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이트 노이즈' 바움백의 COVID-19 우울증 클리닉
'화이트 노이즈' 바움백의 COVID-19 우울증 클리닉
  • 김경수
  • 승인 2022.12.21 11: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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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 시대를 데칼코마니로 그려내고자 하는 바움백의 시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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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이 의미를 부여하는 모든 행위와 그 부산물은 모두 죽음을 부정하는 것에 기초를 둔다."―어니스트 베커

열차 탈선 사고로 인해서 정체불명의 독극물인 나이어딘 D가 퍼지자 J.A.K.글래드니(아담 드라이버)와 그의 가족을 포함한 마을의 주민들은 한꺼번에 피난길에 오른다. 그즈음 독극물이 묻었을지도 모르는 소나기가 쏟아지기 시작한다. 온갖 교통수단이 한 데에 몰려 병목 현상이 생긴 고속도로 한가운데에서 사람들이 하나둘 차 밖으로 나온다. 그들은 망원경으로 독극물이 한 데에 모여서 생겨난 보랏빛 구름을 관찰한다. 노아 바움백의 신작 <화이트 노이즈>(2022)의 장르를 굳이 규정해야만 한다면 '재난 영화'일 것이다. 영화의 한가운데에 있는 소재가 독극물인 나이어딘 D의 유출이어서다.

웃기게도 이 영화에서 재난 영화의 스펙터클에 부합하는 장면은 앞서서 설명했던 장면뿐이다. 그마저도 인간에게 별다른 물리적인 위협을 가하지도 못한 채로 금방 지나간다. 이 장면이야말로 올해의 괴작인 <화이트 노이즈>를 압축하는 장면이라고 말할 수 있을 듯하다. 가족과 중산층을 이야기하던 노아 바움백 감독은 왜 재난 영화를 찍은 것일까.

이때의 독극물 구름은 CG의 산물이다. 스크린 너머의 블루스크린에만 머무르는 가상 이미지기에 이것이 스크린에 있는 사람에게 물리적인 해를 가할 수가 없다. 지금껏 모든 재난 영화가 지니는 딜레마는, 여기서 기원하기에 지금껏 재난 블록버스터라 불리는 영화는 둘의 간극을 메우려 했다. 인간이 스크린에서 자연을 움직이게끔 만드는 권능은 CG로만 드러난다. 제작사는 자본을 얼마나 소유하고 있느냐에 따라 토네이도든 지진이든, 쓰나미든 무엇이든지 제작해낼 수가 있다. 자연재해의 이미지는 대체로 원경에 배치되어서 압도감을 자아낸다. 이때의 CG로 연출된 재해는 스크린에 있는 사물에 어떠한 영향도 끼치지 못한다는 본질적인 한계를 지니고 있다. 그 권능은 CG 자체가 아니라 근거리 숏을 매개해서만 드러날 수가 있다. 재난 블록버스터의 유행을 이끈 <투모로우>(2002)는 이러한 딜레마를 전면에 드러낸다. 도심을 뒤흔드는 토네이도가 원경으로 드러나고, 그다음 숏에서는 인공적으로 연출된 바람에 사람이 휩쓸리기 시작한다. 원경에 있는 토네이도와 근경에 있는 바람은 아예 다른 것인데도 가상으로 연결된 것이다.

<화이트 노이즈>는 CG와 실재의 벌려져 있는 틈새를 막을 생각이 없다. 오히려 CG로 제작된 보랏빛 독극물 구름을 도로에 있는 모든 이가 관찰하게끔 만든다. 그들은 텅 빈 하늘을 보고 있지만 거기에 매혹되어 있다. 구름을 관찰하는 이들은 자신이 독극물이 묻은 소나기에 노출되어 있다는 사실을 깜빡 잊은 듯하다. 이는 감독이 영화에서 COVID-19를 다루는 방식을 전면으로 드러내는 시퀀스다. COVID-19는 이미지는 존재하되 실물은 감각되지 않는 재난으로 그려진다. 일상에 깊숙이 침투했지만, 그 규모를 미디어에 재현된 스펙터클(사망자 수)로만 확인할 수 있어서다.

