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7th BIFF] '더 메뉴' 예술가는 오만한 관객과 예술계에 어떻게 복수하는가
[27th BIFF] '더 메뉴' 예술가는 오만한 관객과 예술계에 어떻게 복수하는가
  • 김경수
  • 승인 2022.11.03 11: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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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술과 상업 사이에 서 있을 수밖에 없는 영화의 역설"

〈더 메뉴〉는 예술가가 관객과 예술계에 가하는 잔혹한 복수를 다루는 밀실 호러다. HBO의 드라마 <석세션>의 감독 마크 마이로드가 감독을 맡았고, 차세대 호러퀸 안야 테일러 조이, 여기에 니콜라스 홀트, 랄프 파인즈 등 연륜 있는 스타 배우들이 총출동한 것으로 알려진 이 영화는 국내 개봉을 앞두며 관객들의 호기심을 자아내고 있다.

〈더 메뉴〉는 전설의 셰프 슬로윅(랄프 파인즈)이 무인도에서 운영하는 레스토랑에 마고(안야 테일러 조이)와 타일러(니콜라스 홀트)를 비롯한 열 명의 사람이 갇히면서 생기는 이야기를 다룬다. 초호화 레스토랑이기에 그곳으로 가는 사람들은 음식 비평가, 사업가, TV 프로그램 출연자와 배우 등 부르주아들이다. 처음에 괴상한 음식을 대령하는 괴짜 셰프로만 그려지던 셰프 슬로윅을 보고 사람들이 당혹해한다. 이윽고 그는 정체를 드러내며 결말에 이르러서는 그 레스토랑에 모인 부르주아들의 심판자가 된다. 영화는 음식 코스에 따라서 챕터를 나누며, 셰프가 정체를 드러내기까지 정보를 탁월하게 조절한다. 코스가 진행될수록 레스토랑은 이유도 없는 아수라장이 되어가고, 사람들이 하나둘씩 죽어 나가기 시작한다. 챕터가 진행될수록 온갖 반전이 드러난다.

그리고 그가 아방가르드 예술가와 비슷하다는 것이 드러나며, 이 영화는 더욱 깊은 차원의 논의를 만든다.

 

ⓒ 월트 디즈니 컴퍼니

사실 상업 영화에서 아방가르드를 바라는 것은 헛된 기대다. 평생 MTV를 경멸했던 '커트 코베인'은 MTV의 전성기를 이끈 스타가 되었고, 그 모순을 견디지 못하고 1994년 4월에 죽었다. 이듬해에는 마지막 아방가르드 예술가로 불린 상황주의 인터내셔널의 수장 '기 드보르'가 자살로 삶을 마감했다. 또 혁명가 체 게바라의 얼굴은 티셔츠에 프린팅 되어서 불티나게 팔려나갔다. 자본주의는 자본주의에 저항하는 사유마저 제 무기로 삼아서 상품으로 만들고야 마는, 사실상 전지전능한 힘이라고도 할 수 있다. 자본이 모든 것을 판가름하는 기준이 되지 않기를 바랐던 사람들의 저항성과 낭만이야말로 상품으로 팔기에 매력적인 것이기 때문이다. 슬라보예 지젝의 지적대로 "지구의 멸망을 상상하는 것이 자본주의의 종말을 상상하는 것보다 더 쉬운 시대"에서 예술, 특히나 가장 상업화된 영화와 드라마에서 혁명의 전조를 보고자 하는 것은 어쩌면 처음부터 잘못된 시도일 수 있다. 〈오징어 게임〉(2021)과〈조커〉(2019)등 세계적인 흥행작이 나타날 때마다 자본주의의 폐해를 발견해내고, 계급투쟁의 관점으로 독해하고자 하는 비평은 계속 쓰이는 실정이다.

〈더 메뉴〉는 이러한 비평가의 딜레마를 담는다. 그들이 상업 영화에서 발견하고자 하는 전복적인 상상력을 영화에 그대로 구현하되 비평가 혹은 시네필을 조소하며 그들에게 가학적인 쾌감을 안긴다. 무엇보다 〈더 메뉴〉가 디즈니 산하의 제작사 서치라이트 필름에서 제작된 영화라는 사실이야말로 이 영화를 역설적인 위치에 서 있게 한다. 〈더 메뉴〉는 자본주의에 저항하는 옛 영화의 자산을 한껏 오마주하고, 예술과 상업 사이에 서 있을 수밖에 없는 영화의 역설을 식당이라는 한정된 공간에서 재현한다.

