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린 나이트'는 어쩌면 영화의 내일
'그린 나이트'는 어쩌면 영화의 내일
  • 배명현
  • 승인 2021.08.31 10: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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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뷰] "뿌리 내린 서사, 돋아나는 서사 - '서사'라는 나무의 생장"

찬사가 들려왔다. <그린 나이트>(감독 데이빗 로워리)에 대한 미학적, 영상 언어적 성취에 대한 다양한 찬사 말이다. 그리고 '데이빗 로워리가 어떻게 신화를 재구성하였는가'에 대한 이야기들이 들려왔다. 필자는 <그린 나이트>를 맞이할 준비를 했다. 다시 <고스트 스토리>(2017)를 관람한 뒤 극장으로 향했다. 영화는 가히 압도적이었다.(너무나 상투적이고 피상적인 표현이긴 하지만 이보다 간명하게 진실을 드러낼 수는 없다) 하지만 부족했다. 이 영화가 부족한 게 아니라 '이 영화에 대한 이야기'가 부족했다. 더 많은 이야기가 필요했다. 그러면 내가 하나를 더하자고 생각했다. 그리고 내가 쓸 수 있는 이야기를 쓰겠다고 마음먹었다.

<그린 나이트>는 원작이 있는 영화이다. 심지어 그 원작이 영화나 소설이 아닌 영국의 구전 설화인 '가웨인 경과 녹색기사' 이야기이다. 그러니까 원전이 너무나도 오래되어 현대 영어도 아닌 중세 영어로 전해져 오는 범대중적인 서사시(톨킨이 처음 현대영어로 해석했으니 그 구문학적 역사는 설명할 필요가 없을 정도) 말이다. 이런 서사를 현재 재구성할 때 대부분의 감독들은 원작이 가진 형태는 최대한 유지하면서, 그 안에 담긴 알레고리를 현재화하여 영화화하는 데 그친다. 수많은 범작들이 그러하다. 이 점은 데이빗 로워리도 포함된다. 하지만 감독은 여기에서 끝내지 않았다. 전작인 <고스트 스토리>에서 보여준 서사적 전복의 성취를 이어나가는데, <그린 나이트>는 전작의 성취에서조차 한 발자국 더 나아갔다.

그리고 필자는 '어쩌면 이 성취가 어쩌면 현재, 오늘의 영화가 가질 수 있는 영화적 서사의 바운더리를 발자국 넓힌 게 아닐까'라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 (주)팝엔터테인먼트
ⓒ (주)팝엔터테인먼트

서사의 변형 - 과거에서 오늘에 도착하기까지

우리가 알고 있는 '이야기'는 어디서부터 시작된 것일까. 거칠게 이야기하면 이야기는 구전설화부터 시작된다. 호메로스의 이야기 「일리아드」와 「오디세이아」가 대표일 것이다. 굵직한 사건을 기반으로 한 '거대한 이야기'가 오늘날 서사의 원형이다. 이 이야기에는 목적과 목표가 명백하게 존재한다. 민족과 국가의 정신을 구현하고 전파하는 것이다. 물론 이런 이야기의 구현이 국가 혹은 군집이 바라는 목표와 이상향을 제시하는 데 그치지 않는다. 사회적 시대적 위계적 총체를 제현한다. 그러니까 이야기 그 자체가 현실의 총체의 재현이다. 이야기는 재현, 그 자체에 뿌리내리고 있다.

이야기, 그 자체가 현실이다. 신이나 인간의 능력을 뛰어넘는 영웅의 존재가 그 현실성을 위반하는 것이 아니다. 이 이야기가 유효했던 그 당시를 생각해보면 그야말로 단순했다. 기술의 발전 속도는 상상 이상으로 느렸고, 군집을 이루는 인구 대부분은 같은 직업을 가지고 있었으며, 이는 대를 이어도 변화가 거의 없을 정도였다. 전쟁과 전염병은 개인이 어찌할 수 없는 거대한 무엇이었으며, 그만큼 개인의 존재는 한계가 명확한 존재였다. 때문에 '영웅'이나 '신'과 같은 인물이 개인을 대신해 전체를 대신해 구성하려 했다. 이 이야기가 전달하는 교훈이나 금기는 보편적으로 유효했다. 이로써 이야기는 '전지'의 입장에서 세계를 구현하려 했고 이 세계를 '전능'의 방향으로 서술함으로 사회 구성원에게 덕목을 제시하거나 방향성을 즉각 제시할 수 있었다.