노아 바움백은 지금껏 미국 사회를 그려내기보다 가족이라는 소우주를 그리는 데에 초점을 두었다. 그러나 그의 소우주와 COVID-19가 전염되고 있는 사회라는 대우주 간의 거리는 더없이 크게 벌어지기 시작했다. 바움백은 <화이트 노이즈>에서 그 틈새를 이야기하고자 한다. 이는 그가 인디와이어와의 인터뷰에서 언급하기도 한 보 번햄의 <혼자서 만든 쇼>(2019)의 영향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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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는 원작에서는 3부 즈음에 등장하는 대중문화학과 교수 머레이(돈 치들)의 강의로 시작한다. 머레이는 앨비스 프레슬리를 비롯한 살아 있는 우상을 연구하는 연구자로 학생을 상대로 자동차 충돌 세미나를 연다. 자동차 충돌 세미나는 미국 액션 영화에 등장하는 자동차 충돌이 폭력이 아니라 세속적인 낙관이 지탱하는 아메리카 드림을 자축하는 의례라 이야기한다. 이는 하나의 놀이에 가까우며, 거기서 누군가가 죽는 것을 걱정하기보다는 폭발 자체를 즐긴다는 것이다. 이윽고 영화는 여느 바움백의 영화와 비슷한 풍경을 다룬다. 히틀러학의 잭 글래드니와 그의 아내 버벳(그레타 거윅), 제각기 소란스러운 네 자녀가 왁자지껄 떠드는 미국의 중산층 풍경은 그가 천착한 소재다. 무엇보다도 이들의 소통 불가능성은 이전의 바움백 영화보다 더 과장되어서 드러난다. 더욱이 소통이 전혀 안 되는 이 가족은 제각기의 불안을 지니고 산다.

<화이트 노이즈>는 1984년에 쓰인 돈 드릴로의 원작을 배경으로 한다. 바움백은 난해하기로 소문난 원작의 플롯을 최대한 따라가는 각색을 택한다. 영화도 소설과 마찬가지로 파동과 방사, 유독가스 공중 유출 사건, 다일라 세 파트로 나뉘며, 전형적인 가족 서사와 블랙코미디, 음모론, SF 세 장르의 불균질한 공존을 있는 그대로 전개한다는 점에서도 그러하다. 무엇보다도 영화의 대사가 다소 딱딱하고 연극적이라 느껴지는 것을 아는 데도 원작에서 드러나는 교수들의 장광설을 있는 그대로 담아내려고 한다. 차이점이라면 자잘한 에피소드가 생략되었고, 원작은 J.A.K. 글래드니의 1인칭 시점으로 전개되지만, 영화는 이를 3인칭으로 전개한다는 점이다. 원작의 결을 최대한 따라가기로 한 것은 아마도 감독이 1980년대의 소설을 지금과 포개보고자 하는 의도가 선명하다.

특히, 나이어딘 D의 증상 중 하나로 데자뷔deja-vu(이미 봄)가 강조되는 것은 이 영화가 원작을 택한 이유와도 이어져 있다. 이는 '1980년대에 우리가 이미 본 것'을 '다시 보게끔 하는 작업'을 하고자 해서다. 에이즈, 레이건의 집권으로 인해서 급격히 보수화된 미국 사회, 매스미디어에 유통되는 가짜뉴스와 주류 언론에 대한 불신으로 인한 음모론, 전통적인 지식인의 붕괴 등 바움백이 그려내고자 하는 '1980년대의 미국'은 작금의 미국과도 어느 정도는 맞물려 있다. COVID-19와 그로 인한 코로나 우울증, 트럼프의 당으로 인한 대안 우파의 등장, 가짜뉴스와 음모론, 반지성주의와 대학의 붕괴 등이 그러하다. 1980년대와 2020년대, 40년의 차이가 있는 세대를 데칼코마니로 그려내고자 하는 그의 시도는 제법 흥미롭다. 이는 트럼프의 탄생을 이야기하고자 유년기의 기억을 토대로 1980년대 미국의 풍경을 영화에다가 소환하는 <리코리쉬 피자>(2022), <아마겟돈 타임>(2022), <본즈 앤 올>(2022) 등 최근 영화들을 연상하게 하기도 한다.

