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정범의 <무산일기>에서 내내 볼 수 있는 것은 '한 사람의 등'이다. 탈북민으로서의 삶의 무게를 짊어지고 홀로 영화 안에 놓인 한 사람의 위축된 몸은 그 존재만으로 언어가 말할 수 없는 많은 것들을 불러온다. 그렇다면 박정범은 이 영화에서 그 사람의 등을 보고자 한다고 말할 수 있는 것일까. 이런 질문 앞에서 혼란스러워진다. 질문을 구체화해 보자면, 박정범은 그 사람의 등을 보는 위치에 있는 것일까. 박정범은 감독으로서 카메라 뒤에 있기도 하지만, 동시에 배우로서 카메라 앞에 있기도 하다. 그래서 영화에서 등이 반복적으로 등장할 때마다, 박정범은 그 몸을 보려고 애쓰는 것이 아니라, 그가 스스로의 몸의 자세와 각도와 질감을 조종해가면서 어떠한 하나의 형상이자 존재를 드러내려고 노력하는 것처럼 보인다. 다시 말해, 박정범은 그 몸을 보려는 자리에 있기도 하지만 본질적으로는 그 몸으로 존재해야 하는 자리에 있다.
박정범은 자신이 연출과 동시에 연기를 하는 이유에 대해 "맞는 연기를 다른 사람에게 시키기 미안해서"라고 말한 바 있다. 한국영화에서 올곧이 리얼리즘이라는 자신의 길을 걸어온 그는 자신의 영화에서 인물들이 '실제로' 맞고 때리기를 원하기 때문이다. 이 말에서 어떠한 죄책감이 느껴진다. 마치 북한에서 우발적으로 살인을 저지른 뒤 그 죄책감으로 평생을 살아온 영화 속 승철처럼. 박정범이 자신의 몸으로 영화 안에서 존재할 수밖에 없는 데에는 어떠한 죄책감의 이유가 있다. 그것은 어쩌면 자신의 동료였던 탈북인 전승철의 삶의 고통을 그저 지켜보고 들을 수밖에 없었던, 암투병으로 세상을 떠난 그에게 그의 삶을 담은 영화 <125 전승철>(2008)을 끝내 보여줄 수 없었던, <무산일기>를 만들기 시작하고 끝날 때까지 박정범의 마음 깊숙한 곳에 박혀있었던 그런 죄책감이다.
<무산일기>의 등은 고행으로서의 영화를 찍고 있는 박정범의 몸, 그의 죽은 동료 '전승철'의 몸, 영화의 주인공 '승철'의 몸, 그 많은 존재들을 소환하는 영화적 장소가 된다.
그렇기에 결정적 순간에 대상의 앞모습이 아닌 뒷모습을 보여주겠다는 이 영화의 태도는, 카메라가 아니라 몸으로 있는 박정범에게 '대상을 어떻게 볼 것이냐'는 응시의 윤리가 아닌, '대상을 어떻게 드러낼 것이냐'는 존재의 윤리로 다가온다. 다만, 그것이 응시의 욕망 자체가 사라졌다는 것을 의미하진 않는다. 박정범이 연기하고 있는 승철은 영화 안에서 계속해서 무언가를 본다. 교회 창문 너머로 좋아하는 숙영을 보고, 가게에 진열되어 있는 정장을 유리창 밖에서 구경한다. 이때의 시선은 박정범의 응시라기보다는 승철의 욕망을 드러내는 승철의 응시라고 보는 것이 맞다. 사실상 박정범이 승철이라는 영화적 인물로 영화 안에 들어오게 된 이상 이러한 과정은 당연한 것이다. 그러나 영화는 승철의 응시가 곧 박정범의 응시로 넘어가는 순간을 보여주고야 만다. 카메라 앞에서 승철로서 보이는 것을 의식하고 있거나, 보고 있는 박정범이 자신의 욕망을 드러내며 무언가를 보는 순간이 온다는 것이다.
