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살아남은 사람들> 무기 화합물을 이룬 '어느 가족'의 이야기
<살아남은 사람들> 무기 화합물을 이룬 '어느 가족'의 이야기
  • 이지영
  • 승인 2021.02.23 10: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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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공 상태의 성장 영화가 갖는 한계점에 대하여

헝가리 영화 <사울의 아들>(2015)은 관객을 홀로코스트 현장의 한 가운데로 끌어들여 그 안에서 펼쳐지는 지옥도를 간접적으로 체험하도록 한다. 카메라는 존더코만도(수용소의 시체처리반)인 주인공 사울의 시선에 따라서, 가축처럼 걸어가는 앞 사람의 등에 시선을 고정하였다. 그리고 차마 제대로 쳐다볼 수도 없는 반인륜적인 행위와 죽음의 풍경을 의도적인 아웃포커스로 처리하였다. 그렇다면 이 모든 광기가 소진되고 다시 제로 베이스에서부터 삶을 시작하는 이들은 어떤 삶을 살아갔을까? <살아남은 사람들>은 전쟁의 트라우마와 상처로부터 차츰 고개를 들어 타인의 얼굴을 바라볼 수 있게 되기까지 세대가 다른 두 주인공의 내면의 여정을 그린 작품이다.

 

ⓒ 알토미디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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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차 대전 직후의 유럽에는 부모 잃은 고아와 전쟁 중에 태어난 사생아들이 거리를 떠돌았다. 군수 시설과 공장들은 비교적 덜 파괴되었던 반면, 민간 주택들은 그 피해 규모가 훨씬 컸기 때문에 참전한 유럽 국가들은 만성적인 주택난에 시달렸다. 어쩌면 주인공 클라라(아베겔 소크)는 고아원 신세를 면하고 가족 친지의 집에서 살아갈 수 있었기 때문에 상대적으로 운이 좋은 편에 속했던 것인지도 모른다. 그러나 주택을 가졌다고 해서 소녀가 잃어버린 가정을 돌려받았다는 뜻은 아니다. 유럽의 파괴된 주택들은 대서양을 건너온 외국 자본이 투입되어 겨우 재건될 수 있었으나, 무너진 가정과 피폐화된 정신은 어디서부터 어떻게 재건할 것인지의 문제가 남아 있었다.

이 영화에서 스스로 구원과 정신적 재건을 이끌어가는 주체는 알도(아베겔 소크)가 아닌, 청소년기를 지나고 있는 클라라이다. 알도와 클라라의 관계는 의사와 환자로서의 첫 만남으로 시작된다. 전쟁 전에는 유능했던 산부인과 전문의로서 아마도 직업적 소명에 충실한 사람이었던 것으로 짐작되는 알도는, 전쟁 중에 가족을 모두 잃고 삶의 의욕을 전부 상실한 채, 그저 하루하루 연명하고 있을 뿐이다. 어느 날 그의 병원에 클라라라는 소녀가 찾아온다. 소녀는 월경이 늦어져서 고모할머니 손에 이끌려 병원을 찾는다. 조숙한 클라라의 눈은 영양실조로 인해 검게 그늘이 져 있고, 식욕만큼이나 삶에 대한 의욕도 그다지 없어 보인다. 그러나 소녀는 나중에 혼자서 알도를 다시 한번 찾아온다. 그녀가 들고 온 소식은 자신의 월경이 시작되었다는 내용이다. 클라라가 결국 하고자 했던 말은 자신의 외로움이었고, 이들은 처음으로 포옹을 하게 된다.