하지만 오늘날에는 어떠한가. '이야기'라는 것이 세계의 일말을 담을 수 있을지조차 가능한지 의문이 들 정도로 세계는 복잡하고 방대해졌다. 심지어 어제와 오늘이 다르고, 내일이 또 다르다. 그렇기에 '이야기'는 이에 따라 그 모습과 형식 그리고 양태를 바꾸었다. 세계의 총체를 재현하는 것이 완전히 불가능해졌고 이에 당연한 수순을 따르듯 점점 '작은 이야기'들과 '새로운 이야기들'이 탄생했다. 이야기는 이제 개인의 삶이나 내면 혹은 윤리와 같은 '생각할 거리'를 던져준다. 오늘날 우리가 좋은 서사 예술은 '개인 내면에서 생각하게끔 하는 작품'이다라는 문장에는 이런 종류의 무력함 내지는 무기력이 은밀하게 숨겨져 있다.

오늘날 소설(novel)이 새롭거나 신기한 것을 의미하는 'nobella'에서 파생된 단어이며 소설(小說)이 작은 이야기라는 것을 생각해보았을 때, 이렇게 오늘날의 이야기의 특성을 잘 설명할 수 있는 단어가 있을까. 오늘날의 이야기는 더는 실용적이지도 않고 유효한 기간이 그리 길지도 않다. 영화라고 다르지 않다. 100년의 짧은 역사를 가지고 있는 영화는 소설에서 많은 방법론을 빌려왔고 서사 혹은 내러티브의 영역에서 특히나 큰 빚을 지고 있다. 물론, 이제는 영화는 독자적인 이야기 방식과 자존적 장르로서 가져야 할 형식의 형태로서 눈부실 만큼 놀라운 성과를 만들어냈지만 말이다.

 

ⓒ (주)팝엔터테인먼트

<그린 나이트>는 '작은 이야기'라는 고개를 넘어 여행을 계속한다

데이빗 로워리 감독은 14세기의 거대한 이야기를 어떻게 작은 이야기로 바꾸었을까. 위에서 이미 언급했다시피 그는 '개인'의 이야기로 바꾸어놓았다. 본받아야 하는 영웅이 아닌 한 개인의―"아직 준비되지 않았어"라는 노골적인 대사를 하기까지 한―모습으로 바꾸었다. 그러나 이야기의 원형이 그러하듯 '운명'은 그를 가만히 두지 않는다. 그에겐 서사가 필요하다. 그래야 그의 자리를 유지할 수 있다. 그렇기에 그는 목을 베고 일 년 후 길을 떠난다. 준비가 되지 않은 그는 길을 떠난다. 도둑에게 가진 것을 모두 빼앗기고 한 억울한 소녀의 목을 되돌려주기도 한다. 그리고 성주와 그 부인 그리고 정체 모를 노파를 만나기도 한다. 여기에서 그는 경험을 얻는다. 그리고 마침내 그린 나이트를 마주한다.

여기까지가 개별 객체가 얻는 경험, 그러니까 작은 이야기를 다루는 영화이다. 만약 데이빗 로워리가 보통의 감독이었다면 원본에 충실하게 녹색의 기사가 세 번째 도끼를 휘둘렀을 때, 이야기의 진실을 밝히며 끝을 낼 수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로워리는 그렇게 하지 않는다. 그는 이야기를 전혀 이상한 방향으로 끌고 간다. 도망친 가웨인은 삶을 이어간다. 그동안 사랑한 여인이 아닌 익명의 여성과 결혼을 하고 왕이 된다. 그는 전쟁으로 아들을 잃고 민심을 완전히 잃는다. 그리고 결국 성이 함락당하고 목이 잘리게 된다. 대사 하나 없이 비현실적인 점프로 이어지던 삶이 그렇게 끝이 난다. 이것이 하나의 결말이다. 영화 시작에서 불타오르는 그의 얼굴이 바로 이 지점과 연결된다. 영화는 원래 여기에서 끝이 났어야 한다. 하지만 영화를 본 우리는 알고 있다. 이 영화는 그렇지 않다고.

