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열대왕사'가 포착한 세계의 단면
'열대왕사'가 포착한 세계의 단면
  • 배명현
  • 승인 2022.05.06 11: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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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뷰] "비선형적서사의 근원, 그곳은 세계"

"'이 사건'은 도대체 어디에서부터 시작되었는가?" <열대왕사>가 던진 물음이다. 그렇다면 응당 답해야 할 것이다. 이 사건에 대해 그리고 그 질문에 대해.

이 질문을 더 엄밀하게 들여다보자. '이 사건'이란 무엇을 뜻하는가. 영화 전체를 움직이는 사건. 그야 물론 살인이다. 하지만 그것이 이 영화가 다루는 시간의 전체를 다루고 있지는 않다. 그렇다면 여기서 다시 우리는 생각해야 한다. 우리는 사건의 시작을 어디서부터 볼 것인가.

 

ⓒ 싸이더스

인간은 우연히 이 세상에 던져진 존재이고, 우리는 역사의 맥락 한 가운데 시간의 거친 물살을 견디며 살고 있다. 이곳에 우리는 명확한 것들에 의존하며 살고 있다. 이를테면 선명한 인과관계를 가지는 사건, 나와 오랜 시간 동안 함께 한 가족, 친구, 애인이나 혹은 과학적 사실, 우리의 일상, 내일도 반복될 학교생활이나 직장생활 등등. 우리는 우리가 명확하다고 믿는 것들을 믿는다. 그러나 이것은 말 그대로 믿음일 뿐이다. 결코 객관적 사실이 아니다. 절대로 변화할 리 없다고 (순진하게) 믿고 있는 많은 것들이 허상이라 폭로된 역사 위에 살고 있다. 친가족을 잔혹하게 몰살한 살인범, 계속해서 갱신되거나 재정립되는 과학적 이론, 코로나19로 한 순간에 망가져버린 일상 그리고 정치와 경제 체제. 우리의 믿음은 개인적인 관계에서부터 이 세상을 움직이는 모종의 법칙에 이르기까지 걸쳐있다. 그러나 우리는 현재를 버티기 위해 그런 믿음을 심어주는 반복되는 안정을 사랑한다.

그 때문에 우리는 사건의 명확한 인과를 알 수 없다. 아니, 그 명확한 근원을 알 수 없다. 이 부조리함은 인간을 고통에 빠트리지만, 역설적으로 이 고통 때문에 인간을 살게 하기도 한다. <열대왕사>는 이 부조리의 아이러니를 적나라하게 전시한다. 왕쉐밍(펑위엔)이 후이팡(장애가)의 남편을 차로 치기 전, 도로 위에 앉아있던 소가 없었다면 이야기는 어떻게 되었을까. 아니, 왜 하필 그 도로 위에 앉아 있었을까. 아니, 그 소를 묶고 있던 줄이 더 굵었더라면 그 소는 탈출하지 않았을까. 그렇다면 그 소의 주인은 이 사건과 전혀 연관이 없다고 말할 수 있는 걸까. 이것도 아니라면 후이팡의 남편과 돈 가방의 관계? 아니면 왕쉐밍이 후이팡에게 의도적으로 접근한 것? 물론 이 질문은 무용하다. 왜냐하면 이 모든 질문 자체가 답을 얻을 수 있는 질문이 아니기 때문이다. 인간의 의도와 우연을 세계(복잡계)의 관점에서 본다면 사실 너무나 무의미할 정도로 차이가 없기 때문이다.

심지어 후이팡의 남편이 차 사고가 아닌 총알에 죽었다는 사실(일종의 반전)에 충격을 받는 왕쉐밍과 관객인 우리는 사실 이 작은 지구의 작디작은 알갱이일 뿐 아닌가.

 

 

ⓒ 싸이더스

그러나 이 작은 사건을 영화는 끈질기게 쫓아간다. 그리고 이 시선은 기억의 형태로 기록된다. 우리는 <열대왕사>를 기억의 형태로 관람한다. 기억이란 본디 시간의 엉킴이 아니던가. 뒤죽박죽 섞인 이 기억은 디졸브와 활용으로 전시된다. 기억 A에서 G로 G에서 다시 D로 이 움직임을 이어주는 건 무의식이다. 비선형적 서사로 이루어진 이 시간의 흐름이 서스펜스로 나아갈 수 있는 이유는 바로 여기에 있다. 우리는 이미 알고 있다. 이 영화의 뒤엉킨 이야기의 근원이 세계의 부조리함이라는 사실을. 그리고 여기에 더해진 욕망의 서사는 우리의 몰입도를 한껏 끌어올려 준다. 죄의식적 부채감과 이유를 알 수 없는 고백의 욕망 그리고 타인과 이어지고 싶다는 불안함.

