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남자는 타이타닉을 보고 싶지 않았다' 이제 무엇을, 어떻게 보아야 하는가
'그 남자는 타이타닉을 보고 싶지 않았다' 이제 무엇을, 어떻게 보아야 하는가
  • 이지영
  • 승인 2022.03.14 11:00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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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뷰] "영화적 레퍼런스가 감각의 빈자리를 채우는 방식에 대하여"

관객에게 일상의 감각을 넘어서 확장 체험하도록 해주는 영화들이 있는 반면, 제한된 감각을 대리 체험하도록 해주는 영화가 있다. 티무 니키 감독의 <그 남자는 타이타닉을 보고 싶지 않았다>는 초반에 후자에 속하는 영화로 보인다. 주인공의 익스트림 클로즈업된 얼굴을 빼면 모두 아웃포커스된, 심도가 극단적으로 얕은 화면, 정체를 알 수 없는 소음, 제어할 수 없는 신체가 땅에 부딪힐 때의 거친 통각들과 같이, 다발성 경화증으로 인해 흉부 아래 감각과 시력을 상실한 주인공이 느끼는 감각들을 스크린 상에 옮기는 한 가지 목적에 충실하다.

영화 제목에서 "보고 싶지 않았다"는 문구는, 보고 보지 않음을 선택 가능했던 야코(페트리 포이콜라이넨)의 과거와 이와 대비된 현재의 처지를 역설적으로 드러낸다. 주인공은 영화 DVD를 수집하는 애호가이자 존 카펜터 감독의 광팬이다. 그가 과거에 제임스 카메론의 <타이타닉>(1997)을 보지 않았던 이유는, 첫째로 누구나 좋아할 법한 뻔한 상업 영화를 보지 않겠다는 씨네필 특유의 오만한 의지 표명이고, 둘째로는 포장을 벗기지 않은 타이타닉 DVD로 자신과 친한 척하는 방문객을 골려 주겠다는 특유의 유머러스한 삶의 태도 때문이다. 영화 컬렉션이 그 사람에 대해 말해주는 것처럼 타이타닉을 보고 싶지 않았던 이유는 과거의 야코라는 인물에 대해 정의해주는 간결하고도 상징적인 명제이다.

 

ⓒ 슈아픽처스

<그 남자는 타이타닉을 보고 싶지 않았다>에서 영화라는 장르와 신체 감각 사이의 관계는 독특하다. 야코의 시각으로 그 앞에 펼쳐진 카오스의 세계를 그대로 전달하는 대신에, 그의 지칠 줄 모르는 영화적 인용들이 빈 공백들을 보완하고 있다. 다시 말해서 그는 그가 오랫동안 마음속에 간직하고 있는 영화적 레퍼런스를 통해서 보이지 않는 세계를 특별하고 비일상적인 영화적 세상으로 재구성하고 있다.

매일 달리기 하는 꿈을 악몽처럼 꿀 정도로 무기력한 일상은 영화를 매개로 한층 다채롭게 채색된다. 이를테면 야코의 유일한 방문자이지만 같이 농담 따먹기를 할 물리적, 심적 여유가 없는 전담 간호사는 <미저리>(1990)의 애니가 되고, 택시 기사는 로버트 드니로의 <택시 드라이버>(1977)로 현현한다. 그가 매일 통화하는 연인 시르파(마르야나 마이야라)는 <에일리언>(1987)의 시고니 위버라고 상상된다. 우리는 야코와 동등한 입장에서 간호사와 택시 드라이버의 얼굴을 보지 못하고, 약자의 돈을 갈취하는 악당들의 얼굴 또한 당연하게도 보지 못한다.

극단적으로 아웃포커스된 부연 화면에 우리가 익히 알고 있는 영화 속 캐릭터의 유령들이 떠돌아다닌다. 이 영화의 텍스트는 본문은 백지이고, 주석만 잔뜩 달린 기묘한 텍스트이다.

그러나 영화사적으로 유명한 캐릭터들이 유령으로 돌아다니는 야코의 세계가 권태롭고 반복적인 실제 세계, 변하지 않는 일상보다 차라리 낫다고 보기는 어렵다. 이것은 대안적 상상에 불과하다. 시고니 위버의 젊은 시절 모습이 아니고 암 투병을 하는 환자의 모습을 한 연인일지라도, 야코는 그녀의 얼굴을 자신의 두 눈으로 보고 싶을 것이다. 시르파는 야코에게 영화 <타이타닉>을 좋아한다고 이야기하며, 영화 속의 잭(레오나르도 디카프리오)도 로즈(케이트 윈스렛)도 아닌, 빙산이 되고 싶었지만 현실로는 '타이타닉 호'가 되었다고 말한다. 타이타닉호는 죽음과 사투하는 두 연인의 처지를 비유한다.

감독의 카메라는 불과 3시간 거리에 살지만 서로 다른 망망대해에서 각자의 빙산에 부딪혀 침몰하는 이 두 연인이 서로에게 가 닿지 못하는 간절한 마음을, 차가운 일상 속 뜨거운 마음을 파헤치고 들여다본다. 전화기를 붙잡고 원격으로 함께 춤을 추고 있을 때는 시르파의 육신이 마치 실재하는 것처럼 환상 혹은 환각으로 나타나고, 그녀의 손이 그의 얼굴을 어루만진다. 하지만 그녀의 얼굴은 끝내 보이지 않는다. 영화 <타이타닉>을 보고 싶지 않았던 과거의 야코는 이제 '타이타닉'(시르파)을 누구보다 간절히 보고 싶어 하는 사람이 되었다. 그렇기 때문에 그는 침몰하는 육체를 다시 일으켜 시르파의 집으로 향하는 모험을 감행한다.

