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달이 지는 밤' 죽음을 소환하는 두 개의 작은 빛
'달이 지는 밤' 죽음을 소환하는 두 개의 작은 빛
  • 김민세
  • 승인 2022.09.27 11:00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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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패의 순간에서 희망의 이미지로"
ⓒ 디오시네마

김종관은 이미지 안에서 사람들을 점점 지워나가는 듯이 영화를 찍어 왔다. <최악의 하루>(2016)에서 은희는 료헤이의 소설 속 가상 인물의 현현인 것처럼 남산 아래를 서성이고, <더 테이블>(2016)의 사람들은 서울 한 카페의 테이블 위를 중심으로 나타나고 사라지길 반복한다. <밤을 걷다>(2018)의 죽은 여자는 한 남자의 꿈에서 간신히 점멸하고, <하코다테에서 안녕>(2019)에서는 기어이 인물이 이미지에서 실종되기에 이른다. 즉, 김종관의 영화에 등장하는 사람들은 금방이라도 사라질 것만 같이 깜빡인다. 그들은 특정 공간 위를 유영하는 유령으로서 김종관의 영화 속을 맴돈다.

반면 장건재는 이미지 안에 사람들을 천천히 새겨나가는 듯이 영화를 찍어 왔다. <잠 못 드는 밤>(2012)은 집이라는 공간과 그 안의 인물들을 밀착시켜 마치 그 공간과 인물이 하나가 된 것처럼 그들의 존재를 담아냈고, <한여름의 판타지아>(2014)의 1부에서 죽음을 앞두고 고조시라는 시골 마을 공간에 고착화되어 있는 사람들을 응시했다. <회오리 바람>(2009)의 마지막 푸티지처럼, 존재와 기억은 하나의 유물로서 남아있다. 장건재는 그 유물로서의 존재를 믿는 듯이 그들이 이미지와 하나가 되는 순간을 기다린다.

다시 말해 김종관의 인물들은 유령으로서 증발하려 하고, 장건재의 인물들은 유물로서 남아있으려 한다. 그 둘이 <달이 지는 밤>의 '무주'에서 만났다. 그리고 함께 죽음에 대해 이야기한다. 둘은 서로 다른 표현방식, 다른 계절, 다른 리듬을 갖고 각자의 서사를 이어 나가다가 일종의 반복이자 '대구'(對句)처럼 보이는 죽음의 이미지로 돌아오고야 만다. 그 두 개의 이미지에서 우리가 보게 되는 것은 김종관의 영화들에서 유령처럼 스스로 사라지고 있던 사람이고, 장건재의 영화들에서 유물처럼 존재를 지탱하고 있던 사람들이다. 전자의 이미지에서 느낄 수 있는 것은 서늘한 공포이고, 후자의 이미지에서 느낄 수 있는 것은 기이한 희망이다.

이렇듯 <달이 지는 밤>의 대구(對句)는 무주라는 설정적인 공간과 죽음이라는 소재 안에서 두 작가의 연출 방식을 비교하는 것뿐만 아니라 죽음을 응시하는 서로 다른 태도와 방식에 대해 생각할 여지를 남긴다.

 

ⓒ 디오시네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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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종관이 연출한 1부의 서사와 장건재가 연출한 2부의 서사는 '산 자가 죽은 자를 소환해낸다'라는 말로 느슨하게 묶여 설명될 수 있다.

1부에서 무당인 해숙은 절반이 무너져 내린 산골의 한 폐가에서 자신의 죽은 딸 영선의 영혼을 불러오려는 의식을 치른다. 의식을 위한 과정에서 김종관은 산골마을과 산속의 풍경들, 그리고 나무에 걸려 있는 천 조각의 이미지들을 집착하다시피 반복시키며 산길을 걷는 해숙이 마치 같은 곳에서 제자리걸음을 하는 것처럼 그려낸다. 이에 따라 영화의 공간이 교란된다. 동시에 김종관은 폐허가 된 집 위에 영선이 살아있던 과거의 이미지와 스스로 목을 조르는 상상적인 이미지, 영혼으로 소환된 환영 이미지를 겹쳐놓는다. 이로 인해 영화의 시간이 교란된다. 무주의 이미지와 영선의 이미지가 반복될 때마다 우리는 선형적으로 따라갈 시공간의 방향을 상실하게 되고 해숙은 그 시공간을 헤치며 필사적으로 영선의 영혼을 찾기 위해 노력한다.

