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년기획] '얼굴들'을 풍경으로 보기
[신년기획] '얼굴들'을 풍경으로 보기
  • 이현동
  • 승인 2022.02.07 11: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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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독립·예술영화 비평 특집 ④

신년기획 <코아르CoAR> '한국 독립·예술영화 비평 특집' 네 번째는 이강현 감독의 <얼굴들>이다. 이현동 기자는 '영화에서 풍경이란 무엇인가'라는 화두를 가지고 작품을 심도 깊게 분석한다. 그는 영화의 이미지를 성실히 읽어내면서, 그만의 관점으로 이미지들을 재조합하여 자신의 생각을 관철시킨다. 그는 풍경을 '자연의 경관이나 경치'(landscape)가 아닌 '보기 혹은 바라봄'(sight)으로 해석함으로써, 인물, 사물, 공간, 장소, 빛, 시간, 대화 등 영화 속에 존재하는 모든 영화적 요소에 섬세한 시선을 부여한다. 이러한 응시는 영화가 품고 있는 관계성을 하나하나 풀어나가며 풍경을 객체가 아닌 주체의 위치로 끌어올리는 흥미로운 비평을 만들어낸다. [편집자주]

 

ⓒ 시네마달

 

풍경이란 객체가 주체로 관측될 때

 

내가 풍경을 바라보는 줄 알았는데

풍경이 날 째려보고 있었다는 걸 안 순간 질겁했습니다

내가 성의 계단을 오를 때 내 시선의 높이가 변화면서 풍경이 다르게 보이는 줄 알았는데

줄곧 풍경이 눈빛을 바꿔서 날 바라보고 있었다는 걸 안 순간 빰을 한 대 얻어맞은 듯했습니다.

 

김혜순, 『당신의 첫』 中 <풍경의 눈빛>, 문학과 지성사, 2021.

이강현 감독의 <얼굴들>을 감상 후에 김혜순 시인의 <풍경의 눈빛>이라는 시가 번뜩였다. 이 시에서 풍경은 자신의 존재를 인식하게 하는 존재론적 틀이자 공간의 부름 속에서 자유 할 수 없는 인간을 함의한다. 더 나아가 '본다'라는 행위가 '타자'에게 귀속되어 있음을 지시하는 문장이기도 하다. 실상 그것은 영화라는 풍경을 보는 행위로써의 주체인 관객들에게도 적용된다. 그렇다면 영화에서 풍경은 무엇인가? 영화적인 풍경이란 존재하는가? 언제부턴가 나는 '영화적'이라는 표현이 일으키는 관행적인 소비의 형태와 관습, 그리고 문법들은 풍경의 의미에 대한 물음을 제기하곤 했다. 이 물음에 이 영화는 이런 의미에서 영화적인 것을 배제하면서 사회라는 풍경들을 통해 이를 돌파한다.

이강현 감독은 "'영화'는 한 편의 매력적인 순간을 담는 포토제닉"이라고 이야기한 적이 있다. 이는 영화가 완결된 '그림'의 형태가 아닌 임의적인 형태로의 마주치게 되는 '풍경'임을 선언하는 것이다. 그의 전작들인 <파산의 기술記述>(2006)과 <보라>(2011)는 이러한 풍경들 사이를 배회하고 있는 이미지들을 포착하여 몽타주한다. 파산의 경험으로 삶의 여력이 남아있지 않은 무기력함을 호소하는 사람들의 인터뷰, 이로 인해 급속도로 증가되고 있는 자살에 대한 보도, 산업 재해로 질병을 경험하는 이들과 디지털 기기의 발전으로 밤샘노동을 하며 삶을 기거하는 이들의 아카이브들이 배치된 이미지들은 단순히 사회 시스템의 현재를 고발하는 지점에서 표류하는 것이 아니라 그 현재성을 직시하며 풍경의 이미지만으로 관객들을 설득하는 특권적인 작품으로 도래한다.

 

ⓒ 시네마달

<얼굴들> 속 '풍경의 편린들'

이강현 감독의 <얼굴들>(2017)은 완전한 풍경의 영화이다. 영화에서 서사의 행방은 흐릿하게 그 흔적들을 남길뿐, 관습적으로 기능하지 않는다. 그저 풍경의 변화로 작동되는 등장인물들의 인과관계를 어렴풋이 감지할 수 있을 뿐이다. 제목으로 유추할 수 있는 이 영화의 특징은 분명 '얼굴'일 텐데, 역설적이게도 얼굴들을 부각하는 쇼트는 거의 등장하지 않는다. 실제적으로 얼굴이란 골상의 형태를 영화적으로 묘사할 때 통상적으로 클로즈업(Close-up)을 활용하지만, 영화는 얼굴을 강조하지 않고 오히려 특정한 공간을 줌 인(Zoom-in) 하거나 의미를 관측할 수 없는 장소들을 나열한다. 동명의 영화 존 카사베츠(John Cassavetes)의 <얼굴들>(1968)이 얼굴에서 관찰할 수 있는 모든 것들을 활용하여 인간의 실체가 무엇인지를 드러냈다면, 이강현의 <얼굴들>은 얼굴의 심도가 아닌 풍경의 심도로 전혀 다른 전략을 구상한다.