중년에 접어든 남성과 사춘기 10대 소녀의 특별하고도 밀접한 관계를 불편하게 바라보는 영화 내적·외적 시선에 대하여, 영화는 응당 그러한 반응을 기다렸다는 듯한 태도를 취한다. 그들의 관계를 '오해'하는 사람들 앞에서 알도는 "혼자인 것이 두렵다고 창녀인 것은 아니야. 나도 두려워"라고 소녀를 위로한다. 환자에 대한 전이 감정과 롤리타 콤플렉스 등, 이 둘의 관계를 삐딱하게 바라볼 해석 방식은 다양하다. 그러나 영화는 '산부인과 의사 알도'와 '이제 막 2차 성징이 발현된 소녀'라는 캐릭터에 전후 시대의 상징성을 부여한다. 전쟁이 휩쓸고 지나간 불모의 땅에서도 다시 무언가를 일구고 수확할 수 있다는 희망을, 특별할 것은 없지만 더없이 따뜻하게 보여주고자 노력한다. 소녀는 알도 곁에서 생활하며 식욕과 지식에 대한 욕구를 되찾고, 또래 이성과의 사랑에도 눈을 뜨면서 소녀에서 독립적인 한 여성으로 성장한다. 점차 양분을 받아 생장하는 장미처럼 소녀의 입술에는 진한 립스틱 자국이, 뺨에는 건강한 붉은 생기가 돌게 된다.

 

ⓒ 알토미디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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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클라라의 '염화물의 비유'처럼 알도와 클라라 단둘이 집에 있을 때, 그들의 관계는 아무리 시간이 흘러도 금방이라도 깨질 듯이 위태롭다. 부재한 아버지의 자리에 알도가, 부재한 아내 혹은 자식들의 자리에는 클라라가 기능적으로 위치하고 있을 뿐, 알도는 언제든 자신에게 상처받거나 싫증이 나서 떠날 수 있는 아이에게 매사 행동 하나에 조심스럽다. 알도의 이러한 신중함 때문에 이들은 어떤 한계에 이르렀을 때 서로에게 더 다가가지 못하고 각자의 자리에서 공회전한다. 대신에 서로의 등을 맞댄 채로 부족한 온기를 채워줄 뿐이다. 유사 부녀 관계의 깊이를 기형적으로 더하는 대신에 그들은 어딘가 불완전하지만, 각자에게 합당하다고 판단되는 또래의 연인을 사랑하기로 '결심'한다. 그렇게 차츰 하나의 대가족을 이루어 이들은 안정된 삶을 찾아가는 듯하다.

느슨하게나마 지속되던 관계도 1953년 스탈린의 사망으로 새로운 국면을 맞는다. 소련의 압제에서 벗어나 새로운 세상이 열릴 것이라는 희망의 전조는 헝가리 뿐 아니라 동유럽 전체를 들끓게 했다. 역사의 제2막이 열릴 것 같은 새로운 앞날의 희망을 암시하면서 이야기는 종결된다. 그러나 실제 역사를 돌이켜 봤을 때, 동유럽인들이 가졌던 희망은 반짝 솟았다가 점차 어두운 퇴로를 걷게 된다. 무소불위 권력을 휘두르던 독재자의 사망 이후, 흐루쇼프가 집권한 소련은 당시만 해도 충격적이었던 탈스탈린주의 노선을 걸었고, 동유럽 각국에도 거대한 변화의 조짐이 보였다. 헝가리에서는 1956년에 이르면 페페처럼 열정적인 학생들이 전국적으로 헝가리 학생 연맹을 조직하고 개혁과 자유를 외쳤다. 자유화에 대한 비전과 희망의 물결은, 뒤이은 헝가리 사회주의 노동자당의 유혈 진압, 1989년 동구권이 몰락할 때까지 아주 서서히 부패해가며 인민들에게 고착된 삶의 패턴으로 자리 잡은 '굴라쉬 공산주의'로 귀결된다. 하지만 영화는 이러한 씁쓸한 역사적 몰락에 대하여 완전히 외면하거나 함구하고 있다.

클라라의 앞날에 이제 많은 선택지가 새롭게 등장하자, 알도는 그녀를 자신의 곁에 붙들고 있던 것이 다름 아닌 공산 치하의 억압적인 환경이었음을 깨닫게 된다. 그동안 알도가 제공한 작은 유리 마개 안에서 살아남은 장미는 이제 밖으로 나가 마음껏 자유의 공기를 마시고 싶어 한다. 알도는 이 연약하고 갈 곳 없는 생명이, 자신이 제공하는 보호막, 즉 유리 마개가 없다면 생존하지 못했을 것이라고 믿고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사실은 자신이 유리 마개를 정성껏 닦는 관리인으로서 여생의 의미를 찾고 있었다는 것을 깨닫는다. 알도는 마치 그동안의 삶이 자신에게 이별을 고한 것인 마냥 화장실에서 몰래 흐느껴 운다.

