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독립영화 편지 박정범#2] '산다' 비참한 현실에서 초월적 세계로
[한국독립영화 편지 박정범#2] '산다' 비참한 현실에서 초월적 세계로
  • 김민세
  • 승인 2023.07.31 17: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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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정범의 몸은 영화 그 자체가 된다"

<무산일기>(2010)를 보고 나서 문득 이런 생각이 들었다. '박정범의 몸'은 이제 무엇이 될 것인가. 전승철의 몸이 되어, 전승철을 보았던 박정범은 이제 무엇이 되어, 무엇을 볼 것인가.

이러한 질문에 호응하듯 박정범은 또다시 카메라 앞에 선다. 그리고 그 질문에 섞였던 약간의 의심을 무너뜨리듯이 영화가 시작하고 나서 수 분의 시간 동안 자신의 몸으로 영화를 지탱한다. 아무 말 없이 노동하고, 거칠게 숨 쉰다. 처절한 몸부림처럼 보이는 이 노동과 호흡은 살아있음에 대한 증명이기도 하지만 죽어감에 대한 반증이기도 하다. 결코 짧다고 이야기할 수 없는 길게 늘어뜨려진 것 같은 시간을 걸쳐 그의 노동을 보고, 호흡을 듣다 보면 박정범은 간신히 살아있는 자신의 몸을 기록하기 위해 영화를 찍고 있다는 생각까지 다다른다. 모든 것이 무너진 세상을 홀로 돌이키려는 듯이. 혹은 아무것도 없는 무(無)의 상태에서 창조의 순간을 재현하려는 듯이. <산다>에 도착한 박정범의 몸은 그렇게 자신의 살아있음을 증명한다.

 

ⓒ 리틀빅픽처스

어찌 보면 <산다>는 지독한 리얼리즘의 극단을 보여주었다고 할 수 있는 <무산일기>의 반복 같아 보인다. 박정범의 몸이 놓인 곳은 언제나 희망 하나 볼 수 없는 비참한 현실의 구렁텅이였으며, 계급 안에 놓인 노동자들의 치열한 투쟁이었다. 그는 마치 그곳에서 자학과 고행을 하듯이 영화를 찍어왔다. 그러나 <무산일기>에서 끝내 다다랐던 곳이 비참한 현실의 극단이었다면 <산다>는 현실의 세계에서 상징적인 세계를 넘어 초월적인 세계로 진입하는 것만 같은 인상을 준다.

가족을 부양해야 하는 정철이 다시 올려 세우려고 애쓰는 무너진 집, 쉽게 쓰러지지 않는 앙상한 나무들만 남은 황량한 숲, 이기심으로 인해 투쟁과 심판의 장이 되어버린 된장공장, 버텨내야만 하는 겨울과 절대 오지 않을 것 같은 필리핀으로의 휴가. <산다>는 이런 것들을 통해 삶과 죽음, 계급과 인생을 담은 하나의 상징적인 세계관을 그려간다. 비전문배우들이 내뱉는 딱딱하고 투박한 대사들은 이 영화를 누군가에 의해 직조된 거대한 부조리의 세계로 경험할 수 있게 하며, 된장공장 사장과 그의 딸을 향한 형식주의적이고 경직되어 있는 듯한 영화적 시선은 자본가와 노동자를 둘러싼 이야기를 계급 우화로서 바라보게 만든다. 그리고 엔딩에 다다라 정철의 변화가 드러나는 일련의 이미지들은 숭고함마저 느껴지는 초월적 세계로 나아간다.

 

ⓒ 리틀빅픽처스

리얼리즘으로써 <산다>의 세계 아래에는 의미로서 존재하는 상징적인 세계가 작동한다. 주목할 수 있는 상징은 '숨'과 '문', '불'이다. 먼저, 은유적으로 말하자면 '숨'은 정철의 입에서 나오는 첫 번째 말이다. 오프닝 시퀀스의 이 숨소리는 암전 후에 타이틀이 떠오를 때까지 이어진다. 정철은 자신이 살아있다는 것을 잊지 않게 하려는 듯이, 지금이 겨울의 한복판이라는 것을 자꾸만 상기하듯이 하얀 김을 내뿜으며 숨 쉰다. 반면 이 숨은 부모의 죽음 이후로 정신 이상과 발작 증세를 겪고 있는 정철의 누나 수연으로 인해 반복적으로 멈춰진다. 수연은 숨 쉬지 못해 몸을 비틀고 정철의 노동과 계획은 그녀로 인해 정체된다. 한 사람이 자학하며 스스로를 무너뜨릴 때, 한 사람은 노동하며 일으켜 세운다. 한 사람이 숨을 멈추려 할 때, 한 사람은 숨 쉬려 한다. 한 사람이 죽어갈 때, 한 사람은 산다. 숨은 삶과 죽음 사이에 놓인 정철과 수연의 상태를 설명하는 시각적이지 청각적인, 더불어 촉각적인 기표이다.

