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독립영화 편지 장우진#1] '춘천, 춘천' 영화라는 데칼코마니에 관하여
[한국독립영화 편지 장우진#1] '춘천, 춘천' 영화라는 데칼코마니에 관하여
  • 김민세
  • 승인 2023.04.20 11: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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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영화라는 타자를 어떻게 이해하는가"

장우진 감독의 <춘천, 춘천>(2016)은 그의 고향인 춘천의 가을을 배경으로 하며, '춘천 사계절 연작'의 시작을 여는 작품이다. 여기서 '춘천 사계절 연작'이라는 말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영화는 공간을 지목하는 '춘천'이라는 기호와 시간을 지목하는 '사계절'이라는 기호를 가진다. 그렇다면 <춘천, 춘천>은 공간에 대한 영화인가, 시간에 대한 영화인가. 다시 말해, 공간을 위해 시간을 가져온 영화인가, 시간을 위해 공간을 가져온 영화인가.

앞서 장우진 감독은 춘천을 배경으로 하는 하나의 이야기를 구상하면서, 그 시나리오에 맞는 계절을 뒤늦게 떠올렸다고 말한 바 있다. <춘천, 춘천>의 이야기가 시작하는 곳은 계절이라는 연속적·회귀적 시간이 아니다. 영화는 공간 그 자체가 주는 인상에서 시작한다. 계절은 시간적 개념에서 공간을 구성하는 이미지적 요소로 변모한다. 춘천의 '계절' 이전에 '춘천'의 계절. 사계절이라는 연속적 시간에서 가을이라는 특정 계절을 떼어놓은 것을 보았을 때도 영화는 결국 공간을 위해 시간의 흐름을 고정시킨 셈이다.

 

1.

사실 <춘천, 춘천>에서 시간적 논리는 그리 중요하지 않다. 영화에서 '춘천'이 가지는 공간의 힘은 논리적 시간에 균열을 일으키고 비논리를 부여하게 하는 주요한 동력으로 작용한다.

<춘천, 춘천>은 이야기를 이끄는 주인공을 기준으로, 또는 카메라가 비추는 반복의 구조를 중심으로 1부와 2부로 나뉜다. 다만, 한 쇼트로 촬영된 첫 장면만은 그 구조에서 벗어난 유일한 장면이 된다. 첫 씬에서 지현과 중년의 불륜 커플은 춘천으로 가는 기차에 있다. 이 장면이 끝난 뒤, 지현은 1부의 주인공으로 등장하고, 커플은 2부의 주인공으로 등장한다. 이때, 1부와 2부는 동일한 시간적 범위 내에서 진행되고 같은 구체적 장소를 공유하기도 한다.

그러나 첫 장면에서 지현과 커플을 하나의 프레임에서 동시에 응시하던 카메라는, 지현과 커플을 다시는 함께 담지 않음으로써 1부와 2부를 평행선상의 이야기인 것처럼 분열시킨다. 그리고 2부에서 커플 흥주와 세랑의 각자의 과거 이야기를 불러오면서 다시 한번 그들의 시간을 분열시킨다. 우리는 이러한 시간의 분열에서 '1부의 시간(지현의 현재 또는 과거)–2부의 시간(흥주의 현재 또는 과거-세랑의 현재 또는 과거)'이라는 도식을 세워볼 수 있다.

 

ⓒ 봄내필름

각자 흐르는 논리적 시간에서 아이러니가 느껴지는 순간은 커플이 각자의 과거를 이야기할 때이다. 흥주와 세랑이 이야기하는 과거. 그들은 어렸을 적 각자의 첫사랑과 춘천으로 여행 왔던 기억에 대해 이야기한다. 흥주의 과거와 세랑의 과거. 그 둘의 과거는 겹쳐지지 않고 서로에게 영향을 주지 않는 독자적인 시간임이 분명하다. 그 둘은 첫사랑과 만나던 기간도 달랐으며 여행 당시에 연인과 관계의 진전도 달랐기 때문이다. 대화가 진행됨에 따라 그들이 갖고 있는 현재의 위치는 분명해지고, 과거의 위치는 겹쳐질 수 없는 독립적인 것이 된다. 그러므로 흥주의 첫사랑은 세랑이 될 수 없고, 세랑의 첫사랑은 흥주가 될 수 없다. 다시 말해, 흥주의 과거는 세랑이 될 수 없고 세랑의 과거는 흥주가 될 수 없다.

