 

ⓒ CJ ENM

아리조나에서 피닉스로 가서도 샘은 장르 영화를 찍기에 이른다. 그가 피닉스로 가서 처음 찍은 영화는 보이스카웃에서 존 포드의 <리버티 밸런스를 쏜 사나이>(1962)를 따라 한 서부극이다. 샘은 미치가 피아노 리허설을 하다가 구멍을 낸 악보를 보고는 필름에 구멍을 내서 빛을 쏘는 방식으로 총구에서 나온 섬광을 구현한다. 이는 샘이 특수효과를 처음 고안한 순간이기도 하다. 버트가 이를 공학적 사고라고 칭찬한 것은 의미심장하다. 스필버그가 성장할 즈음부터 유행한 CG는 영화계에 혁신을 불러일으킨 데다가 스필버그도 CG의 정점에 있던 <쥬라기 공원>으로 흥행 감독으로 자리한 것을 생각하면, 더욱 그러하다. 장르, 테크놀로지, 빠른 리듬의 연출 등 할리우드 블록버스터를 성립하게 만드는 것을 배운 셈이다.

이윽고 샘은 블록버스터와는 상반된 픽션과 기록 영화라는 두 장르의 영화를 찍는다. 하나는 보이스카웃에서 만든 전쟁 영화고, 다른 하나는 온 가족은 물론 삼촌과 다름없는 버트의 친구이자 조수인 베니(세스 로건)와 함께 간 캠프 여행에서 만든 캠프 영화다. 전자는 버트의 일화를 기반으로 샘이 원래부터 촬영하기로 한 것이었으며, 후자는 버트의 부탁으로 외할머니의 죽음으로 인해서 상심해 있는 미치를 위해 촬영하게 된 것이다. 캠프에서 돌아와서는 두 영화를 만들 즈음에 그의 집에 외할머니의 오빠이면서 서커스 출신 영화인 보리스가 방문한다. 보리스는 샘에게 예술과 가족 사이에는 영원한 불화가 있을 수밖에 없다는 이야기를 건넨다. 이 불화는 놀라우리만치 빠른 속도로 이루어지기 시작한다.

샘은 캠프 영화를 편집하던 중 카메라에 의도치 않게 담겨 있는 미치와 베니와 불륜을 목격하면서부터 고뇌에 빠지고, 둘의 불륜이 포착된 장면만을 잘라내 완성한다. 샘은 카메라가 인간이 볼 수 없는 것까지 찍고, 목격할 수가 있다는 것을 알아차린다. 영화에서 미치와 베니의 불륜이 담긴 장면이 바흐의 'BWV974'와 어우러져서 재생되는 것은 인상적인 연출이다. 이 연출은 미치가 침실에서 "바흐를 연주할 때는 바흐의 음악에 굴복하면 된다"라고 한 말과 이어진다.(그전까지 미치가 여러 곡을 연주하더라도 바흐를 연주하지 않는다.) 이에 따라 샘과 미치는 영화 매체의 힘에 굴복하는 듯이 그려진다. 샘은 편집을 통해서 필름을 은폐한다. 그제야 픽션이 결국 보아야 하는 것을 보여주어야만 하는 것을 골라야 하는 윤리에 의해서 생긴다는 것을 안 셈이다.

한편, 보이스카웃에서의 전쟁 영화는 여동생에 의해서 여성이 없다는 지적을 듣기에 이른다. 이는 여동생은 캠프 영화를 찍을 때도 조명으로 인해 미치의 드레스에 미치의 나체가 비친다며 몸소 조명을 가리는 것과 이어지기도 한다. 카메라는 언제나 인간을 압도한다는 사실을 안 셈이다. 독일의 평론가 프리드리히 키틀러는 카메라는 총기와도 모습이 비슷하다고 지적했다.

8mm 카메라를 쥔 샘의 모습은 마치 기관총을 든 병사 같다.

