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NETFLIX] '클라우스' 산타클로스 비틀기
[NETFLIX] '클라우스' 산타클로스 비틀기
  • 오세준
  • 승인 2020.03.05 22:55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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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클라우스'(Klaus, 2019, 스페인, 96분)
감독 '서지오 파블로스', '카를로스 마르티네즈 로페즈'

넷플릭스 제작 첫 번째 애니메이션 영화(이하 영화), <클라우스>에 대한 소개로 가장 적절한 첫 문장이 아닐까. 아니면 디즈니, 픽사, 드림웍스, 블루스카이 등 거대 스튜디오에서 벗어난, '직접 손으로 그린 2D 애니메이션 작품'이라고 표현하면 어떨까. 그렇지만 <클라우스>는 과거 디즈니(클래식)가 보여온 전통적인, 또 고전적인 방식의 애니메이션 영화와는 다르다. 또 2D를 3D처럼 보이려는 시도 역시 존재하지 않는다. 어쩌면 2D의 기술적 한계를 극복하기 위함이 아닌 관객에게 2D를 유지한 채 이야기를 전달하려는 듯 다가온다. '창작자의 분명한 스타일이 있는 애니메이션'. 어쩌면 이 표현이 더 어울릴지도. (한편으로 디즈니보다는 팀 버튼의 작품들이 가진 분위기에 더 가깝게 느껴진다)

어떤 영화인지 소개도 하지 않은 채 첫 문단을 칭찬으로 가득 메우는 시작이라니. 그러나 <클라우스>는 이미 지난해 아카데미 및 고야상 장편애니메이션 노미네이트를 비롯해 영국 아카데미 작품상 수상, 애니어워드에선 감독상‧작품상‧스토리보딩상으로 3관왕을 기록했다. 이미 어느 정도 검증이 된 작품이란 소리다. 물론 수상의 의미만으로 이 작품을 논하려는 것은 아니다. 무엇보다도 아무런 정보를 접하지 않은 채, 작품을 본 필자에게 가장 인상적이었던 것은 이 작품의 '이야기', 더욱이 '이야기의 아이디어 또는 발상'이었다.

 

사진 ⓒ IMDb
사진 ⓒ IMDb

산타가 없는 산타 이야기

'빨간 옷 입은 뚱뚱한 사람'에 대한 이야기, 영화 시작 화자인 제스퍼가 언급하는 사람은 영화를 보는 관객이라면 누구나 '산타'를 떠올릴 것이다. 재밌게도 영화의 무대는 산타의 마을이 아닌 '왕립 우정공사'가 운영하는 '우편 사관학교'다. 아버지의 명령에도 우체부 훈련을 제대로 이수하지 않은 '제스퍼'는 이번에는 멀리 떨어진 '스미어렌스버그'라는 곳으로 가 1년 동안 편지 6천 통을 채우라는 명령을 받는다. 제대로 처리해야 상속권을 받을 수 있다는 말과 함께. 영화의 구조는 '철이 없는 부잣집 아들이 고난을 통해 성장을 하는 이야기'다. 하지만 비교적 간단한 이 영화의 플롯에는 꽤 매력적인 요소들이 담겨있다.

세상과의 단절, 심지어 두 가문이 틈만 나면 싸우는 '스미어렌스버그'는 동네 사람 모두가 새 우체부가 왔다고 비웃듯, 우편을 이용할 일이 없어 보인다. 학교는 생선을 파는 곳으로, 우체국 역시 닭들이 모여 살고 있다. 어떤 식으로든 자신의 원래 집으로 되돌아가려는 제스퍼는 산지기 오두막에 사는 '클라우스'를 만난다. 그의 수많은 장난감과 함께. 그리고 그 순간 클라우스는 제스퍼의 가방에서 빠져나온 '한 아이의 그림이 담긴 편지'를 보게 되고, 제스퍼를 통해 그 아이가 사는 곳에 자신이 만든 장난감을 배달한다.

창문 너머로 장난감을 받고 기뻐하는 아이의 모습을 본 클라우스. 알고 보니 그는 과거 아내와 아이를 갖고자 했지만 이루지 못했고, 심지어 아내마저 세상을 떠나 홀로 살고 있었다. 그는 자신의 장난감이 어린아이에게 행복을 줄 수 있었다는 사실에 기쁨을 감추지 못했다. 이후 동네의 아이들이 자신들도 장난감을 받기 위해 제스퍼가 일하는 우체국으로 몰려든다. 더불어 제스퍼는 아이들의 편지를 이용해 목표 할당량을 채우기 위해서 매일 저녁 클라우스에게 아이들의 편지를 배달하고, 그와 함께 아이들의 집에 다시 장난감을 배달하기 시작한다.

