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ritique] 수면의 예술 혹은 애타게 소리를 찾아서
[Critique] 수면의 예술 혹은 애타게 소리를 찾아서
  • 이상용
  • 승인 2023.02.01 11:00
  • 댓글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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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모리아>의 세계

현대 영화(모던 시네마)가 '수면을 동반한다'는 것은 새삼스러운 일이 아니다.

안드레이 타르코프스키의 유작 <희생>(1986)은 타르코프스키의 다른 영화들처럼 뒤늦게 국내에 개봉할 수 있었는데―당시로서는 당연한 일이었다. 그는 구소련 감독이었으니까―1995년에 첫 개봉을 하면서 십만이 넘는 관객을 동원하였다. 관객들이 느릿느릿한 영화의 속도와 롱테이크로 쌓인 화면을 버티다 후반부에 밀려오는 기적적인 느낌을 체험했는지는 모르겠지만, 예나 지금이나 꽤 놀라운 관객 숫자였다.

영화 초반 자전거를 탄 우체부가 왼쪽으로 갔다가 오른쪽으로 움직일 때, 카메라는  느릿느릿하게 따라간다(panning). 화면의 움직임은 역동적인 것이 아니라 세밀한 세계의 관찰을 요구하고 자연스럽게 수면을 동반한다. 이 영화의 속도는 친숙한 속도를 위반한다. 하지만 속도 자체가 영화를 더 잘 이해하도록 돕는 것도, 덜 이해하도록 돕는 것도 아니다. 중요한 것은 '다른 감각'과 '경험의 제공'이다.

동시대 관객에게 익숙한 속도는 더 많은 정보를 섭취하는 쪽으로 발달해 왔다. 여러 OTT 플랫폼의 영화와 드라마를 최대한 빠른 배속으로 소비하고, 여러 방식의 채널(유튜브, 인스타 등)을 동시에 열어둔다. 집중이 아니라 산만함이야말로 관람의 핵심이다. 그뿐만이 아니라 본래 작품의 형태를 소비하는 것은 고사하고, 유튜브를 통해 해설본이나 축약본을 보고 난 후 그 영화를 보았다고 말한다. 이는 정보와 영화 혹은 드라마를 혼동하거나 이러한 환경에 익숙해진 탓이다.

이러한 문화에서 관객의 눈을 사로잡는 것은 충격(자극성)뿐이다. 이야기의 자극성, 시각의 자극성, 사운드의 자극성, 소재의 자극성과 함께 민감한 유행, 인스타 사진에 올리기 좋은 콘텐츠와 같은 과시의 대상이 호응을 얻는다(고 여겨진다).

그러나 이렇게 형성되어 온 적극적 소비는 관람의 능동성과는 다르다. <탑건: 매버릭>(2022)을 보기 위해 돌비사운드가 제대로 갖춰진 극장을 찾아가야 한다는 것은, 개인의 취향과 구별 짓기의 욕망이 뒤엉킨 적극성의 형태다. 오히려 능동성을 경험하기 위해서는 관람의 쾌락을 위한 만반의 준비가 아니라 극장에서의 '버티는 고통과 작은 소음에도 예민해지는 촉수 그리고 쉼 없이 밀려오는 수면욕'과 싸워야 하는 인내심을 필요로 한다.

 

ⓒ 영화 <희생>(1986)
ⓒ 영화 <노스탤지아>(1983)

1995년에 개봉한 <희생>은 '예술영화'(Art Film)라는 이름으로 등장한 당대 유행의 산물이기도 하다. 하지만 유행과 상관없이 예나 지금이나 이 영화는 쉽게 다가오기를 거부한다.

영화가 보여주는 거부의 몸짓이야말로 <희생> 혹은 모던 시네마의 주요한 태도다.

<희생>의 표면적인 이야기는 거창하다. 인류를 구하기 위해 주인공 알렉산더는 희생을 치르기로 결심한다. 그런데 인류의 구원이라는 거대한 묵시록을 따라가는 데 있어, 영화가 보여주는 것은 재난 영화의 스펙터클이나 웅장한 돌비 사운드가 아니다. 어쩌면 사소하지만 돈으로는 쉽게 살 수 없는 인내심과 이를 향한 믿음을 요구한다. 

전작 <노스탤지아>(1983)의 클라이막스는 서로 다른 두 장소에서 두 개의 불꽃이 올라와야 세상이 구원된다는 도메니코(그는 마을에서 미치광이 취급을 당한다)의 말에 따라 로마에서 분신자살을 하는 도메니코와 시골 마을 온천에서 초를 들고 왕복하는 주인공 안드레이 고르차코프의 교차편집 장면이다. 분신하는 도메니코의 모습은 타르코프스키 영화가 취할 수 있는 최대한의 자극일 수 있다.

그러나 <노스텔지아>가 분신보다 힘을 주어 보여주는 것은 러시아에서 온 이방인 안드레이가 촛불을 지킨 채 조심스럽게 온천을 왕복하는 모습이다. 이쪽에 있던 촛불을 다른 쪽으로 옮기는 행위가 세상을 구원할 수 있다는 믿음은 꽤 신비주의적이지만, 영화 내내 쌓아온 세밀한 보여주기와 단순하지만 절실한 소망의 실현은 신비주의를 눈앞에서 실현시키는 것 같은 경험을 선사한다. 이 또한 영화의 환상성이겠지만 영화는 거기에 다가가려고 애쓴다.

