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7th BIFF] '벼랑 끝의 남매'가 관객에게 좌절감을 안기는 방법
[27th BIFF] '벼랑 끝의 남매'가 관객에게 좌절감을 안기는 방법
  • 변해빈
  • 승인 2022.10.24 11: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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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가피한 선택에 의한 고통은 누구의 몫인가"
ⓒ 부산국제영화제

<벼랑 끝의 남매>는 요시오(마츠우라 유야)가 부둣가를 배회하는 장면으로 시작된다. 그는 한쪽 다리를 절면서 자폐 스펙트럼 장애를 지닌 동생 마리코(와다 미사)의 행방을 찾고 있다. 경찰 친구의 우려에도 요시오는 실종신고 따윈 불필요하다고 장담하고, 해가 저물어서야 마리코는 낯선 남자의 차를 타고 귀가한다. '일단' 마리코의 실종 방지 목걸이에 적힌 요시오의 연락처가 제 역할을 해낸 것처럼 보인다. 그리고 관객이 안심할 즈음 요시오는 마리코의 행방을 찾아준 낯선 남자가 그녀를 강간한 혐의를 알게 된다. 그러나 이후 요시오가 선택한 것은 마리코의 주머니에 든 지폐다.

여기까지 봤을 때, 가타야마 신조의 국내 개봉작 <실종>(2022)을 본 관객이라면 몇 가지 연결고리를 발견하게 된다. 육신을 결박하는 밧줄, 가난의 잔혹함, 불운한 가족의 파멸, 무기화되는 두려움과 절망감, 신체적 결함에서 비롯된 범죄로의 비극적 유입, 실종 사건(사라짐)과 강박적인 육체의 노출이 일으키는 엇박, 비등비등한 갈래에서의 선택의 문제... 감독의 장편 데뷔작인 <벼랑 끝의 남매>의 주요 테마들은 <실종>에서 난폭하지만 비교적 봉인되어 온 인간 근원의 악마적 본성을 통렬하게 폭로하는 용도로 정돈된다.

그러나 가타야마 신조가 <실종>에서 보여준 명백한 선악의 구별, 과잉 소비되는 가학성이나 악행에 대한 감독 자신의 인정은 <벼랑 끝의 남매>에선 좌절된다.

 

ⓒ 부산국제영화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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쾌락과 절망의 자리 맞바꾸기

<벼랑 끝의 남매>에는 폭력과 학대, 성매매, 분뇨, 살인미수, 위악과 위선을 비롯한 온갖 혐오스러운 것들이 가리지 않고 등장한다. 그러나 이 영화의 가장 큰 좌절감은 혐오스러운 이미지를 벗어난 지점에서 온다. 요시오는 마리코의 외출을 제한하는 족쇄인 (기존의 밧줄보다 엄격한) 쇠사슬을 풀어주는 조건으로 그녀를 성매매에 동원한다. 본격적으로 1인 성매매 사업에 뛰어든 요시오는 가장 먼저 핑크색 종이에 전화번호와 선정적인 문구를 한데 알록달록하게 장식해 명함을 만든다. 마리코는 그게 무슨 용도이고 얼마나 폭력적인 물건인지 인식하지 못한다. 단지 종이의 화려함에 매혹되어서는 요시오를 도와 동네 여기저기로 배달한다. 그 자체로도 가혹한데 감독은 기어코 명함을 무더기로 공중에 흩뿌리고선 카메라 위로 떨어지는 그것들의 추락을 슬로우 모션으로 지연해가며, 여러 각도에서, '아름답고 해방감 있게' 포착한다. 마치 꽃잎이나 종이 폭죽을 다루듯이. ​이런 상황은 마리코가 성매매에 동원되는 장면이 펼쳐진 뒤 줄탁동시로 바짝 붙어서 따라온다. 예컨대 요시오가 마리코의 꾀죄죄한 얼굴을 씻기고 색조 화장을 입히는 장면, 동생의 생식기를 손수 치료해주는 장면, 그녀가 좋아하는 과자를 쌓아놓고 먹어대거나 한밤중 불꽃놀이를 하는 장면이 그러하다.

기괴하게 틈입하는 '아름다운' 광경과 '다정한' 남매의 모습은 섹스, 신음, 나체, 성매매의 과정을 직설적이고 선정적으로 시각화하는 영화의 수위를 조절한다. 당연하게도 폭력성 또한 느슨해진다. 끔찍한 장면 앞에서 잠시만 눈 감았다 뜨면―이때 주체는 요시오와 관객이다―그런대로 버틸 만한 구실이 뒤따른다. 영화는 절망을 견딜 만한 수단을 틈틈이 마련하면서 도리어 고통을 찰나적인 것으로 전복시킨다. 요시오 역시 그런 '아름다운' 순간들도 있기에 언젠가 자신의 어두운 삶에도, 누구에게나 공평하게 주어지는 일광이 스며든다고 오인한다.