촬영에서도 앞서 이야기한 <리코리쉬 피자>와 (35mm 필름에서 영향을 받은) <아마겟돈 타임> 등과 비슷하게 35mm 아나모픽 렌즈에다가 이를 담아내 1980년대의 시공간을 느끼게끔 한다. 다만, 이러한 데자뷔가 다소 겉핥기로만 느껴진다는 점이 아쉬운 점이다. 특히 바움백이 글래드니의 아들 하인리히를 통해서 COVID-19 음모론의 확산을 이야기하는 관점은 원작 그대로라서 다소 시대착오적이라는 인상을 지울 수 없다. 모든 이가 각자만의 정보를 지니고 있기에 음모론이 생기는 지금과 거대 언론이 정보를 독점하고 있어서 거기서부터 음모론이 유포되었던 80년대는 명백히 다르다. 두 시대를 포개어보려는 시도는 이처럼 곳곳에서 삐걱거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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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토록 복잡한 플롯을 지닌 <화이트 노이즈>에서 두드러지는 것은 그간 바움백이 잘 쓰지 않던 '몽타주'다. 처음부터 바움백은 몽타주를 통해서 시대의 풍경을 화면 안으로 급작스레 외삽한다. 이 몽타주가 두드러지는 시퀀스는 히틀러학 창시자인 글래드니가 엘비스학 연구자인 머레이의 연구를 도우려 그와 함께 퍼포먼스에 가까운 강연을 하는 에피소드에서다. 둘은 마마보이 히틀러와 어머니와 불화한 엘비스의 삶을 번갈아 이야기하며 관중들의 시선을 사로잡으려 애쓴다. 소설에서는 이 퍼포먼스가 1인칭으로 드러나 있으며, 바움백은 이를 3인칭으로 전환하면서 그 열차가 충돌해서 독극물이 퍼지는 몽타주를 삽입한다. 원작에서 부재해 있던 동시성이 영화에서는 드러나 있는 셈이다. 이는 글래드니가 죽을지도 모른다는 공포를 급작스레 느끼는 방식과도 같다. 한 인간이 느끼는 실존적인 공포가 사회적 불안으로 번져나가는 식이다.

<화이트 노이즈>의 몽타주는 그간 바움백의 스타일과는 정반대라서 다소 낯설게 느껴진다. 매스미디어를 비판하며, 문체 곳곳에 대중문화의 흔적을 녹여낸 원작의 영향으로 볼 수 있겠지만, 이는 바움백의 세계관이 다소 낯선 세계관으로 달라지고 있는 기점으로 볼 수도 있는 연출이다.