영화에서 그려지는 각 코스 요리는 자본주의에 저항하려는 아방가르드 예술의 문법을 모방한다. 영화의 후반부에 이르러서야 관객은 셰프가 커트 코베인과 비슷한 궤적의 삶을 사는 인물이라는 것을 알아차릴 수 있다. 빈민가 출신으로 치즈버거를 굽다가 음식 평론가로 인해서 본인이 원치 않게 스타 셰프가 된 그는 평생 번아웃을 두려워하며 스스로 학대하고 있다는 점에서 그러하다. 이 영화는 저항적인 예술이 어떻게 자본에 의해서 소멸하는지를 셰프의 삶을 통해서 그려내는 동시에 그것을 복원하고자 한다.

<더 메뉴>는 웨스 앤더슨 풍의 미장센을 흉내 내되 앤더슨이 그러하듯이 인공적인 노스탤지어로 퇴행하지 않는다. 오히려 레스토랑을 미술관으로 탈바꿈한다. 슬로윅이 대령하는 각 코스 요리는 사람들이 흔히들 생각하는 현대 미술의 이미지를 그대로 쓴 것이며, 그의 설명은 카탈로그와도 같다. 빵이 없는 소스의 경우는 재현 대상이 부재하는 추상회화를, 바다 풍경을 그대로 플레이팅 한 코스는 설치 미술의 어법에 따르고 있다. 또한, 행위예술가 '마리나 아브라모비치'의 자기파괴적인 퍼포먼스 예술을 모방하는 뻔뻔함도 이 영화의 장점이라 할 수 있다. 무엇보다도 영화의 결말은 "서서히 사라지기보다 한 번에 타버리는 것이 낫다"라는 커트 코베인의 말을 연상하게 한다. 영화는 저항적 아방가르드 예술이 실패하는 메커니즘을 선명하고 명확히 전달하되, 예술가가 그것을 무시하는 수용자들을 처단하는 방식으로 그 예술의 가치를 역설하고자 한다. 이 영화는 실험적인 연출을 도입하지 않고, 장르적 문법으로 세계와 불화하는 예술이 처하는 딜레마를 있는 그대로 소개하고자 한다. 매끄러운 연출은 감독의 자의식이 과하게 드러날 수도 있는 것을 감춘다.

 

ⓒ 월트 디즈니 컴퍼니

〈더 메뉴〉를 보고 곧장 떠오른 작품은 루이스 부뉴엘의〈학살의 천사〉(1962)다. 루이스 부뉴엘은 부르주아의 속물성이 가장 잘 드러나는 장소를 '식탁'이라 보았다. 식탁은 가장 은밀한 형태의 모임 장소이기도 해서 권력자들이 저마다의 이해관계에 따라서 결탁하기에 유리하다. 부뉴엘은 〈비리디아나〉(1961)에서 레오나르도 다빈치의 「최후의 만찬」을 패러디하며 이를 비꼬았으며, 후기 3부작에서는 어떠한 방식으로든 그들의 식사를 방해하려 한다. 〈학살의 천사〉는 문이 닫혀서 열리지 않는 파티장을 배경으로 한다. 이 파티의 참여자들은 보이지 않는 존재로부터 아무런 이유도 없는 죽음을 당한다. 이는 부르주아들에 저항하는 부뉴엘만의 방식이다.〈더 메뉴〉는 부뉴엘의 스타일을 그대로 쓰되 그것을 현대화하는 데에 집중한다. 감독은 밀실 호러의 문법을 따라서 부조리한 상황을 한층 더 두드러지게끔 연출한다.

다만, <더 메뉴>가 자본에 의해 주체성을 박탈당한 예술가를 구원하는 방식은 순진하다. 셰프의 과거를 알아차리는 것은 같은 서비스 노동자 마고뿐이다. 셰프는 작가의 저항적인 예술을 사라지게 하는 여러 인간군상(시네필과 비평가, 투자자, 클리셰로 가득한 영화 제작자, 작품을 제대로 감상하지 않는 관객 등)과 함께 자살하고자 그날의 실험적인 코스요리를 마련한 것이다. 미식가 타일러만이 그날 어떠한 일이 생길지를 처음부터 알았다. 돈을 받고 타일러와 동행한 마고는 속았다는 것을 알아차린 뒤에 셰프를 타일러 거기서 탈출하려고 애쓴다. 마고는 셰프의 방에서 그의 과거 이력을 알아차린다. 그녀는 치즈버거를 주문하고, 셰프는 그녀만 섬 밖으로 보낸다.