 

사진 ⓒ IMDb
사진 ⓒ IMDb

제스퍼와 클라우스가 배달하는 과정은 <클라우스>가 보여주는 가장 재미있는 장면이다. 무거운 선물을 운반하기 위해 순록이 끄는 마차를 이용하거나 또 굴둑을 통해서 몰래 집 안에 들어가는 등 익숙한 산타의 모습들을 볼 수 있다. 또 제스퍼는 자신에게 나쁜 짓을 하는 아이에게 장난감을 선물하지 않으면서, 편지를 쓰러 온 아이들에게 선행을 한 아이만이 장난감을 받을 수 있다고 소문을 퍼뜨린다. 영화는 산타라는 존재 대신 그와는 이질적인 인물들을 통해서 '산타가 하는 행동'이라는 움직임이나 몸짓을 스크린에 고스란히 담는다. (물론, 클라우스는 'Klaus'라는 이름이나 그의 모습을 통해서 언뜻 산타를 연상시킨다)

정작 이 부분에서 관객인 우리가 주목해야 하는 것은 그러한 과정에 어떠한 신비로운 마법의 도움 없이 이뤄냈다는 점이다. 삭막했던 마을이 아이들의 활기로 가득 차오르는 변화, 여기에는 오로지 제스퍼의 개인적인 목표(또는 이득)와 클라우스의 안타까운 사정이 존재한다. 더불어 오직 영화만이 만들어 낼 수 있는 기적과 같은 우연까지. (사실 이 우연이야말로 감독이 만들어 낼 수 있는 마법이 아닐까?)

<클라우스>가 전달하는 이야기에는 산타 중심의 여러 크리스마스 영화가 가지는 특별함은 없다. 오히려 제니퍼가 철부지 아이가 아닌 어른으로 성숙해지거나 클라우스가 자신의 상실감을 회복한다는 점 더 나아가 서로 싸우기만 했던 마을 사람들이 아이들을 통해서 서로 화해한다는 점 등 전형적인 해피엔딩을 가진다. 그렇지만 재밌게도 좌충우돌 일사불란한 제니퍼와 클라우스의 선물 배달 과정은 순수한 아이의 눈으로 포착돼 '존재하지 않는 산타'의 모습을 그려낸다. 그리고 영화 속 모든 인물이 결말로 치닫는 과정 안에는 '산타'라는 존재가 가지는 힘이 발휘됐다는 것이다.

결말이 예상되는 영화인 <클라우스>. 그런데도 관객인 우린 유쾌하게 즐길 수 있다. 크리스마스의 선물을 주는 기원이나 산타라는 존재의 탐구가 아님에도, 제니퍼의 여정이 충분히 작품을 매력적으로 만든다. 그것이 자신의 욕심을 채우고자 했던 제니퍼의 이기적인 목표가 어느 순간 이타적으로 바뀌면서 영화가 한층 더 따뜻해지는 분위기를 만든 탓도 있다. 심지어 “혹시 산타는 정말 이러한 이야기를 근거로 만들어지지 않았을까”하는 재밌는 생각이 떠오르게 만든다.

 

아이의 '놀이'

필자의 경우. <클라우스>가 보여준 '변화'에 대해 조금 더 고민해 볼 가치가 있다고 느껴진다. 여기서 말하는 변화는 제스퍼의 성장이나 클라우스의 치유가 아니다. 이들의 마을 전체에 대한 변화다. 이것은 특히 영화의 특정 장면으로 면밀하게 확인해 볼만 한다. 영화 초중반 한 아이가 개구리 장난감을 가지고 밖에서 놀고 있다. 갑자기 그 개구리 장난감이 한 소녀 앞으로 뛰어오른다. 깜짝 놀라는 두 아이. 그 순간 관객이 목격하는 건, 빛과 그림자, 두 마을 사이의 경계, 구멍이 뚫린 장벽 사이로 서로를 마주하는 남자아이와 여자아이다. 그리고 “까르르르” 함께 뛰어노는 소리가 들린다.

자신들의 역사와 관습을 잣대로 두 마을이 지금껏 싸워왔다는 마을의 어른들. 그들의 신념에는 어떠한 이유나 필연적인 사건을 내포하지 않은, 무의미하고 공허할 뿐이다. 그들의 정체성이자 태도가 아이들에게 이어질 찰나에 아이들은 장난감을 통해서 서로 친구가 되어 함께 뛰어논다. 심지어 장난감을 받기 위해서 선행까지 하니 마을에 어떤 어른도 아이들의 친절에 거부하지 못한다. 적대적인 어른들 사이에서 신기하게도 '우정'이 싹 틔어 서로가 친구가 되는 아이들의 모습은 보는 이로 하여금 미소를 짓게 만든다. 어떻게 이같은 변화가 일어날 수 있었던 것일까.