대중영화이든 예술영화이든 동시대 영화에서 이러한 태도를 취하는 경우는 드물다. 아주 예외적인 감독들이나 실험영화라고 불리는 영화의 일부를 제외하고 이러한 경험 전달은 정보 전달 중심의 문화에서 사라진 지 오래다. 최근에 기억나는 사례는 페드로 코스타의 <비탈리나 바렐라>(2019), 로이 안드레손의 <끝없음에 관하여>(2019) 같은 작품들이다. 회화적이기도 한 이 두 영화는 영화제를 통해 버티는 '작가영화'(auteur film)의 한 지평일 것이다. <비탈리나 바렐라>가 로카르노에서 황금표범상과 여우주연상을, <끝없음에 관하여>가 베니스에서 은사자상(감독상)을 수상한 것도 이러한 맥락과 멀지는 않다. 

아무려나 타르코프스키는 <노스텔지아>에서 멈추지 않았다. 그는 인내심을 갖고 다음 작업을 진행하였으며, 유작 <희생>은 <노스탤지어>의 촛불을 옮기는 장면을 영화 전체로 확장한 영화라고 할 수 있다. 이 영화는 장면마다 느리게 움직이며 미세한 바람에도 흔들리는 인물의 마음을 화면에 새겨 넣는다. 그래서 <희생>의 움직임은 영화 전체가 온천에서 촛불을 옮기는 장면처럼 보인다.

 

ⓒ 찬란

아핏차퐁 위라세타쿤의 <메모리아>(2021)는 한밤중에 난 소리로부터 시작되지만, 소리를 찾는 과정은 인내심을 요구한다. 이 영화는 소리의 원인이나 해결책을 보여주지 않는다. 단지, 소리를 따라 영화적 경험을 고양시키고, 때로는 영화를 견디는 데 실패하도록 짜여져 있다.

영화 관람에 동반되는 수면은 영화 속의 장면으로도 구현되는 <메모리아>가 고려하고 있는 관람의 방식이다. 영화의 첫 장면은 수면에서 깨어난 주인공을 보여주는 장면이고, 주인공 제시카가 영화 후반에 만나는 가장 중요한 인물인 두 번째 에르난에게 잠을 자보라고 청하기도 한다. 수면은 이 영화의 기본 세팅이다. 이것은 관객에게 지독한 인내심을 요구할 뿐만 아니라 그 어느 시네마보다 능동적으로 다가오기를 희망한다. 영화가 하나의 체험이라면 그것은 돌비나 3D와 같은 기술적인 혁신에 있는 것이 아니라 영화의 경험이라는 집요한 태도에서 비롯되는 것임을 강조한다. 우리가 경험하는 시네마는 쾌락적이고 자극적인 사운드만 있는 것이 아니라 끝을 알 수 없고, 목적도 방향도 없는 소리도 한 자리를 차지하고 있다. 

이러한 체험을 글로 복원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하지만 몇 가지 가능성과 인상을 기록하는 것은 의미가 있다. 그것은 영화 속에서 묘사된 것처럼 저 멀리 기원으로부터 도래했지만, 어느새 희미해지거나 사라진 기억의 근원, 6천 년 전부터 살아남은 유골의 구멍을 통한 편린들을 전달하려고 애쓰기 때문이다. 이를 무엇이라고 부르건 간에 관객들이 그곳에 다가가는 순간은 분명 시네마의 경험과 얽혀 있으며, 그것은 극장을 나온 뒤 남는 잔상 혹은 기억의 문제다. 그래서 이 영화의 제목은 소리들이거나 사운드가 아니라 라틴어에서 가져온 'memoria'(메모리아, 기억)다. 

 

소리의 불일치, 이야기의 불일치

한밤중에 제시카는 어떤 소리에 놀라 깨어난다. 일상에서 어떤 소리가 들리는 것은 드문 경험은 아니다. 그런데 영화라는 '이야기'에서 한밤중의 소리가 문제시되려면, 인물(주인공)에게 어떤 작용이 일어나야 한다. 소리로 인해 고통이나 두려움, 불편함과 위기를 초래해야만 한다.  

그런데 <메모리아>는 한밤중에 소리가 났고, 그 때문에 깨어났지만 소리가 어떤 사건을 일으키지도, 불편한 상황을 지속해서 발생시키지도 않는다. 한밤중에 깨어난 장면 다음으로 이어지는 것은 공터 주차장이다. 갑자기 주차된 차들의 헤드라이트가 켜지고 경적이 울린다. 자동차의 소리와 불빛은 공터를 가득 메운다. 그러나 이를 확인하기 위해 나타나는 사람도 없다. 

거리를 보여주는 장면도 비슷하다. 한 남자가 걸어가고 있는데 커다란 소리가 난다. 남자가 몸을 움츠리고 도망치기 시작한다. 그 모습 때문에 혹시 총소리가 아닌가라고 생각할 수 있다. 그런데  이어지는 장면은 연기를 내며 이동하는 버스의 뒷모습이다. 그렇다면 버스의 배기구에서 난 소리인가? 횡단보도를 건너다 멈췄던 제시카와 사람들이 주변을 둘러보다가 길을 가기 시작한다.

