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2 BEST] 텍스트에서 목소리로(Text-to-Speech)
[2022 BEST] 텍스트에서 목소리로(Text-to-Speech)
  • 이지영
  • 승인 2023.01.04 11: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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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지영 영화전문기자

각본의 텍스트를 배우의 목소리로 발화하는 것, 연기의 가장 첫 단계이자 문학 텍스트가 영화가 되고자 하는 첫 번째 몸짓이다.

올해 만난 많은 영화들은 이 발화 과정을 전면에 내세운 작품들이 많았고, 그렇기에 문학적이라고 느낄 여지가 많았다. 영화를 구성하는 직물(Texture)의 감촉을 직접 만지는 듯한, 낯설지만 기분 좋은 순간들이었다. 또한, 올해는 새로운 얼굴의 발견보다는 익숙한 감독들의 신작이 놀래게 했다는 점이 기억에 남는다. 어떤 시도는 아쉬웠고 어떤 시도는 찬탄을 자아내었다. 그러나 이 재발견의 시간은 한순간도 지루할 틈 없는 '해피 아워'(Happy Hour)였음이 분명했다.

 

1. <헤어질 결심Decision to Leave> 박찬욱 | 2021

ⓒ CJ ENM

마침내, 2022년 영화를 결산할 날이 왔음을 생각하며, 한 해 동안 '마침내'라는 단어를 과연 몇 번이나 사용했을지 문득 궁금해졌다. 신드롬까지 낳은 <헤어질 결심>은 더 넓은 관객층과 만나려는 박찬욱 감독의 욕망이 느껴지는 영화다. 복수 3부작 때의 들끓는 에너지, 강박적일 정도로 정제된 미학, 거대한 아이러니를 향해 전력으로 질주하는 서사 등, 박찬욱에게 기대하면서도 동시에 두려워했던 모든 것과 우리는 이별해야 하는 것일까? 나는 그것들과 아직 '헤어질 결심'을 하는 중이다. 잘 알려진 것처럼 이 영화는 <아가씨>보다는 TV시리즈 작 <리틀 드러머걸>의 연장선 상에 있다. 암호 해독이 필요한 사랑의 언어, 정교하게 구축해 올리는 서사, 종국에 모든 수수께끼가 풀리는 동시에 몰락하는 사랑의 풍경 등. 그 결과, "찬욱씨는 어느 시대에서 왔어요?"라고 묻고 싶을 만큼 박찬욱 감독은 고풍스러우면서도 낡지 않은 화법의 사랑 이야기를 할 수 있음을 스스로 증명한다. '산해경'이라는 인공적인 모티프가 실재하는 자연으로 해방될 때의 시네마틱한 경이는, 그가 미학적 강박증에서 벗어나 또 다른 경지로 올랐음을 말해주었다. 올해 최고의 엔딩이라고도 할 수 있는 이 장면은 마치 '해일'이 덮치듯, 관객들을 불시에 연인들의 내면적 격랑 속으로 끌어들인다.

 

2. <해피 아워Happy Hour> 하마구치 류스케Hamaguchi Ryusuke | 2015

ⓒ 트리플픽쳐스

<우연과 상상>(2021)이 하마구치 류스케의 정수를 담은 단편소설 모음집 같다면, <해피 아워>는 연출론과 연기론을 모두 톺아볼 수 있는 장편소설과도 같다. (심지어는 『카메라 앞에서 연기한다는 것』(2022)이라는 친절한 안내서까지 있다. 이를 번역하고 올해 작고하신 故 이환미님께 다시 한번 조의를 표한다.) 나에게 이 둘은 이란성 자매처럼 한 쌍이다. 다만, <해피 아워> 같은 작품은 아마 그의 필모에서 다시 나오기는 어렵지 않을까 감히 예상한다. 이 영화는 투명하고 여백이 넓은 텍스트다. 배우들의 건조한 연기 톤에서, 발아 직전의 감정을 감지하는 기묘한 경험을 할 수 있다. 타자의 불가해성, 도덕적인 딜레마, 중첩되면서 한없이 복잡해지는 인간관계 등, 주제는 평범할 수 있지만 이보다 더 흥미로운 것은 그 미묘한 진행을 배우의 흰 도화지에 담아내는 감독의 역량이다. 배우들이 어느 순간 그 인물과 자기 자신의 중간에 서서 짓는 표정들이 있다. 이를 보는 것이 내게는 하마구치의 영화를 보는 가장 큰 이유이기도 하다.

