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아의 딸' 회복 가능한 삶에 대한 믿음
'경아의 딸' 회복 가능한 삶에 대한 믿음
  • 변해빈
  • 승인 2022.06.27 11: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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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절된 일상을 봉합하는 나란한 몸짓"

홀로 자취 중인 연수(하윤경)는 엄마 경아(김정영)와의 통화에서 방을 검사받는다. 애인이라도 숨겨놓고 자신을 속이는 건 아닌지 노심초사하는 경아를 안심시키기 위해서다. 헤어진 연인과 강압적인 만남이 있던 날 연수는 불편한 마음을 추스르려 엄마의 집으로 향한다. 선명한 방 안의 냉기나 끝맺어지지 않은 불안한 관계의 사물들이 유독 예민하게 신경을 건든다. 그리고 다시 자기 방으로 돌아갔을 때 연수의 방은 전혀 다른 광경으로 변해있다. 촬영물 유포 범죄 피해자의 방이거나 (경아의 울분처럼) 문란한 행실을 일삼는 망신스러운 딸의 방 혹은 그런 낙인에서 영영 빠져나올 수 없는 은둔자의 방.

이제 영화는 이 폐색된 공간에 놓인 그녀를 어떻게 할 것인가.

 

ⓒ 인디스토리

가로로 등져 누운 몸이 있다. 연수가 아무도 모르게 거처를 옮겼단 사실이 알려진 후 어느 정도의 시간을 통과한 다음이다. 몸은 별다른 기척 없이 고요하다. 보편적으로 그것은 디지털 성폭력 피해자의 기력 잃은 몸이라는 인식을 불러온다. 그런데 등져 누운 몸에서 시야를 조금 더 확장하고 보니 끼니를 스스로 챙겨 먹은 듯하고 코미디 쇼를 보며 작지만 분명하게 웃음 짓고 있지 않은가. 물론 문제는 아직 해결되지 않았다. 유포물을 삭제하는 업체에서 계약을 연장하겠냐는 전화가 걸려 오자 연수는 웃음을 거두고 몸을 일으킨다. 이 장면의 낯선 기색은 그녀가 '웃었다'라는 것이 아니라, '웃음을 거두었다'는 사실에서 비롯되어야 한다.

<경아의 딸>이 폐색된 공간에서 시야를 확장하는 방법은 상대의 감정을 측정하고 짐작하지 않으려는 사려 깊은 태도에서 기인한다. 때로 영화의 사려 깊음은 관객에 대한 불친절이나 개연성의 문제로 오인되기 쉽다. 이 영화에서 이러한 오인은 우리가 몰두해야 하는 대상이 인물이 아니라 사건에 있다는 것을 인지해야 함을 상기시킨다. 영화는 연쇄적이고 중첩적인 촬영물 유포 범죄의 실상을 세밀하게 담아낸다. 그 과정에서 당사자인 연수는 지속적인 고통에 직면한다. 지인과 가족에게 유포된 영상은 인터넷상에서 유통되고 스토킹 범죄에 시달리기까지 한다. 더 괴로운 건 자신의 고통을 가장 내밀하게 나누고 보듬을 것 같던 존재 앞에서 오히려 고통의 강도와 범주를 호소하고 인정받아 스스로 코드화된 몸짓을 취해야만 하는 순간들이다.

 

ⓒ 인디스토리

그런데 영화는 연수의 고통을 적나라하게 담아낼 생각이 없다. 다시 말해 한 인물이 느끼는 감정과 심리상태와 거리를 벌리며 디지털 성폭력 범죄라는 사건, 인물을 둘러싸고 벌어지는 상황의 사실성과 심각성에 주의를 환기한다. 연수에게 중요한 것은 피해자의 수동적인 몸짓이 아니라 생존자(survivor)로 나아가기 위한 회복의 운동성이기 때문이다. 영화는 이를 위해 그녀가 또 다른 고난에 직면한 순간이 오면 분주히 장면을 분절시킨다. 예컨대 이런 식이다. 연수가 모르는 번호로 걸려 온 전화를 받는다. 상대는 일방적으로 그녀의 팬이라고 말하고선 전화를 끊는다. 연수는 직전까지 하던 일을 멈추고 또 다른 상황이 벌어졌음을 직감하고선 인터넷에 접속한다. 그녀는 검색창에 자신의 이름을 입력하고 두려움에 망설인다. 우리는 그녀의 망설임과 함께 다음 컷을 예상한다. '인간이 인간을 어디까지 고통에 처하게 만들 수 있을까'에 관해서. 그러나 영화는 연수의 행동을 중단시키고 다음 장면으로 넘어가기를 택한다. 그것이 당장 해결될 수 없는 문제에 부딪혔기 때문이라고 낙담하긴 이르다.