 

ⓒ 찬란

<메모리아>에서 소리가 나는 여러 장면이 제시되지만, 원인을 제시하지 않을 뿐만 아니라 소리로 인한 사건과 연결되지 않는다. "소리가 났다"는 하나의 사실만이 던져질 뿐이다. 여러 소리 가운데 자신이 들었던 한밤중의 소리를 느슨하게나마 추적하는 인물은 틸다 스윈턴이 연기하는 제시카다. 그녀는 자신의 증상에 대해 병원을 찾기도 하고, 주변 사람들에게 공사 중이었는지를 물어보기도 하며, 소리를 따라가 보기도 한다. 제시카는 탐정 역할을 수행한다. 하지만 그녀는 태만한 탐정일 뿐만 아니라 만나는 사람들을 통해 분명하게 원인에 다가가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혼란을 가중시킨다. 

제시카가 만나는 여러 인물 중 가장 눈에 띄는 것은 두 명의 에르난이다. 두 사람은 성도 이름도 같다. 하지만 두 인물은 나이도 다르고 생김새도 다르다. 두 에르난의 유일한 공통점은 소리에 대한 특별한 지위를 갖는다는 점이다. 첫 번째 에르난은 음향기사다. 그는 직업적으로 소리를 다룬다. 두 번째로 만난 에르난은(첫 번째 에르난이 사라진 후) 소리를 다루는 기술자가 아니라 무당과 같이 과거의 기억과 소리를 저장하고 있는 인물로 등장한다. 첫 번째 에르난 혹은 젊은 에르난이 자신의 하드디스크에 소리를 저장하고 있는 인물이라면, 두 번째 에르난 혹은 나이 든 에르난은 자신의 몸속에(혹은 기억 속에) 소리를 저장하고 있는 인물이다. 

두 명의 에르난과의 일화는 모두가 흥미롭지만 가중되는 '혼란'과 관련해서 눈에 띄는 장면은 다음과 같다. 제시카가 음향기사 에르난을 또다시 만나기 위해 스튜디오로 찾아갔을 때, 그곳에서 일하는 사람들로부터 그런 사람은 없다는 말을 듣는다. 근무하는 음향기사의 이름조차 다르다. 이쯤 되면 첫 만남의 대화를 통해 등장한 에르난을 소개한 지인에게 확인해 봐야 하는 일이겠지만 제시카는 이 혼란을 무심히 받아들인다. 그는 스튜디오를 둘러보며 에르난 혹은 무언가를 찾는다. 그러던 중 밴드의 연주 장면을 보게 되는데, 어쩌면 이 밴드는 에르난이 자신의 밴드라고 소개했던 '망상합주의 심연'일지도 모른다. 물론 아닐 수도 있다. 그저 밴드의 연주를 감상하는 제시카의 모습을 보여줄 따름이다.

다른 사람과의 만남에서도 비슷한 혼란이 등장한다. 제시카가 퇴원한 동생 부부와 식사를 할 때 '안드레스'라는 사람의 이름이 거론된다. 제시카는 그가 죽었다고 말한다. 하지만, 동생 부부는 우리가 말하는 치과 의사 안드레스는 살아있다고 말한다. 도대체 누구의 말이 맞는 것일까.

 

ⓒ 찬란

<메모리아>는 여러 불일치한 상황을 보여주지만, 그것을 파고들지 않는다. 그렇다고 해서 제시카가 미쳐있거나 귀신에 사로잡힌 인물처럼 묘사되는 것도 아니다. 중요한 것은 제시카를 둘러싼 세계가 무척이나 낯설고 혼란으로 가득하다는 것을 집요하게 보여준다는 데 있다.

그것은 <메모리아>의 촬영장소로 '콜롬비아'를 선택한 이유와 관련을 맺는다. 아핏차퐁 감독은 자신과 틸다 스윈튼이 모두 알지 못하는 나라를 일부러 선택했다고 밝혔는데, 낯섦으로 인한 단절과 혼란은 고스란히 영화에 투영되어 제시카 주변에서 끊임없이 일어난다. 언어에 있어서도 마찬가지다. 스페인어를 사용해야 하는 상황은 제시카를 종종 당혹스럽게 만든다.

<메모리아>는 혼란한 세계에 던져진 인물이 예민하게 주변과 소리에 민감하게 반응하는 영화이며, 그것을 따라서 어떤 기원이나 원초적인 흔적에 다가가려는 영화다.

하지만 원초적 흔적을 복원하거나 구현한다는 것은 애초에 불가능하다. 그럴 수 있다면 그것은 원초적인 것도 흔적도 아닐 것이다. 끊임없는 추적과 반복 속에서 일어나는 감각적 경험만이 그 흔적에 다가가도록 이끌 따름이다. 그리하여 혼란은 영화를 보고 느끼는 관객들에게도 고스란히 전이되며, 혼란을 통한 감정의 고립과 함께 천천히 밀려오는 수면의 과학을 경험한다. 