<열대왕사>는 조명과 미장센에만 신경을 쓴 영화가 결코 아니다. 흔히들 왕가위의 초기 영화를 떠올리게 만든다는 소감은 어딘가 미감(美感), 그 자체만을 의미한다는 인상을 지울 수 없다. 이 말에 동의하지 않는 건 아니지만, 그것이 마치 전부인 것 같은 느낌을 받는다. 오히려 필자는 샤이페이 웬 감독의 조명을 영화적 무의식이라 말하고 싶다. 그가 다루는 세계에 대한 이야기와 서사는 극히 '현실적'이지만, 그가 다루는 밤의 형상은 너무나 극명하게 영화적 현실이기 때문이다. 영화이기에 그것이 가능한 현실. 그러니까, 우리가 영화를 본다고 합의한 상태에서 받아들이는 영화 속의 현실이기에 우리는 그 씬을 현실의 세계와는 다른 방식으로 받아들인다.

 

ⓒ 싸이더스
ⓒ 싸이더스

하지만 스크린 안에 있는 인물들은 어떠한가. 그들은(물론 가상이긴 하지만) 낮에 일어나는 현실적 현실과 밤에 벌어지는 영화적 현실을 구분할 수 없다. 그들은 불가항력적으로 세계의 사건에 휘말리게 된다. 인물들에게 '영화적'이란 존재하지 않는다. 오로지 그들의 세계 안에 있을 뿐이다. 하지만 우리는 구분할 수 있다. 다만, 다시 이 영화라는 '합의'로 인해 이상함을 느끼기 힘들다. 이 때문에 샤이페이 웬 감독은 극명한 빨간색과 녹색의 대비를 통해 신랄하게 드러낸다. 관객에게 이것은 '영화'라고. 그러니 이 현실이 아닌 영화의 이야기를 느껴달라고. 그가 전달하려고 하는 세계의 부조리함은 이 '영화적 현실', 다시 말해 이 생경함으로 인해 더 빛을 내게 된다. 그에게 조명은 영상미학적 성취와 함께 영화적 서사 그리고 의미에 있어서 합치되는 훌륭한 장치였을 것이다. 영화 전체를 다루는 시간의 흐름과 기억 그리고 영상미는 모두 이렇게 하나의 중심으로 모인다. 세계의 부조리라는 어떤 것.

그렇다면 이 영화는 세계의 부조리를 '폭로'하기 위한 영화인가. 그렇지는 않을 것이다. 위에서 이미 이야기했듯, 우리는 이 영화를 보면서 이미 (무)의식적으로 느끼고 있었다. 우리가 이미 알고 있는 것에 대해 다시 한번 반복해서 말해주는 영화는 설명하는 영화이다. 영화관은 강의실이 아니다. 영화는 설명하는 순간 지루해진다. 이 영화가 주목한 것은 세계의 작동 방법이지만, 그 끝에서 조금은 특별한 변곡점을 만들어 놓았다. 모든 중심 사건이 끝나고 왕쉐밍은 출소한다. 그리고 그는 알 수 없는 표정을 지으며 교도서의 문을 나선다. 이때 관객이 바라보는 1점 투시 쇼츠에서 여성 한 명이 보인다. 그녀의 직선 앞에 서있는 왕쉐밍은 머리를 긁으며 다가가지만, 그녀는 후이팡이 아니다. 이건 관객을 향한 의도적인 배신이다. 그리고 위트이다. 이상한 끌림으로 엮인 이 두 사람의 인연은 '기억'으로 끝난다. 그리고 그래야만 이야기가 '완성'된다.

이 완결된 두 사람의 연결 뒤, 왕쉐밍은 달린다. 홀로말이다. 그는 볕을 받으며 웃으며 어디론가 달려간다. 교도관이 언급한 버스를 타기 위해서인가? 아니, 우리는 모른다. 그 이후를 보여주지 않았기 때문에. 그러나 오직 이 사실만은 알 수 있다. 이 부조리한 이야기의 이후는 인간의 의지로 뒤집을 순 없지만, 그렇기에 또 어떤 부조리한 희망을 만날 수도 있을 것이라고. 알 수 없음은 절망으로 귀결되지 않는다. 그것을 결정짓는 것은 이 이후를 산 우리의 '기억'이다. 분명 감독은 이렇게 말하고 있는 듯하다.

[글 배명현, rhfemdnjf@ccoart.com]

 

ⓒ 싸이더스

열대왕사
热带往事
ARE YOU LONESOME TONIGHT?
감독
샤이페이 웬
Shipei WEN

 

출연
펑위옌
Eddie Peng
실비아 창Sylvia Chang
왕연휘Yanhui Wang
장위Yu Zhang
강패요Peiyao Jiang
노흠Xin Lu
진영충Yongzhong Chen
등비Fei Deng

 

배급|수입 싸이더스
제작연도 2021
상영시간 96분
등급 15세 관람가
개봉 2022.04.21

배명현
배명현
 영화를 보며 밥을 먹었고 영화를 보다 잠에 들었다. 영화로 심정의 크기를 키웠고 살을 불렸다. 그렇기에 내 몸의 일부에는 영화가 속해있다. 이것은 체감되는 영화를 좋아하는 이유이기도 하다. 영화를 보다 문득 '아.' 하고 내뱉게 되는 영화. 나는 그런 영화를 사랑해왔고 앞으로도 그런 영화를 온몸으로 사랑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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