영화가 유발하는 가장 큰 오해는 마리코가 낯선 남자들과의 금전적 거래를 통한 섹스에 동의하는 것처럼 재현된 연출 방식에서 비롯된다. 분명 요시오의 성매매 사업이자 가해자와 피해자가 명백한 범죄인데, 한동안 영화는 장애인인 마리코도 섹스를 즐기고 욕망할 수 있다고 주장하는 모양새로 굴러간다. 마리코에게 있어서 이는 단순한 섹스의 문제가 아니다. 마리코라는 캐릭터에게 주어진 '장애'에는 위악을 의도적으로 외면하는 특수한 고의성이 가미되어 있다. 다리가 불편한 요시오보다 '문제를 일으키는 존재'로 치부되는 위계적 관계를 설정해 쾌와 불쾌의 차이, 폭력성에 대한 그녀의 무의식이 요시오가 행하는 범죄의 심각성이나 죄의식의 결여를 보호하는 구조다. 이런 상황에서 마리코에게 강요된 성매매가 진정 섹스의 온전한 쾌락으로 치환할 수 있을까. 장기간 이어진 굶주림을 견디다 못한 마리코가 향이 첨가된 티슈를 달콤한 과자처럼 씹어먹던 모습은 쉽게 잊히지 않는다. 정말 그렇다고 호응하던 요시오의 지나친 긍정도. 쇠사슬에 묶여 굶주리면서 두 사람의 불행의 원인으로 치부되는 마리코의 일생에서 허용된 감정과 욕망은 외출의 해방감과 성적 쾌락(넓게는 에로스=삶의 본능)뿐이다. 그녀에게 자발성을 부여하려면 적어도 하나의 인간으로 대하는 태도, 즉 쾌락과 욕망의 영역을 구분하고 인식할 수 있는 기본적인 환경은 주어져야 했다.

그러나 영화는 이를 철저히 외면한다. 그 방법은 요시오를 비루하고 치욕적인 모습으로 무장시키는 것이다. 그는 자신이 동생을 먹여 살려야 하는 가련한 처지이며 이를 위해선 친구에게 무릎 꿇는 일도 마다치 않는 인물처럼 그려지지만, 실은 동생 때문에 굴욕에 날마다 허덕인다고 스스로 비관하는 존재다. 영화는 그의 완전한 변명을 위해 성매매 현장에서 사각지대를 마련한다. 대표적으로 덤프트럭 장면, 트럭 내부에는 마리코와 트럭 기사가 함께 있다. 문제는 내부에서 벌어지는데 영화는 바깥의 요시오로 향해 그가 트럭 기사의 컵라면을 허겁지겁 훔쳐먹는 비루한 모습을 보여준다. 요시오는 생생한 굴욕감으로 위로받고 진짜 폭력적인 상황에 대한 인지를 흩뜨린다. 납득하기 어렵지만 <벼랑 끝의 남매>는 한편으론 코미디 영화다. 요시오의 굴욕적인 모습은 웃음과 친밀하다. 그는 먹고살기 위해서라면 벌건 대낮에 의도적으로 대변을 보는 일쯤은 개의치 않는다. 오히려 그의 위기 대처 능력이 영웅담으로 포장되기까지 한다. 이러한 영화의 타협 없는 어처구니없음에 극장에 앉은 관객들은 웃음을 터트리고 말았다. 아마 실소거나 비웃음에 가까웠으리라. 중요한 것은 굴욕과 웃음의 화음으로 인해 사각지대에 놓인 마리코의 존재와 고통은, 그럼에도 어떻게든 버틸만한 문제로 하중이 약해진다.

 

ⓒ 부산국제영화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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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패된 달리기 꿈

<벼랑 끝의 남매>에는 두 종류의 달리기가 있다. 적어도 달리기의 문제는 감독의 최소한의 양심의 가책이라 명명할 만하다. 하나는 '요시오의 달리기'이고 다른 하나는 '촬영 카메라의 달리기'다. 전자는 요시오의 꿈속에서 펼쳐지는 허구적 상상이다. 그는 꿈속에서 튼튼한 두 다리로 숨이 차도록 달리고 (한 번도 타본 적 없을) 어린이용 자전거도 실컷 굴려본다. 이 행복한 꿈은 표면적으로 그가 현실로부터 도망치고 싶어 한다는 것을 가시화한다. 마리코는 결국 임신했고 낙태할 돈도 마땅치 않다. 무엇보다 당분간의 생계 수단이 동결됐다. 그러나 그것이 마리코의 문제인가? 근원적으로 그의 달리기 꿈은 남매의 '벼랑 끝'의 사태가 요시오 그 자신이 지닌 다리에 대한 불만족과 결핍, 자기혐오를 인정하기 싫은 방어기제에 기인함을 가리킨다. 방어기제에 의한 ‘도망침'(달리기)이 그의 인간성을 벼랑 끝으로 내몬다. 현실과 동떨어진 욕망을 실감할 때의 깊은 허무와 절망감은 그 욕망의 투명성을 투사의 무기로 전면화한다.

