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독립영화 편지 김대환#1] '철원기행' 결국 산다는 대답
[한국독립영화 편지 김대환#1] '철원기행' 결국 산다는 대답
  • 김민세
  • 승인 2023.02.17 11: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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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수한 이미지를 향해 가는 작은 몸짓들"

<철원기행>은 다짜고짜 들어간다.

어딘가 불편해 보이는 한복과 정장을 입고 서 있는 네 사람의 어색한 공기 속으로. 교사 퇴임식, 한해의 겨울, 인생의 노년이라는 끝자락으로. 그 끝에서 영화가 시작될 수 있다는 듯이 그곳으로 들어간다. 한 가족들의 답답한 대화를 멀찍이서 나지막하게 지켜보고 있던 카메라도, 어느 순간 다짜고짜 아버지의 얼굴로 들어간다.

그리고 그 순간을 놓치지 않고 기어이 그의 입에서 나오고야 마는 '한 마디'가 철원에서 발이 묶인 가족들의 며칠을 뒤흔들어 놓는다. '그 말'은 서사의 중심이 되고, 그를 둘러싼 인물들의 정서의 핵심이 된다.

그러나 아버지의 말은 다시 반복되지 않는다. 또는 상대방에 의해 다시 확인되지 않는다. 어떤 징조도 없이 뜬금없이 튀어나온 '이혼'이라는 단어는 아버지의 입에서 한번 발화될 뿐이고 어머니는 이에 응수하지 않는다. 가족에게 향하는 어머니의 신경질이나 투정은 아버지의 말에 대한 대답을 뒤로 유보하려는 것뿐이지 그 물음에 대한 확실한 대답이 될 수 없다.

그렇다면 본가로 향하는 버스 앞에서 홀로 철원에 남기로 한 아버지를 잠시나마 쳐다보는 어머니의 얼굴은 이에 대한 대답이 될 수 있을까. 아무 말 없이 등을 돌려 버스 위에 오르는 어머니의 행동은 어쩔 수 없는 끄덕임일까, 아니면 결국 계속되는 대답의 유보일까.

엔딩이 만드는 계속되는 질문에서 볼 수 있듯이 <철원기행>은 단정적인 물음(이혼 선언)을 했음에도 확실히 대답하지 않는다. 어쩌면 마지막에 와서 '이혼'이라는 단어가 가진 물음의 의미는 증발해버렸다고 말할 수는 없을까. 그 단어는 한 가족의 춘천에서의 며칠간 새로운 물음의 형태로 그들에게 스며들어 버린 것이 아닐까.

 

"이혼하기로 했다" 이 말은 합의를 전제로 한 완료형일까, 또는 순간의 결심일까. 이 말은 거의 영화 내내 입을 다물고 있는, 그 어떠한 삶의 목표나 의지도 없어 보이는 아버지의 입으로부터 나오는 처음이자 마지막 욕망의 말이다. 이 말은 어머니, 큰아들, 작은아들, 며느리가 각자의 욕망을 갖고 서로에게 하는 말과는 다르다. 아버지의 말은 스스로의 안에서도 수없이 울렸을 것이며, 그것이 결국 발화된다는 것은 선언이나 설득이라기보다는 그 답답한 가족의 공기를 뚫고 나오는 외마디 비명에 가깝기 때문이다.

영화는 아버지의 입에서 왜 그 말이 나올 수밖에 없었는지에 대해 직접적으로 설명하지 않는다. 그저 영화는 아무 말도 하지 않는 아버지처럼 '그 말' 전후에 일어나는 가족의 몸짓을 조용히 지켜본다.

일차적으로 볼 수 있는 것은 관계의 어긋남을 형상화하는 '미끄러짐의 몸짓들'이다. 작은아들이 눈 때문에 차가 밀려 퇴임식이 끝난 한참 뒤 식사 자리에 뒤늦게 합석할 때, 어머니가 눈 내린 땅 위에서 한복 치마를 끌고 다니다가 미끄러져 넘어질 때, 며느리가 끓어 넘쳐흐르는 주전자를 잡다가 손을 데일 때, 큰아들이 갑자기 망가진 보일러를 고치려고 어설프게 애를 쓸 때, 이는 '아버지의 말에 대한 삐걱거리는 반응들'이며, 그 불안한 관계의 압력을 견디고 있는 '어설픈 움직임'이다. 그리고 그것은 그들에게는 낯선 철원이라는 타지, 아버지의 집에 대한 반응이기도 하다.