하지만 둘의 과거는 무언가 묘하게 겹쳐 보인다. 마치 흥주와 세랑이 서로의 첫사랑이었던 것처럼. 혹은 그들이 첫사랑과의 여행을 다시 재현하는 것처럼. 논리적으로는 설명되지 않는 구멍들이 많지만, 우리는 결국 그 틈을 메우고 싶은 욕망에 빠질 수밖에 없다. 만약 그렇지 않더라도 흥주와 세랑은 그것이 가능할 수 있다고 믿거나 믿고 싶어 하는 것 같다.

이와 닮은 또 다른 도식, 1부와 2부라는 구조. 앞서 이야기했듯이 1부에서 다루는 지현의 시간과 2부에서 다루는 커플의 시간은 첫 쇼트를 제외하고 겹쳐지지 않는다. 그렇지만, 이미 1부의 지현을 보고 2부를 마주하게 된 우리는, 흥주의 모습에서 지현의 모습 계속해서 겹쳐 올리게 된다. 청년인 지현의 미래가 흥주가 될 수 있다는 가능성, 중년인 흥주의 과거가 지현이었을 수도 있다는 가능성. 논리적 시간에 다시 한번 비논리를 쌓아 올리려는 시도. 이렇기 때문에 흥주와 세랑 각각의 첫사랑 이야기는, 1부와 2부의 축소판이라고 볼 수도 있을 것이다. 흥주와 세랑이라는 데칼코마니가 환유하는 1부와 2부라는 데칼코마니. 이를 증명하듯 흥주와 세랑이 서로의 과거를 말하는 식당 장면은 <춘천, 춘천>에서 가장 기이한 힘을 발한다.

 

2.

논리적 시간에 비논리를 부여하면서까지 흥주와 세랑에게서, 다시 흥주와 지현에게서 동일한 인상을 보이려 하는 <춘천, 춘천>은 이상하게도 관객인 우리에게 '다시' 영화를 보도록 만드는 욕망을 일으킨다. 도대체 이 욕망은 무엇에서 기인한 것일까.

모든 것은 '춘천이라는 공간'에서 다시 시작한다. 이 '시작'은 단순히 관객으로서의 관람의 욕망만을 지목하지 않는다. 장우진이라는 존재의 시작. 장우진의 응시의 시작, 새로운 층위를 가진 가능성의 세계의 시작, 영화라는 세계의 시작. '춘천, 춘천' 하고 두 번 힘주어 말하고 있는, 그래서 스스로 힘을 발하고 있는 이 공간.

 

ⓒ 봄내필름

흥주와 세랑의 데칼코마니. '첫 번째 춘천'(1부)과 '두 번째 춘천'(2부). 이 데칼코마니는 어딘가 불완전해 보이거나 무언가에서 증식되어 나온 것처럼 우리의 가정을 확장시킨다.

우리는 앞서 말한 임의적인 두 가지 데칼코마니 이전에 존재하는 '근본적인 데칼코마니'를 보아야만 한다. 세 번째 데칼코마니. (창작자의 입장에서) 재현의 욕망으로 연결되어 있는 현실과 영화. 또는 (관객의 입장에서) 동일시의 욕망으로 연결되어 있는 영화와 현실. <춘천, 춘천>에서 우리가 자연스레 만드는 비논리는 현실에 영화를 겹쳐놓으려는 창작자의 시도, 또는 영화에서 현실을 겹쳐보려는 관객의 시도와 닮았다.  

이 '근본적인 데칼코마니'는 영화를 만든다는 행위와 영화를 본다는 행위와 함께 이야기될 수밖에 없다. 그리고 이 담론은 장우진의 영화에서 나오는 것이 어울린다. 구체적이지 않은 시나리오로 즉흥적으로 영화를 찍으며, 기다림의 시간 속에서 영화적인 순간을 만드는 그의 연출론은 영화를 만드는 동시에 보는 것처럼 보이기 때문이다.

카메라의 앞과 뒤, 스크린의 안과 밖을 오가는 행위는 <춘천, 춘천>이라는 기이한 영화 이미지 안에서 '춘천, 춘천'이라는 타이틀이 뜨기의 전(1부)과 후(2부)를, 그리고 두 개의 춘천 사이 쉼표를 평면적으로 오가는 게임으로 변모한다. 이 게임은 영화 이미지 속에서 전과 후의 시간을 오가는 평면적인 운동임과 동시에 영화 이미지 속 '그들의 세계'에 입체성을 부여한다. 1부와 2부는 서로를 바라보고 끊임없이 대화하고 있기 때문이다.