이를테면 기선(박종환)의 추천으로 화성행궁으로 소풍을 가게 된 진수(윤종석)와 기선과의 식사를 하며 대화에서 관측할 수 있는 건 그들의 얼굴이 아닌 고정된 롱 쇼트로 프레임을 가득 채우는 '풍경'이다. 곧이어 행궁을 배회하는 아이들이 지나간 장소를 천천히 패닝하고 떠난 장소를 정면을 각도로 고정하는 카메라의 시선과 연결되는 진수가 부상을 입게 되는 축구 시퀀스는 다층적인 이미지가 어떠한 에너지가 감독의 관심으로 발화하는지를 탐색하게 한다. 또한 기선이 문화회관으로 직접 취재를 나설 때의 풍경에서 취재 대상인 후원사 대표는 프레임 밖으로 나와 음성만이 간신히 그 현존을 형상화한다. 카메라가 기선이 아닌, 그 오른쪽의 공간을 줌인할 때 필자가 <얼굴들>을 '풍경의 영화'라고 규정했던 그 구별이 더욱 명확해진다.

 

ⓒ 시네마달

<얼굴들>의 앞서 언급한 구성들의 사례는 풍경들의 가변적인 도약으로 나아간다. 몇몇의 장면들이 이어지거나 절단되는 공간의 이음새와 상승과 하강의 운동-이미지, 그리고 밀폐된 공간과 광대한 평면적 공간은 이 영화의 서사를 이끄는 사건이나 인물의 주체성보다 객체인 풍경을 통해 그 구심점을 '영화적인 것'으로부터 탈주하는 데에 그 의의가 있다. 혜진(김새벽)과 택배 기사인 현수(백수장)의 공간을 떠올려보자. 혜진은 직장을 그만두고 엄마의 식당을 리모델링해서 운영할 계획을 세운다. 그녀가 방문하는 장소와 삶의 패턴은 그때부터 음식의 맛을 연구하거나 식당의 풍경을 설계하는 방식으로 전개된다. 이때 완성된 '음식'(형태)을 보여주는 것이 아닌, 각각의 '양념'들을 맛보는 장면은 풍경이 이리저리 분절되어 있는 것임을 암시하는 의도로 구축된 이미지이다. 또 현수의 경우에는 그의 행위가 각기 다른 질량과 부피로 배치된 택배가 가득한 탑 차 안으로, 즉 밀폐된 풍경 안으로 제한된다. 최초에 탑 차 안에서 그의 얼굴의 명암은 그가 갖고 있는 손전등을 통해서만 그 윤곽을 식별할 수 있을 뿐, 그의 풍경은 암전된 형국으로 그 편린들을 묘사한다.

<얼굴들>에서 등장인물들이 처한 풍경의 배열은 교차되거나 서로의 세계를 침범하면서 확대되거나 결합된다. 기선이 행정실 직원으로 일할 때 종석과의 관계가 우연한 계기로 인해 다시금 그 관계가 이어지는 장면, 3년 동안 함께 동거한 혜진과의 관계, 우연히 기선과의 취재를 응하게 된 현수의 풍경은 그 외재적인 것들이 모여 또 다른 풍경을 형성하는 연료로 활용된다. 특히, 이 영화가 갑작스레 개별적인 영화, 혹은 그의 전작들을 상기시키게 하는 순간이 있다. "남편이랑 정말 오랜만에 나들이를 나왔다"라는 내레이션으로 시작되는 이 시퀀스에는 두 가지의 풍경이 현존한다. 미술 속 도시/도시 속 미술이라는 주제가 전시되고 있음을 가리키는 풍경 속에 내포하고 있는 두 가지의 풍경, 즉 '박물관'과 '공원'이라는 인위적인 공간과 자연적인 공간 사이를 비스듬히 표현함으로 그 차이를 불현 중에 인지하게 한다. 이 시퀀스는 2장의 현상수배 포스터의 인물이 남편과의 닮았다는 내레이션에서 마무리되는데, 이러한 구별은 판별할 수 없는 이미지 사이에서 풍경이 그 양면성을 갖고 있음을 드러낸다.

