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블루 아워' 어디로 가야할지 모르는 이들에게
'블루 아워' 어디로 가야할지 모르는 이들에게
  • 선민혁
  • 승인 2020.07.29 01:43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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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뷰] "핸들을 잡고 일상으로 돌아간다"
사진 ⓒ 오드 AUD

표현하기 어려운 것들이 있다. '미쟝센', '카타르시스', '그로테스크' 등의 단어는 그 의미를 한국어로 완벽하게 번역하기가 어렵다. 또한 어떤 말들은 내가 그것의 뜻을 완전히 이해하고 있더라도, 다른 사람이 이해할 수 있도록 설명하기 쉽지 않다. 우리가 느끼는 감정 역시 그러한 경우가 많다. 우리는 분명히 그것을 느끼지만, 항상 말로 표현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오늘은 하루종일 비가 왔어요.

그걸 레바논 감정이라 할까 봐요.

그걸 레바논 구름이라 할까 봐요.

떴다 내리는

그걸 레바논이라 합시다. 그럽시다.

 

최정례 시인, 시집 <레바논 감정>(문학과 지성사) 中 

최정례 시인은 <레바논 감정>에서 기존의 말로는 표현할 수 없는 어떤 감정을 '레바논 감정'이라고 부르기로 한다. 이 감정은 기쁨, 슬픔, 사랑, 분노 등 세상에 존재하던 말의 의미에 포함되기에는 모호해 '레바논 감정'이라는 별개의 이름을 가지게 된 것이다.

<블루 아워>의 주인공 '스나다'(카호)역시 기존의 어떤 말로 표현하기는 어려운 모호한 무엇인가를 느끼고 있다. 그래서 그녀는 '안괜찮지만 괜찮아'라고 이야기하고, '슬프지 않아서 슬퍼'한다.

 

사진 ⓒ 오드 AUD

스나다는 자신이 느끼는 이 모호한 감정이 무엇인지 스스로도 정확히 모른다. 오랫동안 해온 숙달된 업무와, 무던한 남편에게서 오는 권태 같기도 하고, 요즘 들어 자주 떠오르는 유년시절의 특이한 기억들이 불러일으키는 우울 같기도 하지만 그렇다고 하기엔 권태롭지 않고, 우울하지 않다. 그러던 중 카메라를 빌려주기 위해 카페에서 '키요'(심은경)를 만난다.

스나다와 이전부터 알고 지내던 사이인 것으로 보이는 키요는 자유분방하고 즉흥적이며, 어떤 상황에서도 명랑한 성격이다. 건강이 좋지 않던 할머니가 호전되었다는 소식을 듣고 고향 집에 방문할까 고민 중이었다는 스나다의 이야기를 들은 키요는, 스나다의 고향에 자신도 가보고 싶다며 즉흥적으로 여행을 제안한다. 이 순간부터 우리는 내면에 불안, 우울 등 부정적인 감정들을 가지고 있던 스나다가 밝고 긍정적인 키요와 함께하는 고향 여행을 통해 잊고 있었던 순수한 가치를 찾고 '힐링'을 하는 전개를 예상하게 된다.

 

사진ⓒ오드 AUD

그러나 <블루 아워>는 그런 이야기가 아니다. 스나다는 현재가 만족스럽지 않고 무엇인가가 채워지지 않는 느낌이 들며 왠지 모르게 유년시절의 기억이 자꾸만 떠오르지만, 자신이 느끼는 이것이 무엇인지 모르기에 해결할 방법 또한 모른다. 이것은 치유해야 하는 아픈 상처라고 할 수도 없고, 전환해야 하는 우울한 기분이라고 할 수도 없다. 해결이 필요하긴 한 것인지도 알 수 없다. 모호함 속에 갇혀 헷갈리기만 하는 것이다.

이러한 스나다의 표류는 명랑한 키요와 고향을 여행하고, 그리워하던 할머니를 만나도 끝나지 않는다. 스나다는 어찌해야 할지 모르겠는 모호한 감정을 해결하지는 못하지만, 여행을 마치고 난 뒤 이 모호한 감정을 직면할 수 있게 된다. 자신이 느끼는 뭔지 모를 이 감정이 매우 모호하다는 것, 그리고 그것을 지금 느끼고 있다는 것을 받아들이는 순간, 조수석의 스나다는 운전석으로 이동하여 핸들을 잡고 일상으로 돌아간다.

 

사진ⓒ오드 AUD

인물의 모호한 감정을 이야기하는 만큼, <블루 아워>는 쉽게 이해하기가 어려운 영화다. 이 영화의 스토리라인이 복잡하지 않더라도, 충분한 설명이 없는 이미지 위주로 영화가 전개된다는 점 때문에 관객들은 내러티브에 몰입하는 것에 어려움을 느낄 수 있다.

그러나 결국, <블루 아워>는 표현하기 어려운 어떤 것을 전달해낸다. 보편적이지 않고 일관성이 없어 보일 수 있는 이미지와 에피소드도 과감히 보여줌으로써, 영화는 관객들에게 인물이 느끼는 모호한 감정을 차분히 이야기해준다.

최정례 시인이 시 <레바논 감정>에 어떤 감정에 '레바논 감정'이라는 이름을 붙여주었다면, 하코타 유코 감독은 <블루 아워>를 통해 어떤 모호한 감정을 느끼며 보내는 시간에 '블루 아워'라는 이름을 붙여준다. 스나다를 이해하기 어려웠던 나는 점차 그녀의 감정을 이해하게 되었고, 내가 보냈던 '블루 아워'들을 떠올리게 되었다.

[글 선민혁, sunpool1347@gmail.com]

 

사진 ⓒ 오드 AU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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