 

서로의 목표와 욕망이 엇갈려 주춤하는 다른 사람들의 몸짓과 다르게 영화가 응시하고 있는 숨겨진 또 다른 움직임이 있다. 철원이라는 공간과 집이라는 장소, 그리고 그 안에서 자연스레 움직이는 아버지의 몸짓이 그것이다. 어찌 보면 아버지의 행동은 가끔 가족들에게 이해받지 못하거나 이혼이라는 결심 안에 갇힌 고집처럼 보인다. 그래서 그 행동들은 자연스럽기보다는 때론 지나치게 태평해 보이거나 돌발적으로 느껴진다.

그러나 그것은 사실 그를 둘러싼 가족들과 우리는 그 말이 나오기까지의 수없이 홀로 반복했을 아버지의 일상을 봐오지 못했기 때문에 그러하다. 그를 도우려는 아들과 며느리의 호의를 고집스럽게 만류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그는 전부터 모든 갖가지 일들을 혼자 해결했어야 했던 때가 일상이었을 것이다. 쏘아붙이는 어머니임에도 불구하고 무뚝뚝하게 대화를 피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그는 대화 상대 없이 홀로 지내는 일이 일상이었을 것이다.

 

그래서 영화는 아무 말도 하지 않는 아버지처럼, 가족 없이 수없이 많은 시간을 보내왔을 그 집을, 그리고 그 안에서 수없이 반복해왔을 아버지의 노동을 조용히 지켜본다. 안절부절못해 하는 가족 사이에서, 빨래를 개고, 집 앞의 눈을 치우고, 감자를 찌고, 마늘을 꺼내 건네주는 그 자연스러운 몸짓들. 그 몸짓과 몸의 형상이 <철원기행>의 철원, 집, 그리고 설원의 풍경에 가장 알맞아 보인다. 이러한 어렴풋한 인상 앞에서 슬퍼지는 것은 그 결심이 자의일지라도 아버지는 결국 삶의 나머지를 홀로 그렇게 보내게 될 것이라고 그 고착화된 자연스러운 몸짓들이 증명해주는 것처럼 보이기 때문이다.

가족들 간의 부조화의 몸짓들은 한 곳에 뒤엉킨다. 한 집 아래에서 부딪히거나 서로 흩어지길 반복했던 가족들의 몸과 각자의 서사는 철원을 떠나기 전날의 밤하늘 아래에서 하나가 된다. 두 아들은 술에 취해 비틀거리는 아버지의 몸을 양쪽으로 부축하고, 이를 발견한 어머니와 며느리는 팔짱을 낀 채로 천천히 그들의 뒤를 따라간다. 이 몸짓들에는 어떠한 목적이나 욕망이 부재한다. 그저 걸어야 하니 걸을 뿐이다. 넘어지지 않기 위해 서로를 붙잡을 뿐이다. 이것을 통해 희망이나 화합의 여지로도 나아갈 수 있는 가능성 또한 만들 수 있겠지만,

   

영화는 그런 식으로 해체 앞의 가족을 봉합하려 하지 않는다. 이 걸음의 이미지가 보여주려는 것은 그 어떠한 조건과 수식어 없이, 그저 '산다'는 것이다.

<철원기행>은 가족의 해체라는 물음 앞에 희망이나 파국을 제시하지 않고 그저 산다는 이미지로 대답한다. 그러므로 어머니가 등을 돌려 버스에 타는 것, 아버지가 새로운 집을 향해 차를 모는 것은 질문 뒤에 따라올 강박적인 선택이 아니라 '산다'는 관성의 운동이자 걸음의 연장선이다. <철원기행>은 가족 드라마에서 익히 봐온 갈등으로 나아가다가 결국 그 순수한 이미지를 경험하게 하는 순간을 만들고야 만다. 어쩌면 이 삶에 대해 조심스럽게나마 대답할 수 있는 건 ‘모두가 그저 살아가야 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글 김민세, minsemunji@ccoart.com]

 

철원기행
End of Winter
감독
김대환

 

출연
문창길
이영란
김민혁
이상희
허재원
강승민
장준호

 

제작 타이거시네마, DGC
배급 디씨드
제작연도 2014
상영시간 99분
등급 12세 관람가
개봉 2016.04.21

김민세
김민세
 고등학생 시절, 장건재, 박정범 등의 한국영화를 보며 영화를 시작했다. 한양대학교 연극영화학과 영화부에 재학하며 한 편의 단편 영화를 연출했고, 종종 학생영화에 참여하곤 한다.
 평론은 경기씨네 영화관 공모전 영화평론 부문에 수상하며 시작했다. 현재, 한국 독립영화 작가들에 대한 작업을 이어가고 있으며, 그와 관련한 단행본을 준비 중이다. 비평가의 자아와 창작자의 자아 사이를 부단하게 진동하며 영화를 보려 노력한다. 그럴 때마다 누벨바그를 이끌던 작가들의 이름을 하염없이 떠올리곤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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