 

 

시간성과 풍경

ⓒ 시네마달

 

풍경들의 미세한 편린 속에서도 이야기가 유지될 수 있는 건 톱니바퀴처럼 맞물리는 시간 때문이다. 시간성은 생성과 소멸이 반복적으로 축적되는 무대이며 이는 <얼굴들>의 이미지를 개시하는 통로이다.

<얼굴들>에서 시간의 흐름을 인식할 수 있는 장치는 '직업'의 변화와 몇몇의 대화로 유추할 수 있다. 기선의 직업이 행정실 직원에서 기자로, 혜진은 직장인에서 식당 주인으로, 진수는 조기 축구 코치로 그들의 역할이 교체되면서 그들의 일상을 축조한다. 이 영화에서 일상은 계속해서 소실되는 점선들과 같다. 그 일상의 점선은 공간을 점멸하기도 했다가 암전 되기도 하는 모호함 속을 인물들은 배회한다. 대표적으로 카메라의 방식의 변화를 이야기하는 장면, 혜진과 선생님의 만남은 시간의 변화가 어떤 삶의 굴곡들이 존재하게 하는지를 관철시키는 장면이라 할 수 있다. 기선이 현수의 앨범을 관찰할 때, 현수가 '액자 아날로그 형식의 필름이 아닌 디지털로 이뤄진 세계'를 이야기하는 것은 그 시간성이 형성한 풍경의 절편에 대한 논구이다. 한편으로 시간성으로부터 기억은 상실되기도 한다. 혜진이 길에서 문득 마주친 서클 활동 선생님은 처음에 자신이 "기억력이 좋은 편"이라고 말하지만, 혜진에 대해서 아무것도 기억하지 못한다. 어렴풋이 기억하는 시골에서의 추억도 혜진으로부터 소환되는 것이다. 풍경은 아무런 방해도 없는 것처럼 잠들어 있는 것처럼 보이지만, 유일하게 이를 유동적으로 현시하는 것은 바로 시간성이다. 풍경과 시간은 주체를 꿰뚫고 도리어 주체가 된다.

페드로 코스타(Pedro Costa)가 조명을 풍경 삼아 찍은 <반다의 방>(2000) 같은 작품에서 떠올릴 수 있는 것이 오로지 빛과 어두움의 명암 안에 깊이 고여 있는 '풍경'이라는 점은 동일하게 <얼굴들>에서도 풍경이란 장치를 끝까지 밀고 나가는 감독의 기획에서 고스란히 적용될 수 있을 것이다. 풍경의 불균질한 배치는 어떠한 중요성도 부여하지 않는 것처럼 보일지라도 김혜순의 시처럼 인간을 향한 응시는 인간을 행위하게 하는 총체적인 작동 원리가 된다. <얼굴들>은 실로 풍경의 영화이지만, 그 몇몇의 대사들을 통해 그 주제와 의도를 확보한다. "원탁 위에 유리 화병, 의미를 담는다는 것은 단순히 아름다움을 만드는 것 이상의 가치를 가질 것입니다"라는 이 영화의 대사는 감독의 기획이 무엇인 지를 설명한다. 타자와의 관계에서 얼굴들 뒤편에 존재하는 풍경은 결국 풍경 뒤에 존재하는 얼굴들인 셈이다. 마지막 쇼트에서 기선의 모습과 배경은 인물과 풍경의 우선순위를 지시한다. 기선이 아닌 풍경이 먼저 명료한 상태로 머물러 있다는 점을 보자. 이는 풍경의 '인물'이자 풍경의 '얼굴들'임을 명시적으로 제기하는 것이며, 영화의 위치를 풍경으로 다시금 환원하는 뤼미에르적 회귀이다.

[글 이현동, Horizonte@ccoart.com]

 

ⓒ 시네마달

얼굴들
Possible Faces
감독
이강현

 

출연
박종환
김새벽
백수장
윤종석

 

제작|배급 시네마달
제작연도 2017
상영시간 132분
등급 12세 관람가
개봉 2019.01.24

이현동
이현동
 영화는 무엇인가가 아닌 무엇이 아닌가를 질문하는 사람. 그 가운데서 영화의 종말의 조건을 찾는다. 이미지의 반역 가능성을 탐구하는 동시에 영화 안에서 매몰된 담론의 유적들을 발굴하는 작업을 한다. 매일 스크린 앞에 앉아 희망과 절망 사이를 배회하는 나그네 같은 삶을 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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