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살 즈음에 나는 정체 모를 "쿵" 소리를 들은 적 있다.
날짜는 정확히 기억나지 않는다. 저녁 어스름이 드리우기 시작할 시간이었다. 퇴근한 부모님이 서둘러 집으로 돌아오기를 기다렸다. 집이 차츰 어둠에 잠겨갔으므로, 나는 최대한 남은 노을빛이라도 쐬려고 창가 쪽으로 엎드려 누운 자세로 그림을 그렸다. 해는 창문 너머로 보이는 봉우리 뒤편으로 가라앉으며 더 세게 불타올랐다. 봉우리 곳곳에 곰팡이처럼 핀 소나무는 역광을 받아서 차츰 어두워졌다.
나는 크레파스와 불어펜과 같은 필기구를 주먹 쥐듯이 쥐었다. 그때 스케치북을 몇 권을 낭비했는지 모르겠다. 나름 신중히 선을 그렸으나, 제대로 직선과 원을 그려본 적이 없다. 죄다 비뚤비뚤하거나 선 끝에 다다라서는 옆으로 이탈하거나 둘 중 하나에 불과했다. 선과 선을 이어서 겨우 그림을 그리더라도 스케치북에는 2차원과 3차원 사이에 걸쳐 있는 무언가만 남았다. 그림으로 부르기에는 한참 모자란 것들이었다. 나는 내 서투른 결과에 자괴감을 느껴서 스케치북을 찢기를 반복했다. 시간이 가는 줄도 모르고 있던 즈음 "쿵" 소리가 들렸다. 창밖을 황급히 보았는데도 원인을 알기가 힘들었다. 당연히 한참 뒤에 집에 도착한 부모님도 그 소리의 정체를 몰랐다.
그날 밤 산 너머에 공룡이 사는 것을 보는 꿈을 꾸었다. 초등학교 2학년 즈음까지 나는 그곳을 왜인지 북한산이 아니라 '공룡산'이라고 불렀다. 터무니없는 이름인데도, 나는 매일 그리 불렀다.
그 꿈의 기원은 스티븐 스필버그의 <쥬라기 공원>(1993)이다.
어릴 적 살던 집의 TV는 거실에 있는 반원 모양 서랍 위에 설치되었다. 서랍을 열면 비디오 재생 장치가 있고, 그 옆에 세로로 비스듬히 세워진 여러 비디오테이프 중 하나가 <쥬라기 공원>이었다. 그때 티라노사우루스의 첫 등장 장면을 거의 매일 돌려보았다. 재생 장치가 고장이 날 만큼이나 나는 그 장면에 매혹되었다. 쾌청 비디오를 재생하는 그 잠깐의 시간마저 내게는 길다고 느껴질 정도로 말이다. 물컵에 따라진 물이 흔들리는 장면에 불과한 데도, 쿵 소리와 함께 멀리서 무언가가 다가오고 있다는 공포가 생겨서다.
외-화면에서 티라노사우루스가 한 발짝 내디디면 물이 흔들린다. 그것이 정체를 드러내기까지 오랜 시간이 걸린다. 쿵 소리의 진폭은 차츰 커졌다. (나중에야 안 사실이지만 스필버그는 <죠스>에서도 사람을 똑같이 겁먹게 했다.) 티라노사우루스가 살아있다고 상상하게 하는 것도, 그 대상이 외-화면에 있는 쿵 소리로 인해서 가능해진다. 공룡은 보이지 않는 순간에야 더욱 생생히 느껴졌다. 그 소리는 탁이나 딱과 같이 울리는 순간 사라지는 날카로운 소리가 아니다. 겨우 1초도 안 되는 찰나에 내가 서 있는 공간이 통째로 흔들리고, 심지어는 공간이 무너질 수 있다는 감각을 몸에 각인하는 뭉툭한 소리다.
상상은 쿵 소리로 인해 감각에 스며들었다. 아직도 나는 내게 그 산을 공룡산으로 부르게 한 소리의 정체를 모른다. 지레짐작해보았다. 산에서 훈련하고 있는 부대에서 오발탄이 나간 것이 아닐까. 경우의 수는 수없이 많으므로 추측은 아무 쓸모도 없을 것이다. 나는 세상 어딘가에 공룡이 있을지도 모른다는 비밀을 혼자 영원히 지니려 했다. 내 시야의 한계가, 그로 인해서 내가 볼 수 있는 세계의 한계가 지평선 너머에 불과했다는 것이 내게 상상의 나래를 펼치게 했다. 인터넷을 손에 쥐기 전까지는 세계의 99%는 내 상상으로 가득했다. 영화가 평행세계를 프레임으로 잘라낸 세계이듯이.
