춘천을 떠나는 택시 안. 흥주와 택시 기사의 어색한 대화가 이어지는 사이에 은주가 휴대폰을 잃어버렸다며 택시를 돌린다. 이렇게 하나의 쇼트로 이루어진 영화의 첫 장면은 춘천을 떠나는 것으로 시작해 춘천으로 돌아갈 때 끝난다. 그 뒤로 은주는 흥주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휴대폰을 찾기 위해 춘천의 가장 깊숙한 곳까지 올라간다. 그 이동의 끝에는 청평사가 있다. 청평사에 다다르기까지 은주의 목소리는 꼭 그렇지 않으면 안 될 것처럼 불안과 간절함이 가득하다. 이 목소리가 만드는 심각한 분위기는 은주가 말하는 '놓고 온 것' 또는 '찾아야 하는 것'이 비단 휴대폰만은 아닐 것을 짐작하게 한다.
장우진은 <춘천, 춘천>에서 춘천을 떠나가는 장면으로 영화를 끝냈다. 그리고 그때를 다시 복기하듯 <겨울밤에>에서 춘천을 떠나는 것으로 시작하려 하다가 방향을 돌린다. 다시 춘천으로. 장우진은 왜 자꾸만 춘천으로 돌아오고야 마는 것일까. 장우진은 마치 춘천에 중요한 것을 두고 왔듯이, 다시 돌아올 수밖에 없다는 듯이 춘천에서 두 편의 영화를 찍었다. 그리고 앞으로도 그럴 수밖에 없을 것을 인정하는 것처럼 춘천 밖으로 나가려는 은주와 흥주를 멈춰 세우며 <겨울밤에>의 마지막을 닫았다. 그래서 그의 영화에서 춘천은 며칠 간의 짧은 이야기가 펼쳐질 단순한 배경만으로 설명될 수 없다.
오히려 춘천이라는 공간은 영화 속 인물들을, <겨울밤에>라는 한 편의 영화를, 카메라 뒤에 있는 장우진을 계속해서 끌어당기고 있다.
그 힘은 단순히 영화가 춘천 안에서의 시간만을 담고 있다는 시공간의 형식의 문제를 넘어서서, 그 속의 인물과 서사가 더 이상 어디론가 나아갈 수 없는 막다른 길 앞에서 정체되게끔 만든다. 그렇기에 난감한 표정으로 택시 앞에 서있는 은주와 흥주의 이미지로 끝나는 영화의 마지막 장면은 마치 이들의 시간이 춘천 밖에서 흐를 수 없으리라는 일종의 선언처럼 다가온다. 이 정지한 이미지 앞에서는 은주와 흥주가 함께할 그 어떤 미래도 보이지 않는다. 그러므로 장우진의 영화에서 춘천은 이 세상에서 유일하게 시간이 흐를 수 있는 곳이다. 장우진은 그 시간을 흘러가게 하기 위해서 자꾸만 춘천으로 돌아오고야 만다.
<춘천, 춘천>에서도 그러했듯이, <겨울밤에>의 춘천은 여러 층위의 시간과 세대와 시대가 만나는 곳이다. 그 중심에는 배우 양흥주와 우지현이 있다. 또는 서영화와 이상희가 있다. <춘천, 춘천>에서 그들의 관계를 겹쳐보고 짐작하게 만드는 욕망의 주체가 관객이었고 그것이 그저 가능성의 세계에만 머물러 있었다면, <겨울밤에>에서는 그들의 존재가 적극적으로 상호작용하면서 가능성을 넘어선 환상성의 욕망 안에서 움직인다. 예를 들어 은주와 흥주가 식당에서 밥을 먹으며 그 식당에 왔었던 20년 전의 과거를 이야기하다가 자리를 비울 때, 그 둘을 대체하듯 여자와 남자가 식당으로 들어와 계산을 한다. 이때 지금과 그때라는 시간, 중년과 청년이라는 세대는 아직은 직접적으로 만나지 않는다. 그래서 이 장면에서의 겹쳐지는 시간은 같은 공간 위에서 흐르는 독립적인 것이며 가능성의 세계로만 존재한다.