 

3. <본즈 앤 올BONES AND ALL> 루카 구아다니노Luca Guadagnino|2022

ⓒ 워너 브러더스 코리아

서정적인 서부극을 좋아한다. 사회에 편입되지 못하고 척박한 서부로 향할 수밖에 없는, 그리하여 마지막을 맞이하게 되는 아이들의 성장과 사랑 이야기는 『어린 왕자』를 떠올리게 한다. 그런데 루카 구아다니노 영화에서 이것들을 조우하게 될 줄은 예상 못 했다. (그가 수영장만은 포기 못 할 줄 알았다. 아, 물론 농담이다.) 게다가 왜 카니발리즘인가? 살점만 물어뜯는 것이 아니라, 뼈까지 모조리 먹어 치우는 것이 '본즈 앤 올'이라면, 본즈 앤 올은 사랑하는 사람들이 하나가 될 수 있는 가장 극단적인 방법이다.

잃어버린 내 반쪽 찾기의 신화는 버젓이 살아있다. 현 세태를 보면, 자본주의 체제에 적응한 순으로 남녀에게 수치를 매겨 나의 근사치에 해당하는 자를 '잃어버린 반쪽'이라고 믿는 것 같다. 그렇게 하지 못하는 자들은 아예 사랑하기를 포기한다. 체제 밖으로 밀려난 사람이라면, 하물며 서로가 서로를 파멸시키거나 공동체의 위협이 된다면 그들은 어떤 합일을 꿈꿀까? 온전한 두 사람이 하나가 된다는 뻔한 환상이 아니라, 너를 먹어치우고 세상에서 소거하여 영원히 죄와 고통을 덜어준다는 구원과 합일이 뒤섞인 환상. 이것은 소수자의 사랑을 극단적으로 상상한 잔혹 동화이다.

 

4. <소설가의 영화Novelist's Film> 홍상수 | 2021

ⓒ 영화제작전원사, 콘텐츠판다

"날은 아직 밝지만, 날은 곧 저문다. 날이 좋을 때 실컷 다녀보자." 이 문장에서 다른 소설가가 말한 것이 떠올랐다. "여행지에 왔는데 벌써 늦은 오후가 되어 해가 어둑어둑 지고 있었다. 그렇다면 나에게서 인생의 시간은 몇 시쯤일까? 얼른 나가서 조금이라도 더 봐야 할 텐데, 이제 곧 해가 질 텐데."

홍상수에게는 무언가 만들어내지 못한 시간을 안타까워 하는 정서가 없다. 날이 좋을 때 실컷 다녀보자는 말처럼 그는, 자신과 약속이라도 한 것처럼 매년 작품을 '실컷' 찍는다. 소박하고 애정 어린 존재를 대상으로 말이다. 문득 <낭트의 자코>(1991)의 어린 자크 드미가 생각났다. 그는 순수한 창작의 즐거움이라는 세계에 입성한 것일까? 소설가는 배우와의 허물없는 대화로부터 이야기를 길어 올리고, 그 이야기는 마치 주문처럼 다시 배우의 삶에 적용되는 것처럼 보인다. '소설가의 영화' 속에 등장하는 작은 결혼 의식을 보면, 홍상수는 날이 완전히 지기 전까지 자신의 영화를 찍고, 그의 연인은 이제 고독한 꿈에서 깨어나 자신이 원하는 색채로 가득한 영화를 만들고 삶을 살아가기를 축성하는 것 같다.

