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망친 여자' 모순의 일상
'도망친 여자' 모순의 일상
  • 선민혁
  • 승인 2020.09.23 01:18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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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상수는 왜 세계적으로 꾸준한 사랑을 받을까? 이전 작들과 크게 다를 것이 없어 보이는 그의 신작들이 개봉할 때마다 씨네필들은 '홍상수 신작'을 보기 위해 극장을 찾고, 평론가들은 그의 영화에 대하여 매번 호평을 아끼지 않는다. 이들은 홍상수 영화를 왜 좋아할까? 아마도 현실적이면서도 비현실적인 특유의 분위기가 마음에 들었거나 꿈과 실제, 무의식과 의식에 대한 시선이 흥미로웠거나, 어리석어서 사랑스러운 인간과 그들이 맺는 관계에 대한 이야기가 절묘해서일 것이다.

필자 역시도 홍상수 영화를 보는 것을 즐긴다. 그러나 매번 그의 작품에서 어떤 대단한 의미를 발견하는 것은 아니다. 그의 작품들이 비슷비슷해 보이며 내가 기억하는 장면이나 대사가 <하하하>에 나온 것인지, <다른나라에서>에 나온 것인지 두 영화에서 모두 나온 것인지 알아내지 못할 때도 있다. 그래도 그의 신작이 나올 때마다 꼭 본다. 비슷비슷한 영화가 이렇게 많은데도 봤던 작품을 반복해서 볼 때도 있다. 영화를 처음 볼 때 느끼지 못한 것을 발견하기 위함이 아니다. 재밌어서다. 나는 홍상수 영화를 '그냥 재미로' 본다.

 

사진ⓒ ㈜콘텐츠판다

<도망친 여자> 역시 재미있었다. 고정된 카메라가 롱테이크로 씬을 담아내더라도 지루하지 않았고 줌인, 아웃이 어색하지 않았다. 반복적으로 나오는 패닝 숏에 피로감을 느끼지 않았으며 나무나 동물 등 자연을 담은 인서트가 갑자기 나와도 뜬금없지 않았다. 형식적인 부분에 있어서 의심의 여지없이 '홍상수 영화'였기에 만족스러웠다. 그러나 '홍상수 영화'의 재미가 단지 확고한 그의 스타일을 즐기는 것에만 있는 것은 아니다.

'홍상수 영화'에는 인물을 들여다보는 재미가 있다. <도망친 여자>의 이야기는 주인공 감희(김민희)를 중심으로 진행된다. 5년간 남편과 떨어진 적이 없던 감희는 남편의 해외 출장을 계기로 외출을 해 알고 지내던 세 명의 친구들을 만나고 대화를 나눈다. 두 번은 감희가 일부러 그들의 집에 찾아감으로써 이뤄진 만남이고, 나머지 한 번은 우연한 만남이다. 세 번의 만남에서 감희는 친구들과 함께 뭘 먹으며 그들의 일상을 듣기도 하고 주변의 사물에 대한 이야기를 나누기도 한다. 의도한 만남이든, 우연한 만남이든 감희와 친구들의 대화는 편안해 보인다.

 

사진ⓒ ㈜콘텐츠판다

그런데 편안한 순간에 미묘한 불편함들이 매번 생겨난다. 첫 번째로 만난 영순(서영화) 집에서는 식사 후 사과를 먹으며 소소한 이야기들을 나누던 중 초인종이 울린다. 이웃집에 사는 남자가 찾아온 것이다. 그는 영순과 그의 동거인 영미(이은미)가 먹이를 주고있는 길고양이를 '도둑고양이'라 칭하며 먹이를 주지 말 것을 요구한다. 아내가 고양이를 무서워하여 마당으로 나오는 것에 어려움을 겪고 있다는 것이다. 영순과 영미는 뭘 훔친 적이 없는 고양이를 '도둑고양이'라고 칭하는 것을 언짢아 하며 먹이를 주지 말라는 그의 요구를 받아들이지 않는다.

두 번째로 만난 수영(송선미)의 집에서 역시 음식을 먹으며 그의 일상에 대하여 이야기 하던 중 젊은 남자가 찾아온다. 그는 수영이 자신에게 수치심을 줬다고 주장하며 무리한 구애를 한다. 수영은 그를 미친 사람 취급하며 화를 내 쫓아낸다.

 

사진ⓒ ㈜콘텐츠판다

한 발짝 뒤에서 불편한 관계들을 지켜보던 감희는 친구 우진(김새벽)을 만난 극장에서 자신이 직접 불편한 관계에 마주치게 된다. 과거에 교제했던 적이 있는 우진의 남편 정선생(권해효)을 흡연실에서 우연히 마주친 것이다. 유명한 작가인 정선생은 감희가 자신을 보러 일부러 극장에 찾아왔다고 생각하고 감희는 그런 정선생에게 비판의 이야기를 한다. 티브이에 출연하는 그를 보았는데 말이 너무 많다는 것이다. 말이 너무 많으면 했던 말도 또 하는 법인데, 그러면 사람이 진정성이 없어 보인다고 말한다.

 

사진ⓒ ㈜콘텐츠판다

그런데 똑같은 말을 반복하는 것은 감희 역시 마찬가지이다. 그는 여태 친구들과 만나며 남편과 5년간 지내며 한 번도 떨어져 있던 적이 없다는 이야기를 반복해왔다. <도망친 여자>는 이와 같이 인물의 모순된 모습을 태연하게 보여준다. 머리를 짧게 자른 감희의 모습을 보고 정신나간 여고생 같다고 했다가 정신나간 것 같냐는 되물음에 "아니야 귀여워"하는 영순의 모습, 고기를 맛있게 먹으며 소의 깊은 눈동자를 언급, 채식주의자가 되어야겠다고 이야기하는 감희와 영순의 대화 등 인물들의 행동과 대화에는 모순들이 담겨져 있다. 이 모순들은 자연스러워 인물들의 모습에 잘 녹아든다.

영화의 마지막에서 감희가 다시 극장으로 돌아가 자연물이 담긴 영상이 나오고 있는 스크린을 바라볼 때, 나는 스크린을 떠나 현실로 돌아가야 했다.

[글 선민혁, sunpool2@ccoart.com]

 

사진ⓒ ㈜콘텐츠판다

도망친 여자
The Woman Who Ran
감독
홍상수
Hong Sang soo

 

출연
김민희
서영화
송선미
김새벽
권해효

 

제작|배급 영화제작전원사
제작연도 2019
상영시간 77분
등급 청소년 관람불가
개봉 2020.09.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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