노아 바움백은 스크린을 하나의 무대로 간주하는 스테이징에 힘쓴다. 우디 앨런에게서 큰 영향을 받은 그는 영화에서 연극의 흔적을 곳곳에 드러낸다. <오징어와 고래>(2005)에서의 테니스 코트처럼 집을 반으로 나누어 분할된 가족, <결혼 이야기>(2019)는 니콜과 찰 리가 싸우는 공간이 이를 가장 선명히 드러낸다. 이는 예술가 부모가 갈등한 끝에 이혼한 까닭에 청소년기를 혼란스럽게 보낸 감독의 유년기 경험에서 비롯됐음을 이야기할 수 있다. 바움백은 둘 사이를 관통하는 소통의 절단을 공간화하려 애쓴다. 이를 가장 선명히 드러내는 것은 '연극적인 공간'이다. 둘의 세계가 영영 다르다는 것을 공간화하려는 바움백의 시도는 이전 영화에서부터 지속되었다. <결혼 이야기>의 아방가르드 극단을 이끄는 찰리(아담 드라이버)와 영화를 찍으려는 니콜(스칼렛 요한슨)의 충돌은 필연적이다. 오프닝에서 둘은 서로 상대방의 장점을 쓴 편지를 낭독한다. 그때 둘의 일상이 몽타주 된다. 그러나 몽타주가 끝난 뒤 편지들이 실은 낭독되지 않았고, 독백에 불과하다는 것이 드러난 순간부터 영화는 플래시백을 사용하지 않는다. 누가 잘못했는지를 밝히는 것은 더는 둘이 처한 파국에서 소용없으며, 과거는 둘에게 말로만 남아 더는 쓸모없기 때문이다. <결혼 이야기>에서는 하나의 시간을 둘러싼 입장들만 존재할 뿐이다. 둘은 변호사 상담실에 있지만 별개의 공간에 있다. 이는 <화이트 노이즈>에서 내내 반복되는 내레이션인 "가족이란 이 세상의 온갖 잘못된 정보의 요람과 같다"라는 진술과도 이어진다.

이와 같은 바움백의 공간 연출이 가장 두드러지는 시퀀스는 찰리와 니콜이 한 공간에서 마주 보고 격한 말싸움을 하는 시퀀스다. 찰리와 니콜이 서로의 밑바닥을 드러내는 순간에 카메라는 둘이 한 공간에 있다는 것을 드러내려 하지 않는다. 되려 둘의 얼굴과 움직임만을 클로즈업해 둘이 같은 공간에서 대화하고 있는데도 방백을 하는 듯이 보이게끔 한다. <오징어와 고래>에서는 하나의 공간이 둘로 나뉘었다면, <프란시스 하>와 <결혼 이야기>에 이르러서 인물들은 하나의 공간에 있는데도 다른 쇼트로 분할되어 존재하는 셈이다. 바움백의 영화에서 캐릭터가 대화하는 시퀀스는 둘이 대화하고 있는 데도 리액션이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는다. 이는 바움백이 한 인물이 대사를 내뱉고 그 대사가 끝나는 순간에 바로 대화하고 있는 상대에게로 카메라를 넘기는 숏의 구조로 인해서다. 이때의 대화는 자연스러운 편집으로 이어지지 않는다. 상업 영화에서 두 인물의 대화가 한 인물이 말하는 것을 드러내는 숏과 맞은편에 서서 그것을 듣고 반응하는 다른 인물이 말하는 것을 비추는 리버스 숏의 교환으로 이루어진다면, 바움백의 영화는 이러한 대화 공식을 파괴한다.

바움백은 그가 영향을 받았다고 하는 장-뤽 고다르의 점프 숏을 인물의 대화에 삽입하고 이를 자연스러운 것으로 여기게 한다. 대화에서의 감정은 휘발되고 발화만이 남은 대화 상황은 디지털 네이티브 세대의 감수성을 연상하게 만든다. 채팅창이라는 가상의 공간에서 대화에 참여한 둘이 각자 분할된 영역에 머무르면서 말풍선에 담긴 텍스트로만 대화를 나누는 매체 환경은 바움백 영화의 연극적인 세팅과 이어져 있다.