 

ⓒ 슈아픽처스

침몰하는 인간

죽음으로 침몰하지 않기 위해 사투하는 타이타닉들이 서로 만나는 과정은 누구라도 예상할 수 있듯 순탄치 않다. 야코는 이론적으로 다섯 사람의 도움을 받으면 시르파의 집에 도착할 수 있는데, 운 좋게 도박으로 딴 6,000유로로 프로젝터를 사서, 두 사람은 여느 연인들처럼 함께 <타이타닉> 영화를 볼 수 있다. 장애인 전용 택시에 탔을 때 야코는 자동차의 달리는 속도를 창문을 열어 바람을 느낀다. 그리고 자연스럽게 앞으로 내밀어 가상의 핸들을 쥐는 듯한 그의 손을 비추며, 찰나의 해방감에서 오는 극도의 쾌락이 관객에게 전이된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이양선에서 다른 이양선으로 넘겨지는 것처럼 익명의 타인에게 자신의 전부를 맡기는 불안한 상황이 그를 기다리고 있다. 기차역이라는 광장에서 혼란스럽게 들려오는 알 수 없는 노이즈들, 위협적으로 다가오는 행인들의 발걸음, 그리고 다음 익명의 보호자가 오기까지의 상대적으로 영겁과 같은 시간들은 야코만 감당해야 할 것이 아닌 관객도 공유해야 할 몫으로 주어진다.

기차역에서 만난 소매치기나, 야코가 가진 것과 똑같은 스콜피언즈 티셔츠를 입었다고 말하는―진위를 끝까지 명확하게 알 수 없고 아주 잠깐 사이에 스쳐 가지만―남자는 역시 익명의 얼굴 없는 악당이다. 스콜피언즈 남자의 품에서 야코의 휴대폰이 울리는 순간, 그는 그제야 자신이 함정에 빠졌다는 사실을 절망적으로 직감한다. 시력을 잃고 거동이 불편한 야코가 두 건장한 양아치들을 어떻게 이겨낼 것인가? 그것이 가능하긴 한가? 야코가 두 건달과 말로 담판 짓는 장면은 육신의 난투극이 없는 액션 결투씬이다.

 

ⓒ 슈아픽처스

야코는 협상하고, 설득하고, 회유하고, 이들에게 아주 미약하게 살아있는 양심과 죄책감을 자극한다. 신체가 온전한 사람들이 가방엔 영화 DVD 몇 장밖에 없고 도박으로 번 6,000유로뿐이 없는 모든 것을 잃은 남자를 갈취하려는 상황은 사회가 만들어낸 아이러니다. 이들을 중독시키고 파산에까지 이르게 한 마약이, 야코에게는 합법적으로 주어진다는 것도 그러하다. 그리고 건강한 육신을 가졌지만 금전적·정신적으로 파산한 사람들이 육중하고 굳건하게 버티고 있는 그의 의지와 정신 앞에서 그토록 무력하다는 것은 마지막 아이러니이자, 블랙 유머에 가깝다.

야코는 자신이 유일하게 가진 것을 모두 지킨 채로 다시 황망하게 거리 밖으로 나온다. 그는 집에서 한번 쓰러졌던 것처럼 바깥세상에서 또 한 번 땅바닥으로 쓰러지는데, 그 위험한 순간마저도 멀리서 그를 감지한 개를 부르기 위해 영화에 등장하는 개들의 이름을 부른다. 극적으로 구조자를 만나서 이론상 완벽하게 시르파 집 앞에 도착한 이 영웅은 보호자 없이 홀로 당당하게 연인의 현관 앞에 등장한다. 이렇듯 타인의 손을 빌리더라도 자신의 주체성을 끝까지 유지하려는 데서 영화는 한 인간이 필사적으로 지켜낸 존엄을 발견한다.

그리고 야코도, 관객도 그토록 간절하게 보고 싶었던 타이타닉의 형체가 이제 보인다. 시르파의 음성이 야코의 얼굴을 어루만지는 촉각으로 현현하였다면, 이제 그가 "얼굴 좀 보자"하면서 그녀의 얼굴을 어루만질 때, 손에 만져지는 촉감은 시르파의 얼굴 형태로 또렷이 나타난다. 이로써 감독은 감각이 청각에서 촉각으로, 촉각에서 시각으로 전이되는 신비스러운 경험으로 관객을 안내한다.

<그 남자는 타이타닉을 보고 싶지 않았다>는 제한된 감각에서 점차 확장된 감각으로 뻗어가는 영화이다. 두 연인은 얼음장으로 뒤덮인 바다에서 시한부의 시간을 얼굴을 맞대고 견디는 '잭'과 '로즈' 같기도, 기적처럼 두 동강 난 반쪽을 찾은, 온전한 타이타닉 호 그 자체 같기도 하다.

[글 이지영, karenine@ccoart.com]

 

ⓒ 슈아픽처스

그 남자는 타이타닉을 보고 싶지 않았다
The Blind Man Who Did Not Want to See Titanic
감독
티무 니키
Teemu Nikki

 

출연
페트리 포이콜라이넨
Petri Poikolainen
마르야나 마이야라Marjaana Maijala
마티 오니스마Matti Onnismaa
사물리 야스키오Samuli Jaskio
라미 루시넨Rami Rusinen

 

수입|배급 슈아픽처스
제작연도 2021
상영시간 82분
등급 12세 관람가
개봉 2022.03.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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