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컴온 컴온' 다음을 위한 세 가지 질문
'컴온 컴온' 다음을 위한 세 가지 질문
  • 김민세
  • 승인 2022.07.06 11: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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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어의 리얼리즘과 세계의 아카이빙"
ⓒ 스튜디오 디에이치엘

조니(호아킨 피닉스)가 레코더와 붐 마이크를 들고 미국 곳곳을 다닌다. 뉴욕, 로스앤젤레스, 뉴올리언스 등 미국 전역의 아이들에게 각자의 삶에 대해 묻는다. 그리고 각자가 상상하는 미래에 대해 질문한다. 조니의 질문과 아이들의 대답이 레코더에 녹음된다. 그는 때때로 자신의 하루가 어땠는지 말로 정리하는가 하면, (자신이 하고 있는 인터뷰와 관련된) 책의 구절들을 따라 읽기도 한다. 그리고 배경이 되는 도시가 변화할 때마다 챕터를 나누듯이 도시명의 자막이 화면을 가득 채우고, 책 구절의 내레이션이 나올 때마다 출처를 밝히듯이 책의 제목과 작가의 이름이 자막으로 떠오른다. 이렇게 <컴온 컴온>은 수많은 말과 언어들로 둘러싸여 있다.

말을 통해 논픽션 에세이를 써 내려가는 듯한 영화의 형식과 더불어 그 언어들은 영화 이미지에 맞추어 동시적으로 발화되는 말이라기보다는 '증언'의 성격을 띠게 된다.

증언으로서의 언어는 과거로부터 기록되고 미래까지 남아있을 것을 조건으로 한다. 그러므로 일시적으로 존재했다가 사라질 소리를 영원히 기록한다는 조니의 말은, 그가 하고 있는 일을 가장 잘 설명하는 말이다. 동시에 그의 말은 기록의 욕망을 대변하는 자리에 놓일 수 있기도 하다. 세계를 있는 그대로 재현하려는 리얼리즘으로서의 욕망. 세계의 단편을 영원하게 보존하려는 아카이빙으로서의 욕망. <컴온 컴온>의 언어들은 이러한 욕망들의 양태이다. 그리고 그 언어들은 영화의 내용과 형식을 가로지르며 세 가지 질문의 형태로 우리에게 도착한다. '영화는 어떻게 언어와 관계 맺는가' '픽션은 어떻게 현실과 관계 맺는가' '지금 세대는 어떻게 미래와 관계 맺는가'

 

ⓒ 스튜디오 디에이치엘

영화는 어떻게 언어와 관계 맺는가. 이미지라는 존재의 재현. 언어라는 추상 기호. 둘 사이에 절대적인 위계를 따질 수는 없으나, 나름의 틀을 갖기 위해 영화가 언어에 의지할 수밖에 없던 것은 사실이다. 그러므로 어찌 보면 영화의 계보는 특정 부분에 있어서 '언어를 어떻게 이미지화하는가'라는 질문에 따라 이어져 왔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여기서 개별 영화는 딜레마에 마주한다. 이미지가 선행할 것인가. 언어가 선행할 것인가. 전자라면 영화의 힘이, 후자라면 언어의 힘이 강조될 것이다. <컴온 컴온>은 이들의 증언을 강조하기 위해 언어를 선행시키면서도 딜레마의 문제를 통합하는 대안을 내놓는다.

영화에 반복적으로 등장하는 인터뷰 장면들을 짚어보자. 도시의 인서트가 이미지의 자리를 채울 때, 조니와 아이들의 내레이션이 언어의 자리를 메꾼다. 그리고 그 목소리의 출처를 추적하듯이 조니와 아이들이 함께 있는 장면으로 이미지가 컷(Cut)된다. 그러나 지속되는 인터뷰 소리와 이미지는 완벽하게 싱크 되지 못한다. 그다음 이미지로 컷 될 때야 존재의 이미지와 발화되는 언어는 싱크를 맞춘다. 연속적인 내레이션을 중심으로 플래시백과 플래시 포워드를 넘나드는 이미지로도 확인할 수 있듯이, 언어는 존재를 관통하고 존재는 마치 목소리를 따라가듯이 언어의 틀 위를 유영한다.

이미지를 불러오는 언어. 또는 언어를 위해 자리를 내어주는 이미지. 그때부터 <컴온 컴온>은 목소리라는 언어를 위한 리얼리즘을 성취하며 증언으로 작동하는 영화가 된다.