〈더 메뉴〉의 결말은 이 영화가 시종일관 유지하는 톤과 주제의식에 비해서 다소 감정적이다. 슬로윅의 자학적 퍼포먼스는 이 영화를 배급할 메이저 배급사로 인해서 미학적으로 포장될 것이다. 이는 자본이 얼마나 강력한 것이며, 그것이 예술을 기획하고 있다는 것 외에는 그 어떤 것도 증명하지 않으며, 어떠한 문제도 해결하지 않는다. 이 영화의 고유한 한계야말로 이 영화가 처한 딜레마다. 아방가르드 예술이 더는 불가능하다는 것을 스스로 실패함으로 증명하는 셈이다. 다만 이 영화는 이러한 예술의 은유로만 보기에는 훨씬 풍부한 맥락을 지니고 있다. 이 영화는 한층 더 깊숙한 차원으로 볼 필요가 있다.

 

ⓒ 월트 디즈니 컴퍼니

이를테면 영화 초반은 그야말로 흥미롭다. 슬로윅의 레스토랑으로 가는 길에 안내원이 무인도의 자연 풍경을 하나씩 소개하며, 공간과 거기서 나오는 음식 재료를 소개한다. 다만 안내원이 공간을 소개하는 방식은 영화의 장소를 설명한다기보다, 게임의 맵을 설명하는 방식에 가깝다. 초반부만을 볼 때는 이 영화가 〈오징어 게임〉와 비슷한 서바이벌 게임일 수 있겠다고 느꼈다. 이윽고 슬로윅의 어머니를 포함한 열두 명의 손님이 제자리에 착석하자마자 출구가 봉쇄된다.

영화에서 폐쇄적인 공간인 레스토랑과 밖은 단절된다. 이후로 자연과 문명이라는 이질적인 공간의 매개자로 예술가를 내세운다. 셰프도 계절과 생태계를 강조해 그것을 감상자가 느끼기를 바란다. 예술가만이 자연을 이해할 수 있는 사람이기에, 자연을 아름다운 것으로 가공해 전달할 수 있다는 것이다. 셰프로 드러나는 예술가상은 19세기의 낭만주의 시기에 등장했던 천재의 클리셰를 모방하는 듯하다가 전환된다. 셰프는 생태계의 순환에 따라서 인간이 그 순환에 따라야 한다는 자연친화적인 사고를 아방가르드적인 것으로 포장한다. 영화의 진짜 의의는 아방가르드를 다룬다는 데에 있는 것이 아니라, 저항적인 상상력의 기원을 생태계로부터 발견하고자 하는 데에 있을지 모르겠다.

〈더 메뉴〉의 레스토랑은 설정상의 허용이겠지만, 독자적인 생태계 아래서 모든 식재료가 생산되고 있는 곳이다. 또한 그것을 만드는 셰프들은 생태계의 흐름에 따라서 일목요연하게 움직인다. 생태계가 무한한 만큼 예술로 가공할 수 있는 질료도 무한하며, 생태계를 이해하는 것이 곧 예술을 이해하는 것이 된다. 이러한 생태학적인 상상력은 영화의 결말을 다르게 보이게 한다. 부르주아들이, 불타야만 하는 이유는 창 바깥의 전지전능한 자연을 매개하는 슬로윅이 그들을 응시하고 있어서다. 이때 예술을 학술적인 언어를 통해서만 이해하고 의미화할 수 있는 예술계에 속하지 않은, 예술에 대한 환상이 없이 질료의 맛을 있는 그대로 느끼고자 한 마고만 살아남는 것도 이런 맥락에서 이해할 수 있다.

그렇기에 난 이 영화를 '예술을 지켜야 하는 이유가 생태계를 지켜야 하는 이유와 마찬가지라고 역설하는 생태학적인 상상력을 지닌 영화'로 보고 싶다.

[글 김경수, rohmereric123@ccoart.com]

 

ⓒ 월트 디즈니 컴퍼니

더 메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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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독
마크 밀로드
Mark MYLOD

 

출연
랄프 파인즈
Ralph Fiennes
안야 테일러 조이Anya Taylor Joy
니콜라스 홀트Nicholas Hoult
자넷 맥티어Janet McTeer
쥬디스 라이트Judith Light
존 레귀자모John Leguizamo
아미 카레로Aimee Carrero
홍 차우Hong Chau

 

제작연도 2022
상영시간 107분
공개 제27회 부산국제영화제(2022.10.05~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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