1부와 2부는 쉼표라는 스크린을 두고 서로를 바라보는 각각의 영화이다. 이런 가정이 가능한 이유는 결국 1부와 2부가 (영화관의 환유라고 할 수 있는) '영화라는 공간'의 형식 아래에 있기 때문이다.

서로를 바라보는 각각의 영화, 첫 번째 춘천과 두 번째 춘천. 이 구조는 평행하면서도 서로의 시간을 공유하고 그렇게 보도록 하는 욕망을 일으킨다. 그리고 이는 춘천이라는 공간 안에서 일정한 리듬을 갖고 반복적으로 상기된다. 1부와 2부가 공유하는 시간은 '춘천에서의 첫 번째 밤-춘천의 낮-춘천에서의 두 번째 밤-춘천을 떠나는 낮'이라는 도식으로 나타낼 수 있다. 이 도식은 1부와 2부에서 반복되고, 대부분의 장면은 원씬-원컷에 정적인 롱테이크로 촬영되었다.

 

ⓒ 봄내필름

그러나 이러한 사실주의적 촬영의 리듬에 균열을 일으키는 장면이 영화 내에서 두 번 등장하고 반복된다. 춘천에서의 첫 아침을 맞이하자마자 마주할 수 있는 기다란 마라톤 행렬. 이 장면은 1부에서 지현을 중심으로 한 번, 2부에서 커플을 중심으로 한 번 진행된다. 아무런 사운드도 존재하지 않은 채 고속촬영으로 촬영된 이 장면은 형식적인 면에서부터 영화 전반을 이루던 사실주의적 촬영에 반한다. 게다가 영화 안에서 밤이 끝나자마자 등장하는 이 눈부신 낮의 장면은 그 존재만으로 이질적인 감상을 안긴다. 왠지 모르게 오래 지켜보고 있기 힘든 두 장면. 그럼에도 이 장면은 반복을 통해 보여주고 들려주려 한다.

이 이미지에서 볼 수 있는 것. 슬로우 모션으로 인한 지루한 시간의 연속. 이와 별 다를 바 없는 인생. 마라톤 행렬을 두고 숙취에 절어 어디로 갈지 모르고 방황하는 지현이라는 청년. 그리고 꼭 가야 할 곳이 있는 것처럼 불안한 표정으로 마라톤 해렬을 둘러보며 천천히 걸음을 옮기는 흥주와 세랑이라는 중년. 지현의 뒷모습. 흥주와 세랑의 앞모습. 지현의 뒷모습은 앞으로 마주해야 할 고난 앞에 무력해진 청년의 등이며, 흥주와 세랑의 앞모습은 고난이라는 인생의 물결을 한 번 겪고 힘없이 버티고 있는 중년의 얼굴이다.

1부와 2부 각각 처음 마주하는 태양광에 비친 그의 등과 얼굴은 영화적 시간 그 이전부터 형성되어 고착된 그들의 정체성이다. 그 빛이 보고자 하는 것은 그들의 몸의 진실이다. 장우진은 이들의 시간을 그저 오래 지켜볼 수밖에 없게 만든다. 이것이 우리가 이 장면을 보고 느끼는 일차적 감상이라고 할 수 있다.

이어서 이 장면에서 들을 수 있는 것. 사실 이 말과 역설적으로 이 장면에는 사운드가 존재하지 않는다. 그리고 그 뮤트를 대체할 새로운 소리가 영화를 채운다. 스크린 속 영화적 존재 이전에 스크린 앞 우리라는 현실적 존재의 소리. 적막한 가운데 들리는 우리의 어색한 숨소리. (개인적으로 필자는 영화에서 갑자기 사운드가 사라질 때 지금 영화관이라는 공간에서 불특정 다수들과 함께 하나의 스크린을 바라보고 있는 사실을 불현듯 깨닫곤 한다)

사운드의 부재를 통해 보는 주체, 듣는 주체인 '나'를 상기하게 하는 이 장면들은 스크린의 안과 밖을 명확히 구분 짓고 동일시와 관련한 조금의 환상도 허락하지 않는다. 그리고 우리가 어쩔 수 없이 주목할 수밖에 없는 것은 모든 살이 벗겨지고 뼈대만 남은 영화의 구조와 그 구조들 간의 관계이다. 영화라는 예술이 관객을 통해 완성된다면 존재할 수밖에 없는, 스크린을 두고 안과 밖으로 나뉘는 데칼코마니(동일시)는 <춘천, 춘천>의 스크린 안에서 구현되고 이미지 간의 관계를 통해 상기되기에 이른다.