이에 대해 김현정 박사는 “우정은 상대방의 고유한 특징을 인식하고 평가하는 데서 시작된다. 하지만 정확히 어떤 특징인가? 우정은 영혼과 영혼의 만남이므로 외적 요소, 즉 육체나 환경에 속하는 특징들은 중요하지 않다. 인종이나 성, 연령, 사회적 지위나 출신 계급 따위는 영혼들이 우연히 걸치게 되는 외피 또는 우연히 처하게 되는 조건에 불과하므로, 우정을 허락하거나 거부하는 이유가 될 수 없다.”라고 말한다. (김현정, <사람, 장소, 환대>)

어른들이 살아온 방식, 또 가문에서 내려오던 역사나 이념은 결과적으로 '우정' 앞에서는 어떠한 힘도 발휘할 수 없는 것이다. <클라우스>의 흥미로움은 제스퍼의 개인적인 목표가, 클라우스의 슬픔의 치유가 결과적으로 한 아이에게 장난감을 선물하는 계기가 되었지만, 그 장난감을 통해서 두 마을이 하나로 되는 결과를 낳았다는 것이다.

아이들에게는 선천적으로 놀고 싶어하는 충동이 있다. 그들은 놀이를 통해서 자신들이 만든 환상의 세계를 탐험한다. “놀이를 통해 아이들은 세상을 배운다”는 말처럼. 영화 초반 집에 갇혀 홀로 그림을 그리던 아이가 장난감을 계기로 다른 친구와 함께 뛰어노는 장면을 통해 확인할 수 있다.

<클라우스>가 보여주는 것은 결과적으로 '아이들의 놀이'가 아닐까. 장난감을 통해 서로 의사소통하고, 상상력을 자극해 서로의 경험을 나누는 모습. 이 영화가 말하고자 하는 산타의 존재 이유에는 신비한 마법이나 하늘을 나는 루돌프가 아닌 아이들과 장난감이 필요충분 요소로 채워진다.

 

사진 ⓒ 오픈키드
사진 ⓒ 오픈키드
사진 ⓒ 넥서스주니어

다시, 위에서 필자가 언급한 <클라우스>의 이야기가 가진 발상의 참신함은 순수한 시각 속에서 '산타'라는 존재를 완벽히 지워내는 시도에 있다. 이를테면 영국 작가 '레이먼드 브릭스'의 동화책 <산타 할아버지>, <산타 할아버지의 휴가>와 미국 작가 '말라 프레이지'의 동화책 <산타 할아버지는 세계 제일의 장난감 전문가>와 비교를 해보자면, 세 권의 동화책은 산타 클로스를 신적인 혹은 종교적이거나 환상적인 존재가 아닌 평범한 사람으로 그려내고 있다.

'레이먼드 브릭스 작가의 시리즈'는 산타가 추운 겨울을 끔찍이 싫어하거나 굴뚝을 넘어 다니는 일을 힘들어하고, 여름에는 라스베이거스에서 휴가를 즐기는 등 일반인과 다를 바 없는 산타의 일상을 그려낸다. 말라 프레이지 작가의 동화책 역시 산타는 마법으로 장난감을 만들어내는 것이 아닌 열심히 연구하는 장난감 전문가로 등장한다. 아이들이 어떤 장난감을 좋아하는지 조사하고, 안전성도 검사하는 등 인간미가 넘치는 친근한 할아버지 그 자체다.

필자가 두 동화책을 예시로 든 이유는 <클라우스>가 가지는 독특함을 이해하기 위함인데, 전자의 경우에는 존재하지 않는 대상을 친숙한 인간으로 바꿔 독자로 하여금 거리를 좁혔다면, 후자의 경우에는 산타의 존재를 부재로 두어 그 안에 여러 사람들의 사정과 우연으로 채워넣었다는 점이다. 즉, 이 영화는 산타가 아닌 오로지 극 중 주인공들의 필연적인 우연과 그것에 대한 아이들의 상상력으로 이야기를 펼쳐낸다는 것이다.

<클라우스>가 보여주고자 한 것은 무엇일까. <팀 버튼의 크리스마스의 악몽>과 같이 익히 알고 있는 산타나 크리스마스에 대한 또 다른 관점으로 볼 수 있는 영화가 아닐까. 크리스마스라는 특별한 날이나 산타라는 존재에 관한 물음이 아닌 아이들의 상상력을 직접적으로 그려지고 즐길 수 있는 애니메이션. 평범한 출발인 듯 보이는 이 영화의 여정에는 분명 아이들에게 나눠줄 장난감 한 바구니만큼의 즐거움이 깃들어 있다. 

 

[코아르CoAR 오세준 기자, yey12345@ccoart.com]

오세준
오세준
《코아르》 영화전문기자 및 편집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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