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75 킬링필드, 푸난' 역사의 재현이라는 문제 앞에서
'1975 킬링필드, 푸난' 역사의 재현이라는 문제 앞에서
  • 김민세
  • 승인 2022.02.04 10:42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리뷰] "타자의 불가사의라는 질문, 이야기라는 대답"

1973년, 캄보디아에 주둔하던 미군들이 철수한 뒤 미국과 결탁했던 론 놀 정권은 힘을 잃었다. 반면 론 놀의 친미정권에 대항했던 좌익 무장세력 크메르 루즈는 농민, 공장 노동자, 민족주의 세력들과 함께 사회주의 실현을 꿈꾸며 전국적으로 세력을 넓히기 시작했다. 1975년, 결국 론 놀이 하와이로 망명을 떠나고 캄보디아 수도 프놈펜은 크메르 루즈에게 장악당한다. 이전에 감행되었던 미군의 폭격 작전으로 수도에 밀집되었던 인구들은 크메르 루즈의 명령에 의해 지방으로 쫓겨나게 되었으며, 그 과정에서 반혁명 사상이 의심되는 자들은 무차별적으로 학살을 당했다. 당시에 크메르 루즈가 죽은 시체들을 묻은 집단매장지는 '킬링필드'라고 불리며, 지금까지 발견된 킬링필드는 20,000여 개, 추정되는 사망자 수는 170만 명에서 250만 명에 달한다.

 

ⓒ 그린나래미디어

드니 도 감독의 장편 데뷔작 애니메이션 <1975 킬링필드, 푸난>(2018)은 크메르 루즈의 프놈펜 점령 직전을 기점으로 시작한다. 거리를 메우는 군중들 속에서 평범한 삶을 사는 슈와 그녀의 남편 쿠온, 4살 배기 아들 소반이 이야기의 주인공이다. 이내 공산당 혁명의 시작을 알리는 라디오 방송이 나오고 슈 가족을 포함한 시민들은 프놈펜에서 추방당한다. 이러한 일련의 장면들에서 우리가 눈여겨볼 수 있는 것은 슈 가족이라는 공동체와 캄보디아 시민이라는 군중이다. 영화는 슈 가족의 개인적인 이야기를 중심 서사로 진행하다가도 우리가 보고 있는 것이 한 국가의 국민 전체에게 행해진 독재 정치의 만행이라는 것을 직시하게끔 군중 샷을 지속해서 보여준다. 쿠온을 포함하고 있는 도로의 오토바이 행렬들, 군인들의 명령에 따라 걷는 시민들을 담는 익스트림 롱 샷과 트래킹 샷들이 그러하다.

영화는 이런 방식으로 개인의 이야기를 보편의 역사로, 타자의 과거를 우리라는 현재로, 과거의 유물을 현존의 이미지로 재현한다. 두 번의 세계대전과 진행형인 독재 국가들의 현재. 아우슈비츠의 참상, 난징과 관동에서 벌어졌던 학살, 또는 어쩌면 한국에서 일어난 몇 번의 비극. 대부분의 관객들은 이 영화를 보면서 우리의 과거와 현재를 상기할 것이고, 킬링필드에 대한 배경지식이 있는 사람이라면 군중들의 모습에서 머지않아 시체가 될 그들의 미래를 겹쳐 볼 것이다.

 

ⓒ 그린나래미디어

다른 영화들과 마찬가지로 <1975 킬링필드, 푸난>은 과거의 실화를 다룬 영화들이 넘어서야 할 문제들에 마주한다. 결과를 알고 있는 사건의 서사는 어디로 향할 것인가. 사건의 기록에서 멈출 것인가, 영화라는 재현으로 나아갈 것인가. 최근의 영화 몇 편들을 되짚어 볼 수 있겠다. 라즐로 네메스 감독의 <사울의 아들>(2015)이 아우슈비츠라는 상황 속에 처한 재현의 윤리. 우리는 영화 내내 한 남자의 등과 머리와 얼굴을 보았으나 결과적으로는 그 이상을 보았다. 구로사와 기요시 감독의 <스파이의 아내>(2020)가 난징대학살이라는 사건 앞에 처한 '본다'는 것의 의미. 끔찍한 과거의 푸티지들을 보았다고 믿었으나 세상과 역사라는 시간 앞에서 속았다. 두 영화들과 대면하고 나서 떠오르게 된 질문. 과연 우리는 무엇을 보았는가.

이러한 질문을 갖고 다시 <1975 킬링필드, 푸난>으로 돌아오면 이상한 지점을 발견하게 된다. 우리는 무엇을 보았는가. 제목이 지시하고 있는 1975년을 보았다. 하지만 킬링필드는 보지 못하였다. 영화는 킬링필드, 무참하게 살해당해 묻히는 시체들, 시체들이 타고 남은 잿더미를 보여주지 않는다. 시각화의 윤리적인 문제 이전에 마치 영화 안에서 킬링필드의 역사를 지워내듯이 영화적 시공간을 재구성하였다. 대신 우리가 보게 되는 것은 슈와 쿠온과 소반이며 그들과 함께하는 역사의 피해자들이고 가해자들이다. 이 영화가 역사를 재현하는 방식은 사건이 아니라 사람이다. 이것이 감독 드니 도만의 재현의 윤리이다.