으레 그 또래 어린 남자아이가 그러하듯이, 나는 거대한 것에 쉽게 매혹되었다. 공룡과 비행기, 탱크 등 각자의 덕질 분야는 달라도, 어린아이는 보통 스스로 자신이 덕질하는 거대한 대상을 놀이도구로 상상의 나래를 펼쳐나가기 마련. 초등학생 때까지만 하더라도 수많은 아이가 과학의 날 포스터에다가 하늘을 나는 자율주행차라든지, 우주왕복선을 그려서 냈다.
여러 오브제가 있기는 해도 공룡만큼의 위상을 지니는 것은 없다. 왜 그런지 정확한 이유를 설명한 이는 아직 없는데도, 여전히 아동용 콘텐츠에 공룡이 가득한 것이 그 위상을 드러낸다. 특촬물부터 <뽀로로> 속 크롱에 이르기까지 종류는 다양하다. 공룡을 재료로 하는 상상력은 세상에 철저히 무해해서가 아닐까. 공룡은 멸종된 생물이기에 그것으로 어떤 상상을 한들 혼날 리가 없다. 공룡이 멸종했다는 엔딩을 이미 알뿐더러, <쥬라기 공원>처럼 공룡이 되살아날 일이 없다는 것도 아이들은 충분히 알 것이다.
심지어 영화에서 공룡을 되살리려는 빌런을 처단하기까지 한다. 마찬가지로 어른도 아이가 슈퍼맨을 따라해서 다치느니 쥐라기에서 놀게끔 두는 것이 더 나을 것이다. 공룡은 먼 옛날에 살았던 고생물이라기보다는 문화적 공간에 가까운 것이었다. 공룡은 놀이도구에 불과했다. 공룡이 있는 세계는 내가 자유로울 수 있는 몇 안 되는 공간이었다. 스케치북에다가 그 멋진 세계를 아무리 그리려고 해도 실패작으로 남기 일쑤다. 직선 하나 제대로 못 그리는 아이가 어떻게 세계를 그릴 수 있을까.
내가 상상한 세계는 <쥬라기 공원>보다 거대했을지도 모른다.
이제는 흔적조차도 없는 세계다. <쥬라기 공원>을 볼 때마다 그 세계의 파편을 지레짐작하는 것으로 만족해야만 한다.
나는 붉은색 공룡 도록을 읽으며 수백 가지에 이르는 공룡 이름을 외우고는 했다. 비록 숫자를 100까지는 못 외우고, 내 또래는 다 하는 덧·뺄셈이 서툴렀을지라도 그게 자랑스러웠다. 공룡에서만큼은 나도 전문가고 어른이었다.
심지어 공룡 사이의 상성을 상상하면서 나는 인생 최초로 단편소설을 썼다. 처음으로 만든 이야기를 부모님 앞에서 재잘거렸다. 한창 신나서 들떠 있는 내 과거는 이제는 재생할 수도 없는 아버지의 홈비디오, 그리고 구석 한편에 주황 글씨로 사진을 찍은 날짜가 인쇄된 바랜 필름 사진에만 남아 있다. 트라이아스기, 백악기, 쥐라기 사이에는 아득한 시간 차가 있고, 각 시기에 있는 공룡이 한자리에서 만나는 것이 불가능한데도 나는 어쩐지 그들을 굳이 한 자리에 두고 싶었다.
박치기 공룡이라고 불리는 파키케팔로사우루스가 내가 가장 사랑하던 공룡이었다. 티라노는 왠지 너무 강하고, 브라키오사우르스와 트리케라톱스는 순했다. 벨로시랩터는 어딘가 얍삽해 별로고, 해룡 플레시오사우루스는 물에만 있어서 다른 공룡과 맞붙을 수가 없다. 적당히 약하고, 비장의 무기를 지닌 파키케팔로사우루스가 제격이었다. 나는 그가 전력으로 티라노를 들이받아서 티라노의 다리뼈를 부수기를 바랐다. 어쨌거나 둘은 백악기 후기에 살았으니 가능했을 상상이다.
그때 쓴 단편소설이 몇 매인지는 아직도 모른다. 타임머신을 발명하면 과거의 나에게 가서 그 소설을 제일 먼저 듣고 싶어질 정도다.
공룡에 구체적 형상을 부여했고, 상상의 공간을 마련한 매개가 '영화'라는 것은 의미심장하다.
<쥬라기 공원> 하나만으로 내게 스필버그는 신이나 마찬가지다. 공룡이 고도로 발달한 CG에 불과하고, 그 스크린 안의 모든 것이 가짜에 불과하다는 것을 안 것은 초등학교에 입학한 일곱살 즈음이었다. 아이들은 서둘러 공룡을 머리에서 지우기에 급급했다. 더는 공룡과 지낼 수 없다는 것을 느낀 것은 초등학교에 간 첫날이었다. 아이들은 장래희망으로 대통령과 우주비행사를 적기 시작했다. 제법 조숙했던 몇몇 아이는 변호사와 판사를 꿈꾸었다.