 

ⓒ 봄내필름

3.

앞서 확인한 데칼코마니의 형상보다 더 직관적으로 다가오는 데칼코마니가 있다. 2부에서 흥주와 세랑의 이미지적 구도가 만들어 내는 것이다. 이는 두 번의 식사 장면에서 명확하게 드러난다. 스크린을 좌우로 나누었을 때 흥주는 좌측에서 약간 카메라를 등진 채 있으며, 세랑은 우측에서 얼굴을 보이고 있다. 첫 번째 식사에서는 소양강의 풍경이 보이는 곳에서 막국수를 먹고, 두 번째 식사에서는 좌식의 식당에서 전골과 파전에 막걸리를 먹는다. 첫 번째 식사에서는 흥주가 얼굴에 묻은 음식을 떼어준다며 세랑의 얼굴을 만지고, 두 번째 식사에서는 가방에 붙은 사마귀를 떼어주는 듯하며 세랑의 옆으로 자리를 옮긴다. 간략하게 기술했지만, 사실 이 장면은 글로 보이지 않는 장면이다. 합해서 20분이 넘는 두 번의 정적인 롱테이크를 보고 나서야 이 반복과 미세한 차이, 그리고 그 속에서 오는 묘한 감정을 느낄 수 있다.

첫 번째 식사 장면에서 흥주는 손을 뻗어 세랑의 얼굴을 살짝 건드린다. 여기서 흥주는 두 사람을 가르고 있는 식탁 너머로 손을 내민다. 흥주의 소심한 시도는 둘 사이의 분리된 듯한 구도 사이 공간을 뛰어넘는 것처럼 보이지만, 그 힘은 스크린을 뚫고 나올 정도로 크지는 않다. 반면 두 번째 식사 장면에서 흥주가 자리를 옮길 때, 생각지도 못한 것에 놀라지 않을 수 없다. 흥주가 식탁을 건너 움직일 때, 우리는 드디어 그의 뒷모습 혹은 옆모습이 아니라 얼굴 정면을 볼 수 있게 된다. 물론 흥주의 정면 얼굴은 마라톤 행렬이 등장하는 장면에서도 확인된 바 있고 영화에 자주 등장하지만 약간 10분가량의 뒷모습만 보여주던 롱테이크는 그 마지막 부분에 갑자기 등장한 그의 정면 얼굴에 기이한 힘을 부여한다. 그가 자리를 옮기는 행위는 멀리서 세랑의 얼굴을 만지던 때와는 달리 더 큰 힘을 가진다.

객체에서 주체로, 마치 삶의 주체로 가기 위한 듯한 행위. 슬로우 모션으로 각인된 그의 무력한 얼굴을 지우고 새로운 자기 자신을 정립하려는 얼굴. 서로 다른 시간 속에서 각각의 위치에서 살아왔지만, 이제는 서로를 이해할 수 있을 것 같은 거대한 의미의 운동. 나란히 겹쳐지는 몸과 몸의 방향, 그리고 시선. 그런 그를 비추고 얼마 가지 않아 사라지기를 반복하는 햇빛은 과연 무엇을 위한 것일까. 이들의 판타지적 시간이 계속되길 바라는 희망일까, 그 와중에 현실의 시간은 그저 흐르고 있다는 암시일까.

무엇보다 그 시간은 <춘천, 춘천>이 상기시키는 수많은 시간의 층위들 중에 가장 특별한 시간이다.

시간이 흐르고 찾아온 춘천의 밤. 술에 취한 둘은 상처 난 서로의 몸을 끌어안고 단지 흐느끼기만 한다. 춘천에서의 시간을 판타지적 시공간, 다시 돌아가야 하는 시간을 현실의 시간이라고 한다면 이 장면은 판타지적 시공간 안에서 현실의 시간을 뒤늦게야 떠올리게 된 첫 장면일 것이다. 둘이 돌아가야 하는 현실의 시간에 무엇이 기다리고 있을지는 알 수 없다. 짐작할 수 있는 것은 그 둘이 붙잡고 있는 것이 서로의 육체뿐만이 아니라 춘천이라는 판타지적 공간 또는 영화라는 판타지라는 것이다. 적지 않은 사람들이 <춘천, 춘천>의 2부를 보고 싶지 않은 불륜 남녀의 이틀 밤의 서사라고 이야기한다. 그러나 영화라는 것이 현실에서 특별한 존재론적 시간을 담아야 한다면, 영화의 2부는 그것에 충실한 영화다. 나아가 현실의 시간으로 다시 돌아가야 함을, 그리고 그 운명에서 오는 무력감을 명확하게 역설하고 있다.

