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베이비시터>는 극도로 과잉된 이미지와 사운드를 폭주하듯 쏟아내는 영화다. 숨 가쁘게 전환되는 컷과 정처 잃은 패닝은 극단적으로 확대된 신체들을 집요하게 포착한다. 가슴과 엉덩이에서 시작해 격투 선수들의 육체적 파열이 남긴 혈흔('강인한' 남성성)과 수영 수업에서 유독 강조되던 모성성처럼 신체는 교차되는 사회적 시스템과 영화적 시스템 안에서 끊임없이 포착된다. 본능적으로 여성들의 신체를 관음하는 세드릭(Patrick Hivon)의 시선과 의지와는 상관없이 육아에 지쳐 감기는 나딘(Monia Chokri)의 눈꺼풀은 폭주하는 시청각적 에너지를 감당하는 카메라 렌즈와 성격이 닮았다. 그런 와중에 인물들은 상대에게 한 마디도 지지 않으려는 기세로 끊임없이 말을 쏟아내는데, 또 상대의 말을 제대로 듣지는 않아서 속으로나 할 법한 되묻기의 추임새까지 섞어가며 조금의 틈도 없이 떠든다. 여기에는 세드릭이 성추행한 스포츠 캐스터 샹탈의 경악하는 동공과 외침, 유행어처럼 (재)생산되는 폭력의 언어들이 관객과 어떠한 타협도 없이 침투한다.
시청각적 체험과 감각의 의미
영화는 그것만으론 모자랐는지 에이미(Nadia Tereszkiewicz)라는 과잉 집적체를 등장시킨다. 스트리퍼 출신의 베이비시터인 그녀는 여성의 육체에 관한 노골적인 관음의 시선을 폭로하면서도 자발적인 성애화의 몸짓과 분리된 존재는 아니다. 자신이 착용한 유니폼이 성적 대상화된 페티시즘의 표본이 아니라고 주장하지만, 계급적 우위에 따른 역할극에는 동참하는 이중적이고 중첩된 존재다. 애초에 그녀는 잠투정하는 아기의 칭얼거림을 제지하기 위해 세드릭의 집에 고용된 이가 아니던가. 그런데 에이미는 아기의 수면을 위해 고요하게 숨죽이거나 매사에 조심스럽게 행동하는 법이 없다. 도리어 과감하고 기이한 몸짓으로 다층적으로 정체성을 변조해가며 인물들의 영역에 파고들어 그들의 정신을 현혹하고 각성시킨다. 에이미의 등장 후 영화는 평화롭게 잠이 든 아기의 모습을 근근이 비출 뿐 실제 아기를 위한 보살핌의 현장에는 무관심하다. 극의 후반부 "이제 내가 필요 없어요?"라는 에이미의 물음에 그렇다고 답하는 나딘의 호응이 이어지는 동안 잠투정하는 아기는 두 여자의 안중에 없다. 이러한 에이미의 분열적 위치는 베이비시터의 보살핌이 필요한 영역엔 아기의 울음소리가 아니라 성인 캐릭터들이 행하는 과잉 체험과 언행이 있음을 가리킨다.
에이미의 등장 후, 아기의 울음을 멎게 하듯 영화는 세드릭과 나딘, 장미셸이 각자의 이유로 시청각의 한계에 치닫도록 만든다. 인물들은 관음의 우위를 점하다가도 상대가 인기척을 느끼면 몸을 감추고 숨죽이는 입장이 된다. 대표적으로 장미셸이 커튼 사이로 정원의 에이미를 훔쳐보던 장면. 노래를 작게 흥얼거리는 에이미의 음성은 근방의 아기를 위한 자장가가 아니라 집 내부에서 그녀를 관음하는 장미셸의 귓가에 꽂히는 양태로 관객에게 들린다. 그런데 얼마 안 가 에이미가 누군가의 시선을 느끼고 음정을 무너트리며 괴상한 소리를 내기 시작하는데, <베이비시터>는 과잉과 폭주의 감각들이 막바지에서 갈피를 잃을 때 그 반대편에 환각이거나 꿈결 같은 광경들로 경고음을 울린다.(영화는 이제 비현실적인 감각까지 동원해 과잉의 세계를 확장하기에 이르렀다.) 그것은 대체로 앞서 언급했던 인물들의 산만한 대화와 거대한 성량보다는 누군가의 속삭임과 몰래 나누는 험담, 신경을 건드리는 미세한 입버릇처럼 특정 인물의 개별 감각 내에서 비현실적으로 증폭되는 성질의 것이다. 다시 말해, <베이비시터>는 과잉과 폭주의 체험을 익숙한 감각으로 적응하게 만든 후 도리어 작고 미약하게 속삭이는 반향적 감각을 이 세계의 가장 낯설고 강렬한 풍경으로 느끼게끔 한다. 이는 과감하게 포착하고 강조한 성적 페티시즘으로 가득한 영화가 진행되는 동안, 극의 출발점이기도 한 세드릭의 성추행에 관한 언어("사랑해요. 샹탈!")와 몸짓(포옹과 입맞춤)의 폭력성과 불쾌감을 무의식중에 익숙한 감각으로 포섭하고 타협시키려는 시스템을 풍자하는 시도로 볼 수 있다. 그렇기에 작고 미약한 감각이 과잉과 폭주의 체험을 중단하는 경고음으로 작동하는 현상을 끊임없이 보여주려는 것 같다.