그럼에도 <메모리아>를 관람하며 완전히 잠들 수가 없었다면, 그것은 중간중간 등장하는 소리의 충격 때문만이 아니라 불안을 야기하기 때문이다. 제시카를 둘러싼 불일치는 이 영화를 어디에 두고 보아야 할지 관객의 입장에서는 불안하다. 수면 속의 불안 혹은 수면과 함께 튀어나오는 혼란은 영화적 긴장감을 형성하면서 편히 잠들지 못하게 만든다. 마치 한밤중에 깨어난 제시카처럼 어둠을 응시하는 것이다.

그리고 이처럼 이율배반적인, 잠을 동반하지만 쉽게 잠들 수 없는 환경이야말로 지대한 인내심을 필요로 한다. 차라리 잠이 쉽게 승리하는 영화라면 좋으련만 실마리들은 끊임없이 귀와 눈을 어지럽힌다.

 

두 명의 에르난

'불일치를 불일치로 내버려 두는 것', '혼돈을 혼돈 그 자체로 관망하는 것'은 영화를 수용하는 하나의 방법일 수 있다. 하지만 호모 사피엔스의 특징 중 하나는 이러한 불일치를 봉합하려는 이성의 힘을 발휘해 왔다는 점이다. 그러한 작용이 가장 활발히 일어난 것은 모더니즘 예술이었다. 철학자 슬라보예 지젝은 『항상 라캉에 대해 알고 싶었지만 감히 히치콕에게 물어보지 못한 것』의 서론에서 모더니즘의 특징을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모더니즘 예술작품은 정의상 '이해 불가능'하다. 그것은 하나의 충격으로, 즉 틀에 박힌 일상에 대한 우리의 자기만족을 침식하고 만연한 이데올로기의 상징계에 통합되기를 거부하는 트라우마(trauma)의 침입으로 기능한다. 따라서 해석은 이러한 최초의 만남 이후에 등장하며 우리가 이러한 충격을 통합시킬 수 있게 해 준다."(새물결, 11쪽)

'모더니즘'은 한 마디로 충격을 던지는 예술이다. 그리고 이 충격을 즉각적으로 이해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덕분에 필요한 것이 '해석', 즉 비평이다. 모더니즘의 충격은 상징계의 언어로 통합되기를 거부하지만, 비평은 트라우마를 상세히 파헤치거나 트라우마의 균열, 틈, 상처 속에 담긴 언어를 끄집어냄으로써 "이러한 충격을 통합시킬 수 있게" 도와준다.

 

ⓒ 찬란

한밤중의 소리로 시작하는 <메모리아>의 첫 장면은 모더니즘 예술의 충격 자체다.  "쿵", "펑", "쿠앙앙" 등 소리는 하나의 단어로 환원될 수 없다. 그 소리가 무엇인지 정의할 수 없다는 환원불가능성은 이해불가능성으로 연결된다. 이러한 간극을 해결하는 것이 비평의 과제라면 <메모리아>는 비평의 관점을 이미 영화 안에서 수행하고 있다. 이것을 모더니즘 예술의 자기반영성(self-reflection)이라고도 부르는데, 소리를 둘러싼 해설가의 역할을 하는 인물이 바로 두 명의 '에르난'이다. 

제시카는 지인의 소개로(지인은 누구인지, 제시카가 어째서 소리를 추적하는지는 결코 등장하지 않는다.) 음향기사 에르난을 만났을 때, 여러 소리를 구현해 보이는 것은 한밤중의 일어난 소리를 구현하는 동시에 그것의 불가능성을 보여주는 이중적인 장면이다. 처음에는 에르난이 지인을 통해 전해 듣고 만들어 두었던 소리를 들려준 후 조금씩 변형해 가며 유사한 소리를 찾다가 방법을 바꾸어 본다. 컴퓨터에 저장된 영화의 효과음 중에서 제시카가 골라낸 소리를 들어 본 후 이를 변형해 간다. 제시카가 저장 목록에서 골라낸 것은 "나무 방망이에 맞아 이불 위로 쓰러질 때"라는 소리다. 이 소리를 바탕으로 저음을 더 강조하면서 한밤중에 들렸던 소리에 다가간다. 이 과정은 애초에 들었던 소리, 그 소리를 기억할 수 있는가의 문제, 그 소리를 고스란히 재현하거나 찾을 수 있는가에 대한 여러 문제와 의문들을 함축한다. 

그런데 소리에 다가가는 장면은 여러 차원의 의미를 형성한다. 음향을 저장해 둔 데이터베이스에서 소리를 찾는 과정은, 결국 소리를 만드는 과정으로 이어진다. 즉, 한밤중의 소리를 구현해 가는 과정은 소리를 만드는 것일 수밖에 없다는 것, 그것이 바로 영화의 본질임을 은연중에 강조한다. 제시카가 들은 한밤중에 들었던 소리를 누가 알 수 있을까? 아니, 그 소리를 극장에서 들었다고 한들 얼마나 정확히 기억하고 있을까? 또한 영화에 쓰인 소리는 실제로 어디서 만들어진 것이고, 어떻게 영화에 입혀진 것일까?