담임선생은 장래 희망을 쓴 칸 아래에다 자신의 미래를 그림으로 그려보라고 했다. 나는 고생물학자를 적고 밑에다가 공룡을 그렸다. 그는 그림을 일제히 거둬서 교실 벽 한쪽에다가 나란히 전시해두었다. 그다음 쉬는 시간에 어떤 아이가 아직도 공룡이 살아있는 줄 아냐며 시비를 걸기 시작했다. 나는 네 꿈이 진짜냐고 물어보다가 서로를 물어뜯었다. 그것이 내가 기억하는 인생 첫 번째 싸움이었다.
일 년도 채 지나지 않아 앨런 그랜트(샘 닐)를 따라서 고생물학자로 살겠다는 꿈도 수학을 잘해야만 가능하다는 것을 안 뒤로 그 꿈은 사라지고 말았다. 수학학원을 하나 더 다니느니 꿈을 포기하는 것이 나았다. 거기다 빌런을 양산한다는 대학원 괴담까지 접했더라면 내 동심은 완전히 박살이 나버렸을 것이다. 학벌주의의 황혼이 다다른 시기에 고생물학자는 헛된 꿈이었을지도 모른다.
대신 나와 달리 꿈을 포기하지 않은 사람이 있으리라는 가능성을 믿기로 했다. 그 가능성과 동지애를 믿어야 나는 공룡을, 아니 영화를 사랑할 수 있을 듯했다. 최근에서야 나는 나와 동갑이자 『만화로 배우는 공룡의 생태』를 쓴 김도윤 작가를 만나서야 비로소 그 사랑의 결실을 본 듯했다.
<쥬라기 공원>에서의 그 "쿵" 소리는 사실 아날로그가 CG로 전환될 즈음의 신호라고도 볼 수 있다. 공룡 발자국으로 상정되는 세 번의 두드림은 CG의 시대가 아날로그의 시대에 노크하는 소리기도 했다. 내 유년기는 아날로그 특수효과의 시대가 저물고, CG와 디지털 영화가 서서히 주류로 부상하던 시기다. <쥬라기 공원>은 이 둘 사이에 걸쳐 있다.
스티븐 스필버그는 40년간 영화'만' 찍었다. 2023년 기준, <쥬라기 공원>을 기점으로 스티븐 스필버그의 필모는 반으로 나뉜다. 전반부 20년은 아날로그 특수효과를 중심으로 했고, 후반부 20년은 CG 특수효과를 중점으로 영화를 찍었다.<쥬라기 공원>은 그 중간에 낀 작품인 셈이다. 공룡의 파편만 드러나다가 그것이 서서히 스크린에서 전면에 드러나는 순간은 그야말로 CG가 호령하는 시기가 오리라는 공포이기도 했다. 우연찮게도 <쥬라기 공원>은 유전자의 조작으로 공룡이 탄생하는 과정을 다루는 영화다.
이듬해에 나온 영화 <포레스트 검프>(1995)의 오프닝은 깃털이 사뿐히 내려앉는 장면이다. 깃털이 사뿐히 내려앉는 것은 자연에서는 불가능한 일이다. CG의 권능만이 자연을 조작하고 공룡을 탄생하게끔 했다. <쥬라기 공원>의 공룡이 더없이 진짜처럼 보인 것은, 쿵 소리를 통한 아날로그를 거쳐서 CG로 제작된 공룡이 서서히 등장해서다. CG와 아날로그가 상응했고, 공룡은 온전히 상상으로만 존재한 시기인 셈이다. 미지와 변수가 지배하는 아날로그의 세계는 모든 것을 창조할 수 있는 CG의 세계에 자리를 내주기 시작했다.
중학생일 때 제임스 카메론의<아바타>(2009)를 보았다. 모든 것이 CG라서 영화관의 모든 관객이 경탄을 멈추지 못했다. 3D로만 모든 것이 채색된 <아바타>의 세계는 판타지로는 완벽한 세계관을 구축했다고 볼 수 있을 정도로 탄탄했다. 분명 아름다웠다. 다만, 보는 동안<쥬라기 공원>의 세계가 사라져간다는 허망함에 사로잡혔다. 나는 아직<쥬라기 공원>에서 티라노가 등장하는 장면만큼이나 아름다운 장면을 본 적 없다. 그러나 공룡의 세계는 내게서도, 영화에서도 맥없이 사라지기 시작했다.
[글 김경수 영화평론가, rohmereric123@ccoart.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