'문'은 정철이 경계에 선 인물이라는 것을 증명한다. 정철은 노가다 판에서 돈을 갖고 도망친 동료 용욱으로 인해 손해를 본 피해자이지만 다른 동료들을 책임져야 하는 입장에 있어서 가해자이다. 3년 전 일어난 산사태로 인해 부모는 죽고 수연은 미쳐버렸지만 정철은 그 고통을 애도할 수 없이 노동의 삶을 이어간다. 그렇기에 정철운 용욱이 도망치고 홀로 남은 그의 아들이 집에 숨지 못하게 문을 떼어내야 하고, 자꾸만 집에 나가 실종되는 수연을 나가지 못하게 문을 잠가야 한다. 집의 안과 밖의 경계를 만드는 문이라는 상징을 통제하는 정철의 모습은 어디에도 속할 수 없는 이방인으로서 그사이를 조율해야 하는 그의 운명을 떠올리게 만드는 동시에 그로부터 나오는 폭력성을 증명한다. 그 폭력성은 최소한의 삶의 조건을 무참히 짓밟아 버린다는 점에서 자본가가 시행하는 계급의 폭력보다 더 잔인하고 근원적이다. 용욱의 돈을 받아내기 위해 그의 아들에게까지 해코지를 하고 정철을 위협했던 자들이 문을 떼어내는 정철을 아무 말 없이 당황한 얼굴로 볼 수밖에 없는 이유는 그에게서 어떠한 근원적인 공포를 느꼈기 때문일 것이다.

'불'은 영화에서 두 가지 형태로 모습을 드러낸다. 하나는 정철이 계속해서 태워대는 모닥불이고, 하나는 영화의 후반부에 이르러 한 번만 등장하는 가로등이다. 정철을 비롯한 영화 속의 노동자들은 돈이 없다면 이 한겨울을 버틸 수 없을 것이라는 말을 반복한다. 그리고 정철은 그 강원도의 추운 겨울을 견디기 위해 장작을 베고 불을 피운다. 그러므로 모닥불을 피운다는 것은 그들의 삶과 직결되는 문제이다. 우리가 이 모닥불에서 읽어낼 수 있는 삶의 태도는 어떻게든 이 시간이 지나가길 ‘버티는 것’이다. 반면, 수연이 또다시 실종된 뒤에, 수연이 집에 잘 찾아올 수 있게 나무 위에 달은 가로등은 삶에 대한 또 다른 자세를 제시한다. 지금까지 수연을 찾기 위해 강원도 곳곳을 헤매고, 서울로 올라갔던 정철은 이제 그녀의 돌발행동을 버텨내려 하지 않는다. 결국 수연은 찾지 못했지만 정철은 가로등을 달며 그녀를 기다리기로 한다. 이때 정철의 삶의 태도는 ‘버티는 것’에서 ‘기다리는 것’이 된다. 분노와 욕망으로 타오르던 모닥불에서 희망과 믿음으로 비추는 가로등으로. 우리는 수연의 딸을 비추는 이 가로등의 작은 불빛에서 미래를 향한 삶의 태도를 읽어낼 수 있다.

 

ⓒ 리틀빅픽처스

버티는 삶에서 기다리는 삶으로. 무엇이 정철의 태도를 바꾸어 놓았는지는 모르겠으나 그는 한밤중 가로등을 물끄러미 올려다보더니 떼어냈던 문짝을 등에 지고 용욱의 집으로 향한다. 아무 말 없이 행해지는 또 다른 노동을 견디는 것은 첫 장면에서와 마찬가지인 박정범의 몸이다. 시시프스가 된 박정범의 몸은 이 마지막에 다다라서 새로운 신화를 써간다. 부조리의 삶에도 불구하고 계속 산다는 것. 이 변화가 숭고한 이유는 사실 그의 삶에서 나아진 것이 하나도 없기 때문이다.

<산다>는 제작 과정 자체가 하나의 고행이었다. 박정범은 자신만의 고집으로 8시간의 시간 동안 홀로 나무를 베는 노동을 강행했고, 이틀 동안 한 컷 분량의 롱테이크 씬을 촬영하기 위해 스스로의 몸을 망가뜨려 갔으며, 스태프들은 때로 그를 불신하고 떠나갔다. 그래서 정철이 자신의 몸보다 큰 문짝을 등에 지고 걸음을 이어나갈 때. 죄책감으로부터 비롯된 뒤틀린 폭력성을 내려놓고 용서의 걸음을 내딛는 정철의 몸은 모든 책임을 짊어지고 걸어가겠다는 박정범의 결단과 겹쳐 보일 수밖에 없다. 어쩌면 <산다>에서 박정범은 영화 그 자체가 되어버린 것은 아닐까. 여러 수난을 겪은 뒤 스크린에 도착한 정철의 몸은 고행으로서의 필름 메이킹을 해 온 박정범의 현현이 된다. <산다>의 초월적 경험은 영화에서 박정범의 몸을 볼 수 있는 이 순간에 온다. 박정범의 영화를 지지하기 이전에 그의 필름 메이킹을 간절하게 응원할 뿐이다.

[글 김민세 영화전문기자, minsemunji@ccoart.com]

 

ⓒ 리틀빅픽처스

산다
Alive
감독
박정범

 

출연
박정범
이승연
이승준
박명훈
신햇빛
박희본
주영호

 

제작 세컨드윈드 필름·산다문화산업전문회사
배급 리틀빅픽처스
제작연도 2014
상영시간 166분
등급 청소년 관람불가
개봉 2015.05.21

김민세
김민세
 고등학생 시절, 장건재, 박정범 등의 한국영화를 보며 영화를 시작했다. 한양대학교 연극영화학과 영화부에 재학하며 한 편의 단편 영화를 연출했고, 종종 학생영화에 참여하곤 한다.
 평론은 경기씨네 영화관 공모전 영화평론 부문에 수상하며 시작했다. 현재, 한국 독립영화 작가들에 대한 작업을 이어가고 있으며, 그와 관련한 단행본을 준비 중이다. 비평가의 자아와 창작자의 자아 사이를 부단하게 진동하며 영화를 보려 노력한다. 그럴 때마다 누벨바그를 이끌던 작가들의 이름을 하염없이 떠올리곤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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