바움백 영화의 대화 리듬은 메신저에서의 대화 리듬과 이어져 있고, 그는 이를 적극적으로 쓴다. 이는 <결혼 이야기>까지, 아니 <화이트 노이즈> 1부에서 바움백 영화의 핵심으로 드러나 있기도 하다. <결혼 이야기>에서 동부와 서부로 분할된 부부의 갈등이 정치적인 양극화와 어렴풋이 유사하다면, 바움백은 <화이트 노이즈>에 이르러서 이를 사회적인 차원으로 확장하고자 한다. 가족을 사회를 압축한 소우주로 보기 시작한 결과물이 바로 이 영화다. 앞서 이야기했듯 1980년대에 쓰던 35mm 필름의 사용, 몽타주로 인한 1980년대 대중문화 요소 도입, 교수 사회 등 1980년대의 풍경 등의 도입으로 바움백의 인물은 비로소 사회에 서게 되었다. <화이트 노이즈>의 1부에서 드러나는 가족의 생활은 바움백이 마주하는 COVID-19 이후의 분열된 미국 사회의 온상을 압축한 것이기도 하다. 이는 2부의 대피소에서 아들로 인해서 가짜뉴스가 확산되더라도 상황에 서로가 아무런 영향을 끼칠 수 없는 무기력으로 이어진다. 3부에 들어서서는 부부의 갈등이 현대인의 무의식으로 드러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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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편으로 <화이트 노이즈>가 보고자 하는 것은 '시간이 사라져 간다'는 의식이다. 바움백의 필모에서 죽음에의 불안을 발견하는 일은 어렵지 않다. <프란시스 하>(2012)에서 청춘이 끝나가고 있다는 불안으로도, <결혼 이야기>에서 니콜의 사라져 가는 꿈으로도 드러난다. <화이트 노이즈>는 개인의 차원에 머물러 있던 죽음에의 불안이 COVID-19로 인해 사회의 차원으로 확장되었다고 본다. 1부에서의 글래드니가 안고 있는 죽음에의 불안은 개인의 차원으로만 머문다. 이는 글래드니의 캐릭터성에서 비롯된다. 영화의 원작자인 돈 드릴로가 가상으로 지어낸 히틀러학은 미국 대학가에서 컬트적인 인기를 누리다가 1974년에 죽은 종교학자인 어니스트 베커의 이론을 모티프로 한 것이다.

어니스트 베커는 『죽음의 부정』이라는 책을 통해서 일약 스타가 되었다. 어니스트 베커는 인간의 행위 전반을 죽음을 부정하는 것으로 해석한다. 인간이 필멸의 존재이기에 죽음을 두려워하며 이 죽음으로부터 도피하고자 스스로 불멸하는 문화적 영웅으로 가정해야만 그것을 견딜 수가 있다는 논리다. 어니스트 베커는 이를 영웅주의로 이야기하고, 이 영웅주의의 기반에 나르시시즘이 깔려 있다는 논지를 펼친다. 자신의 삶을 의미 있는 것으로 지탱하려면 어떠한 것이든 할 수 있다는 논지다. 어니스트 베커의 염세주의는 베트남 전쟁으로 인한 문화적인 억압에 시달리는 동시에 미국을 지탱하던 여러 도덕적인 가치의 붕괴로 인해서 맨슨 패밀리 등 엽기적인 사건이 연달아 일어나는 등 혼란의 해결책이었다. 어니스트 베커는 불멸에의 욕망에 사로잡혀서 인간을 학살하는 악의 결정체로 히틀러를 이야기했다.