첫 장면으로 돌아가 보자. 필자는 앞서 이 영화가 프놈펜 점령 직전을 기점으로 시작한다고 말했지만 사실 이는 사실이 아니다. 영화의 첫 이미지는 초현실적인 백색의 공간이다. 그 공간 속에서 슈가 등장하고 알지 못하는 누군가의 목소리가 들린다. 슈는 아들 소반의 이름을 부르며 뛰어다니다 검은 실루엣의 사람들에게 막혀 몸부림친다. 이것은 아마 소반을 잃어버릴 슈의 미래에 대한 암시일 것이다. 문제는 슈라는 주인공을 둘러싸고 있는 배경, 즉 타자를 가시화하는 초현실적 방법이다. 이것은 단순한 반복일까. 혹은 슈가 본 환상이나 꿈일까. 핵심 질문으로 돌아오자면 무엇을 보여주는가, 어떻게 보여주는가.

 

ⓒ 그린나래미디어
ⓒ 그린나래미디어

 

배경과 타자는 가상으로서 존재한다. 그렇다면 그 장면은 타자를 불가사의한 것으로 상정하고 지워내고 있는 것이 아닐까.

이를 증명하듯 <1975 킬링필드, 푸난>은 보편으로 나아가다가도 타자를 기이한 방식으로 지워내기를 반복한다. 열을 맞추어 강을 건너던 중 누군가 지뢰를 밟아 폭발음과 물보라가 치지만 누가 죽었는지는 명확하게 확인되지 않고 죽었다는 것도 짐작만 가능할 뿐이다. 노동 수용소의 한 여성이 먹을 것을 얻기 위해 군인에게 강간당하는 딸을 내버려 두자 그 딸은 목을 매고 세상에서 사라진다. 그리고 이와 조응하듯 국경을 넘어 베트남으로 망명하기를 성공한 슈와 소반의 마지막 장면에는 영화 내내 그들을 에워싸던 군인과 수용소 사람들의 행렬 없이 모자 둘만 오롯이 존재한다. 가해자와 피해자라는 타자, 킬링필드라는 불가사의가 지워지고 이야기만 남는 순간이다.

<1975 킬링필드, 푸난>은 타자의 고통이라는 불가사의를 노골적으로 가시화하지 않는다. 오히려 역사의 환유로 기능하는 지극히 개인적인 이야기로 작동한다. 감독 드니 도가 그 시대를 경험한 자신의 어머니에게 들은 이야기로 영화를 만들었기 때문일 것이다. 그러므로 이 영화는 아무리 들여다보아도 알 수 없는 타자의 얼굴, 타자의 역사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이야기라는 것이 필요함을 다시금 깨닫게 해주는 영화이다.

재현을 넘어서서 전복의 순간을 그려내는 것 또한 주목할 만하다. 공산당원 군인들을 창고에 가두고 불을 지르는 부분은 시각적으로도 가장 인상적인 장면인데, 마치 영화의 시공간에서 지워진 킬링필드의 참상을 다시 쓰기의 방법으로 전복하는 듯한 감상을 자아낸다. 애니메이션 영화 또한 시네마라는 것은 당연한 사실이지만 <1975 킬링필드, 푸난>은 잘 만든 애니메이션 그 이상으로 동시대 시네마의 대열에 합류하였다고 말하고 싶다.

[글 김민세, minsemunji@ccoart.com]

 

ⓒ 그린나래미디어

1975 킬링필드, 푸난
Funan
감독
드니 도
Denis Do

 

출연(목소리)
베레니스 베조
Berenice Bejo
루이 가렐Louis Garrel
콜레트 키퍼Colette Kieffer
오드 로랑스 클레르몽 바이버Aude-Laurence Clermont Biver
브리스 몽테뉴Brice Montagne
프랑크 새소노프Franck Sasonoff
에르베 송네Hervé Sogne

 

수입|배급 그린나래미디어
제작연도 2018
상영시간 86분
등급 12세 관람가
개봉 2022.01.27

김민세
김민세
 고등학생 시절, 장건재, 박정범 등의 한국영화를 보며 영화를 시작했다. 한양대학교 연극영화학과 영화부에 재학하며 한 편의 단편 영화를 연출했고, 종종 학생영화에 참여하곤 한다.
 평론은 경기씨네 영화관 공모전 영화평론 부문에 수상하며 시작했다. 현재, 한국 독립영화 작가들에 대한 작업을 이어가고 있으며, 그와 관련한 단행본을 준비 중이다. 비평가의 자아와 창작자의 자아 사이를 부단하게 진동하며 영화를 보려 노력한다. 그럴 때마다 누벨바그를 이끌던 작가들의 이름을 하염없이 떠올리곤 한다.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