많은 감독들은 카메라라는 시선을 통해 응시의 욕망을 드러낸다. 감독이 자신의 카메라를 통해 배우가 연기하고 있는 캐릭터를 본다는 것은 그 캐릭터의 서사를 따라가겠다는 것, 그의 삶을 계속해서 들여다보겠다는 것이다. 하지만 감독이 곧 배우이자 응시의 대상이 되어있는 <무산일기>의 특별한 상황에서는 감독이 무언가를 본다는 행위가 물리적으로 카메라가 담고 있는 하나의 이미지 안에서 구현되기에 이른다. 관객은 박정범의 응시를 카메라라는 눈의 시선이 아닌 카메라 안에 존재하는 몸의 시선으로 확인하게 된다. 그리고 그 몸의 응시의 끝에 있는 것은 '개'이다.
처음에 개를 보고 있는 것은 승철이다. 열악한 환경 속에서 하루하루를 버티며 살아가고 있는 승철에게 개는 유일한 친구이자 희망이 된다. 이때 개는 앞서 언급한 승철의 응시의 대상으로서만 존재한다. 이윽고 영화의 마지막 장면에서 승철이 차에 치여 죽은 개를 이상하리만큼 오랫동안 쳐다볼 때, 그 오랜 시간이 지날 동안 그가 '눈'으로 개를 보고 있는 것이 아니라 가만히 고정되어 깊이 박혀버리는 '몸'으로 개를 보고 있다는 생각이 들게 될 때, 승철이 개를 본다는 것은 박정범이 개를 본다는 것이 된다. 즉, 이 순간 개는 박정범이 '이 영화를 통해서 보고 싶었던 것'이 된다.
박정범은 촬영 당시 길바닥에 죽어있는 개의 모습에서 힘겹게 암투병을 하던 전승철의 모습을 겹쳐보고 오랜 시간 서 있을 수밖에 없었다고 말한다. 즉, 그가 보고 있는 개는 전승철이다. 스스로가 전승철이 되어 승철로서 영화 속을 떠돌던 박정범은 그 순간 박정범으로서 전승철을 보게 된다. 앞서 말한 맥락에 견주어 보았을 때 이 응시에는 죄책감이 있다. 그것은 아주 개인적인 것일 수도 있다. 이 응시 끝에 다시 걸어가다가 영화가 툭 끊어져 버릴 때, 그리고 그 위로 이 영화는 전승철을 위한 것이라는 자막이 떠오를 때, 우리는 이 영화가 전승철을 향한 박정범의 사적인 편지이자 고백, 그리고 그와 함께했던 시간의 회고였음을 깨닫게 된다.
영화 중반, 우연히 나타난 개와 승철이 뛰어다니는 넓은 황무지가 이상하게도 초현실적인 공간처럼 느껴졌던 이유는 왜일까. 그곳이 전승철을 다시 보고자 하는 박정범이 만들어 낸 상상적 공간이었기 때문이 아닐까. 어쩌면 개가 죽는다는 것은 박정범에 의해 상상적으로 재현된 전승철의 환상이 무너져버리고 만다는 것이 아닐까.
전승철이라는 현실의 재현, 리얼리즘이라는 영화적 목표, 그리고 아카이빙이라는 개인적 소망. 이 모든 것은 박정범의 몸에서 일어난다. 박정범의 몸은 이 모든 것들은 견디며 때론 전투적으로, 때론 스스로 무너져 내리면서 세상에 던져진다. 그래서 인상을 펼 수 없을 정도로 가학적이고 고통스러운 이 영화를 보다가도, 무엇보다 영화의 마지막 장면이 주는 절망감에 정신을 차리지 못하다가도, 모든 고행을 견뎌냈던 것은 박정범의 몸이었다는 것을 깨닫고 고개를 숙인다. 그는 이것만이 고 전승철을 위한 영화를 찍을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라 생각했을지도 모른다. <무산일기>의 감동은 이 책임과 안간힘의 태도에서 온다.
[글 김민세 영화전문기자, minsemunji@ccoart.com]
무산일기
The Journals of Musan
감독
박정범
출연
박정범
진용욱
강은진
제작 세컨드윈드 필름
배급 영화사 진진
제작연도 2010
상영시간 127분
등급 15세 관람가
개봉 2011.04.14
평론은 경기씨네 영화관 공모전 영화평론 부문에 수상하며 시작했다. 현재, 한국 독립영화 작가들에 대한 작업을 이어가고 있으며, 그와 관련한 단행본을 준비 중이다. 비평가의 자아와 창작자의 자아 사이를 부단하게 진동하며 영화를 보려 노력한다. 그럴 때마다 누벨바그를 이끌던 작가들의 이름을 하염없이 떠올리곤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