 

5. <에브리씽 에브리웨어 올 앳 원스Everything Everywhere All at Once>
다니엘 콴Daniel Kwan, 다니엘 쉐이너트Daniel Scheinert|2022

ⓒ 워터홀컴퍼니

<에브리씽 에브리웨어 올 앳 원스(이하 에에올)>은 마블 시네마틱 유니버스(이하 MCU)와 차별화된 A24표 멀티버스로 그린 작품이다. <애프터 양>에서 제이크라는 서양 백인남성의 눈으로, 양의 혼란을 이해하는 과정이었다면 <에에올>은 비이민세대, 이민 1세대, 이민 2세대가 서로의 혼란과 고통을 이해하는 과정이다. (다른 인종 구성원과의 관계는 서브 스토리에 가깝다.) 캐시 박 홍과 차학경이 겪었던 것처럼, 미국 사회에서 아시아계 여성이 직업적으로 예술가가 되기 녹록지 않은 현실을 지적한 점이 눈에 띈다. 이민 2세대에게는 성소수자성까지 더해져 최대의 혼란을 겪는 빌런으로 등극한다. A24표 멀티버스가 그들의 새로운 발명품은 아니지만, MCU가 멀티버스를 통해 그리려는 다양성, 혹은 다문화주의에 대안을 제시한다는 데서 그 의의를 찾을 수 있다. 이들은 마블이 못한 것들을 해낸다. 현시대와 동떨어진 신화 속에나 존재할 왕국을 세워주는 것이 아니라, 일상 속에서 그들을 공동체 구성원이자 주역으로, 히어로로 만들어 주기 때문이다.

 

6. <노바디스 히어로Nobody's Hero> 알랭 기로디Alain Guiraudie|2022

ⓒ 부산국제영화제

현대인의 집단 트라우마는 미디어와 불가분의 관계다. 사회에 비극적인 사건이 일어날 때, 현대인은 서로의 스마트폰과 SNS라는 눈을 통해 폭력적인 씬에 무자비하게 노출된다. <노바디즈 히어로>에서 이런 이미지들이 범람하다 못해 사람들의 감각이 둔감해지고, 비극이 일상화되는 현상을 재치 있게 그린다. 기로디는, 이번 작품에서만큼은 유럽 시네마에서 부뉴엘과 알모도바르의 계열을 잇는 자리에 스스로를 자리매김한다. 여러 장점들에도 불구하고 <호수의 이방인>(2013)에서 기대했던 전복적인 힘은 부족했기에, 앞서 글('노바디즈 히어로' 편집증 환자들의 술래잡기)에서 지적한 바 있다. 그럼에도 이 영화는 그럴 만한 가치가 있을 뿐 아니라, 비판할 때조차 흥미로운 텍스트다. 2022년 부산국제영화제 갈라 프레젠테이션으로 만난 것도 특별하기는 했으나, 그의 영화를 보는 일이 한국에서도 좀 더 일상적인 일이 되었으면 하는 바람이다.

 

7. <모어I am More> 이일하E Il-ha|2021

ⓒ 엣나인필름

다큐멘터리라는 장르를 사랑하지만, 정작 다큐로부터 기대하는 바는 몇 가지로 국한되어 있다. 감독의 구도자적인 자세라든가, 마치 오래 굶은 짐승이 먹이를 잡듯이 진실의 민낯을 순간적으로 포착하는 카메라 같은 것. 미학적인 충격에 대한 기대는 거의 후순위다. <라 당스>(2009), <피나>(2011), <퍼스트 포지션>(2011) 같은 댄서들에 대한 다큐라 하더라도, 인물의 내러티브와 무대 공연은 거의 분리된다. 소위 '아우라의 상실'이라 하는, 공연 실황의 녹화 버전을 보는 듯한 느낌을 자아내는 것은 이 때문이리라.

<모어>는 독립 다큐의 가장 열악한 조건에서 그 관습을 뒤집고자 했고, 그들이 할 수 있는 최선의 결과를 내었다. 모지민이 직접 자신의 내러티브를 창조하고 주장하기 위해 드랙쇼적인 요소와 뮤지컬, 뮤직 비디오, 발레가 섞인 독특한 무대가 탄생했다. 연출과 편집의 이음새가 어떻든 모든 부족함을 압도하는 것은 모지민의 존재감과 예술성이다. LGBTQ는 오히려 부차적이다. 다큐는 찍히는 인물의 인생을 어떻게든 변화시킨다. 모지민의 현재 행보를 지켜보며, 나는 지금도 이 영화에 끊임없는 갈채를 보내는 중이다.

