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더 파더' 뫼비우스의 띠 안에서
'더 파더' 뫼비우스의 띠 안에서
  • 이지영
  • 승인 2021.04.20 10: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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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뷰] "분절되지 않는 시간의 직조술"

<더 파더>는 평단의 인정을 받은 노련한 극작가이자 영화계에서는 신인 감독으로 데뷔한 플로리앙 젤레가 자신의 연극을 영화화한 작품이다. 그만큼 이 영화는 태생적으로 연극의 DNA를 가지고 태어났다. 이 연극의 주 무대는 '집'이다. 어떤 수식어도 안 붙이고 그저 집이라고 부른 이유가 있다면, 이 무대는 주인공 안소니(안소니 홉킨스)의 집이자 그의 딸 앤(올리비아 콜먼)의 집이기도 하며, 또 다른 역할을 부여받기도 하는 무정형의 공간이기 때문이다. 영화가 시작되면 형식적으로 눈에 가장 띄는 것은, 인과 관계도 없고 선형적이지도 않은 시간의 흐름일 것이다. 관객은 오직 주인공 안소니의 당혹스러운 반응과 공간의 미묘한 변화들로만 그것을 감지할 수 있다. 보통 연극에서는 때때로 막이 내리고 인테리어와 소품을 재배치함으로써 극 중 시간이 다른 시점으로 이동했다는 것을 관객들에게 알린다. 감독은 이렇게 관객에게 직접적 힌트가 되는 시간의 분절을 제거하는 대신에 공간이 스스로 변화하는 것처럼 매끄러운 이음매를 만들어서 가장 영화적이라고 할 수밖에 없는 DNA를 심는다. 그리하여 집은 안소니의 의식과 무의식이라는 추상적인 공간으로 탈바꿈한다. 이제 안소니가 살고 있는 멋지고 아늑한 집은, 스스로 변모하고 위장하면서 그의 정신을 교란하는 공포스런 생명체가 된다.

 

ⓒ 판씨네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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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 파더>는 알츠하이머를 앓고 있는 노인이 어떻게 일상적인 도전과 좌절을 겪게 되는지를 철저히 노인의 1인칭 시점에서 체험하도록 한다. 80대의 안소니를 연기한 안소니 홉킨스는 오직 자신을 위해 만들어진 캐릭터를 연기하면서 현실과 픽션의 경계를 허무는 착각마저 드는 명연을 선보였다. 이번 영화를 보면서, 대배우 안소니 홉킨스의 깊고 폭넓은 필모그라피 중 가장 먼저 떠오르는 영화는 의외로 1993년 작 <남아있는 나날>(감독 제임스 아이보리)이었다. 이 영화는 가즈오 이시구로의 동명 소설을 원작으로 하고 있는데, 은퇴를 앞둔 영국 대저택의 노 집사 '스티븐스'에게 벌어지는 일을 1인칭으로 묘사하면서 그가 겪는 심경의 변화를 포착한다. 상대역인 미스 캔튼 역은 엠마 톰슨이 맡았다. 미스 캔튼은 스티븐스의 딸뻘인 가정부로, 그의 협소하면서 공고한 세계에 조금씩 균열을 일으킨다. 그리고 그가 바깥세상으로 나가서 제2의 인생을 살도록 도와주려 한다.

자신이 평생 일궈왔고 군림하고 있는 집에서 아버지를 밖으로 밀어내려고 하는 '딸'과, 집(저택)이라는 공간에 집착하면서 가부장적인 주인 의식을 내려놓지 못하는 '아버지'라는 두 인물의 구도. 또 한평생 살아온 방식이 아닌 새로운 방식으로 남은 여생을 어떻게 보낼 것인가에 대한 막막함과 성찰을 던진다는 점에서도 <남아있는 나날>과 <더 파더>는 서로를 관통하는 지점이 있다. 그러나 전작 <남아있는 나날>에서 주인공이 구축한 세계가 몰락하기 직전의 스산한 전조를 품고 있다면, <더 파더>는 그 세계가 완전히 무너져내리는 비극적인 과정, 그리고 폐허로 남은 내면의 풍경을 그렸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 전자에서 미스 캠튼이 일종의 연민과 선의를 가지고 아버지뻘인 스티븐스의 단단한 껍질 깨기에 도전하지만 결국 실패하였다면, 올리비아 콜먼이 연기한 앤은 아버지가 군림한 작은 왕국이 완전히 붕괴하고 형체도 없이 전소되는 것을 지켜본다.