이 소리를 자연에서 끌어오든, 인공적으로 만들어 내든 감독은 여러 방식을 취했을 것이다. 이 소리는 영화라는 장치에 입혀진다. 그렇다면 제시카가 들었던 소리는 결과적으로 영화에 저장되었거나 음향으로 입혀진 소리에 불과하다. 데이터베이스화된 그 소리의 기원은 얼마나 원천과 유사한 것일까. 

결국, 모든 소리는 실종된다. 소리는 데이터로 저장된 것에 불과하며, 한 번이든 두 번이든 기계적 과정을 거친 소리는 애초의 소리와 다를 수 있다. 어쩌면 이 소리는 애초부터 기원이 없는, 음향기사 에르난의 작업처럼 인공적으로 만들어진 소리일지도 모른다. 

그런데 이야기를 덧붙이면, 영화를 보다 보면 어떤 근원적인 소리가 있는 것처럼 생각하게 된다. 그것은 영화와 관객 사이의 암묵적인 약속이다. 영화에 등장하는 많은 소리들은 결국 인공적으로 저장된 소리의 일부일 텐데, 어째서 눈앞에서 대형 가스통이 폭발하고, 거대한 화염의 소리가 난다고 믿는 것일까. 그것이야말로 '영화의 환영성'이 아닌가.

결국, 첫 번째 에르난과 함께 소리를 찾아가는 과정은 <메모리아>가 영화에 대한 영화임을 보여줄 뿐만 아니라 이 소리의 근원이 한여름 밤의 꿈처럼 환상성의 일종일 수 있음을 시사한다. 

 

ⓒ 찬란

그래서 <메모리아>가 '영화에 대한 영화'라는 것을 의식하고 본다면 전체가 거대한 환상일 수 있다는 생각으로 나아간다. 영화의 사운드는 결국에는 "다 기계 소리 아니야? 그래서, 아핏차퐁이 친절하게 보여주잖아. 저장된 소리를 감독이 원하는 대로 조금씩 변형해 가면서 맞추면 되는 거라고?"라는 식으로 이해하게 된다. 현실에서 그 누구도 용이 불길을 내뿜는 소리를 들어 본 적은 없다. 하지만 영화의 관객들은 용이 뿜는 화염의 소리를 수도 없이 들어왔을 것이다.

   

'기계와 자연의 소리의 구별점은 어디에 있는가?' 소리의 문제를 거론하면서, <메모리아>는 영화에 담긴 소리의 식별 불가능성을, 소리의 경계들을 넘나든다.

음향기사 에르난과의 두 번째 만남에서 소리는 더욱 흥미로워진다. 에르난은 드디어 소리를 완성했다면 제시카에게 들려준다. 제시카는 헤드폰을 쓰고 소리를 듣는다. 제시카는 만족을 표한다. 하지만 이 소리는 스크린 밖으로 전달되지 않는다. 제시카가 헤드폰으로 확인하는 순간만을 보여줄 따름이다. 또한, 에르난은 이 소리를 자신이 작곡한 곡에 입혀서 들려주기도 한다. 그 음악 또한 알 수가 없다. 하지만 제시카는 "이렇게 해석될 수도 있군요!"라며 에르난이 활동 중인 밴드의 이름을 묻고 신기해한다. 에르난이 밴드의 이름이 "망상합주의 심연"이라고 말한다. 그리고 이 곡을 발표한다면 제시카를 공동 작곡가로 이름을 올려주겠다고 말한다.

관객들은 아무런 소리를 듣지 못했다. 하지만 소리는 거기에 존재하고, 제시카는 만족감을 표현한다. 이 간극이야말로 <메모리아>의 핵심이다. 더 중요한 인물인 두 번째 에르난을 만날 때도 마찬가지다. 소리를 따라가던 제시카는 물고기 비늘을 벗기고 있는 남자를 만난다. 그는 자신을 에르난이라고 소개한다. 그는 경험을 최소화하기 위해 이곳에 홀로 있다며 주변의 자연물(사물)에 깃든 이야기를 들려준다. 그가 처음에 손을 댄 것은 돌멩이였다. 그는 돌멩이에 깃든 한 남자의 사연을 들려준다. 제시카는 그와 함께 집에 있다가 자신이 기억하는 것이 그의 기억(경험)이라는 것을 알게 된다. 그리고 제시카는 자신이 듣는 소리에 대해 말하며, 이 소리 또한 당신이 들은 소리인가라고 질문한다.

"어떤 소리가 계속해서 들려요. 그것도 당신 건가요?"
"네. 우리의 시간보다 앞선 기억이죠."

두 사람의 대화를 통해 제시카의 소리가 남자의 기억이고, 남자의 말을 통해 두 사람의 시간보다 먼저 나타난 기억 속의 소리라는 것을 확인하게 된다. 하지만 관객은 "우리의 시간보다 앞선 기억"에 속한 소리를 들을 수는 없다. 이 소리는 과거의 기억 속에서만 존재하는 것인지도 모른다. 결코 들을 수 없는, 결코 들려주지 않는 그 소리를 두고 영화는 여러 만남을 보여주고, 여러 다른 사운드를 들려주며, 그것들과의 차이를 통해 어떤 소리가 있다는 것을 제시한다. 제시카가 들었다는 지구의 중심부에서 나는 것 같은 그 소리를 말이다. 하지만 그 소리는 지구의 중심부일 뿐만 아니라 지구 바깥에서 나는 소리일 수도 있다. 왜냐하면 오로지 기억을 공유하는 자들만이 들을 수 있는 소리이기 때문이다.