<경아의 딸>이 디지털 성폭력 범죄의 실상을 좇으면서도 포기하지 않는 건, 고통에 직면한 당사자가 혼자만의 슬픔과 좌절, 분노에 잠식되는 시간을 단축시키려는 중단-분절의 시도다. 그렇다고 유포된 영상이 얼마나 무분별하게 퍼져나가는지, 익명을 가장한 가해자들의 폭력이 얼마나 지속해서 벌어지고 있는지를 회피하지 않는다. 폭력의 실상은 연수의 몸과 몸짓을 활용하지 않고, 주변인의 2차 가해 행위를 깨닫게 하는 계기거나 부서진 노트북 화면처럼 사물을 경유해 제시된다. 사건을 구체적이고 과장 없이 묘사하되 피해 당사자를 과도하게 개입시키거나 배제하지 않으며, 범죄의 심각성과 고질적인 제도의 한계를 공고히 한 채 당사자를 한계적 상황에 잠식시키지 않는다. 만약 자신의 의지와 상관없이 무분별한 고난이 지속된다면, 그런 고난을 끊어내는 힘 역시 지속적으로 만들어낼 수 있다는 것을 보여준다.

그런 간절하고 사려 깊은 태도만이 중단된 인물의 행위와 분절된 장면을 봉합하는 영화적 움직임이 된다.

 

ⓒ 인디스토리
ⓒ 인디스토리

연수가 재판을 위해 엄벌 탄원서를 작성하는 동안 카메라는 그녀의 속도에 맞춰 활자가 생성되는 과정을 신중히 따라간다. 분명 그것은 영화가 보여준 것처럼 허위도 왜곡된 내용도 아니다. 그런데 잠시 후 그녀는 쓰기를 중단한다. 이는 파레시아(parresia)로서의 행위가 아니라 고통을 전시하거나 증명해야 하는 도구로 전락했기 때문일까. 혹은 연수의 모든 고통을 대변해줄 수 없다는 허무와 무기력의 표현일지도 모른다. 

<경아의 딸> 속에는 중단된 대목에 이어, 연수가 엄벌 탄원서를 마무리하는 장면이 없다. 대신 그 손은 다른 이들의 손이 써 내려간 글을 건네받는다. 영화는 그것이 엄벌 탄원서라는 정보를 전달하되 구체적인 내용을 전달하지 않는다. 주목할 것은 직장 동료(최희진)와 엄마 경아, 경아의 부탁을 받은 변호사(이채경)를 거쳐 마침내 연수의 손 위에 도달하기까지의 봉합적 움직임이다. 홀로 탄원서를 작성하던 연수의 손 위로―가해자의 처벌 강도를 위해서가 아니라―그녀의 온전한 회복을 염원하는 연대의 기운이 도달했다는 사실만이 회복 가능한 삶의 통로를 이어준다.

사려 깊음이나 연대의 기운이 회복의 통로를 구축한다면, 회복 가능성을 인식하는 힘은 연수 자신으로부터 생성된다. 연수를 향한 피해자 프레임이나 피해자 유발론, '은둔자의 방'에서 벗어나게 만드는 힘은 그녀의 자발적인 선택과 행위에서 비롯되었다. 영화가 미처 담지 못한 시간 속에서 연수는 공간을 옮기고 문제를 해결할 방법을 강구하고 생계를 유지하려 애쓰며 도움의 손길을 스스로 내밀기도 한다. 영화는 경아와 주변인들의 위치에서 연수보다 한 단계 느린 속도로 상황의 진전과 변화를 마주한다.

따라서 연수는 타인에게 자신의 이야기를 발화하는 존재로만 머무르지 않는다. 그녀는 디지털 성폭력 범죄의 생존자를 넘어 동시에 고심하는 누군가의 이야기를 들어줄 수 있는 존재이기도 하다.

화상으로 진행되는 과외 학생과 대면으로 소통하는 일을 단지 학생 수를 늘리기 위한 경쟁과 전략적 시도로서가 아니라, 상대의 고민에 호응하기 위한 용기 있는 행위로 변주시키는 힘은 연수의 자발적인 걸음으로부터 나온다. 그러니 그녀의 마지막 걸음이 주는 감동은 자신의 삶이 회복 가능성을 지니고 있다는 믿음을 만들어내는 것 역시 자기 자신임을 알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더 나아질 것이라는 스스로에 대한 믿음을 지닌다는 것은 얼마나 용기 있는 일인가.

[글 변해빈, limbohb@ccoart.com]

 

ⓒ 인디스토리

경아의 딸
Gyeong-ah’s Daughter
감독
김정은

 

출연
김정영
하윤경
김우겸
이채경
박혜진
이세랑

 

제작 주마등필름
배급 인디스토리
제작연도 2022
상영시간 119분
등급 15세 관람가
개봉 2022.06.16

변해빈
변해빈
 몸과 영화의 접촉 가능성에 대해 고민한다. 면밀하게 구성된 언어를 해체해서 겉면에 드러나지 않는 본질을 알아내고 싶다. 2020 제1회 박인환상 영화평론부문 수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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