 

ⓒ 스튜디오 디에이치엘

픽션은 어떻게 현실과 관계 맺는가. <컴온 컴온>은 현실에게 직접 질문하는 방식을 택한다. 픽션이 논픽션에게 하는 질문. 호아킨 피닉스가 연기한 가상의 인물인 조니라는 픽션이, 현실 속에 자리한 미국의 아이들이라는 논픽션에게 질문한다. 이에 따라 사전에 합의된 전문 배우가 아닌 일반인들과의 실제 인터뷰 상황에서 촬영된 일련의 장면들은, 픽션에서 느낄 수 없는 생경함을 발한다. 이러한 장면들은 단순히 기능적인 연출적 기교로 사용되는 것이 아니라 아이들과 끊임없이 대화하는 조니, 그리고 조니와 아이들이 이끄는 내러티브와도 일치하기에 효과적으로 극영화 안에 논픽션을 스며들게 한다.

그러나 픽션에 논픽션이 침투한다는 말만으로 <컴온 컴온>을 설명하기엔 부족해 보인다. 오히려 논픽션에서 시작해 픽션으로 이어가거나, 논픽션에 픽션을 얹었다는 표현이 어울리는 듯하다. 인터뷰라는 논픽션이 조니라는 픽션의 원동력이 되기 때문이다. 언어가 이미지에 선행했듯이 논픽션이 픽션에 선행한다. 나아가 언어라는 논픽션과 이미지라는 픽션. 이런 도식을 세우는 것이 가능한 이유는 조니라는 캐릭터의 서사적 움직임뿐만 아니라, 그가 중심이 되는 픽션의 이미지조차 아이들의 목소리에 발을 맞추어 가는 듯한 놀라운 영화적 움직임의 순간 때문이다.

미래를 이야기하는 아이들의 내레이션 위로 죽은 어머니와 교감하는 조니의 과거가 겹쳐질 때, 영화가 끝나고 크레딧이 올라가는 와중에도 끝나지 않는 아이들의 목소리가 들릴 때, 픽션은 논픽션과 박자를 맞춘 뒤 눈을 감는다. 이제 논픽션의 목소리를 들을 사람은 조니라는 픽션이 아니라 우리이기에. 스크린에서 디지털 저장 장치로 수렴하는 아카이빙이 아닌 세계로 넘어와 우리에 닿는 아카이빙.

 

ⓒ 스튜디오 디에이치엘

지금 세대는 어떻게 미래와 관계 맺는가. 결국 <컴온 컴온>이 만드는 모든 질문은 이 질문으로 귀결될 수밖에 없을 것 같다. 필자는 이 질문에 대한 사유를 위해 영화의 또 다른 주인공이라고 할 수 있는 조니의 조카 제시(우디 노먼)의 존재를 한 번도 언급하지 않았다. 사실 앞선 질문들에 대한 사유는 제시에 대한 언급 없이도 이어 나갈 수 있는 것이기 때문이다. 아이들과 아이(제시). 미래라는 하나의 대상과 서로 다른 두 가지 관계의 형태. 그렇다면 질문을 바꾸어서, 영화는 왜 아이들만이 아닌 제시를 필요로 하는가.

조니라는 지금 세대는 아이들에게 질문한다. 아이들은 대답한다. 반대로 제시라는 다음 세대는 조니에게 질문한다. 조니는 대답한다. 다음 세대를 향한 질문의 위치에 있던 조니가 이제는 대답의 위치에 선다. 이렇게 그는 들을 뿐만 아니라 말할 수도 있게 된다. <컴온 컴온>이 제시하고자 하는 지금 세대의 바람직한 태도는 듣기에 있지도, 말하기에 있지도 않다. 듣고 말하기. 또는 말하고 듣기. 그리고 그것이 작은 목소리든 비명이든 간에 모두를 위한 증언으로 받아들이기. 마치 서로를 향해 비명을 지르다가도 이내 껴안고 속삭이는 조니와 제시처럼.

[글 김민세, minsemunji@ccoart.com]

 

ⓒ 스튜디오 디에이치엘

컴온 컴온
C'mon C'mon
감독
마이크 밀스Mike Mills

 

출연
호아킨 피닉스Joaquin Phoenix
우디 노먼Woody Norman
가비 호프만Gaby Hoffmann
스쿳 맥네이리Scoot McNairy
몰리 웹스터Molly Webster
자부키 영-화이트Jaboukie Young-White

 

제작 A24
수입 찬란
배급 스튜디오 디에이치엘
제작연도 2021
상영시간 109분
등급 12세 관람가
개봉 2022.06.30

김민세
김민세
 고등학생 시절, 장건재, 박정범 등의 한국영화를 보며 영화를 시작했다. 한양대학교 연극영화학과 영화부에 재학하며 한 편의 단편 영화를 연출했고, 종종 학생영화에 참여하곤 한다.
 평론은 경기씨네 영화관 공모전 영화평론 부문에 수상하며 시작했다. 현재, 한국 독립영화 작가들에 대한 작업을 이어가고 있으며, 그와 관련한 단행본을 준비 중이다. 비평가의 자아와 창작자의 자아 사이를 부단하게 진동하며 영화를 보려 노력한다. 그럴 때마다 누벨바그를 이끌던 작가들의 이름을 하염없이 떠올리곤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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