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원히 우리의 시선에서 머물 '선 라이즈'
영원히 우리의 시선에서 머물 '선 라이즈'
  • 이현동
  • 승인 2023.03.22 12: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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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대와 영화, 그 명암 속으로 진입하며 부르는 희망의 찬가"

"무성영화 시절 모든 영화감독의 꿈이라는 것은 영화 속에서 자막을 전혀 쓰지 않고 카메라의 움직임과 인물들의 움직임, 화면 배치만으로 보여주는 영화를 찍어내는 것이었습니다. 이 꿈은 에이젠슈타인도 이루지 못했고, 채플린도 이루지 못했습니다. 그런데 그것을 '무르나우'가 해낸 것입니다."

―정성일 영화평론가, 정은임의 영화음악 中

 

비교적 최근 개봉한 <블랙 펜서: 와칸다 포에버>(2022), <엔트맨과 와스프: 퀀텀매니아>(2023) 등 굵직한 마블 작품들의 흥행 실패를 보며, 세계 영화 시장을 장악하던 마블의 시대가 점차 종언되는 듯 보입니다. 여러 이유가 있겠지만, 과거 영화감독 마틴 스콜세이지(Martin Scorsese)가 한 말이 떠오릅니다. "마블영화는 테마파크에 가깝다. 그런 영화는 '시네마'가 아니다" 그런데 마블 영화뿐만 아니라 최근 영화들 또한 일종의 테마파크처럼 느껴지기까지 합니다. 영화가 더는 향유의 대상이 아닌 마치 놀이기구와 같은 '체험'의 형태로 공유하는 시대가 아닐까 하는 의문이죠. 영화는 동시대의 유행을 따라가는 것과 별반 다르지 않게 되었습니다. 

'볼만한 영화'를 말할 때 대다수는 <아바타>와 같은 막대한 자원을 투자한 할리우드 작품일 것입니다. 이때 누군가는 영화 보기에 대한 문제 제기를 시도하기도 합니다. 이젠 이런 유사한 영화를 보며 '지쳤다'라거나 영화 감상에 대한 '환기가 필요해' 라며 이전 작품들을 뒤적거리는 되는 것이죠. 여기저기 뒤적거리다 찾아낸 영화 리스트를 보면 멈칫하는 순간이 옵니다. 왜냐하면 평론가 또는 시네필이 추천하는 영화 대부분에는 고전영화가 포함되어 있기 때문이죠.

여느 예술에서 마찬가지로 클래식(고전, 명작)이 다시 거론되는 경우는 드문 일입니다. 리메이크를 통해 성공을 거두어 회자하는 일이 아닌 이상 특정한 이들만이 향유하는 문화처럼 여겨지기도 합니다. 특히, 영화의 경우에는 유성영화 이전 영화들은 화질도 좋지 않고, 쉽게 구할 수 있는 작품이 아닌 경우도 많습니다. 솔직히 토로하자면 왜 클래식을 보아야 하는가를 묻는 물음에 해줄 수 있는 명증하고도 정직한 답은 제겐 없습니다. 그런데도 거칠게 말해보자면 "비행기는 우리가 지구의 진정한 모습을 발견하게 해주었다. 길은 사실 여러 세기 동안 우리를 기만하였다"라는 어린 왕자의 한 문장으로 답을 하고 싶습니다. 고전영화는 분명 우리에게 익숙한 '볼만한 영화'에서 보지 못한 또 다른 새로운 시각을 제시합니다.

 

ⓒ 영화 <선라이즈>(1927)

그렇다면 고전 중에서 꼭 감상해야 할 영화가 있다면 무엇이 있을까요. 당장 떠오르는 영화는 바로 F.W 무르나우의 <선라이즈>(1927)입니다. 이 영화는 최근 개봉한 <바빌론>(2022)이 인용한 <재즈 싱어>(1927)가 개봉하기 한 달 전인 1927년 9월에 개봉했습니다.

<선라이즈>는 유성 영화의 기술적 성취에 대한 우려와는 무관하게 이 작품은 감정적 깊이와 몰입감을 이미지와 사운드 효과만으로도 무성 영화가 줄 수 있는 미학적 탐구를 가능하게 했습니다. 안타깝게도 오슨 웰즈의 <시민 케인>(1941)과 함께 흥행에는 참패했으나 2년 후 개최되었던 최초의 아카데미 시상식에서 작품상, 촬영상, 여우조연상을 수상하며 비평가들의 찬사를 받았습니다. 이러한 수상은 <선라이즈>가 앞으로도 영속할만한 최고의 고전 영화로 합류하는 계기가 되었죠.