'돈 드릴로'는 '어니스트 베커의 염세주의'를 현대인의 세계관으로 보았다. 이는 바움백에게도 마찬가지다. 다만, 돈 드릴로는 물질로 영생을 누리고자 하는 소비주의 사회가 염세주의를 가속화한다는 맥락을 더했으나, 영화에서는 이러한 맥락을 덜어내면서 '코로나로 일상화된 죽음을 현대인이 어떻게 도피하려 하는지'에 더 초점을 둔다. 독성 먹구름을 마주함으로 현대인은 죽음에의 불안을 내재하게 된다. 2부가 COVID-19 상황이라면 3부는 그것이 남기고 간 실존적 불안에 접근하는 텍스트다. 글래드니와 바벳이 느끼는 공포는 다소 어이없을 수는 있더라도 이는 최근에 개봉한 다니엘스의 <에브리띵 에브리웨어 올 앳 원스>에서 조부 투파키가 느끼는 염세주의와 이어져 있다고 볼 때 납득할 만한 것이다. 둘은 가족 영화로 더는 가족을 결속할 만한 정신적인 수단이 없는 상황을 다룬다. 철학자 한병철에 따르면 이 둘은 "공동체가 보유한 가치들과 질서들을 반영하고 전승하는 상징적 행위"(한병철, 『리추얼의 종말』, 김영사, p.8)인 리추얼의 종말로 인해서, 세대를 봉합할 수 있는 삶의 준거 가치가 사라져서 삶이 무의미하다고 느끼며 허무를 탐닉해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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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음으로부터 도피하고자 약을 먹는 바벳, 히틀러학을 가르치지만 히틀러와 비슷해지는 글래드니, 그리고 죽음에의 공포를 망각하고자 '뇌세포를 청소하'고 순간에만 탐닉하고 이윽고 현상과 말을 구분하기 힘든 경지에 다다른 밍크까지 이 셋은 현대인의 악몽을 그려낸다. 현상과 말을 구분하기가 불가능해지면서 밍크는 총알이 날아온다는 말을 총알이 날아오는 것으로 착각한다. 전후 트라우마로도, 음모론으로 인해서 말이 곧 현실을 압도하는 언론에 의한 희생양으로도 볼 수 있는 밍크는 탈정치화된 현대인의 가장 우울한 초상이다. 돈 드릴로와 그의 목소리를 경유한 노아 바움백 감독은 현대인을 치유하고자 하는 결말로 나아간다.

<에브리띵 에브리웨어 올 앳 원스>와 <화이트 노이즈>의 해결책은 다소 비슷하다. 하나는 다정이라는 말로, 하나는 믿음이라는 말로 현대의 허무주의를 봉합하고자 한다. <화이트 노이즈>에서의 믿음은 사후가 없는 것을 아는데도 불구하고 사후를 믿는 수녀의 신앙 체계를 이야기하며, 그들의 믿음이 사회를 지탱한다고 본다. 둘은 리추얼의 부활이다. 이 두 영화의 해결책은 잠깐의 봉합에 불과하다. 여기서 <화이트 노이즈>는 마트로 되돌아가서 그들이 소비주의 사회의 한가운데에서 죽음을 잊으리라고 이야기한다. 바움백다운 결말이라는 생각이 들면서도 왜인지 바움백 나름대로의 COIVD-19 우울증 클리닉이라는 생각을 지우기 힘들다. 또한 이러한 광범위한 이야기가 완성도로 이어지지 않는다는 것도 감독의 우울을 반영한 것이라면 이해할 만하다.

물론, <화이트 노이즈>는 형식뿐인 (<에브리띵 에브리웨어 올 앳 원스>의 다정과) 믿음을 통해서만 미래를 상상할 수 있는 'COVID-19 이후의 무기력감'을 넌지시 드러내고 있다. 이 실패작은 바움백의 세계가 변하고 있고, 그의 다음 작품이 걸작이 되리라는 어렴풋한 가능성만 남기며 끝난다.

[글 김경수, rohmereric123@ccoart.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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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이트 노이즈
White Noise
감독
노아 바움백
Noah Baumbach

 

출연
아담 드라이버
Adam Driver
그레타 거윅Greta Gerwig
돈 치들Don Cheadle
래피 캐시디Raffey Cassidy
샘 니볼라Sam Nivola
메이 니볼라May Nivola
조디 터너-스미스Jodie Turner-Smith
안드레 3000Andre 3000
라르스 아이딩어Lars Eidinger
알렉산드로 니볼라Alessandro Nivola
마이크 개서웨이Mike Gassaway
매튜 쉬어Matthew Shear
프랜시스 쥬Francis Jue

 

제작|제공 넷플릭스(NETFLIX)
제작연도 2022
상영시간 135분
등급 15세 관람가
공개 2022.12.30

김경수
김경수
《코아르》 영화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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