 

8. <기예르모 델토로의 피노키오Pinocchio> 기예르모 델 토로Guillermo Del Toro|2022

ⓒ 넷플릭스(NETFLIX)

이 작품을 보면 OTT가 작가주의 감독들의 소원 성취를 해주는 마법의 램프 같다는 생각이 든다. (관객으로서는 감사한 마음.) 델 토로의 <피노키오>는 인위적으로 남성들로만 가득 찬 세계다. 모성적인 따뜻함을 보여주는 캐릭터는 틸다 스윈튼이 1인 2역으로 연기한 천사와 죽음의 신뿐이며, 케이트 블란쳇은 남은 여성 배역이 없어 원숭이를 연기했다. 'Papa'(아빠)와 'Puppet'(인형)은 음성적으로 조응되면서 아버지-아들, 창작자-창작물의 위계 관계를 드러낸다. 델 토로는 제페토의 권위주의, 서커스단장의 탐욕과 착취, 신부들의 교조주의, 군인들의 파시즘을 비판한다. 피노키오는 예수처럼, 죽음으로써 이들의 죄를 대속하고, 아버지의 뉘우침의 눈물 속에 다시 부활한다. 델 토로는 이번 작품으로써 애니메이션의 장르적 지평을 넓혔고, 디즈니를 능가하기 어려웠던 <피노키오> 서사에 드디어 자신의 인장을 장인처럼 새겨 넣었다.

 

9. <애프터 양After Yang> 코고나다Kogonada | 2021

ⓒ (주)영화특별시SMC , (주)왓챠

연말마다 올해의 영화 Best 10을 뽑아야 할 이유는 무엇일까? 누군가는 그저 때가 되어서 의례적으로 하는 일이라고 치부할 수도 있다. 어떤 대상을 꾸준히 지켜보고 기록하는 일은 가치 있는 일인가? 비록 누가 알아주지 않더라도 말이다. 양의 시선이 특별한 이유는, 가족 구성원들이 보지 못하는 순간에도 그 자리에서 사랑하는 대상을 보고 있었다는 것이다. 통시적인 기억의 집합들은 그 자체로 존재론적인 의미를 가지며, 무한한 우주처럼 아름답다. 그런 의미에서 지금의 영화 기록이 어디엔가 아카이빙 되고 축적되어, 존재의 의미와 아름다움을 가진 소우주를 이룬다면? 적어도 우리가 애쓰고 할애한 것들이 결코 시간 낭비는 아닐 것이다.

 

10. <같은 속옷을 입는 두 여자The Apartment with Two Women> 김세인KIM Sein|2021

ⓒ 찬란

<드라이브 마이 카>(2021)에 빨간 '사브 900'이 있다면, 김세인에게는 빨간 '모닝'이 있다. 그런데 두 차는 반대 기능을 하고 있단 점이 재미있다. 전자가 치유와 회복을 매개하는 수단이라면, 후자는 오래 누적된 애'증'(두 번째 음절에 훨씬 강세)이 급발진하고, 방황 끝에 잘못된 주소로 인도하고, 결국에 폐기되는 파경을 상징한다. 현실의 많은 관계는 흠집 하나 없이 보존된 '사브'처럼 예쁘지 않다, 생물학적으로 연결됐을지라도, 타인은 지옥일 수 있다. 현대인이 앓는 정신질환 중 많은 부분이 가족(특히, 부모)과 청산하지 못한 관계에서 기인한다고 한다. 거침없이 파국으로 치닫는 이 영화에서 나는 탈옥 영화에서나 느낄 법한 진한 해방감을 느꼈고, <드라이브 마이카>의 대척점에서 희망을 발견했다.

[글 이지영, karenine@ccoart.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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