시네아스트인 '무르나우'는 당시 꽤 독특한 위치를 점유하고 있던 감독이었습니다. 그가 영향을 받았던 세계는 혁명적인 아방가르드 독일 표현주의였죠. 그래서일까요. 무르나우가 미국에 러브콜을 받고 촬영한 첫 작품인 <선라이즈>에는 특이한 점이 있습니다. 제작과 촬영을 폭스 필름 코퍼레이션의 설립자이자 미국 프로듀서인 윌리엄 폭스가 담당하고, 각본과 연출을 독일인인 칼 메이어와 로버트 바이네가 함께했습니다. 

당시 주류 미국영화는 시대가 가진 꿈과 열망, 위대한 국가를 설립하고자 하는 신화적 공상을 강렬하고도 매력적으로 표현했습니다. 특히, 코미디 장르가 1920년을 주도하면서 대중의 사회적 분위기는 긍정적인 경향을 지니고 있었죠. 이러한 맥락에서 탄생한 <선라이즈>는 독일의 어두운 아방가르드 표현 양식을 가져오면서도 헐리우드식 해피엔딩을 조합함으로써 당시에 유례없는 독특한 영화를 탄생시켰습니다.

여기서 에이젠슈타인이 강조한 몽타주의 반기를 들고 리얼리즘을 영화의 미덕이라 생각했던 앙드레 바쟁 같은 평론가는 <선라이즈>를 초현실적이고 왜곡되어 있으며, 연기와 편집 등이 과잉되어 있다고 평가하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이 영화에서 사용되는 다양한 숏(트래킹 숏, 중첩 이미지, 원근법)은 표현주의를 연상시키는 동시에 부부가 걷는 장면에서는 롱 테이크는 이 두 요소를 접목해 영화사에서 길이 남을 작품을 만들어냈습니다.

 

ⓒ 영화 <선라이즈>(1927)

<선라이즈>의 이야기는 간단합니다. 시골에 살던 한 남자가 매혹적인 도시 여자를 만나 사랑에 빠집니다. 아내를 살해하라는 도시 여자의 종용에 넘어간 남자는 아내를 살해하려다 실패하고, 다시금 부부의 애정을 회복합니다. 이토록 단순한 스토리가 비극과 희극 사이를 격정적으로 오가며, 대중들에게 따스한 온기를 스며들도록 만들 수 있었던 것은 무르나우의 감각과 그 역량이 보편적인 탐구를 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이미지만으로 서사를 전달하고 감정을 증폭시키려 했던 무르나우 감독은 자막 사용을 최대한 절제하면서 영화를 제작했습니다. <마지막 웃음>(1924)에서는 자막을 하나만 사용할 정도였죠. 이는 그의 스타일이 촬영에 있음을 강조합니다. <선라이즈>에서 두각을 나타내는 시골과 도시, 도시여자와 시골여자라는 두 종류의 양가적인 공간과 정서는 그 감각을 냉엄하게 뿜어내다가도 이내 희락으로 점철되어 감응으로 유발되기까지 그리 긴 시간이 걸리지 않습니다. 95분이라는 시간 안에 무르나우는 이 모든 것을 완결시켜냅니다.

<선라이즈>에서 두 장면은 이 영화가 가진 특성에 대한 감독의 성찰과 발전에 대한 논구로 귀결되어집니다.

첫 번째는 도시 여자와 남자가 최초로 만나 사랑의 줄다리기를 이어가는 장면입니다. 여기서 무르나우는 그의 <노스페라투>(1922)에서 보여줬던 몽환적 스타일을 드러냅니다. 안개가 자욱하게 프레임을 장악하고 유혹에 넘어간 남자는 여자가 살고 있는 도시의 이미지를 연상합니다. 늪을 걷는 남자의 발자국을 추격하는 롱테이크와 살해하라는 여자의 지시가 끝난 다음 카메라는 남자의 정면이 아닌 후면으로 컷을 종료시킵니다. 비극의 전조를 암시하는 이 장면과 그 중간 사이를 매개하는 아내의 살해 실패 장면은 곧장 이 영화의 또 다른 스타일의 반향을 예고합니다.