첫 번째 에르난의 작업과는 달리 두 번째 에르난을 통해 이 소리는 애초에 복원 불가능한 소리이며, 저 멀리 아득한 기억에서만, 저 멀리 상상계의 영역에서만 인식될 수 있는 소리다. 그것은 아무나 들을 수는 없지만 분명히 존재하는 소리다. 

 

ⓒ 찬란

두 번째 에르난은 제시카에게 자신은 일종의 저장고이고, 제시카는 안테나라며 저장고에 있는 것을 끄집어낼 수 있는 것은 제시카의 역할임을 넌지시 암시한다. 그러니까 이 소리는 두 사람의 교신을 통해 통해서만 이뤄지며, 두 사람이 통하는 순간에만 전달가능한 소리다. 

하지만 그 소리의 향방을 완전히 건드리지 않는 것은 아니다. 제시카가 에르난의 손을 잡고 소리에 귀 기울이는 장면이 등장한다. 그것이야말로 이 영화의 진정한 클라이막스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그 소리는 세상의 모든 소리의 조합으로 이어진다. 빗소리가 들리고, 사람들의 소리가 들리며, 다투는 소리, 숨을 헐떡이는 소리가 이어진다. 거대한 바람 소리가 들리고, 파도 소리가 들리며, 아이들의 소리가 들린다. 어떤 사람들의 대화가 들리고, 악기 소리가 들린다. 갑자기 총소리가 들린다. 제시카가 에르난과 연결된 손을 떼자 소리는 멈춘다. 그리고 창 쪽으로 걸어가 창을 조금 열고 귀를 기울인다. 또다시 여러 소리들이 들리기 시작하고, 제시카가 들었던 소리가 들려온다. 카메라가 정글의 한 곳을 비추면 거기에는 거대한 우주선이 있다. 제시카가 듣던 소리는 우주선의 엔진 소리처럼 들린다.

그렇다! 제시카가 찾던 소리는 바로 '우주선의 소리'였다. 그런데 정말 그렇다는 말인가? 대답은 그렇기도 하고, 아니기도 하다. 제시카가 찾는 근원적 소리는 세상의 모든 소리인 동시에 세상의 그 어느 소리도 아니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제시카가 소리에 귀를 기울일 때 온갖 사운드가 출몰하는 동시에 상상적 소리, 전혀 들어본 적 없을 것 같은 우주선의 엔진 소리까지도 포함되어 등장한다.

이 낯선 충격이야말로 <메모리아>가 애초부터 품고 있던 소리의 실체다. 

오히려 흥미로운 것은 소리의 실체보다 과거의 소리마저도 기억하고 있는 에르난이라는 남자다. 그는 제시카에게 자신은 꿈을 꾸지 않는다고 말한다. 이 말은 꽤 유심히 생각해 볼 만한 문제다. 제시카가 잠을 자보라고 했을 때 에르난은 십분 넘게 롱테이크 화면으로 잠든 모습을 보여준다. 아무런 미동도 없이, 마치 죽은 것처럼 에르난은 잠이 든다. 이 장면에 대한 단서는 첫 번째 에르난과 함께 난초를 저장할 냉장고를 구경하는 장면이다. 고성능 냉장고는 난초를 살아있는 채로 저장시키기 위한 장치다. 그것은 흡사 두 번째 에르난의 잠을 연상시킨다. 모든 기억을 꿈으로 재생시키지 않고, 온전히 보전하기 위해 냉동이 된 상태의 구현. 육체의 죽음과도 같은 잠은 완전한 보존을 이룬다는 마법적인 설정이자 이 영화의 가장 아름다운 순간을 묘사한다.

그리고 농담 한마디를 덧붙이자면, 이 장면 때문이라도 관객에게는 진정한 수면이 필요했는지 모른다. 영화와 함께 잠든 관객은 영화와 극장의 현실을 식별불가능한 지경에 이르는 순간을 경험할 수도, 자신의 기억을 끄집어내는 경험을 할 수도, 아주 깊은 잠에서 영화관에 있다는 사실을 망각할 수도 있다. 때로는 영화에서 들려오는 '쿵' 소리에 놀라 제시카처럼 깨어나는 순간을 경험하게 될지도 모른다. 그것도 아니라면 두 번째 에르난처럼 수면을 통해 이 영화에 대한 기억(기록)하기를 거부하거나 최소화했을지도 모를 일이다.

 

구멍과 균열을 찾아서

<메모리아>에는 구멍, 굴, 빈 공간의 울림, 균열 등의 이미지가 있다. 동생 문병을 하러 갔다가 병원의 복도에서 긴 의자에 앉았다가 일어서는 장면에서, 연구실 문이 잠기지 않아 임시로 의자를 앞에 두었다는 여자를 도와 의자를 치울 때 비로소 연구실의 문이 보인다. 보이지 않던 세계의 문이 열리는 셈이다. 이와 연결된 장면으로 연구실에 들어간 제시카가 오래된 유골의 두뇌 부위의 구멍에 손가락을 넣는 장면도 유사하다. 6천 년 전의 것으로 짐작되는 유골의 구멍에 제시카는 장갑을 끼고 손가락을 넣어 본다. 그것은 오래전에 생긴 균열―이 구멍은 제의적인 과정으로 만들어진 악귀를 쫓기 위해 만든 구멍이라고 설명한다―에 손가락을 집어넣음으로써 그녀는 어떤 구멍(균열)에 다가간다. 