 

ⓒ CJ ENM

카메라의 통제불가능성과 픽션의 윤리가 복잡하다는 것을 안 샘은 카메라를 팔기로 한다. 그러나 베니에게 새로운 카메라를 선물 받고서는 계속 그것을 보기에 이른다. 아버지 버트가 캘리포니아로 직장을 옮기면서부터 도의적 책임을 안고서 영화를 그만두게 된다. LA에서 유대인 인종 차별을 경험하기까지 하면서 영화를 찍으려는 그의 의지가 한풀 꺾인다. 그러던 와중에 여자친구인 모니카(클로에 이스트)의 권유로 16mm 아리플렉스를 들고 졸업생 기록영화 <땡땡이의 날>을 찍는다. 샘은 그를 괴롭히던 두 학생인 로건과 채드를 각기 다른 방식으로 편집한다. 한 명은 영웅으로, 한 명은 바보로 그려낸다. 그는 둘 모두에게 영화 속 나와 현실의 나가 달리 묘사된다는 것에 비난당하기에 이른다.

'편집의 힘'은 그 누구에게라도 상처를 줄 수밖에 없다. 그런데도 샘은 영화를 찍기로 한다. 마지막에 이르러 그는 자신의 우상이기도 한 존 포드(데이비드 린치)를 마주한다. 존 포드는 '지평선을 위로 잡냐, 아니냐'가 영화의 흥미를 결정한다고 본 셈이다. 이는 '인간을 미장센 중 어디에 두느냐'의 문제이기도 하다. 그는 그제야 카메라가 곧 '인간을 고상하게 보느냐, 저속하게 보느냐'라는 윤리적 문제라는 것을 알기에 이른다. 이는 아리스토텔레스의 시학 2장에 나온 명제다.

 

소년이 되고자 하는 스필버그와 노년이 되고자 하는 셔젤

영화를 보며 의심스러운 점이 있다. 샘이 성인 스필버그의 삶과 어느 정도 포개진다는 것이다.

<파벨만스>에서 샘이 찍은 영화를 보면 스필버그가 그간 찍은 영화의 흔적을 발견할 수 있다. <지상 최대의 쇼>에서의 기차 충돌 시퀀스는 그의 장편 영화 데뷔작 <슈가랜드 특급>(1974)에서의 차량 충돌 시퀀스와 구도가 비슷하다. 또한 미치가 함께 보러 가자고 한 토네이도에서는 <우주전쟁>(2005)이 엿보인다. 피닉스의 보이스카웃과 만든 전쟁 영화는 <라이언 일병 구하기>(2003)과 비슷하다. 또한 미치가 입양한 원숭이는 <인디아나 존스>(1982)에서 등장한다. 더군다나 <미지와의 조우>(1982)에서 프랑수아 트뤼포를 캐스팅했듯이 데이비드 린치를 캐스팅한다. 더군다나 샘의 여정은 <죠스>(1978) 등의 블록버스터 장르를 찍다가 차츰 유태인으로의 정체성을 깨닫고 정치적인 영화를 찍은 스필버그의 필모그라피와 비슷하다.

 

ⓒ CJ ENM

소년 샘의 세계는 결국 훗날 자신이 영화계로 입문해 거장으로 거듭나는 과정을 반복하고 있는 셈이다. 물론, 영화는 스필버그 자신이 천재라는 사실을 증명하는 데에 바쳐지지 않는다. 아이러니하게도 천재는 그가 거부하고 있는 인간이다.

18세기만 해도 예술가의 (범죄까지 아우르는) 기행은 절대적인 아름다운 작품이 탄생하는 과정으로 낭만화되었다. 예술은 철학과 종교 등과는 다른 독립된 장르로 자리하는 과정에서 예술의 가치를 증명해야만 했다. 천재는 철학과 종교의 중간 지점이었던 예술에서 (종교에 가까운) 감각적 진리를 현현하는 매개인 셈이었다. 칸트를 비롯한 당시 여러 철학자는 천재를 옹호했다. 오히려 스필버그는 모든 숏에서 정교하리만치 가족에 샘을 배치한다. 심지어 몽타주에서마저도 샘은 가족과 포개진다. 천재가 독립적인 존재로 그려지는 데에 비해서 스필버그는 자신을 계속 사회에 있는 인간으로 배치하고자 한다. 보리스가 말했던 괴물이 되어갈 수 있는 가능성을 그는 스스로 인지하는 셈이고, 이 영화의 제작 과정도 그러했다.