영화가 시작되면 오페라 <아서왕>의 장엄한 아리아에 맞춰서 앤이 아버지 안소니의 집을 방문하러 가는 장엄하고 긴 시퀀스가 이어진다. 그리고 영화의 말미에 앤은 한층 쓸쓸한 발걸음으로 아버지의 공간에서 빠져나오게 된다. 점점 상태가 악화되어가는 아버지 곁에서 수발을 들 때, 그녀는 서양에서 성모를 상징하는 짙은 푸른빛 셔츠와 금빛 귀걸이를 하고 있다. 안소니의 대사처럼 '침몰하는 배'에 뛰어들어 아버지를 구원하고자 한 그녀가 감당해야 하는 인고의 노력은 성스럽기까지 하다. 그러나 똑같이 반복되는 다음 장면에서 앤이 전혀 다른 인간적인 충동과 어두운 욕망으로 돌아서는 장면은 보는 이들로 하여금 혼란과 공포감을 조성한다. 영화가 말하고자 하는 것은 실제로 일어난 일련의 사건이 아니라, 자신을 수발해주는 딸에 대한 감사함과 경외심, 그 이면에 딸이 느끼고 있을 감정에 대한 공포와 불안을 갖고 있는 노인의 심리이다.

 

ⓒ 판씨네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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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이러한 초반의 의식마저도 노인은 점점 잃어간다. 영화는 이를 음악과 미술이라는 언어로 대신 말한다. 그의 세상에서 사라지는 것은 반복적인 리듬, 그리고 기억의 전시장이다. 먼저 음악은 안소니의 삶을 추동하는 고유한 리듬이다. 평소 그는 부엌에서 요리를 할 때에 라디오를 틀고, 오후의 햇살을 받으며 헤드셋으로 좋아하는 오페라를 들었을 것이다. 그리고 이런 비슷한 일상을 수도 없이 반복했을 것이다. 이러한 반복은 뇌신경계 질환을 겪는 환자가 삶을 영위해가는 데 있어서 필수적이다. 예컨대 올리버 색스는 자신의 저서 <아내를 모자로 착각한 남자>에서 틱 장애를 비롯한 뇌질환 환자들이 도움을 받는 규칙적인 리듬, 혹은 수단을 '피드 포워드'라고 부른 바 있다.1) 이 피드 포워드는 아주 간단한 도구일 수도 있고 혼자 흥얼거리는 음악일 수도 있으며, 드럼 같은 악기가 될 수도 있다. 형태에 상관없이 환자들은 그것을 의지하여 자신의 생활을 변함없이 유지하고, 자신의 고유한 인격과 존엄성을 지켜낼 수 있다. 이런 의미에서 안소니가 병적으로 집착하는 손목시계는 바로 피드 포워드 역할을 해주는 사물들 중 하나일 것이다. 안소니가 시계를 감춰두고서 잃어버렸거나 도둑맞았다고 느끼는 것은 알츠하이머가 노인의 시간을 앗아간다는 추상적인 비유일 수도 있겠으나, 그가 스스로 생활의 리듬을 통제할 능력을 상실하고 있다는 증거에 다름이 없다.

엔지니어로 평생을 살았던 그가 새 간병인 로라(이모전 푸츠) 앞에서 탭댄서였다고 본인을 소개하는 장면은 여러 모로 의미심장하다. 탭댄스는 본인이 만들어내는 균일한 박자에 맞추어 완벽하게 신체를 통제할 수 있을 때만 출 수 있는 춤이다. 현실에서는 스웨터 하나도 혼자서 입지 못하는 절망적인 상태의 안소니 자신이 있다. 마치 그의 음반이 갑자기 튀는 소리를 내며 같은 구간을 무한히 반복하듯이, 그의 기억은 문맥을 잇지 못하면서 같은 구간을 계속 맴돈다. 고로 본인을 탭댄서라고 한 노인의 자기소개는 사실 현 상태에 대한 반어법이었음을 알 수 있다. 영화가 치매 환자가 느끼는 시간을 그리는 방식은 마치 에셔가 그린 뫼비우스의 띠를 연상하게 한다. 위로 끝없이 오르는 계단처럼, 안소니가 식사 시간에 앤과 전남편 폴(루퍼스 스웰)의 다툼을 엿들은 장면은 어디서부터가 시작이고 끝인지 알 수 없도록 처음과 끝이 출구 없이 이어져 있다.