두 번째 에르난이 제시카를 안테나라고 설명한 것을 믿는다면, 그녀야말로 과거(의 기록)와 접신할 수 있는 중요한 도구일 수 있다. 이러한 인물의 유형은 아핏차퐁의 전작을 보았다면, <열대병>(2004)이나 <엉클분미>(2010)를 통해 반복되어 온 것이기도 하다. 아핏차퐁 감독은 종종 인류학자처럼 과거로부터 온 균열과 구멍에 손가락을 집는 이미지나 이야기를 통해 신화, 전설, 유령, UFO와의 만남(접신)이 현재에 어떤 영향을 끼치고 있는지를 보여준다.

 

ⓒ 찬란

자동차를 타고 도로를 지날 때에도 지진으로 인해 교통이 통제되는 장면이 등장하기도 한다. 발굴을 하는 거대한 터널이 나오기도 하고, 도로 한가운데 일어나는 소리도 마치 도시를 붕괴시키는 거대한 균열처럼 들린다. 

<메모리아>를 바라보는 또 하나의 관점은 영화의 이미지든, 소리든 모든 것을 '균열의 나열'로 이해하는 것이다. 균열은 갑작스럽게 등장해 혼란을 일으키며 그 원인을 알기가 어렵다. 영화는 이 균열에 대해 다가가려는 자와 지나치는 자를 구별한다. 접속하려고 애쓰는 순간 이야기를 수집하러 다니는 <정오의 낯선 물체>(2000)처럼 갑작스럽게 우주선이 등장하기도 하고, <엉클분미>처럼 유령과의 만남이 일기도 하며, 동생의 말처럼 떠돌이 개의 기억이 떠오르기도 할 것이며, 두 번째 에르난이 들려준 사연처럼 살해를 저지른 한 남자의 기억과 연결되기도 할 것이다.

   
'균열'(구멍, 틈)은 우리의 현재가 완전하지 않다는 것, 어딘가의 상처를 숨기고 현재를 형성하고 살아간다는 것을 드러내는 순간이다.

그래서 아핏차퐁의 영화는 세계의 벌어진 틈을 응시하고 귀를 기울인다. 그때 만나는 것들은 꼭꼭 숨겨두었던 세상의 비밀이지만 결코 기억 속에서 사라지지 않을 신화, 전설, 역사, 추억이다.

<메모리아>가 묘사하는 균열은 도처에 널려 있다. 서류 정리를 위한 한 남자를 만났을 때 그는 갑작스럽게 '균류'를 갖고 쓴 시를 들려준다. 가장 아름답지 않다고 여겨지는 것을 통해  아름다운 시로 승화하는 순간에 영화(예술)가 있다. 관객들의 흥미로운 의무는 이러한 균열들을 봉합하는 시도해 보는 것이다. 꿈보다 해몽.  모더니즘 예술에 대한 비평을 이보다 더 적절하게 표현하기는 어렵다.

<메모리아>는 해몽을 필요로 하고, 그만큼 다양한 해몽을 가능케 하는 영화다. 감독조차도 하나의 해몽을 시도하는 것에 지나지 않는다. 그것은 제시카가 들었다는 소리를 결코 다시 들려주지 않는 것처럼, 어쩌면 그 소리는 저 먼 기억의 근원에 깔려있고, 다시는 들을 수가 없기에 거대한 공백으로 남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애타게 소리를 찾게 되는 순간, 두 번째 에르난의 잠을 목격하는 순간, 거대한 소리의 실체를 영원히 확인할 수 없을지 모른다는 불안이 밀려오는 순간 제시카처럼 "이제는 그 소리를 더 자주 듣고 싶어요."라고 말하게 될지도 모른다. 

그것은 인간의 근원을 향해, 사라진 기억을 향한 예술의 호소이자 다가가려 하지만 다가갈 수 없는, 듣고 싶지만 들리지 않는, 살아가고 싶지만 살아지지 않는 어떤 충격의 순간에 서 있는 곳을 향한 깊은 향수(노스텔지아)다.

 

※ 추신

1.

두 번째 에르난에 관해 해석하면서 한 신화적 인물을 덧붙여두고자 한다.

성서의 『다니엘서 2장』에 등장하는 바빌론의 왕 '느부가넷살의 꿈'이야기다. 대제국이었던 바빌론은 유다 왕국을 점령한 후 유대인들을 포로로 데려온다. 그중 하나가 다니엘이었다. 그는 나중에 재상의 자리에 오르는데 처음에는 느부가넷살(<매트릭스>에서 함장 모피어스가 타고 있는 함선의 이름과 동일하다)의 시종이었다. 하루는 왕이 꿈을 꾸고 일어났는데 도대체 무슨 내용인지 기억이 나질 않았다. 그는 바빌론의 용한 점술사들을 불러 자신의 꿈을 맞추라고 했지만, 꿈을 듣고 해석할 수 있을지언정 왕의 꿈을 맞출 수는 없다고 항변한다. 이에 신의 도움을 받은 다니엘이 왕의 꿈은 물론이고, 해석해 낸다. 왕은 다니엘의 이야기를 듣고 자신의 꿈을 확인한다.