 

ⓒ 알토미디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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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렇게 영화는 막을 내렸다. 영화는 살아가기 힘들었던 전후 시대를 배경으로 삼고 있지만, 유독 자신의 캐릭터들을 가학적으로 다루는 데 관심이 없다. 몇 번의 크고 작은 긴장되는 순간이 있음에도, 영화 각본은 주인공에게 주어진 시련은 전쟁만으로 충분했다는 듯이 더 이상의 시련을 내리지 않는다. 물론 모든 홀로코스트 및 전후 시대 영화가 인물들에게 가학적이어야 한다는 절대 원칙은 없다. 그러나 인물들의 진실된 모습은 어떤 시험에 들었을 때, 큰 난제가 던져졌을 때 드러난다. 그것이 짧은 러닝 타임의 영화(소설이라면 단편 소설)라면 효과는 더욱 극명하다. 영화는 캐릭터들이 과거 트라우마와 사투하는 문제도, 현재를 살아가는 데 있어서 겪는 궁핍이나 현실적인 어려움도 관객들에게 충분히 납득할 정도로 면밀하게 스케치하지는 않는다. 위기는 늘 문턱 앞에서 걸음을 멈추고 되돌아간다.

시대와 배경을 달리하지만, 같은 '대안 가족'을 그린 <어느 가족>(2018)에서는 가족 구성원들 간의 관계가 유기 화합물처럼 아주 끈끈하게 뒤얽혀 있던 것을 기억한다. 고레에다 히로카즈 감독은 피가 섞이지 않은 어떤 가족의 명과 암, 그리고 아무도 쉽게 답할 수 없는 윤리적 난제를 서슴없이, 그러나 단호하게 던진다. 반면에 <살아남은 사람들>이 그리고 있는 대안 가족은, 마치 유토피아처럼 현실로 존재할 수 없었던 한편의 동화에 가까운 듯하다. 알도의 집은 진공 속의 공간처럼 윤리적으로 무결하며, 인류애로 인해 고결하기까지 하다. 그러나 우리는 이 진공 공간에서 인물들의 진짜 밑바닥의 모습이, 진실된 모습이 무엇인지 알 방도가 없어진다.

'버르너바시 토트' 감독은 어느 순간의 서로의 경계선을 넘지 못하지만, 그 상태로 서로를 떠나지도 못하는 인물들을 그리며 그런 인위적인 조합만으로도 깊은 상처가 치유되고 새로운 가족이 탄생하는 것을 희망적으로 보여주고자 한다. 그러나 '이 가족이 외부 현실의 압력으로부터 차단되었기 때문에 가능한 것은 아니었는가?'라고 의심하는 순간 영화 플롯이 갖는 내생적인 힘, 캐릭터가 갖는 생명력은 반으로 절감된다. 삶을 굳이 빗댄다면 온갖 미생물이 득시글거리는, 신비롭고도 현실적이고 추하고도 아름다운 유기물에 비유할 수 있을 것이다. 영화는 이런 유기물의 현실을 외면하고 무기화합물처럼 결합한 인물들에 카메라의 포커스를 맞췄던 이유를 그 스스로 철저히 납득하고 설득하지 못하고 있다.

[글 이지영, karenine@ccoart.com]

 

ⓒ 알토미디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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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아남은 사람들
Those Who Remained
감독
바나바스 토트
Barnabas Toth

 

출연
카롤리 하이두크
Karoly Hajduk
아비겔 소크Abigel Szoke
마리 나기Mari Nagy
버르너바시 호르커이Barnabas Horkay
커털린 심코Katalin Simko
유디트 머로슈뵐지Judit Marosvolgyi

 

배급|수입 알토미디어
제작연도 2019
상영시간 88분
등급 15세이상 관람가
개봉 2021.02.10

이지영
이지영
평이한 문장이지만 사색을 담은 글을 씁니다. 투박하고 건조한 문장으로 읽는 이의 마음을 따뜻하게 만들고 싶습니다. 글을 통해, 삶이 우리에게 보여주는 진실의 일면에 다가가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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