알츠하이머가 앗아가는 또 다른 삶의 일면은 그의 미술품들, 즉 전시된 기억이다. 안소니의 집에 있는 많은 그림들은 누가 그리고 걸었을까? 안소니는 둘째 딸 루시의 직업이 화가이며, 지금은 여행 중이라고 간병인에게 여러 번 말한다. 거실 한 가운데 있는 그림은 루시가 발레 하는 어린 날의 자신을 그린 그림이다. 그러나 그림들은 결국 벽에서 끌어내려지고 (앤이 커다란 그림 두 점을 바닥에 내려놓은 것을 보고 안소니는 역정을 낸다) 발레 그림은 흐릿한 흔적만 남긴 채 어디론가 사라지고 만다. 아름다운 그림 대신 노인의 기억 속에 재생되는 것은 가장 버리고 싶은 트라우마틱한 기억이다.

 

ⓒ 판씨네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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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국 영화는 이렇게 묻고 있다. 치매 환자에게 두려운 것이 과연 기억을 잃어가는 것뿐인가? 본인이 의식적으로 상기하는 좋은 시절의 기억은 강제로 철거되고, 무의식 속에 감춰두었던 악몽이 어디선가 튀어나와 매일 밤 출구 없이 되풀이된다. 이것이 가장 무서운 공포가 아니라면 무엇이겠는가? 앤의 집, 아니 '그 집'에 있던 가구와 그림들은 하나둘씩 비워지며, 결국 텅 빈 집에 대한 실제인지 환상인지 모를 장면만이 남게 된다. 이제 노인에게 보이는 전시된 풍경은, 요양원 병실 밖으로 난 커다란 창문 프레임 하나뿐이다. 마지막으로 카메라의 시선이 그 창틀 너머로 이동할 때, 관객은 안소니의 영혼이 집에서 벗어나 서서히 해방될 것임을 어렴풋이 느낀다.

안소니는 이제 혼자서는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유아기로 퇴행한다. 태아에게는 짙은 어둠 속에서 오직 어머니의 온기와 음성만이 들리듯이, 노인의 어린 아이 같은 울음을 달래주는 것은 낯선 얼굴을 한 어머니이다. 그가 다시 안정을 찾는 것을 보면 안도인지 비애인지 모를 달콤씁쓸한 감정이 들게 마련이다. 영화에서 몇 차례 흘러나오는 비제의 오페라 <진주 조개잡이> 중 아리아 <귀에 남은 그대 음성>(Je crois entendre encore) 또한 애상과 그리움 그 위에 깃든 평화가 교차하는 그런 순간을 담고 있다.

영화의 마지막 메시지를 다시 생각해본다. 우리를 보호하기도 하고 가두고 있는 이 조개껍데기는 무엇인가? 스스로 세운 권위, 축적한 부, 명예, 자부심? 무엇이 되었든 노년의 어느 순간에 이르러 그 보호막은 와해되고 부서진다. 그 순간에 껍데기 속에 품고 있던 진주는 어디서 잃어버렸는지, 원래 있긴 했는지도 제대로 의식하지 못하게 된다. 그렇게 흐물흐물한 비선형의 시간 속을 끝없이 미로처럼 헤매는 인간의 말로를, 영화는 그리 애처롭지만은 않게 그리고 있다. 마지막 장면을 다시 상기한다면 영화는 가지의 나뭇잎이 다 떨어질 때까지, 햇살이 있을 때까지는 나가 걸으며 남아있는 나날을 만끽하라고, 오히려 따뜻한 위로를 건네는 것 같다.

1) 올리버 색스, <아내를 모자로 착각한 남자>, 알마, pp.162-177

[글 이지영, karenine@ccoart.com]

 

ⓒ 판씨네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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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 파더
The Father
감독
플로리안 젤러
Florian Zeller

 

출연
안소니 홉킨스
Anthony Hopkins
올리비아 콜맨Olivia Colman
마크 게티스Mark Gatiss
올리비아 윌리암스Olivia Williams
이모겐 푸츠Imogen Poots
루퍼스 스웰Rufus Sewell

 

수입|배급 판씨네마
제작연도 2020
상영시간 97분
등급 12세 관람가
개봉일자 2021.04.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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