그리고 이들은 식당 안에 마련된 각자의 숙소로 들어간다. (영화에 등장하는 숙소는 두 개뿐이다. 각 숙소의 문은 한 벽의 좌우를 차지하며 나란히 좌우 대칭을 이루는데, <춘천, 춘천>의 마지막 장면에서 볼 수 있던 남자화장실과 여자화장실의 대칭 구도를 떠오르게 만든다.) 데칼코마니의 구도로 위치한 숙소의 두 문은 이들이 같은 곳에 있음에도 그 존재의 출처가 본질적으로 다를 수 있다는 가능성을 은유한다. 앞선 장면에서 확인할 수 있듯이 젊은 남녀 커플은 은주와 흥주의 20년 전 과거일 수도 있으며, 그 과거 속에 남겨진 환상으로서의 기억, 가정을 밀어붙이자면 은주가 춘천에 놓고 온 것, 나아가 장우진이 춘천에 놓고 온 것일 수도 있다. <춘천, 춘천>의 마지막, 끝내 화장실에서 나오지 않았던 한 사람처럼. 은주와 흥주는 그 사람(들)을 찾기 위해 거슬러 올라간다.
문득 잠에서 깬 흥주가 알 수 없는 어딘가로 거슬러 올라가는 행위는 한탄과 후회로부터 비롯됨에 가깝다. 흥주의 이동은 과거로의 회귀라는 은유로만 남아있고, 그의 물리적인 이동은 불확실한 지도를 그리듯이 방향을 상실한다. 그래서 흥주의 이동 경로를 따라갈 때 춘천이라는 공간은 공간이 아니게 되어버린다. 그곳에서 만나게 된 '란'은 상상적으로 대체된 은주이며 기억이라는 이동의 잘못된 경로를 나타내는 지표이다. 반면 은주가 하는 이동은 명확한 방향을 갖고 있으며 영화 속 인물들이 흩트려 놓은 춘천의 공간성을 다시 바로잡는 역할을 하는 듯이 기능한다. 예를 들어 맥락 없이 여자와 남자가 등장하는 환상적이고 비현실적인 숲속의 공간은 나중에 그곳을 찾는 은주로 인해 논리적인 경로를 그릴 수 있게 된다. 그리고 우연적이고 삐걱거리던 흥주와 란의 만남과는 다르게, 은주와 남녀 커플 간의 만남은 마치 그래야 할 것처럼 서서히 박자를 맞추다가 결국 이루어진다.
은주와 남녀의 만남은 세 번 이루어진다. 첫 번째는 앞서 언급한 식당 장면이다. 이때 둘은 직접적으로 만나거나 상호작용하지 않지만 여러 시간의 층위를 만들어 낼 가능성으로서 조우한다. 그때까지 영화의 주인공은 은주였으며 영화는 이에 따라 은주의 서사를 따라왔다. 그러므로 그 두 시간이 겹쳐질 때, 남녀의 존재는 그저 과거의 반복, 또는 기억의 잔존으로만 읽힌다. 그들은 아직 가능성의 세계에 머물러 있을 뿐이고 서사의 주인은 은주의 세계에 남아있다.
두 번째는 은주가 청평사를 나오는 길목 장면이다. 은주가 휴대폰을 찾지 못하고 돌아갈 때, 은주는 아래로 내려가는 계단 앞에서 잠깐 멈춘다. 카메라가 계단 아래를 비추면 그곳에는 남녀가 기둥에 등을 대고 이야기를 나누고 있다. 그들은 각자의 삶에 대한 이야기를 하고 끝내 여자는 전 연인과 헤어졌다는 말을 한다. 중요한 것은 단순히 과거의 현현이자 환상으로 존재했던 그들이 자신의 삶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고, 무엇보다 각자의 '과거'에 대해 '이야기'하기 시작했다는 점이다. 그 긴 시간 동안의 이야기를 담는 카메라. 이 응시는 잠깐이나마 그들에게 서사의 주인 자리를 넘겨준다. 물론 아직 은주와 남녀는 만나지 못했지만.