스필버그 본인이 천재라 아니라는 너스레는 소년이라는 우회로로 자신이 영영 성장할 수 없는 피터팬임을 드러내면서, 본인이 좋은 감독으로 거듭나고자 하는 윤리적인 의지 아래서 이루어진다. 이는 30대의 데이미언 셔젤이 <바빌론>(2022)에서 영화의 죽음을 상정하고, 60대의 브래드 피트를 본인의 페르소나로 내세운 엄살에 가까운 조로증과 반대된다. 영화의 죽음을 맞닥뜨린 데이미언 셔젤은 <바빌론> 속 브래드 피트의 상징적 자살로 영화를 영웅으로 숭배한다. 이는 이미지로라도 상대방의 뇌리에 영원히 남으려 하는 불멸의 욕망과 거기서 비롯하는 나르시시즘에 근거한다. 영화의 미래를 스스로 상정해버리는 마지막의 몽타주는 더욱이 그러하다.

<파벨만스>는 영화가 언제든 외적인 조건에 의해서 부서질 수 있다는 데에서 시작한다. 스필버그는 전작 <웨스트 사이드 스토리>(2021)에서 마찬가지로 청년을 영화 한가운데에 내세운다. 그들은 얼마든 바깥의 세계에 의해서 붕괴할 수 있다. <바빌론>과 <파벨만스>는 영화의 죽음에 단말마처럼 생겨난 두 영화다. 이제는 이만한 규모를 지닌 예술에 관한 영화는 나오지 않을 수 있다. 그러나 <파벨만스>는 영화를 찬미하기보다 영화가 세상 끝에 내몰린 가운데에서도 왜 찍혀야 하는가를 정면으로 마주하고 있다. 그 자신이 불멸의 존재가 아니듯, 영화도 외부로부터 분리된 불멸의 존재가 아니라는 듯이 말이다.

어떤 작품을 사랑하기는 쉬운 일이지만, 그것을 만든 예술가까지 사랑하기는 어려운 일이다. 인간으로의 예술가와 작품 사이에는 아득히 먼 거리가 있어서다. <파벨만스>는 그 어려운 일을 해냈다. 이 영화로 인해서 인간 스필버그까지 사랑하게 되었다. 이 영화는 감독 스필버그의 최고작이 아닐지라도 '인간 스필버그의 최고작'이다. 그러나 영화보다 영화 바깥의 인간을 더 사랑하므로 이 영화는 스필버그의 최고작으로 남을 것이다. 단언컨대 이 영화는 가장 완전한 예술가의 탄생을 담고 있다.

[글 김경수 영화평론가, rohmereric123@ccoart.com]

 

ⓒ CJ ENM

파벨만스 
The Fabelmans
감독
스티븐 스필버그
Steven Spielberg

 

출연
미셸 윌리엄스
Michelle Williams
폴 다노Paul Dano
세스 로건Seth Rogen
가브리엘 라벨Gabriel LaBelle
주드 허쉬Judd Hirsch

 

수입|배급 CJ ENM
제작연도 2022
상연시간 151분
등급 12세 관람가
개봉 2023.03.22

김경수
김경수
 어릴 적에는 영화와는 거리가 먼 싸구려 이미지를 접하고 살았다. 인터넷 밈부터 스타크래프트 유즈맵 등 이제는 흔적도 없이 사라진 모든 것을 기억하되 동시에 부끄러워하는 중이다. 코아르에 연재 중인 『싸구려 이미지의 시대』는 그 기록이다. 해로운 이미지를 탐하는 습성이 아직도 남아 있는지 영화와 인터넷 밈을 중심으로 매체를 횡단하는 비평을 쓰는 중이다. 어울리지 않게 소설도 사랑한 나머지 문학과 영화의 상호성을 탐구하기도 한다. 인터넷에서의 이미지가 하나하나의 생명이라는 생각에 따라 생태학과 인류세 관련된 공부도 하는 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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