세드릭의 성희롱 사건을 계기로 시작된 '성차별 이야기'(여성 혐오적 시각과 경험을 대단한 업적이라도 되는 것처럼 서술한 책)의 집필은 엉뚱하게 장미셸의 단독 출판 서적으로 세상에 공개된다. 이 장면 역시 물리적으로 도무지 설명 불가한 설정이 구태여 개입되어 있다. TV 프로그램 속에서 인터뷰 중인 장미셸과 그 TV 앞에서 놀이 중인 아기가 영화 프레임 속에 나란히 배치된다. 심지어 아기가 보는 프레임이 TV인지, 장미셸의 모습이 벽면에 설치된 거울이나 액자 프레임에 합성된 가상의 상인지조차 모호하다. 무엇이건 여기서 영상통화의 동시성이 배제되어 있단 가장 하에, 시청자(아기)가 TV 속 인물(장미셸)을 향해 보내는 호응은 자연스럽지만, 그 반대는 현실적인 논리와 물리적 차원에 부합하지 않는 낯선 광경이다. 그런데 이 장면에서 장미셸은 아기의 옹알이가 거슬려 인터뷰를 망친다. 부연하자면, 무슨 말인지 알아들을 수 없지만 존재 자체만으로 더 넓은 세상으로 깨우침을 실천하는 아기의 옹알이가 장미셸이 과시하던 '깨달음’의 말문을 막는다. 아기의 옹알이는 작고 미세하지만, 마치 "학대당한" 여성들의 삶을 "치유하겠다"는 장미셸의 포부야말로 논리와 물리적인 질서에 부합하지 않으며, 그것이 '샹탈들’이거나 '에이미들’이 살아갈 세상으로 유입되게 두어선 안 된다는 호통처럼 들린다.
과잉이 사라진 뒤 남는 것
영화의 마지막 시퀀스에 진입하기 전, 과잉 집적체이던 에이미는 그녀의 몸체를 스스로 스크린에서 지워내면서 여백을 부조한다. 세드릭이 새벽녘에 목격한 에이미는 그녀를 뒤쫓는 눈들(세드릭과 카메라, 관객)과 숨바꼭질이라도 하듯 음험한 기운에 뒤섞여 텅 빈 거리에서 사라진다. 억눌렸던 과잉과 폭주의 경험에 한이 맺힌 유령이 현세에서 내세로 복귀한 걸까. 어리석은 인물들에게 깨달음을 주려고 인간 세상에 잠시 다녀간 정령일까. 이러한 혼란을 걷어낸 거리에는 에이미의 음성이 남아 있다. "어찌나 짧은지 인생의 아름다운 시간이여. 그러니 살자. 불꽃이 우릴 사로잡고 불이 우릴 높이 데려가리. 땅은 땅으로 남네. 하지만 정신은 하늘로 오르네." 모니아 쇼크리 감독은 마지막 한 컷까지 과잉의 실험과 노골적인 위트를 빠트리지 않는다. 다만, 돌연 태도를 바꿔 틈입된 이토록 은유적인 속삭임은 우리가 극장을 나선 뒤, 그래서 <베이비시터>의 시청각적 체험과 감각이 사라진 다음에도 기억해야 하는 무언가를 전하려는 것 같다. 그것은 "아름다운 시간"을 탄복하는 최소한의 경험이 우리의 "짧은" 생애가 남긴 유산으로 지속되어야 함을, 시끄럽고 피로하고 분열된 세상의 흐름 속에서 잊지 않아야 한다는 것이다. 에이미가 사라지는 마지막 순간에 경고하고 호통치려는 것이 있다면 영화의 격렬하고 과격한 시도가 현실화되어야 한다는 단순한 논리가 아니라 이러한 시도들이 영화 바깥에서 지속되는 삶은 문제임을 기억하게 만든다.
[글 변해빈, limbohb@ccoart.com]
베이비시터
Babysitter
감독
모니아 쇼크리Monia CHOKRI
출연
Patrick Hivon
Monia Chokri
Nadia Tereszkiewicz
Steve Laplante
Hubert Proulx
Stéphane Moukarzel
Nathalie Breuer
Patrice Dubois
제작 Amérique Film, Phase 4 Productions
제작연도 2022
상영시간 88분
등급 15세 관람가
공개 제24회 서울국제여성영화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