마치 잠시 환상을 본 듯, 가웨인은 정신을 차린다. 무릎을 꿇고 녹색 기사의 참수를 기다린다. 여기서 감독의 전작인 <고스트 스토리>와 공통점을 볼 수 있다. 고스트가 건물에서 뛰어내린 뒤, 고스트는 과거의 시간으로 간다. 그리고 여기서 한 가족을 만나게 된다. 하지만 시간은 다시 점프하여 이 가족이 몰살당하는 모습을 보게 되고, 시간은 자신이 생존해있던 당시로 간다. 필자는 여기서 일종의 환상성 내지는 서사 스토리에서 길을 두 갈래로 나누는 분화를 이야기하려는 것이 아니다. <고스트 스토리>는 이야기가 끝난 지점에서 시간을 거슬러 서사를 잇는 방식을 선택했지만, <그린 나이트>는 분명 결말이 난 바로 여기에서 다시 이야기를 시작한다. 이것은 과거에 후일담 형식으로 일컬어지는 서사의 방식과도 다르며, 선형의 플롯으로는 전혀 만들 수 없는 새로운 차원의 서사전개 방법이다.

 

ⓒ (주)팝엔터테인먼트

이런 삼차원 방식으로 진행되는 이야기가 아예 새로운 것은 아니다. 소설로 말하자면 래이먼드 챈들러, 윌리엄 포크너가 시도한 방식이며, 지금 생각나는 가창 최신의 영화에서는 우에다 신이치로의 <스페셜 액터스>가 있다. 그러나 이런 방식과도 또 다른 점은 '시나리오'에만 근거한 플롯이 아닌 '영상'과 함께 접합되어 만들어진 '영화'의 새로운 방식이기 때문이다. 다시 복기해보자. 가웨인이 환상에서 깨어난 부분은 우리가 모두 알고 있다. 그러나 과언 어디서부터 환상으로 들어간 것일까. 바로 '어디 쇼트부터'를 우리는 대답할 수 없다. 이건 완벽히 의도된 영화적 게임인 것이다. 심지어 감독은 이 게임을 영화가 끝나는 순간까지 끌고 가고자 한다. 쿠키 영상에서 목이 잘린 가웨인의 왕관을 쓴 공주가 보인다. 만약 가웨인이 환상을 본 것이라면 이 공주는 실제인가. 우리는 탈출구를 알 수 없는 미로 속에서 게임을 해야 한다.

이 지점에서 <그린 나이트>는 '오늘의 이야기'(작은 이야기)를 넘어선다. 영화라는 것이 그저 개인의 '취향'에 속한 내면에서 작동하는 소품이 아닌, 탐미의 영역에 존재하는 예술 내지는 사유해야 하는 예술 그 자체의 영역으로 이동시킨다. 영화가 비로소 독자적인 서사예술의 영토 위에 일어설 수 있게 되는 알리바이를 만들어냈다. 이 영화는 분명 '지금, 여기에서' 피어난 이파리 중 가장 끝에 돋아나 있는 영화이다. 크리스토퍼 놀란 감독의 <테넷>(2020)이 선형 플롯으로 만들 수 있는 가장 복잡한 이야기를 갱신했다면, <고스트 스토리>는 선형 플롯 너머에 있는 삼차원의 이야기를 구성해 관객을 그 안에 가두었다. 이 흥미진진한 게임은 앞으로의 서사예술을 더욱더 깊은 지점까지 관객을 끌고 놓아주지 않을 것이다. 데이빗 로워리 같은 걸출한 작가이자 감독이 더 많이 생겨난다면.

[글 배명현, rhfemdnjf@ccoart.com]

 

ⓒ (주)팝엔터테인먼트
ⓒ (주)팝엔터테인먼트

그린 나이트

The Green Knight

감독

데이빗 로워리David Lowery

 

출연

데브 파텔Dev Patel

알리시아 비칸데르Alicia Vikander

조엘 에저튼Joel Edgerton

사리타 초우드리Sarita Choudhury

랄프 이네슨Ralph Ineson

케이트 딕키Kate Dickie

배리 케오간Barry Keoghan

숀 해리스Sean Harris

 

수입 찬란

배급 (주)팝엔터테인먼트

제작연도 2021

상영시간 130분

등급 15세 관람가

개봉 2021.08.05

 

배명현
배명현
 영화를 보며 밥을 먹었고 영화를 보다 잠에 들었다. 영화로 심정의 크기를 키웠고 살을 불렸다. 그렇기에 내 몸의 일부에는 영화가 속해있다. 이것은 체감되는 영화를 좋아하는 이유이기도 하다. 영화를 보다 문득 '아.' 하고 내뱉게 되는 영화. 나는 그런 영화를 사랑해왔고 앞으로도 그런 영화를 온몸으로 사랑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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