다음은 '카메라의 달리기'다. 마리코는 그녀를 강간한 남자가 준 돈을 보관했던 저금통을 깨서 수술대 위에 오른다(해당 문장에서 그녀가 자발적으로 원한 것은 없다). 믿어지지 않는 불행의 연속에서, 의사가 마리코에게 '합당하고 정당한' 나머지 믿기지 않는 말을 전한다. "도망치지 마" 마리코가 몽롱한 약 기운에 꾼 꿈이거나, 끔찍한 현실에 지쳐 환청이라도 들은 걸까. 실체가 무엇이든 이는 벼랑 끝에 내몰린, 고통뿐인 양극단의 기로에서조차 스스로 결정권을 쥐고 움직이라는 말로 들린다. 그런데 정작 그 말에 역동적으로 호응하는 건 영화의 카메라다. 카메라는 의사의 말을 배반하며, 인물을 담는 의무를 망각하고, 수술실에서 골목으로 황급히 빠져나와 무작정 달린다. 빠르게 배속 처리된 골목 트래킹 샷은 그간 영화가 총체적 파멸로부터 전면적으로 도망치고 있었음을 폭로한다.

도망침이 <벼랑 끝의 남매>가 유일하게 고통을 전시하고 대상화한다는 혐의를 부인하려던 발버둥을 가시화하면서 동시에 보이지 않는 악마의 존재를 인정하는 대목이다.

그리고 다시 부둣가, 그보다 더 높고 위태로운 바위 끝자락. 마리코가 위험천만하게 바다를 보고 서 있다. 영화의 시작에서처럼 동생을 찾아 헤매던 요시오가 그녀를 발견하고선 위험하다며 타이른다. 이번엔 마리코가 '위험한' 바다를 등지고 뒤로 돌아서려는 찰나, 타이밍 좋게 요시오의 휴대폰 벨소리가 울린다. <벼랑 끝의 남매>에서 그의 전화번호로 연락을 취할 이유는 두 가지다. 그러나 우리는 그중 하나, 마리코의 실종 방지 목걸이를 보고 걸려 온 전화가 아니란 것을 안다. 이로 하여금 마리코의 앞뒤로 타나토스(죽음 본능)와 에로스(삶의 본능)가 마주 선다. 두 가지 본능을 어느 쪽에 각각 배치할 것인가. 단서는 이미 던져졌다. 아주 찰나지만 감독은 수중 촬영된 마리코의 헤엄 쇼트를 첨가해 그녀의 능수능란한 수영 실력을 보여준 바 있다.

그러나 영화의 가장 실망스러운 컷, 영화의 종료를 알리는 블랙 화면이 이어 붙는다. 엔딩의 중단은 달리기와 다름없다. 여기엔 무언가를 인정하려는 태도보다 관객에게 전가된 결정권과 그에 따른 무책임함만 남는다. 요시오의 성매매 사업의 촉발점, 곧 경제적 궁핍이 가차 없이 남매의 집 안의 전기를 앗아 암흑(블랙 화면)으로 장악했던 상황이 여기서 또다시 반복되고 만 것이다. 감독이 관객에게 선택의 권리를 넘기고자 했다면, 차라리 질문의 방향은 틀어져야 한다. 열린 결말은 요시오가 두려워하는 것이 무엇인지에 관한 양극단의 실험일 때 당위성을 얻는다. 그런데 마지막까지 죽고 사는 택일의 문제는 마리코의 책임을 우회해서 이뤄진다.

선과 악, 죽음과 비인간적인 삶, 절망과 쾌락, 고통과 욕망의 끊임없는 갈림길을 벗어나 마리코는 차라리 바다로 뛰어들었어야 한다. 만약 헤엄이 실패될지라도 그런 비극적이고 가혹한 삶이 그녀의 삶 자체라는 걸 누군가는 인정해야만 한다. <벼랑 끝의 남매>에서 벌어진 모든 일 중 절망은 마리코에게, 쾌락은 요시오에게로 자리를 되찾아가야 한다. 마리코의 두 다리의 운동성을 온전히 헤엄치는 힘으로 돌려주고 싶다.

[글 변해빈, limbohb@ccoart.com]

 

ⓒ 영화 <벼랑 끝의 남매> 포스터

벼랑 끝의 남매
Siblings of the Cape
감독
가타야마 신조
KATAYAMA Shinzo

 

출연
마츠우라 유야
Matsuura Yuya
미사 와다Wada Misa
키타야마 마사야스Masayasu Kitayama
이와야 켄지Kenji Iwaya
나카무라 유타로Youtaro Nakamura
카자마츠리 유키Yuki Kazamatsuri

 

제작연도 2018
상영시간 90분
공개 제27회 부산국제영화제(2022.10.05~14)

변해빈
변해빈
 몸과 영화의 접촉 가능성에 대해 고민한다. 면밀하게 구성된 언어를 해체해서 겉면에 드러나지 않는 본질을 알아내고 싶다. 2020 제1회 박인환상 영화평론부문 수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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