1부에서는 죽음이 직접적인 소재였다면, 2부에서 죽음은 일상적인 삶 안으로 서서히 스며든다. 2부는 무주의 공무원인 민재와 힘겨운 고시 생활을 견디고 있는 경윤의 술자리에서 시작한다. 이때 화장실에 간다며 사라졌다가 다시 돌아오지 않는 경윤의 부재는 죽음의 징조로 남는다. 그리고 민재의 연인 태규의 말에서 죽음과 관련한 이야기가 직접적으로 소환된다. 태규는 돌아가신 할아버지가 한밤중에 집을 서성이는 것을 보았고 할머니의 말을 따라 할아버지가 살아생전 쓰던 모자를 집에 걸어두었던 것, 그 이후로 할아버지는 다시 나타나지 않았고 할머니의 치매 증세는 더 심해져 갔다는 긴 이야기를 늘어놓는다. 민재는 그의 말을 듣는다. 그리고 장건재는 처음부터 끝까지 경청하듯이 그의 말을 응시한다.

1부에서 김종관은 죽은 자를 직접적으로 소환시키며 삶과 죽음의 경계에 놓인 비현실의 세계를 만들어낸다. 그 교란된 세계 속에서 결국 해숙은 영선의 영혼과 만나고 영선은 해숙의 독백을 들은 뒤 서서히 사라진다. 여느 때처럼 김종관의 유령은 자취를 감춘다. 사라지는 영선은 삶 앞에서 후퇴하는 죽음이며 상실의 이미지, 삶과 하나가 되지 못한 실패의 이미지이다. 반면 2부에서 장건재는 일상의 삶에서 죽음의 순간을 자연스레 포착하기 위해 기다린다. 태규와 함께 평범한 하루를 보내던 민재는 이른 아침에 일어나 태규의 할아버지와 할머니가 집 밖을 나서는 환영을 마주한다. 그 두 환영이 도로를 따라 걸을 때, 경윤을 비롯한 수많은 무주의 죽음들이 그들을 뒤따르며 걷는다. 이때 카메라는 영화 속 누군가의 시점을 경유하지 않는다.

여느 때처럼 장건재는 그 존재들만으로 영화를 지탱한다. 물리적으로 현현하여 걸어 나가는 영혼들은 무주라는 공간과 하나가 되는 실재의 이미지, 그들만으로 충분하다는 희망의 이미지가 된다.

 

ⓒ 디오시네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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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달이 지는 밤>에 등장하는 두 개의 죽음의 이미지는 삶과 죽음의 경계에 놓인 세계 안에서 분열하고 그 균열을 다시 봉합한다. 인적 없는 산골의 스산한 인상을 발하는 1부의 겨울 뒤에 마을의 생기 있는 공기를 담아내는 2부의 여름이 찾아오는 것도 그런 생각을 이어가게 만든다. 1부와 2부가 반복과 차이의 형식으로 나란히 놓인 <달이 지는 밤>은 단순히 한 소재와 공간을 각자의 다른 각도에서 보는 관람 방식을 넘어서 서로 간의 이미지를 연결시키고 충돌시키길 요구하며 그 접합과 마찰의 순간에 일어나는 정서를 경험하게 만든다. 그것이 죽음이 현현하는 엔딩에서 아이러니하게도 희망의 이미지를 볼 수 있는 이유이다.

이렇게 명징하게 다가오는 이미지 외에 영화 안에서 간신히 반짝이는 듯한 두 개의 이미지가 있다. 죽음을 소환하는 두 개의 작은 빛. 1부의 해숙은 촛불을 켜고, 2부의 민재는 불꽃놀이를 구경한다. 촛불들이 겨울바람에 불안하게 흔들릴 때, 불꽃은 여름밤의 하늘 위로 떠 올랐다가 이내 사그라든다. 이 작은 빛 앞에서 두 사람(김종관과 장건재, 또는 해숙과 민재)은 서로 다른 방식으로 죽음을 불러온다. 김종관은 해숙처럼 방울을 흔들며 기도하고 장건재는 민재처럼 허공을 응시하며 생각에 빠진다. 그 점멸하는 작은 빛은 희망과 회한의 정서, 출처를 알 수 없는 기이한 노스탤지어를 불러일으켜 숨죽이며 그 순간을 지켜보게 만든다. 어쩌면 '달이 지는 밤'의 어둠에서 죽음을 돌아볼 방법은 그 작은 빛이 피어나는 순간을 기다리는 것이다.

[글 김민세, minsemunji@ccoart.com]

 

ⓒ 디오시네마

달이 지는 밤
Vestige
감독
김종관
장건재

 

출연
강진아
곽민규
김금순
안소희

 

제작 무주산골영화제
배급 디오시네마
제작연도 2020
상영시간 70분
등급 15세 관람가
개봉 2022.09.22

김민세
김민세
《코아르》 영화전문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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