두 번째는 아내와 남편이 도시에서 벌어지는 에피소드에서 발견할 수 있습니다. 미용실과 카페, 카니발을 배경으로 미국 영화에서 주로 사용되었던 버스터 키튼이나 찰리 채플린이 구사했던 코미디가 등장합니다. 이건 무르나우가 기존에 잘 사용하지 않는 방법이었습니다. 파티 현장에서 돼지가 주인의 손을 떠나 추격이 벌어지거나 이어지는 댄스 시퀀스에서 유쾌하게 인물들의 표정을 담는 평행 편집에는 분명 무르나우 결연한 결단이 있었을 것이란 추측을 하게 됩니다. 확실한 건 이 영화에서 코미디를 미국 스튜디오에서 요구한 것이 아니라 오로지 그에게 창작 권한을 부여했다는 사실이 이를 방증하고 있습니다.

이처럼 <선라이즈>에서 드러나는 두 종류의 스타일 조화는 무르나우가 어떤 감독으로 거듭날지에 대한 일종의 선언 같은 것이었습니다.

끝으로 하나 더 언급하자면, <선라이즈>는 등장인물의 이름을 명시하지 않습니다. 남자(조지 오브라이언)와 아내(자넷 게이너), 도시에서 온 여자(마가렛 리빙스톤)를 주축으로 진행되는 이 이름 없는 이야기는 누구에게도 해당할 수 있는 보편성을 획득합니다. 특정한 이를 지정하지 않는다는 지점에서 대표성의 원리라고 치환해도 무리가 아닐 것 같습니다.

 

ⓒ 영화 <선라이즈>(1927)

제1차 세계대전이 끝나고 무르나우는 <선라이즈>를 시대의 회복을 긍정하는 것으로 표출하고 싶었을지도 모릅니다. 파멸의 서막에서 희망으로 종결되는 이 영화는 마지막 장면에서 어둠이 아닌 빛을 봅니다. 도시에서 돌아오는 길에 익사하여 죽은 줄 알았던 아내가 살아 돌아오는 장면에서 저는 영화가 산출하는 희망을 믿을 수밖에 없습니다. 칼 테오도르 드레이어의 <오데트>(1954)나 마뇰 드 올리베이라의 <게보와 그림자들>(2013)과 같이 다시금 돌아오는 부활의 의미는 망각이 아닌 희망입니다. 만약 살아남은 자의 분노와 광기, 그리고 슬픔을 가진 자들에게 필요한 영화가 있다면 바로, 이 영화가 될 것입니다.

<선라이즈>는 고전 영화 보기를 어려워했던 이들이나 영화를 단순히 의례적인 경험으로 치부했던 이들에게 권하고 싶은 작품입니다. 경이로운 이 작품은 여전히 모든 이들의 아카이브에서 잊힐 기미가 보이지 않습니다. 누군가가 영원히 간직해야 단 하나의 이미지가 있냐고 물어본다면 저는 마지막 장면이라고 대답할 것입니다.

[글 이현동 영화평론가, Horizonte@ccoart.com]

 

ⓒ 영화 <선라이즈>(1927)

선라이즈
Sunrise: A Song of Two Humans
감독
프리드리히 빌헬름 무르나우
F.W. Murnau

 

출연
조지 오브라이언
George O'Brien
자넷 게이노Janet Gaynor
마가렛 리빙스톤Margaret Livingston
보딜 로싱Bodil Rosing
J. 파렐 맥도널드J. Farrell MacDonald
랠프 시퍼리Ralph Sipperly
제인 윈튼Jane Winton
아서 호스만Arthur Housman

 

제작연도 1927
상영시간 95분

이현동
이현동
 영화는 무엇인가가 아닌 무엇이 아닌가를 질문하는 사람. 그 가운데서 영화의 종말의 조건을 찾는다. 이미지의 반역 가능성을 탐구하는 동시에 영화 안에서 매몰된 담론의 유적들을 발굴하는 작업을 한다. 매일 스크린 앞에 앉아 희망과 절망 사이를 배회하는 나그네 같은 삶을 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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