'꿈의 해석이 아니라 그 꿈을 맞춰야 한다는 것'은 <메모리아>에 깔려 있는 중요한 지점이다. 통상적인 이야기는 소리의 정체를 해석한다. 하지만 <메모리아>는 그 소리를 해석하는 것이 아니라, 왕의 꿈처럼 소리를 찾아다닌다. 꿈의 해석이 아니라 꿈을 맞춰보라는 것이다. 에르난은 다니엘과 같은 인물이다. 그는 결코 소리를 해석하는 않는다. 오히려 첫 번째 에르난은 사운드의 조합을 통해 해석하는 입장이자 바빌론의 점성술사들과 유사한 입장이다. 두 번째 에르난은 소리를 기억하고, 그 소리가 무엇인지를 안다. 그것이야말로 근원적인 힘에 다가가는 순간이다.

그러므로 <메모리아>에서 소리는 기억인 동시에 꿈이기도 하다. 태초의 꿈, 신들이 기억하는 꿈이자 일종의 예언이나 계시처럼 한 인간의 삶을 오래전부터 휘감고 있는 원형이다. 

 

2.

ⓒ <더블 플레이 : 제임스 베닝과 리처드 링클레이터>(2013)

강연장에서 실험적인 형식의 영화가 극영화로 어떻게 수용될 수 있는가를 설명하기 위해 '제임스 베닝' 영화의 짧은 클립을 보여준 후 말을 이어갔다. <더블 플레이>(2013)라는 다큐멘터리에는 제임스 베닝과 리처드 링클레이터의 긴밀한 관계들이 묘사되는데, 링클레이터는 자신이 이끄는 영화제에 베닝을 초청해 대화를 나누기도 한다. 제임스 베닝의 영화는 대부분 엄청난 롱테이크로 촬영한 사물이나 풍경을 보여준다. 그는 미국의 대표적인 실험영화 감독이다. 

그런데 베닝의 영화 만들기를 수용한 링클레이터의 영화가 있다. <보이 후드>(2014)다. 12년간 촬영을 하면서 6살 소년이 대학에 들어가기까지의 모습을 매년 촬영했다. 매년 배우들이 모여 성장하는 소년을 중심으로 영화를 완성해 갔다. 이것이시간을 기록하는 제임스 베닝의 영화 만들기 방식이다. 베닝은 사람이 아니라 사물이나 풍경으로 작업을 하고, 두 시간 동안 변하거나 변하지 않는 집, 기차레일, 구름 등을 보여주지만 극영화 감독인 링클레이터는 이러한 시간을 극영화에 녹여내기 위해 12년간 인물을 따라 촬영했다. <보이후드>의 아이디어는 베닝의 것이며, 실험영화의 아이디어는 이러한 방식으로 저변에 확대될 수 있다. 

 

3.

ⓒ 더숲 아트시네마

이 글은 지난 1월 14일 '더숲 아트시네마'에서 진행된 [이상용의 씨네모어]를 토대로 작성됐다. 강연 중에 다니엘의 꿈-기억 이야기가 갑자기 떠올라 혀끝에서 맴돌았지만, 전반적인 내용이 확실하지 않아 넘어가야만 했다. 이 글을 빌어 보완할 수 있음을 밝혀 둔다.

[글 이상용 영화평론가, poema@ccoart.com]

 

ⓒ 찬란

메모리아
Memoria
감독
아피찻퐁 위라세타쿤
Apichatpong Weerasethakul

 

출연
틸다 스윈튼Tilda Swinton
다니엘 기메네즈 카쵸Daniel Gimenez Cacho
잔느 발리바Jeanne Balibar
아이다 모랄레스Aida Morales

 

수입|배급 찬란
제작연도 2021
상영시간 136분
등급 12세 관람가
개봉 2022.12.29

이상용
이상용
 1997년 『씨네21』 2회 신인평론상을 수상하며 영화 비평을 시작했다. 부산국제영화제와 전주국제영화제 프로그래머를 역임했다. 지은 책으로 『봉준호의 영화 언어』, 『영화가 허락한 모든 것』, 공저로 『씨네쌍떼』 『30금 쌍담』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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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객 2023-02-04 17:57:12
집에서 졸음을 참아가며 보았습니다. 심지어는 다 보고도 무슨 내용인지 궁금하여 이 글을 읽게 되었네요. 수면을 참는 것과 별개로, 위에서 언급하시는 현대영화라든가, 예술영화는 수면을 참는 것을 넘어 일종의 영화라는 것을 이해해야 하고 마치 미술관에 가는 것처럼 문화적 소양을 반드시 가져야 , 이해를 할 수 있는 어떤 것으로 생각하게 됩니다. 적어도 이런 작품을 위해서 어떤 공부가 필요할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