세 번째는 숲속의 비현실적인 공간에서 그들이 조우한 뒤의 일련의 장면이다. 얼음이 깨져 물에 빠질 위험에 처한 은주는 남자의 도움으로 위기를 모면하고, 몸을 녹이며 여자와 함께 대화를 한다. 이때 여자가 남자와 만나게 된 것에 대해 은주에게 이야기할 때, 지금까지 서사를 대리하는 위치에 있던 은주는 서사를 듣는 위치에 오게 된다. 은주의 과거라고 여겨졌던 여자가 현재의 은주에게 자신의 과거를 '말할 때'. 현재(은주)에서 과거(여자)를 돌아보던 영화는 현재(여자)에서 미래(은주)를 향해 말하게 된다. 과거라고 여겨졌던 여자는 지금의 존재가 되고, 지금이라고 여겨졌던 은주는 가능성의 존재가 된다. <겨울밤에>의 두 가지 시간(의 흐름). 과거를 돌아보는 지금에서 미래를 응시하는 지금으로. 이 두 가정이 증명하는 것은 그 춘천의 하룻밤 사이에 나지막이 흐르는 기나긴 시간이다.
<겨울밤에>가 기억에 관한 영화임은 확실하다. 은주와 흥주를 비교해 보았을 때, 이 영화는 '우리는 무엇을 기억해야 하는가'에 대한 영화가 된다. 누군가는 회한의 정서에 갇혀 정처 없이 미로를 떠돌 것이고, 누군가는 그때로 돌아가려는 아집을 천천히 내려놓고 나지막이 기억할 것이다. 반면 은주와 남녀를 비교해 보았을 때, 이 영화는 '우리는 어떻게 기억해야 하는가'에 대한 영화가 된다. 기억 속에 있는 과거의 존재도 이야기할 수 있다는 것. 기억한다는 것은 과거를 돌아보는 것이 아닌 과거의 존재와 함께 대화한다는 것. 그리고 기억은 결국 미래를 향한 발화로 나아가야 한다는 것. 이것이 결국 우리가 기억해야만 하는 이유, 장우진이 춘천으로 돌아올 수밖에 없는 이유이다.
나는 앞서 은주와 남녀의 세 번의 만남에 대해 이야기했다. 마지막에 와서 다시 돌이켜보고 싶은 만남은 두 번째 만남이다. 여자와 남자가 함께 대화를 하고 있다가 잠시 정적이 흘렀을 때. 여자가 먼저 입을 뗀다. 그리고 둘은 서로 발을 맞추듯이 함께 시를 읊는다. '나는 한동안 무책임한 자연의 비유를 경계하느라 거리에서 시를 만들었다. 거리의 상상력은 고통이었고 나는 그 고통을 사랑하였다. 그러나 가장 위대한 잠언이 자연 속에 있음을 지금도 나는 믿는다. 그러한 믿음이 언젠가 나를 부를 것이다. 나는 따라갈 준비가 되어있다. 눈이 쏟아질 듯하다. (1988년 11월, 詩作 메모, 기형도)'
그들은 가끔은 버벅거리고 서로 눈치를 보지만 그 시를 단순히 인용하는 것이 아니라 처음부터 끝까지 모두 읽어낸다. 그리고 무엇보다 함께 읽어낸다. 춘천의 한밤 중에 두 사람의 입에서 동시에 울리는 이 말은 왠지 모를 투명한 감동으로 다가온다. 춘천 전체를 헤집는 듯한 불안에 떠는 은주의 목소리와는 다르게 확신에 차있다. 그들이 돌아갈 자연은 어디인가. 그곳은 결국 춘천이 될 것이다. 그들은 믿는다. 이 영화는 그들의 것이 될 수 있을 거라고. 이 말은 그 모든 것을 숨죽여 듣고 있는 은주에게로 돌아간다. 두 사람의 말이 한 사람의 마음 안에서 울린다. 은주와 함께 그 말을 듣고 있던 나는 그녀처럼 계단을 내려갈 것이다. 나는 따라갈 준비가 되어있다. 그것은 기억과 함께 발맞추어 걸어가겠다는 지금의 다짐이다.
[글 김민세, minsemunji@ccoart.com]
겨울밤에
Winter's Night
감독
장우진
출연
서영화
양흥주
이상희
우지현
김선영
김학선
조경숙
박명훈
조은진
허재원
제작 봄내필름
배급 인디스토리|전주국제영화제
제작연도 2018
등급 12세 관람가
개봉 2020.12.10
평론은 경기씨네 영화관 공모전 영화평론 부문에 수상하며 시작했다. 현재, 한국 독립영화 작가들에 대한 작업을 이어가고 있으며, 그와 관련한 단행본을 준비 중이다. 비평가의 자아와 창작자의 자아 사이를 부단하게 진동하며 영화를 보려 노력한다. 그럴 때마다 누벨바그를 이끌던 작가들의 이름을 하염없이 떠올리곤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