 

ⓒ 봄내필름

밤이 지나고 흥주의 얼굴은 또 다른 곳에서 발견된다. 세랑과 함께 소양강을 바라보는 장면과 기차역 화장실의 장면. 그 두 장면에서 두 사람이 만드는 데칼코마니의 구도가 다시 반복된다. 소양강의 장면에서 둘은 이미 거리를 두고 대칭을 만들고 있다. 흥주는 더 이상 세랑에게 가까이 갈 수 없다. 돌아오는 현실의 시간을 무기력하게 기다릴 뿐이다. 결국 어디선가 경적이 들리고 흥주는 몸을 돌려 소리가 나는 곳으로 향한다. 그리고 우리는 흥주의 정면 얼굴과 다시 마주한다. 이 얼굴은 마라톤 행렬 장면의 반복이다.

그리고 화장실 장면에서 남자 화장실 입구와 여자 화장실 입구는 대칭을 만들고 있다. 흥주와 세랑은 각자의 성별에 맞는 화장실에 들어간다. 우리는 언제 어디서 누가 먼저 화장실에서 나올까 기다리며 좌우의 화장실을 평면적으로 시선을 옮기며 지켜본다. 그때 흥주가 먼저 화장실에서 나온다. 세랄은 끝내 나오지 않는다. 흥주는 우리의 시선의 운동이 만드는 평면을 찢고 카메라 쪽으로 다가와 초점에서 벗어나 이내 프레임 아웃한다. 이 얼굴의 운동은 슬로우 모션의 얼굴을 반복하지만, 그때와 달리 우리는 더 이상 그의 얼굴을 똑바로 볼 수 없다.

슬로우 모션으로 지칠 때까지 보이는 흥주의 정면에서조차 우리는 그 이면을 들여다볼 수 없다. 식당에서 그가 일으키는 전복적인 운동은 우리에게 이해를 바라는 하나의 손짓이었을까. 그러나 결국 보게 되는 것은 답을 알 수 없는 정면 얼굴의 반복이다. <춘천, 춘천>이 영화적 구조, 이야기의 병치, 그리고 이미지적 구도를 통해 말하고자 하는 것은 서로를 바라보는 각각의 영화는 그 너머를 이해할 수 없고 데칼코마니의 형상은 무너지고 만다는 것이다. 흥주는 과연 세랑을 안다고 할 수 있을까. 흥주를 지현이라고, 지현을 흥주라고 할 수 있을까.

그리고 우리는 춘천이라는 공간을, <춘천, 춘천>이라는 영화를 보았다고 할 수 있을까. 지현이 마주한 소양강의 하얀 안개는 엔딩 크레딧이 끝나고 나서도 아무런 답을 주지 않는 백색의 스크린과 닮았다.

[글 김민세 영화전문기자, minsemunji@ccoart.com]

 

ⓒ 봄내필름

춘천, 춘천
Autumn, Autumn

감독
장우진

 

출연
우지현
양흥주
이세랑
이상희
모성민
김민중

 

제작 봄내필름
배급 무브먼트
제작연도 2016
상영시간 77분
등급 15세 관람가
개봉 2018.09.26

김민세
김민세
 고등학생 시절, 장건재, 박정범 등의 한국영화를 보며 영화를 시작했다. 한양대학교 연극영화학과 영화부에 재학하며 한 편의 단편 영화를 연출했고, 종종 학생영화에 참여하곤 한다.
 평론은 경기씨네 영화관 공모전 영화평론 부문에 수상하며 시작했다. 현재, 한국 독립영화 작가들에 대한 작업을 이어가고 있으며, 그와 관련한 단행본을 준비 중이다. 비평가의 자아와 창작자의 자아 사이를 부단하게 진동하며 영화를 보려 노력한다. 그럴 때마다 누벨바그를 이끌던 작가들의 이름을 하염없이 떠올리곤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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